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70) 마왕의 목적 - 3
아마존에서 탄생하여 남아메리카 전역을 멸망에 이르게 한 ‘재앙’ 드래곤······ 그 존재가 성우 앞에 나타났다.
“너희, 너무 뭣 모르고 날뛰고 있었어.”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눈이 번뜩이자······.
- 주의! ‘드래곤 피어’가 발동합니다.
* 격이 낮은 생명체를 경직시킵니다.
윽!”
성우 옆에 서 있던 리웨이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정훈 역시 가슴을 부여 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보다 약한 생명체를 억압하는 ‘피어’였다.
그리고 피어 중에서도 드래곤의 피어는 가장 강력한 축에 속했다.
드래곤은 피식 웃었다.
“나약한 것들은 재미가 없어.”
다행히도 리웨이와 정훈 둘 다 빈사 상태에 빠지지는 않았다.
신격이 없어도 최상위 플레이어였으므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이사벨라.”
그때, 석문 안쪽에서 강석이 나타났다.
“그만하지. 내 손님이야.”
이사벨라가 저 레드 드래곤의 이름인 듯했다. 브라질 출신이라 스페인풍으로 지은 것일까?
강석은 오른손에 흰색의 무언가를 쥐고 있었는데, 성우를 바라보더니 그 물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월드 시드······.‘
월드 이터가 될 수 있는 퀘스트를 주는 아이템, 결국, 그가 먼저 손에 넣었다.
“손님? 그럼, 지금 내가 내쫓으면 손님이 아니게 되는 거지?”
강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여전히 ‘피어’를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성우 일행을 노려보며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쟤들이 파울로의 머리를 잘랐어. 다시 붙이려면 스트레스 좀 받을 것 같아서 화풀이가 필요할 것 같은데?”
강석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결국 ‘피어’가 풀렸다.
“으, 진짜! 도마뱀, 너무 사나워!”
페어리, 나비였다. 녀석이 그렇게 한번 쏘니 이사벨라가 으르렁거렸고, 녀석은 강석의 어깨 뒤로 숨어버렸다.
강석이 성우를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이네, 네크로맨서.”
“······.”
성우는 대답 없이 강석의 어깨너머 석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내부는 언뜻 봐도 난장판이었다. 드래곤의 브레스와 강석의 전격 공격이 모든 걸 짓이겨 놓았으며 그 한 가운데에 거대한 무언가가 고꾸라져 있었다.
아마도 천사 종족의 우두머리일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여긴 내가 먼저 왔어.”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먼저 왔으니 먼저 사냥한 게 잘못은 아니었다.
“압니다. 그건 제가 투정 부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따라 오는 사람에게 돌을 던질 필요는 없죠.”
천사 챔피언 등 천사 무리를 성우 쪽으로 몰아낸 건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성우의 추격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강석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건, 미안하게 됐어. 나도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널 헤치려고 한 건 아니야. 이해해줘. 너 정도라면 당연히 뚫고 이렇게 나와 마주 볼 줄 알았어.”
죽이려고 한 건 아니다? 뻔뻔한 소리지만,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럼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성우는 다시 한번 궁금해졌다.
“그럼 그건 됐고, 이제 솔직해지죠.”
“······솔직이라고?”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저와 싸우려고는 게 아니라면, 당신이 대체 뭘 하려고 하는지, 저한테도 털어놓으세요.”
모든 걸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신은 월드의 플레이어 전체에게 선전포고했습니다. 저도 그 대상이죠. 이런 일을 벌여 놓고는 반갑게 맞이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죠?”
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재앙 퀘스트를 일으킨 뒤에 자신을 믿어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 말에 이사벨라가 아니꼽다는 듯한 표정으로 강석과 성우를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짧게 끝내. 나 오래 못 참아. 수틀리면······다 녹여버릴 거야.”
그녀의 입에서 시뻘건 화염이 일렁거렸다. 입안에서만 맴돈 브레스였음에도 주변 온도가 올라갈 정도였다.
‘확실히 다르다.’
저 브레스를 견딜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걸 마주하게 될 일이 있다면, 최대한 피하는 게 능사일 듯했다.
“그래,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만 하겠지.”
강석은 바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울리지 않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전부······ 우리 세계를 위해서야.”
그래, 결국 대의라? 어느 정도 예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번지르르한 거짓말은 대부분 대의명분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월드 이터’가 되어서 멸망으로 치닫는 세계를 구할 생각이야. 그리고 너도 그걸 도와줬으면 좋겠어.”
아직 성우가 원하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구한다는 말인지, 명확하게 하시죠. 그래야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석의 왼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요한 물음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마디 더 던졌다.
“자, 확실하게, 당신 혼자만 알고 있는 그게 대체 뭡니까?”
이 사람은 분명히 이 세계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 이 게임은 우리에게 재앙이지만, 게임이라는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는 유희 거리에 불가해.”
여기까지는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 사태를 일으킨 ‘그들’에게 잘 보여야겠지?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잘 보여야 하는지 알고 있어. 이해가 가나?”
여기부터는 성우도 모르는 부분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안다니?
성우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걸 억지로 막고 침착하게 물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러니까 그 근거가 뭐죠?”
“나는······.“
그는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게임이 처음이 아니야.”
그 말에 모두가 놀랐다.
“······뭐?”
“처음이 아니라니?”
쉽게 말해 2회차 플레이란 소린가?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내 고향은 이미 멸망했어. 너도 봤을 거야. 마굴, 엔딩을 맞이한 세계를 말이야.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월드 이터처럼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뜻인가? 그래서 처음부터 그렇게 압도적으로 앞서 나갈 수 있던 거였고?
“이건 내가 직접 경험해온 일이고 분명한 사실이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어. 그러니까 더 캐묻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
“네크로맨서, 부디 나를 믿고 따라줘. 나는 지금까지 무슨 수를 써도 멸망 엔딩을 막지 못했어. 하지만······ 이번에는 가능할 것 같아. 하지만 네가 있어야 해.”
부탁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투는 어딘가 당당해 차라리 강요에 가까웠다.
성우는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이 황당한 말을 믿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거짓말이다!”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응?”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외침이 들려온 곳은 등 뒤, 지상으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그곳에 백색 늑대와 검은 사자, 그리고 특별공격대원 십여 명이 서 있었다.
“네크로맨서! 그자의 말을 믿지 마라! 네 말대로 정체불명의 비행선을 수색하고 그곳에 묻어 있는 기억을 읽었다.”
“아.”
강석은 탄식을 내뱉더니 피식 웃었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자?”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자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너를 이용하려는 것뿐이다!”
백색 늑대는 성큼성큼 다가오며 폭로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자의 계획은······ 우리 세계의 멸망이다!”
멸망이라니?
“우리 세계와 다른 세계를 멸망하게 만드는 대가로, 이 게임을 일으킨 존재에게 무언가를 받기로 약속했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공기의 흐름이 느려지고 어느새 굳은 듯 멈추더니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이사벨라의 동공이 커졌고 지수의 숨소리가 멈췄다. 양측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우는 그림 리퍼를 움켜쥐며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금 강석을 마주 보았다.
그의 표정이 어딘가 사뭇 달라진 듯했다.
“네크로맨서, 저것들 우리가 평택에서 함께 맞서 싸웠던 ‘진화 학회’ 아닌가? 심지어 일본 서버의 침략 때도 그 쪽 편을 들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너는 저런 정신 나간 것들의 말을 믿나? 아니면 몇 번이고 너와 함께 싸우고 널 도와준 나를 믿나?”
그때였다.
‘윽!’
성우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별안간 가슴 안쪽에 뜨거워졌다.
그건 이무기의 비늘이었다.
‘······경고?’
조력자가 무언가를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석을 바라볼 때 더욱 뜨거워졌다.
‘이건 한강석의 말을 믿지 말라는 뜻이다.’
사실 이쯤 되니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스템 오류와 함께 성우에게 메시지를 전해주는 정체불명의 ‘조력자’ 역시 성우를 입맛대로 부릴 뿐,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조력자는 시스템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시스템을 다운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시스템을 붕괴시키겠다는 그 주장의 근거였다.
“네크로맨서, 다시 한번 묻지. 너는 누구를 믿을 건가?”
재차 물음, 성우는 한숨을 내쉰 뒤 그 물음에 대답했다.
“내가 믿는 건······ 내 손으로 통제 가능한 것뿐이야.”
이무기의 비늘로 메시지를 전하는 조력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성우는 언제든 그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었다.
이 비늘을 버리고 간접적으로 전해오는 메시지를 받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래?”
강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난······ 절대 아니잖아?”
그 순간, 그의 지팡이에서 빛이 번쩍 였다. 한 줄기의 두꺼운 빛이 성우를 스쳐 지나가, 등 뒤, 어딘가에 적중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백색 늑대의 몸이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다.
“사이코메트리 같은 간사한 능력은 게임을 재미없게 만든단 말이야.”
결국, 전쟁이었다.
성우는 땅을 박차며 그림 리퍼를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나비가 강석의 어깨에서 날아오르며 양손을 펼쳤다.
“안돼!”
방어막이 생성되었다.
쩌一 엉!
그림리퍼가 방어막에 막혔다. 성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겨울 포식자’를 들어 올려 ‘확산 모드’로 바꾼 뒤 이사벨라, 드래곤을 향해 겨누었다. 그 무엇보다 먼저 견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아무리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 원정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위험하다.’
쩌저저저저저!
50발의 빙결 탄환이 날아들자 이사벨라가 양손을 펼치며 자신의 몸을 화염으로 감쌌지만, 그 정도로는 막을 수 없었다.
강력한 냉기 탄환이 이리저리 엉겨 붙으며,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순식간에 구 형태의 얼음 감옥이 형성되었다.
“비보나! 전부 죽여!”
그레이스가 소리쳤고 비보나의 발아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막아!“
정훈의 외침과 함께 양측이 격돌했다.
쾅!
성우의 낫과 강석의 지팡이가 맞부딪쳤다.
기기기기!
“시스템의 주체와 거래를 했다고?”
성우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강석은 여유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게임은 도박판이기도 해. 나는 도박사들에게 3개의 세상을 멸망시키는 대신, 어떤 대가를 받기로 했다. 이번이 바로 3번째 세상이야.”
그 거래 내용이란 게, 플레이어로 가장하여 침투한 뒤, 세계를 멸망시키는 시나리오인 걸까?
“네크로맨서, 어차피 우리는 이 게임에서 놀아나는 존재야 그런데 기왕 놀아날 거면 이쁨받는 캐릭터가 되는 게 좋잖아?”
“······.”
“잘 생각해 봐. 너한테도 기회가 있어. 너한테 이걸 말해주는 이유도 그 기회를 주기 위해서야.”
그의 말처럼, 이 시스템 안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수 있었다. 월드 이터와 그 동료들처럼, 강제로 구속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 강석처럼 시스템에 순응하여 시스템의 한 부분이 되는 게 옳을까?
그렇게······ 누군지도 알지도 못하는, 이 게임의 운영자들, 그 미친 가해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또 다른 세계를 멸망시킨다?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이 게임에서 중도하차야.”
콰一 과一 과一 과一 광!
성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 공간이 통째로 뒤흔들리며 천장에서 폭음이 들렸다.
“······폭격?”
피라미드 상공에 떠 있던 함대가 피라미드를 향해 포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를 통째로 무너뜨릴 셈인가?”
천장이 들썩이며 파편이 우수수 추락했다. 제아무리 천사의 건축물이라고 해도 이런 무차별적인 폭격을 버텨낼 수 없었다.
“으아아! 차가워! 죽여 버리겠어!”
그때, 이사벨라의 몸을 구속했던 얼음 감옥이 순식간에 녹으며, 그 중심에서 시뻘건 광선이 터져 나왔다.
“피해!”
성우 일행은 몸을 던져 그 거대한 불기둥을 피해냈다.
‘브레스다!’
드래곤 브레스, 드래곤 피어보다 훨씬 무서운, 드래곤의 필살기였다.
콰과과과과과!
시뻘건 브레스는 뒤쪽 벽을 녹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고, 그에 따라 이 공간 순식간에 불가마처럼 변했다.
하물며 그 브레스가 피라미드의 지반을 통째로 망가뜨렸는지,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쿠구구구구······.
벽과 바닥에 균열이 번져나갔다. 그 누구도 멀쩡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이사벨라마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한호야!”
“예! 갑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화신 발현’이 시작됩니다.
그 순간, 한호가 ‘현무(玄武)’를 소환했다. 거대한 녹색 형상이 나타나 이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며 웅크렸고, 성우 일행은 그 아래로 몸을 던졌다.
쿵! 쿵! 쿵!
현무의 등껍질 위로 육중한 파편들이 쏟아져 내리며, 세상이 어두워졌다.
쿠구구구구······.
그렇게 피라미드가 완전히 무너져내리면서, 양측이 서로 격리되어 버렸다.
하지만 잠깐의 숨 고르기에 불과했다.
“소크라테스! 일어나자!”
어둠 속에서 한호가 외쳤다. 그러자 그 엄청난 이름으로 불린 현무가 몸을 일으키며, 등을 뒤덮었던 잔해를 밀어냈다.
조금씩 햇빛이 스며들어오더니 이내 탈출구가 생겼다. 성우는 곧장 달려나갔다.
‘시간이 없다. 바로 몰아 붙어야 해.’
콰과과과과!
이제는 천장이랄 게 없는 거대한 구덩이, 새하얀 파편이 무더기로 싸인 가운데, 정면, 토네이도 바람이 일어나며 잔해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레이스의 스킬이었다.
그 사이에 놈들이 서 있었다.
“당장 퍼부어!”
성우의 고함, 하늘에 떠 있던 비행선들이 목표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포구가 기울어지던 찰나······.
파지지지지!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강렬한 빛이었다.
동시에 하늘에서 수십 줄기의 벼락이 떨어졌다.
쩌저저저저!
벼락은 비행선 한 척에 내리꽂혔고 방어막을 순식간에 녹이더니, 순식간에 선체를 사분오열로 박살 내버렸다. 마치 크래커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미친······.“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이었다. 하지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장이 넓어졌다. 이제는 불리하지 않았다.
덜그럭! 덜그럭!
사방에서 언데드 군단이 몰려와 놈들을 포위하며 조여 들어갔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끝낸다.’
마왕 그리고 드래곤과의 전쟁,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 같은 상황은 오히려 기회였다. 놈들이 만발의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이니 말이다.
턱!
그리고 그때, 성우 앞에 무언가 떨어졌다. 길쭉한 철제 상자, 메신저호에서 내려보낸 것이었다.
‘테스트는 없지만, 믿어야 한다.’
성우는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콰아아아아아!
이번에는 브레스가 쏘아졌다. 시뻘건 불기둥이 비행선 한 척에 적중했다.
퍼一 어一 엉!
역시 방어막은 무용지물이었으며 선루가 치즈처럼, 통째로 녹아내리더니 힘없이 추락했다.
쿠구구구구······.
수십 개의 서버를 넘나들며 벌인 긴 전투 중에서도 단 한 척도 잃지 않았건만, 단 몇 초 만에 2척의 비행선이 추락하고 말았다.
‘무려 마왕과 드래곤이다. 이 정도 희생이야 당연하다.’
성우는 공격에 집중했다. 수천에 달하는 언데드가 파도처럼 몰아쳤다. 물론 쉽게 당뚫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돌풍과 번개와 화염이 일어나며 언데드 군단을 깡그리 휩쓸어버렸다. 조금도 접근할 수 없었다.
‘이때다.’
하지만 그건 눈속임에 불과했다.
- ‘황혼 습격’이 시작됩니다.
성우는 검은 연기와 동화되어 그들 사이로 파고들어 갔다.
그 순간, 지수도 함께 뛰어들었다. 적진 한가운데로의 난입이었다.
성우의 ‘황혼 습격’으로 바람의 마법사, 그레이스를 노렸다.
쿵!
검은 연기가 그녀를 집어삼키며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윽! 이런, 불쾌한······.“
바닥에서 망자의 손이 올라와 그녀를 묶었다. 그 사이, 지수는 비보나와 격돌했다.
그러자 놈들의 화력이 현저하게 줄어들며 언데드 군단의 포위망이 삽시간에 좁혀졌다.
성우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이사벨라를 향해 그림리퍼를 휘둘렀고, 지수도 에인랴헤르를 소환하여 비보나에게 보낸 뒤, 이사벨라를 향해 쇄도했다.
‘가장 위험한 존재, 드래곤을 먼저 제압한다!’
하지만 드래곤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뻑!
“······큭!“
성우의 복부에 이사벨라의 주먹이 꽂혔다. 너무나 빨라서 미처 피할 수 없었다.
‘갈비뼈가 부러졌다.’
성우는 그대로 십여 미터를 날아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헉!”
숨이 턱 막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지수 역시 기습에 실패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 강석이 번개를 쏘아 지수를 맞춘 듯했다.
“하, 어디서 감히 네까짓 게, 버러지같은 게 내 몸에 손을 대?”
이사벨라는 콧방귀를 뀌며 성우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성우는······.
웃고 있었다.
“······걸렸다.”
“뭐?”
이사벨라는 이질감을 느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제야 자신이 무언가에 묶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녹색 빛의 밧줄이 그녀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는데, 점점 강하게 조이는 중이었다.
범상치 않은 빛을 바라는 게, 그게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이사벨라는 힘을 주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Polymorph)’한 상태라지만 그녀는 드래곤이었다.
선박용 쇠사슬로 묶어도 지푸라기처럼 끊어낼 수 있었다.
그극一 그극一
하지만 이 밧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이사벨라의 얼굴에 당황이 번져 나갔다.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성우는 바지를 털며 일어섰다. 갈비뼈가 으스러졌지만 그만한 성과가 있었다.
“마법 공학계의 명품, 허스트 공방에서 널 위해 맞춤 제작한 목줄인데,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나도 기뻐.”
그건 ‘글레이프니르’였다. 아니, 마법 공학으로 개량된 글레이프니르였다.
성우가 악마의 세계수에 죽어 있던 드래곤의 사체에서 영감을 받아, 드래곤을 구속하기 위하여 특별 제작을 요청한 물건이었다.
“으! 윽! 이, 이것 좀 풀어봐!”
그녀가 강석을 바라보며 소리쳤지만, 성우가 둘 사이를 막아섰다.
이렇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무력화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한강석, 둘이 얘기 좀 하자.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마왕과 제대로 붙어볼 시간이었다.
“내가 좋은곳을 알아.”
그 순간, 귀신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단 하나의 점으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구一 웅一
그리고 아주 깊은 구덩이 하나가, 하늘에 열렸다.
- 주의! 해당 지역에 ‘명계의 문’이 열립니다.
어느새 온 세상의 모든 색이 사라지고 오로지 백색과 검은 선만이 남았다.
- 생사부(生死簿)에 당신의 이름이 기재됩니다.
강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으로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 명계(具界)에 입장하셨습니다.
한순간에 다른 공간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공간의 주인, 성우는 그에게 걸어 갔다. 그리고 물었다.
「도박사들이 너한테 걸었다고?」
강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서 전해」
유일하게 색깔이 남은 존재, 그의 머리 위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아우라가 떠오르며, 그 빛과 그 어둠이 강석의 얼굴을 잠식했다.
「지금이라도 무를 수 있으면 무르라고, 그리고······ 나한테 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