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72) 마왕성 토벌전 - 3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단 한 번 내뿜는 것만으로도 일대 지형을 일그러뜨리며, 그 열기 휘말리는 모든 생명체를 한 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천사의 전당에서 단 한 방만으로도 피라미드의 지반을 완전히 파괴하여, 그 거대한 건축물을 통째로 무너뜨릴 정도였다.’
그런 걸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콰아아아—
그 파괴적인 불기둥이 비스듬히 내리꽂히며 마왕을 덮쳤다.
쿠구구구구—
놈이 밟고 있던 땅이 치즈처럼 녹아 내리며 깊은 구덩이로 변했다.
놈의 몸뚱이는 불기둥에 짓눌리며 그 안으로, 깊숙이 밀려 들어갔다.
‘제대로 맞았다. 저 정도 열기라면 나도 버티기 어렵다.’
성우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사벨라가 등장했을 때, 상황이 최악 중의 최악으로 치달은 줄만 알았는데 이는 전혀 예상 못한 반전이었다.
‘억지로 잡혀 있던 게 아닌가?’
성우 다시금, 그 거대한 드래곤의 목덜미를 살폈다. 그러나 어디에도 3자루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달린 ‘드래곤 키퍼’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성우는 의문을 뒤로하고 기간테스를 앞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드래곤 브레스가 멎었고 땅은 액화 상태가 되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기회였다.
“밟아 으스러뜨려!”
성우의 명령에 따라 선두의 기가스가 발을 들어 올렸다.
마치 타워 크레인처럼 느리지만, 무엇이든 단숨에 으깨어 버릴 수 있을 만큼 육중한 움직임이었다.
콰— 앙—
기가스의 일격이 액화된 땅을 짓이겼다. 발이 떨어진 지점이 움푹 들어가고 주변의 땅이 들썩이며 파도처럼 일어섰다.
콰— 앙—
그렇게 수차례 반복되는 모습이, 마치 놈을 절구에 넣고 찧는 것만 같았다.
콰— 앙—
그러던 중 이사벨라와 눈이 마주쳤다. 성우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목줄이 벗겨진 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니지?”
이사벨라는 피식 웃었다.
“목줄? 아직 있어. 네가 채운 것보다 더 오래되고 더 질긴 게 아직도 채워져 있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이어서 이사벨라가 다짐하듯 말했다.
“결정했어. 난······ 도구로 이용되지 않을 거야.”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왜 이런 급격한 심경변화를 겪었는지 몰라도 상황이 확연하게 좋아진 건 분명했다.
’성체 드래곤이 아군이 되다면 그 무엇보다 강력한 동맹이다. 설마······ 대 산맥의 왕처럼 된 건가?’
한편으로는 이조차도 의문이 었다.
’몬스터가 시스템에 의해 정해진 방향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 이건 오류인 걸까?’
아니면······.
‘이것도 어떤 각본에 의해서 정해져 있는 걸까?’
성우는 결말에 이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건 머지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넘겨야만 했다.
“네크로맨서, 방심하지 마. 마왕, 저 놈은 이 정도로 죽지 않아. 아직 놈의 권역인 이곳, 마왕성이 멀쩡하잖아?”
이사벨라의 말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구덩이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 * *
전투는 모든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며 미궁 내부에 남은 플레이어들 역시 새로운 위협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젠장! 저기서도 온다!”
한호와 정훈이 속한 그룹은 미로 같이 꼬인 미궁 안, 널찍한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미궁을 탈출할 방법은 요원하기만 했고 이들은 꽤 오랜 시간을 헤매는 중이었다.
“어? 이쪽 복도에서 빛이 보입니다!”
네 방향으로 갈리지는 곳에 도착했을 때, 한쪽 복도가 유난히 훤하게 빛나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이 분명했다.
“후, 드디어 출구인가?”
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을 약 쉰 개의 그림자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였다.
“전원 전투 준비!”
정훈은 그렇게 소리치며 맨 앞으로 나아가 적들을 살폈다.
붉은 갑옷을 입은 지옥의 병사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놈들은 플레이어들을 발견했음에도 본디 서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대열을 만들어서 그 자리를 지키려는 것으로 보였다.
‘원래는 발견 즉시 선제공격을 해오던 놈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바뀌었다.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
“후방에 적 병력이 따라붙었습니다!”
“젠장! 좌측 복도에서도 옵니다!”
그렇게 단 한 곳, 오른쪽 복도만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저쪽으로 가라고 유도하는 것만 같았다.
그 뜻대로 해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버틴다! 그리고 어떻게든 출구를 뚫어낸다!”
적들은 좁은 복도를 활용하여 이들을 가두어두고, 다른 전선에 합류하는 걸 지연시키려는 듯 보였다.
이는 일반적인 몬스터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지성을 가진 존재가 조종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정훈의 추론은 정확했다. 후방의 복도에서 몬스터가 아닌 플레이어 한 명이 걸어 나온 것이었다.
“역시 너였구나? 이 팔팔이 자식!”
한호가 누군가를 알아보고 소리쳤고 이내 어둠 속에서 덩치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파울로였다.
“뭐? 팔팔이? 그게 뭐야?”
놈의 몸이 바위처럼 변하며, 등 뒤에서 바위로 만들어진 팔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팔이 여덟 개나 돼서, 내가 좀 부러워서 붙인 별명이다!”
파울로는 피식 웃으며 목을 좌우로 꺾으며 근육을 풀었다.
“어이, 동양인 꼬맹이, 그때 나한테 얻어맞은 게 꽤 열 받았나 봐? 너희는 눈이 찢어지고 광대가 튀어나와서 별로 아프지도 않을 것 같은데?”
“오, 그래? 그런 삐뚤어진 자세 나쁘지 않아! 내 자서전에 쓸 주제가 하나 더 늘거든? 인종차별주의자 약쟁이 새끼 참교육한 썰을 풀 수 있겠는데?”
“너 이 새끼, 내가 그,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파울로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왔고 한호 역시 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영등포 검사님, 저 암내 나는 약쟁이 자식은 제가 맡을게요! 뒤에서 몰려오는 골렘들을 처리해주세요!”
예전 같으면 한호라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맡기는 게 불안했겠지만, 그가 각성하여 ‘압제자의 손’에 맞서는 걸 본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전원! 탈출구를 뚫는 데 집중한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정훈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그렇게 한호와 파울로가 단둘이 마주 보는 형국이 되었다.
“풉! 지금 너 혼자서 날 막겠다고? 꼬마야, 히어로 무비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방패 몇 개 들었다고 네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건 아니란다.”
“뭐, 너 잘난 건 알겠다.”
이미 한 번 저놈과 부딪쳐본바, 일대일 악력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좁은 곳에서는 현무를 소환할 수 없었다. 다른 수가 필요했다.
텅一 텅一
한호는 뒷걸음질 치며 여섯 개의 손에 들고 있던 모든 무기를 내려놓았다.
“내가 너 같은 바윗덩어리를 잡을만한 방법을 꽤 오래 고민했거든? 혼자서 아이디어 짜느라고 스케치북 한 21장은 쓴 것 같다.”
“그게 뭔데? 망치? 그런 거냐? 아니면 할머니에게 일러바치는 거 아니야?
으하하!”
저 이상한 말은 저쪽 문화권 식의 도발인 듯했는데, 한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바위를 깨는데 최고는 그런 게 아니야. 더 기발한 게 있어. 너 같은 놈은 뇌를 포맷하지 않는 이상 절대 모를걸 ? 으흐흐!”
그 비웃음은 파울로의 신경을 거스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꼬마야, 그게 뭐든 빨리 꺼내지 않으면······.“
그 순간, 놈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내가 네 머리통 안에서 뇌를 먼저 꺼내게 될 거다!”
그리고는 한호를 향해 낙하하며, 바위로 만들어진 팔을 내리찍으려는 찰나, 한호가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핸드 캐논이었다.
“정답은 대포다 새끼야!”
총 4개의 핸드 캐논 중, 좌측 첫 번째가 불을 뿜었다.
콰—앙!
수십 발의 쇠 구슬이 터져 나오며 파울로를 덮쳤고 놈은 뒤로 밀려나 천장에 부딪힌 뒤 바닥에 떨어졌다.
“윽, 뭐야······.“
이 아이템은 당연하게도 아놀드 허스트가 제작한 것으로 절대 종족을 휩쓸어버렸던 ‘버그 헌터’를 소형화한 것이었다.
철컥一
한호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두 손을 이용하여 방금 쏜 핸드 캐논을 장전했다.
‘후장식’ 구조상 한 사람이 한 개밖에 다룰 수 없는 아이템이었지만, 한호의 경우, 무려 4자루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
“내가 총을 다뤄본 적이 없어서 사격을 잘 못 하거든? 그런데 산탄총은 막 쏴도 어떻게든 맞겠지 싶었는데, 대박! 정답이었네!”
한호가 비실비실 웃으며 4개의 핸드 캐논의 총구를 일제히 돌려, 바닥에 엎어진 파울로를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섰다.
“고작 이 정도로 내 몸을 부수겠다고?”
큰 데미지는 없어 보였다. 버그 헌트 특유의 저지력에 밀려났을 뿐이었다.
“한 입 먹고 평가하기엔 이른데? 입 벌려 봐! 구슬 더 넣어줄게!”
파울로는 발끈하며 몸을 던졌다. 한호의 총구가 놈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다가 불을 뿜었다.
콰—앙!
하지만 파울로는 격투로 다져진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으로,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다. 쇠 구슬이 빈 곳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한호는 예측했다는 듯, 그곳으로 2번째 핸드 캐논을 돌려 발사했다.
콰—앙!
파울로도 쉽게 당하지 않았다. 그 찰나의 순간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고, 날아드는 산탄 중 일부만을 허용하고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3번째 총구가 겨누어져 있었다.
콰—앙!
이번에는 제대로 맞았다.
“······억!”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살짝 각도를 틀면 되는 4개의 총구를 전부 피해낼 수는 없었다.
“아이고 아까워라! 2번만 더 피했으면 그 잘난 주먹질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한호가 그렇게 도발하는 사이에도 캐논은 장전되었다.
철컥一 철컥一
6개의 손이 자동화된 기계처럼 움직이며 장전, 이동, 발사를 아주 재빠르게 조금의 오차도 없이 처리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4개의 핸드 캐논이 스탠바이 상태에 놓였다.
“여기 오는 동안 계속 장전하는 것만 연습했거든? 내가 또 손재주 하나는 좋아서 금방 기계처럼 익히거든! 으하하!”
2발을 연달아 맞으니 파울로의 피부를 덮은 바위에 약간의 금이 간 듯했다. 하지만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웃기지 마라! 고작 몇 번 맞췄다고 신이 나서 까불거리기는!”
놈은 도약하는 대신, 좌우로 넓게 움직이며 달려들었다. 허공에 뜬 상태로는 방향을 바꾸기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콰—앙! 콰—앙!
2번의 격발, 하지만 순식간에 좌우로 움직이며 2발을 피해냈다.
콰—앙! 콰—앙!
심지어 나머지 2발까지 모조리 피해 냈다.
“됐다!”
한호는 이제 무방비 상태였다. 파울로는 잇몸을 드러내며, 주먹 쥔 6개의 팔을 들어 올렸다.
“잡았다!”
하지만······.
쩡!
그 순간, 한호의 빈손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파울로의 얼굴에 끼얹어졌다.
“윽! 뭐야!”
빛은 놈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그렇게 움찔하며 한호를 놓쳤고, 다음 순 간······.
“······느려.”
콰—앙! 콰—앙!
놈의 왼쪽 머리를 향해 2발의 캐논이 작렬했다. 다시금 튕겨 나가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삐一 하는 이명이 울리고 골이 띵한 게, 내상이 상당한 듯했다. 아무리 몸이 단단해도 데미지가 서서히 누적되어 가는 중이었다.
“으으, 이, 이건······ 신성한 빛? 프리스트 계열 스킬 아닌가? 뭐지? 이상한 데?”
파울로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섰다.
“오, 아나 보네? 그거 맞아.”
이는 프리스트나 팔라딘 계열이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스킬 중 하나였다.
“맞다니? 네가 어떻게 그걸 쓰는 거냐?”
“응? 그거야 내가 바로 프리스트니까?”
하지만 파울로는 코웃음을 쳤다.
“하! 방패를 쓰는 놈이 팔라딘도 아니고 프리스트라고? 멍청한 놈! 나도 그 정도는 안다! 그런 무식한 거짓말도 전략인 거냐?”
“응? 아니, 진짠데?”
한호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지만, 파울로는 되려 성을 내었다.
“웃기지 마라! 나, 날 놀리는 거냐? 개자식! 쳐 죽여주마!”
유쾌한 평소 모습과 달리 자존심을 건들면 쉽게 화를 내는 듯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빛 따위, 정면으로 안 보면 그만이다!”
한호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듯, 4발의 캐논을 모조리 피해냈다.
쩡—
가까이 접근하자 한호의 손에서 ‘신성한 빛’이 터졌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당한바, 파울로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려, 눈부심을 최소화, 시력을 유지했다.
“이번에야말로 걸렸다!”
그런데, 그 순간, 한호의 몸이 스르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응?”
눈부심 때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투명화가 되었다. 이건······.
은신이었다.
흥!
파울로의 주먹질은 허공을 휘저었다.
“뭐야! 어, 어디로······.“
그가 당황하는 사이, 옆에서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콰—앙!
이번에는 관자놀이를 처맞았다. 그의 몸이 거꾸로 뒤집히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이번에는 그 한 방이 끝이 아니었다.
콰—앙! 콰—앙! 콰—앙!
놈의 몸 위로 무려 3발의 캐논이 내리 명중했다. 온몸에 쇠구슬이 처박히며 돌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오 4발 중에서 4발 명중! 퍼펙트! 굿!”
한호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동시에 핸드 캐논을 장전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파울로는 옆으로 구르며 일어섰다.
한호는 은신이 풀린 채 파울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큭, 이번엔 또 뭐야? 으, 은신? 프리스트라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은신을 쓰지?”
“음, 그게······ 사실 첫 직업은 도적이었거든? 뭐, 도적질을 잘 안하긴 했는데, 이 정도는 저절로 익히게 되나 봐? 으하하!”
파울로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의 몸에서 돌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어느새 누적 데미지가 상당하여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았다.
“이 자식, 거짓말도 적당히 해라! 어떤 이상한 놈이 도적이랑 프리스트를 고르냐!”
파울로는 진심으로 따진 것이었지만, 그 말에 한호의 표정이 싹 가라앉았다.
“······야, 그런 편견으로 무심코 던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이번에는 한호가 달려들며 4개의 총구를 들어 올렸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4개의 총구를 적당히 벌려 일제히 발사, 빈틈없이 탄의 장막을 구성했고, 파울로는 피하지 못했다.
그대로 쇠 구슬을 진탕 뒤집어쓴 뒤,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큭, 내, 내가 나보다 더 멍청이 같은 놈에게······ 당한다고?”
“응? 너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네가 나보다 잘난 건 딱 하나야.”
한호의 왼쪽 3번째 팔과 오른쪽 3번째 팔이 검지를 까딱거렸다.
“팔이 2개 더 많은 거. 그런데 팔이 여덟 개면 뭐해? 주먹질을 여덟 번 하는 게 끝인데? 넌 그래서 나한테 안 돼. 난······.“
한호가 말을 멈췄고 왼쪽 세 번째 팔의 검지로 코끝을 쓱 문질렀다. 뭐랄까, 일본 소년 만화에서 나올 법한 동작이었다.
“······만능이거든!”
그렇다. 잡캐의 끝은 만능이었다.
* * *
“······도, 도대체 저건 언제 죽는 걸까요?”
안 기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손으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제야 다시금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저는 솔직히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벌써 2번째 부활입니다!”
우우우우······.
마왕성의 붉은 하늘, 그곳에 4개의 포탈이 일제히 열렸다.
- 주의! 해당 지역에 ‘지옥 차원의 문’이 열립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지옥 차원의 문’이 열립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지옥 차원의 문’이 열립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지옥 차원의 문’이 열립니다.
그곳에서부터 시뻘건 에너지가 흐드러져 내려와, 마왕이 파묻힌 구멍을 향해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저 포탈에서부터 나오는 에너지의 흐름은 대체 뭘 뜻하는 걸까요? 분명 한 건······ 곧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란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 마왕성 근처는 마왕의 권역이었고 그에 따라 마왕의 권능 중 하나가 발휘되는 것이었다.
쩌저저저一
그 에너지의 흐름이 어느 정도 임계점에 도달한 듯, 지진이 일어나며 바닥이 갈라졌다.
“아아!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때, 월드 전체, 모든 플레이어의 눈 앞에 동일한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재앙 퀘스트]
- 이름 : 대마왕의 강림
- 유형 : 선택
- 목표 : 알수 없음
- 보상 : 알수 없음
누군가 마왕의 분노를 자극했고 결국 이 세계에 마왕의 본체가 강림합니다. 이는 마왕 본인조차 조절할 수 없는 분노가 되어 워드 전체를 휩쓸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운명을 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마왕에게 ‘충성 맹세’를 선택하면 그의 지배하에 연명할 수 있을겁니다.
* 마왕의 추종자(충성 맹세 선택)가 일정 수치를 넘어갈 때마다 추종자들의 힘 일부분이 마왕에게 흡수됩니다. (능력 강화)
“아······.“
안 기자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이어서 떠오른 짧은 메시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 마왕에게 ‘충성 맹세’ 서약을 하시겠습니까? (Y/N)
“역시 또 한 번, 플레이어들을 분열시키고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존재에게 굴복하게 할 메시지가 출력되 었습니다.”
그는 고민 없이 ‘N’을 클릭했다.
“이제는 너무나 노골적이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운 마음에 마왕에게 복종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마치 일제의 총칼이 두려워서 친일파가 되는 짓이나 다름없습니다.”
안 기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우리는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강인한 존재 입니다. 부디 그게 걸맞은, 올바른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월드 전체가 중대한 선택을 시작했다.
* * *
한편, 성우의 눈앞에는 전혀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 특별한 조건을 만족할 시 ‘용사 특전’을 얻을수 있습니다.
“······이건 뭐야?”
용사 특전이라니?
생각해보면 ‘마왕’이라는 클리셰에는 ‘용사’라는 파트너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용사란, 마왕의 침략에 맞서는 대적자이자 정의의 대표자 같은 역할이었다.
그렇다면······.
‘마왕과 맞서는 데 유리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용사란, 마왕이 있어야지만, 그리고 마왕이 세계를 위협해야지만 존재할 수 있었기에 이처럼 다소 뒤늦게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조건이 뭐지?’
쿠구구구······.
그사이에 땅이 절반으로 갈라지며, 무언가 천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