소설리스트

나 혼자 네크로맨서-219화 (219/244)

# 219

73) 마왕과 용사와 무당 - 1

땅이 갈라지고 뒤흔들렸다. 시뻘건 에너지가 균열 밖으로 넘실넘실 피어 올라왔다.

그 아래, 마왕이 움트고 있었다.

“……충격에 대비하라!”

후방의 플레이어들이 다시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비행선들이 대열을 맞추며 장전된 캐논을 조준했다.

“하이퍼 게, 게이트를 열어! 곧, 추가 지원이 도착한다! 윽! 젠장!”

하지만 지상의 병력은 원활하게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아마존 전역이 뒤집힐 듯 흔들렸고 수십 년 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나무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자, 자세를 잡아!”

우직!

“조심해! 나무가 무너진다!”

특히나 수만 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밀집 대형으로 모여 있던 터에 이리저리 뒤엉키며 혼란이 빚어졌다.

그나마 정상 대응할 수 있는 건 비행선과 공중 병력뿐이었는데, 그들도 실상 몰아치는 강풍에 고전 중이었다.

4개의 포탈에서 밀려 나오는 건 시뻘건 에너지만이 아니었다. 양측 공간간 엄청난 기압 차이 때문인지, 돌풍이 발생했다.

쿠구구구구······.

“비행선 간의 간격을 최대한 벌리고! 히포그리포들을 착륙시켜! 당장!”

히포그리포들은 감히 날아오를 생각을 못 한 채, 비행선에 선미에 마련된 임시 둥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갑판에 대기 중이던 병력 역시 서둘러 선내로 피신했다.

“대체······ 저 포탈에서 뭐가 흘러나오고 있는 거야?”

그나마 안정된 장소인 함교, 그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대양의 바다처럼 넘실거리며 흔들리는 아마존, 그 위로, 하늘에 4개의 구멍이 뚫려 붉은 물줄기가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뭔지 몰라도 지금까지 봤던 것들보다 훨씬 끔찍한 게 시작되려는 것 같아.”

마왕(魔王)

그것은 지옥 차원의 지배자이다. 그렇기에 그 공간 자체를 권역으로, 그곳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권속으로 두고 있다.

성우는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열린 4개의 포탈,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정체불명의 에너지, 그건 지옥 차원의 모든 것들이 승화된 일종의 ‘진액’이었다.

‘지금 놈은 그 모든 것, 지옥 차원 자체를 흡수하고 있다.’

그 에너지는 땅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는데, 지하에 파묻혀 녹아버린 마왕의 몸으로 공급되고 있었다.

마치 링거를 꽂고 원기회복을 하는 것처럼, 마왕이 지옥 그 자체를 빨아먹으며 다시 움직이려는 것이었다.

우우우우一

그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저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만 했다.

‘이제 진짜 모습으로 나올 거다.’

한때는 같은 인간, 비슷한 플레이어였지만, 끝내 시스템에 굴복한 모습으로······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우우우一

아마존의 하늘이 물감 번져나가듯, 붉은빛으로 물들어가며 무언가 시작되었다.

콰과과과과!

아마존을 가로지르던 균열이 굉음과 함께 더욱 크게 벌어지며, 그 사이에서 거대한 손이 하나 치솟아, 바닥을 짚었다.

쿠一 웅一

그걸 기점으로 온몸이 시뻘건 거인이 균열 밖으로 빠져나왔다.

쿠구구구구······.

그 장면이 마치 거대한 산이 융기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이목구비가 등장하자 어미의 배를 뜯고 나온 새끼 악마 같기도 했다.

“나왔다!”

“바, 방어막 준비!”

그어어어어······.

물론 새끼 치고는 엄청난 크기였다.

‘저 정도면······ 1km 정도는 되겠는데?’

성우가 지상에서 올려다보기에 거대한 산봉우리를 보는 것만 같았다. 기간테스보다 족히 두 배는 더 커보였다.

심지어 머리는 3개나 달려 있었으며 눈은 12개, 팔은 8개로 모든 방향을 감시할 수 있었다. 저 큰 몸에 사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 포, 포탈이! 움직입니다!”

하늘에 열려 있던 4개의 포탈이 철판에 붙은 자석처럼, 허공을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마왕의 몸 곳곳에 눌어붙기 시작했다. 살이 녹아내리고 그 안에 포탈이 안착했다.

기이한 뒤섞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크고 작은 지옥 생명체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

- 월드 보스 몬스터 ‘마왕(완전체)’ 가 출현했습니다.

포탈을 몸에 매단 지옥 차원의 그 자체, 그게 바로 마왕의 진짜 모습이었다

- 안내! 마왕에 대한 ‘충성 서약’ 투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왕의 등장과 함께, 직전에 떠올랐던 ‘재앙 퀘스트’의 투표가 마무리되었다.

‘투표율에 따라서 마왕의 수준이 강화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보다 훨씬 강력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투표 결과]

- 충성 서약 : 8.8%

- 요구 거절 : 91.2%

* 최소 조건(10%)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대상(마왕)에게 아무런 효과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왕에게 충성 서약을 한 플레이어는 고작 8.8%에 불과했다.

“어라?”

성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마왕을 올려다보았다.

“하긴, 생각을 해봐. 그딴 역겨운 모습으로 출마했으니 누가 뽑아주겠어?“

그렇다면 나머지 91.2%는 마왕의 반대쪽, 즉, 성우를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한강석, 놈이 실수했다. 이 정도의 상황까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듯했다.

‘그런데 마왕에게 아무런 힘이 가지 않았다면, 그 반대급부가 있지 않을까?’

퀘스트 상 마왕에게 주어지지 않은 힘을, 다른 누군가가 얻을 수도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우우우우!

정답을 맞혔다는 것처럼, 성우의 몸 안에서 백색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든 이들의 눈 앞에 축하 메시지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 공포를 이겨내고 하나로 뭉친 월드, 축하합니다! ‘반대 투표율’이 절반을 넘어 ‘예정된 용사’가 출현합니다.

예정된 용사, 그건 마왕의 유일한 대적자, 성우를 뜻했다.

’용사가 되는 조건이 이거였나?’

- 특별한 조건을 만족하여 히든 스킬 ‘용사 특전’이 주어집니다.

* 이 특전은 ‘마왕(완전체)’이 월드에 존속하는 동안만 유지됩니다.

[스킬 정보]

- 이름 : 용사 특전

- 등급 : 특전

- 분류 : 패시브 및 액티브

- 소모 : 없음

용사 개인의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며(+20), 마왕과 그 권속에게 입는 피해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 동료 선택 : 용사는 마왕에게 맞설 ‘동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총 4명) 동료는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며(+15), 마왕과 그 권속에게 입는 피해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 영웅 동맹 : 용사와 동료 주변(lkm 이내)에 있는 ‘아군 플레이어 전원’의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8)

+ 성검 발현 : 단 한번의 공격에 ‘성검’의 아우라를 담습니다. 오직 마왕에게만 추가 피해를 줍니다. (+2,000%)

“동료 선택이라······.“

용사에게는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함께할 동료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함께하여 강화해줄 수 있는 동료들은 전부······.

성우는 고개를 돌려 마왕성을 바라보았다.

‘아직 안에 있잖아?’

아직 아무도 나오지 못했다.

* * *

“하, 하아······.“

지수는 어둠과 빛, 그 두 가지 요소가 엉터리로 섞여 만들어진, 오묘한 그림자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어떤 게 진짜인지 알수가 없다.’

비보나의 그림자는 무려 8개나 되었는데, 그중 단 1개만이 진짜였다.

하지만 그것들이 프로펠러처럼 정신없이 회전하다가 갑자기 공격해오니 무엇이 진짜인지 분간해낼 수가 없었다.

우우우우—

더군다나 그림자는 인기척이 없으니 감각만으로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걸 어떻게든 수십 차례 피해냈지만······.

‘너무 불리하다.’

손가락을 타고 피가 흘러내려 발등 위로 툭, 툭, 연신 추락했다.

이미 어깨와 등을 베였다. 상처가 깊지 않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든지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에인헤랴르도 소환할 수 없으니 돌파하기가 더욱 힘들어.’

이곳은 비보나의 권역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공간을 열 수 없으므로 에인헤랴르를 소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직 단신으로 이겨내야만 했다.

쉭!

등 뒤에서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격이었다. 놈의 그림자 손톱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기에 단순한 움직임으로는 피할 수 없었다.

“큭!”

지수는 앞으로 도약하며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촤—악!

실패였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오른쪽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윽!”

목이 뜨거웠다. 상처가 컸다. 상당히 위험한 일격이었다.

지수는 그 고통을 최대한 신경 쓰지 않고 후속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계속 버틸 수는 없었다.

‘이 상태로 가면 결국 죽는다.’

이미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다.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질질 흘러나왔다. 하지만 프리스트의 도움을 받을 수도 회복 물약을 사용할 틈도 없었다.

“쯧쯧, 가엾기는? 어차피 죽을 텐데, 기왕이면 다진 고기가 되어 죽을 생각인가?”

비보나가 비웃었다. 놈은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후······.“

하지만 지수는 그런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상황은 불리했지만, 마음만은 평온했다. 이런 싸움, 한두 번이 아니지 않던가?

’생각하자. 방법은 분명 있다.’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놈을 곱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건 살아남은 아군에게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지수는 최후의 판단을 내렸다.

‘그래, 내가 회복하지 못하는 상처를 입더라도······ 저놈도 같이 끝내야 한다.’

지수의 전략은 동귀어진(同歸於盡)이었다.

여기서 이기고 아군에 합류할 수 없다면, 적어도 적의 중요한 전력 중 하나인, 비보나와 함께 죽는 것만이 도움이 될 것이었다.

’역시 그걸 써야겠어.’

다소 극단적이지만 언제나 숨겨 두었던 수가 있었다.

특히나 이렇게 일대일 대결, 특히나 칼을 다루는 플레이어 간의 싸움에서 엄청난 변수를 일으켜, 단숨에 적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비장의 수였다.

지수는 땅을 박찼다.

“오! 그래! 이번에는 어디를 찢어줄까!”

비보나의 눈이 커지고 입꼬리가 치솟았다.

“배를 찢어서 내장을 덜렁덜렁 달고 다니게 해볼까?”

놈이 혀를 날름거렸다.

“그래 좋아!”

지수가 그렇게 대답하자 비보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좋아? 좋다고?”

지수는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며 소리쳤다.

“어디 해봐! 여기까지 데려와서 고작 상처 몇 개 내놓고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니야?”

이내 비보나의 그림자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야바위처럼 그것 중 어디에 정답이 있을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개 같은 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지수는 대답 없이 중지를 들어 보였다.

“······.“

부디 저 사이코패스가 발끈하여 배를 노리길 바라며, 지수는 놈의 그림자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집중했다.

한 번은 내줄 생각이었다.

그때, 지수의 몸이 번쩍이며, 광선처럼 쏘아졌다.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이 스킬을 피하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니 말이다.

하지만 비보나는 달랐다.

채一 앵!

놈의 그림자가 치솟아 지수의 검을 맞받아쳤다. 지수는 즉시 뒤로 재빨리 물러섰다.

“또 그딴 허접스러운 수를 써?”

지수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다시 한 번 중지를 들어 올렸다.

“······.“

엿을 두 번이나 강제로 삼킨 놈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이제부터 한 번만 막고 두 번만 휘두른다. 그것만 집중한다.’

놈이 부디 눈에 보이는 한 수를 던져 주길 바라며 지수는 온몸의 솜털을 곤두세웠다.

저벅一 저벅一

지수는 오른손으로 검을 꼬나쥐고 왼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비보나는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았다.

지수가 땅을 박찼다.

턱—

이어서 세 번의 도움닫기 이후 비상, 섬광이 되어 쇄도, 단숨에 수십 미터가 좁혀지며 놈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사라졌다.

서로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온다.’

느껴졌다.

그림자는 인기척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밀어내는 공기가 지수의 몸에 닿으며, 무언가 아주 가까이 왔음을 알게 했다.

물론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건······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배다.’

놈은 지수의 도발에 이끌려 복부를 노렸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노리고 들었다.

지수는 허리를 옆으로 최대한 돌리며 왼쪽 어깨를 내려, 왼쪽 팔로 복부를 감쌌다.

촤—아—악!

공격이 들어왔다. 왼팔이 통째로 잘렸다. 아주 깔끔하게, 살과 뼈가 도려졌다.

순간 눈앞에 아찔했다. 그런데 그 뿌연 시야 위로 선명한 메시지 한 줄이 떠올랐다.

- 팀플레이로 인해 ‘시너지 효과’가 부여됩니다.

[시너지 목록]

1) 외팔의 무사(完)

- 구분 : 개인 시너지

- 조건 : 외팔에 도(刀) 장착

- 효과 : 첫 번째 공격이 ‘흘려내기’ 판정이 될 확률이 88% 증가합니다.

지수는 멈추지 않았다.

왼팔 저릿한 느낌이 올라오고 이내 알싸함으로 변했다. 뒤이어 견딜 수 없을 만큼 진한 고통이 온 신경을 짓밟으며 중추신경계로 파고들었다.

‘한 번의 방어, 성공이다.’

팔을 내주었지만, 목숨은 내주지 않았다.

엄청난 고통 때문에 눈알과 고막이 욱신거렸다. 지수의 집중은 이제 오로지 오른쪽 손아귀, 그곳에 연결된  끝에 가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공격이다.’

지수는 놈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놈이 미소지으며 그동안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던 손을 들어 올렸다.

두 자루의 단검이었다.

역시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았다. 미소가 짙어졌다. 막을 수 있다는, 아니 이미 막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자신감이었다.

’역시 모른다.’

그렇다. 놈은 ‘외팔의 무사(完)’ 시너지를 모른다. 대부분 그럴 수밖에 없다. 팔이 잘려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팔이 잘린 자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드물다.

그러나 지수는 이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그걸 간접 경험했다. 팔이 잘려도 살아남을 수 있는 무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흥!

지수는 정직하게, 놈이 들어 올린 단검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미소 짓고 있는 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

곧, 놈의 미소가 당혹감에 밀려 사라졌다.

“미친!”

놈이 지수의 검을 막아내는 순간, 놈의 칼이, 놈의 팔이, 그리고 놈의 무게 중심이, 쭉 미끄러져 내렸다.

‘흘려내기 판정, 됐다.’

이 정도 수준의 싸움에서는 결코 매울 수 없는 거대한 빈틈이 열렸다.

‘그리고 이게 두 번째 공격!’

집중했다. 절대 놓치지 않았다. 오른 발을 땅에 딛고, 잘린 왼팔을 뒤로 최대한 빼며, 허리를 휘둘러 검 끝에 온 힘을 실었다.

단일격······.

촤—악!

완벽한 일격이었다.

삐, 하는 이명 속에서 무언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플레이어를 살해하여 24,000골드를 얻었습니다.

“으, 으으······.”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고개를 슬쩍 왼쪽으로 돌리니 왼팔이 어깨선까지 잘려나가 있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왼쪽 몸 전체를 흥건하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피 웅덩이 위에 동그란 무언가가 반쯤 잠겨져 있었다.

머리였다.

‘성공이다.’

눈앞에 어두워졌다.

* * *

“으하하! 내가 이겼다!”

한호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발아래에는 덩치 큰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당연히 파울로였다.

“으으으······.”

그는 온몸이 으스러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몸 곳곳에 쇠 구슬이 박혀 있었다.

“내, 내가 이런 멍청이에게······.”

그는 여전히 이 승부를 인정하지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응? 약쟁이, 너 한번 잘 생각해봐.”

“······뭐, 뭘?”

한호가 쭈그려 앉으며 녀석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네가 혹시······ 햄스터가 아닐지 말이야.”

파울로는 움직일 힘조차 없는 상황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도대체 무, 무슨······.”

한호는 파울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바인데, 햄스터는 자기가 햄스터인지 모르거든?”

“대체······.”

“그리고 너 말이야. 이름이 너무 햄스터 같잖아. 특히 푸딩 햄스터한테 어울려. 파울로, 음, 나중에 그 이름으로 지어야겠다.”

“무슨······.”

한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핸드 캐논을 들어 올렸다.

“재밌는 승부였다. 햄스터! 미래에는 해바라기 동산에서 쳇바퀴나 굴리렴!”

이런 말이, 마지막으로 듣는 말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쾅!

파울로는 그걸 느꼈다.

그렇게 한호가 파울로를 끝장내는 사이, 정훈과 플레이어들 역시 나머지 몬스터들을 모두 정리했다.

“자, 모두 이동 준비! 탈출구로 간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여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여, 여기! 여기 좀 도와줘!”

그건 리웨이의 목소리였다.

“응?”

안쪽 복도의 어둠 속에서, 리웨이가 물의 정령을 앞세워 나타났다.

물의 정령 위에는 지수가 얹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의 정령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프, 프리스트! 어서 프리스트 좀! 4등급 이상의 프리스트 없어?”

한호는 그제야 지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 지수 누님! 파, 팔이!”

팔이 통째로 잘려나갔으며 이미 피를 너무 많은 흘린 상태로 보였다.

저 정도 상처라면 리웨이의 말대로 상당한 등급의 프리스트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흔할 리가 없었다.

“지수누님? 괜찮죠? 그렇죠?”

지수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말할 힘도 없는 걸까?

“에, 에이! 지금까지 아무리 다쳐도 이겨냈으니까 이번에도······.”

철퍽一

그때, 한호의 발 앞에 무언가 쏟아졌다.

“뭐야? 피? 피!”

물의 정령에 제 몸 안에 섞인 핏물만 모아서 토해낸 것이었는데, 그것만 해도 족히 수 리터는 될 법했다.

“아,안돼······.”

한호도 심각성을 느꼈다. 하지만 이 곳에는 그 정도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없었다.

“빠, 빨리 나가죠! 나가서 비행선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출구로 몸을 돌렸다.

“잠깐, 기다리시오.”

그런데, 어떤 그림자가 그 방향을 틀어막고 있는 게 아닌가? 한 개의 큰 그림자와 두 개의 작은 그림자였다.

“음, 지수 낭자가 그렇게 다친 건 처음 보는데? 내 마음이 다 쓰리구려.”

이 목소리는?

“호랑이 아저씨?”

대산맥의 왕이었다. 그가 두 마리의 어린 호걸을 데리고 복도로 접어들었다.

“이런, 많이 아파 보이시는데 독한 술 한잔하시면 좀 풀리시려나?”

평소와 같은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는 정말로 술병 하나를 내밀었다.

“어, 그건?”

그리고 한호는 그게 뭔지 기억했다. 설악산의 동굴, 그곳의 지하 호수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맞소. 이제 마실 수 있을 만큼 잘 삭혔으니, 한 잔 받으시오, 낭자. 피로가 싹 가실거요.”

한호가 급히 받아서 지수에게 먹이기 위해 뚜껑을 열었다.

푸쉬이이一

보라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게 범상치 않은 게 들어 있었다.

한호의 눈앞에 그 정보가 표시되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한(恨)

- 등급 : 신화

- 분류 : 소비

- 효과 : ‘산의 정기’와 ‘죽은 자의 혼’이 한데 어우러져 기묘한 힘이 담긴 술이 되었습니다. 한 모금이라도 마신다면 ‘정령 친화력·지배력’과 ‘죽음 속성 친화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또한, 때에 따라 생과 사를 통찰하고 이승과 저승을 잇는 ‘무당’의 자격을 일깨워줍니다. (무당 속성 획득)

- 설명 : 태백산맥의 기운이 어린 술에 죽은 자들의 영혼이 뛰어들어 어우러졌습니다. 이걸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생과 사가 한 잔에 담겼으니 세상 만물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달고도 쓴, 이상한 맛이 납니다.)

‘대체 뭐지? 이런 걸 왜?’

한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는 그저 지수의 입에 병을 기울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