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70) 마왕의 목적 - 2
성우가 반격을 마음먹고 움직이기 직전······.
쩡!
순식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
기기기기!
날카로운 것들이 긁히는 소리, 지수의 칼날이 성우의 목덜미에 닿았다.
정확히는 성우의 목덜미를 노리고 들어온 그림자의 발톱을 막아낸 것이었다.
“······윽, 피해요!”
성우는 급히 몸을 뒤로 뺐고, 지수가 성우의 자리에 서서, 성우의 앞을 가로 막았다.
“······시발!”
비보나는 기습에 실패하자 신경질을 내며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뗐다.
놈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성우의 발아래까지 닿아 있었다.
고오오오—
그리고 지금도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마치 한 마리 포식자처럼 바닥 위를 기어 다녔다. 마치 보트 주변을 맴도는 백상아리 같았다.
이내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솟구쳤다. 갈고리 모양을 한 흉기, 총 3개였다.
챙! 챙! 챙!
지수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갈고리를 쳐냈다. 하지만 그건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촤—악!
살이 베이는 소리, 피가 쏟아지는 소리, 지수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옆구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큭!”
그녀는 숨을 고르며 다시 자세를 고쳐잡았다. 다행히도 치명상은 아닌 듯 했지만, 그녀가 정면 싸움에서 밀렸다는 게 다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우 일격이긴 하지만, 칼잡이끼리의 대결에서 밀리는 건 처음 본다.’
그렇다고 해서 넋 놓고 있을 성우가 아니었다. 그는 곧장 군단을 소환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대강령(大降靈)’이 시작됩니다!
검은 연기가 이 공간을 가득 메우며 그 안에서 백색의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폭풍이여 일어나라!”
여 마법사,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정면에서 광풍이 불어 닥쳤다.
쿠우우웅!
“······윽!”
마치 정면에서 제트 엔진이 뿜어진 것만 같이, 강력한 바람이 이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 바람은 대강령이 토해낸 검은 연기를 통로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덜그럭! 덜그럭!
대강령으로 소환된 백여 마리의 언데드 군단은 멋들어지는 등장 연출을 빼앗긴 건 물론이거니와,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바닥에 넙죽 엎드리는 수모까지 겪었다.
“네크로맨서, 머리 숙여!”
리웨이였다. 그녀가 손을 뻗자 천장에서 물의 정령이 소환되었다.
그것들이 삽시간 안에 천장을 뒤덮으며,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음, 네가 나랑 나란히 서는 건, 별로 좋지 않을 텐데?”
그레이스가 지팡이를 부드럽게 휘젓자, 공기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물의 정령마저 돌풍에 밀려나, 벽에 짓눌리며 허무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이봐 동양인 여자, 대양의 파도도······ 바람 때문에 일어난다는 걸, 모르나 보지?”
그레이시는 리웨이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리웨이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성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년, 상당한 등급의 마법사야. 바람에 특화된 것 같은데, 그래도 다양한 종류의 마법을 다룰 거야. 조심해.”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고위 등급의 마법사를 마주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판타지 속에서 정점에 이른 마법사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직업군이었다.
위험했다.
특히나 이런 좁은 공간은 성우에게 불리했다. 군단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심연의 호흡 같은 도트 데미지만 넣을 수 있다면, 혼돈의 결정체 효과로 생명력을 갉아먹을 수 있겠다만, 접근하는 게 쉽지 않다.’
혼돈의 결정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이템이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혼돈의 결정체 (바다 정령의 눈물 + 악마의 혈석)
- 등급 : 전설
- 분류 : 오브
- 효과 : 소지자에게 ‘혼돈’ 속성 부여, 마나 상승(+500), 마나 회복(+250 %), 공격 시 마나와 생명력을 동시에 강탈(3%)
마법사 계열에 천적이나 다름없는 아이템이건만, 데미지를 주지 않는 이상 무용지물이었고, 현재로서는 바람을 뚫고 들어갈 방법이 요원한 상황이었다.
‘그래, 귀신이다.’
성우는 비형랑의 부채를 이용하여 귀신 10마리를 소환했다.
우우우우一
형체가 없는 존재인 만큼, 바람 같은 물리적인 현상을 무시하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들이 그레이스를 향해 날아갔다.
“아, 겨우 그거야?”
하지만 그레이스가 손을 뻗어 백색 빛을 발하자 성불 당한 것처럼 증발해 버렸다. 고스트 유형을 무력화시키는 주문인 듯했다.
“자! 이제 이 몸이 나가신다!”
그렇게 외친 건 파울로였다. 그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거치게 찢어발기며 땅을 박차고 날아들었다.
퉁!
그리고 무슨 거대한 포탄처럼 날아들었다.
“간다!”
성우는 피할 수 없다는 걸 느끼고 언데드 몇 마리를 몸 앞으로 움직였다.
쩌一 엉!
그런데 언데드가 아닌, 다른 누군가 달려들어 파울로의 펀치를 막아냈다.
“윽! 근육 돼지 새끼, 좀 치는데? 골이 다 띵하네!”
한호였다. 그는 4개의 방패를 쥐고 파울로를 막아냈다.
“······응? 방금 뭐? 무슨 근육 뭐?”
한호는 피식 웃으며, 그의 팔뚝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무식하게 큰 근육을 보니까 이거 딱 견적 나오네. 너 약쟁이지?”
“······뭐?”
약쟁이, 그 말에 파울로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한호는 킬킬 웃으며 목청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으하하! 로이더! 로이더! 로이더!”
한호의 외침이 파울로의 본능을 일깨우는 주문이었던 것처럼, 놈은 잇몸을 드러내며 한 마리 고릴라처럼 달려들었다.
“으아아! 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지껄여! 주, 죽여주마!”
“으하하! 흥분하는 걸 보니까 확실하네! 아저씨, 혹시 고자세요?”
둘은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주고받더니, 곧장 치고받기 시작했다.
텅! 텅! 텅! 텅! 텅!
한호는 힘에서는 밀렸지만, 압도적인 방어력과 6개의 손을 바탕으로 분전했다.
그런데 그때, 파울로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더니, 상체가 검은색 돌로 뒤덮였다. 그리고 등 뒤에서 무언가 일어났다.
“······팔?”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팔이, 무려 6개나 튀어나왔다.
총 8개의 팔을 일제히 휘둘러, 한호의 방패를 강타했다.
콰—앙!
그 충격파가 지하 공간 전체를 울렸다.
“윽!”
한호의 방어막은 깨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엄청난 충격이 그를 뒤로 튕겨내 버렸다. 한호는 벽에 부딪힌 뒤, 힘겹게 일어섰다.
“큭, 팔이 여덟 개면······ 인정이지.”
이어서 정훈이 달려들어 파울로와 맞섰다. 하지만 한호도 버텨내지 못했기에, 정훈 역시 그 주먹에 맞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파울로는 두 사람을 그렇게 쓰러뜨린 뒤, 한 마리 짐승처럼 거친 한호성을 내질렀다.
“으하하! 다 소용없어! 우리는 무려 마왕성에서 발탁한 일명 ‘임페리얼 레인저’라고!”
“아, 파울로 제발······ 멋대로 그딴 유치한 이름 붙이지 말라달라고 했잖아?”
그레이스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레이스! 넌 생긴 것과 다르게 정말 예술 감각이 없어. 네 감각적인 엉덩이의 반만 따라가 보는 게 어때?”
“고릴라 같이 생긴 게 무슨 예술을 논하려고 하지? 그리고 그딴 식으로 성희롱하는 거······ 그게 딱 네 수준이야.”
둘은 그렇게 여유롭게 농담을 주고받기까지 했다.
그때였다.
“······포이즌 필드!”
일행이 지나온 뒤쪽 통로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석문 쪽 천장 부근에 무언가 퍼지기 시작했다.
푸수수수수—
짙은 녹색의 연기, 독가스였다. 민석과 빅터가 통로 쪽에서 걸어 나왔다.
“네크로맨서님!”
“딱! 주인님!”
성우가 만일을 대비하여 뒤쪽에 배치해둔 민석과 빅터가 지원해온 것이었다.
“······제길!”
그레이스는 당황했다. 자신의 등 뒤, 머리 위에서 독가스가 생성되었으니 바람으로 날려버리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이 뒤집어 쓰고 말 것이다.
그녀는 그쪽으로 온 신경을 집중하여 바람을 일으켜, 독가스 내려앉지 않게, 섬세하게 움직여, 성우 쪽으로 밀어냈다.
후우우우!
“숨을 참아요!”
민석이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녹색 연기가 일행을 덮쳤을 때, 민석이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촤르르르!
그리고 그렇게 시야가 가려졌을 때, 그 찰나의 순간, 검은 사슬을 뿜어냈다. 사슬은 그레이스의 왼팔과 지팡이를 묶었다.
“악! 이, 이게 뭐야!”
그레이스는 기겁하며 팔을 잡아당겼지만, 쉽게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성우 씨! 지금입니다!”
민석의 외침, 성우는 독가스 속에서 내달려, 바닥을 박차고 치솟았다.
- 당신의 무기에 ‘악령 폭격’이 깃듭니다. (MAX)
그림리퍼가 검은 구체를 가득 머금었다. 성우는 그대로 낙하하며, 그레이스의 목덜미를 향해 그림리퍼를 휘둘렀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쩌一 저一 적!
파울로의 팔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두꺼운 팔이 그림리퍼를 막아냈다.
“워! 네크로맨서는 마법사 계열 아니었나? 그런 것 치고는 힘이 좋은데? 일격에 내 팔을 네 개나 이렇게 망가 뜨리다니?”
“그렇게 떠벌리기 전에······.“
성우는 숨을 내쉬며, 어딘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다음 수를 생각해라! 돌대가리!“
- 해당 지역에 ‘명계의 율령’이 발령됩니다.
* 모든 원혼을 통제합니다.
염라의 권능 중 하나인 ‘명계의 율령’은 죽은 자의 영혼을 귀신으로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악령 폭격’에 사용하는 ‘영혼’ 역시 귀신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촤좌좌좌좌!
파울로의 팔에 박혀 있던 그림리퍼 안에서 40마리의 귀신이 터져 나오며, 마치 회전 칼날처럼, 파울로의 온몸을 긁어버렸다. 사방으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악! 악!”
파울로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주먹 같은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귀신들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가각! 가각! 가각!
그의 몸은 돌덩이 같았지만, 제아무리 단단한 돌이라도 계속 내리찍으면 흠집이 남는 법이었다. 데미지가 쌓여 갔다.
“악! 이것 좀 떼어내 줘!”
바로 그때부터 반격이 시작되었다.
딱딱!
옅게 깔린 독가스 안에서 오른이가 튀어나갔다. 비보나와 맞서고 있던 지수쪽이었다.
녀석은 지수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며, 비보나를 향해 무언가를 겨누었다.
콰—앙!
핸드 캐논이 불을 뿜었다. 비보나의 발아래, 그림자 속에서 손이 올라오며 탄환을 막아냈다.
끝이 아니었다. 오른이는 핸드 캐논을 집어 던지며 칼을 뽑아 들고 놈의 옆구리를 향해 내달렸다.
“어디서 개 같은 게 굴러들어······.“
하지만 비보나의 시선이 교란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지수가 놓칠 리 없었다.
‘열렸다!’
지수는 섬광처럼 쏘아져 비보나의 목전까지 쇄도했다.
비보나는 서둘러 그림자를 움직였지만, 고수 간의 대결에서 잠깐의 집중력 상실은 아주 큰 틈이었다.
촥! 촥!
지수의 칼날이 놈의 허벅지와 옆구리를 긋고 지나갔다.
놈의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치솟으며, 6개의 갈고리가 일대를 휘저었지만, 지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악! 이, 이런 개 같은 년이!”
비보나는 상처를 움켜쥐며 욕설을 토해낸 뒤, 그림자 속에서 두 개의 거대한 손을 만들어 자신의 몸을 감쌌다.
“이걸로2대 1이야.”
“으으······.”
지수는 무사였고 비보나는 암살자였다. 1대1 대결에서는 몰라도, 이런 동시다발적인 전투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그레이스! 이것 좀 떼어줘!”
파울로가 고함을 토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도 자신의 팔을 옭아맨 민석의 ‘심연의 사슬’을 떨쳐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뭐? 임페리얼 레인저?”
성우는 파울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발을 향해 ‘겨울 포식자’를 겨누었다.
쩡! 쩡! 쩡! 쩡!
수차례의 격발, 빙결 탄환이 그의 하반신에 적중했다.
두꺼운 허벅지와 종아리가 얼어붙으며 바닥에 고정되었다.
“윽! 윽! 저, 저리 가!”
“임페리얼 레인저, 오늘부로 해체야.“
성우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목을 향해 그림리퍼를 내리쳤다.
쩍!
“······파울로!”
그 두꺼운 목덜미가 단숨에 절단됐다. 제아무리 돌 같은 몸뚱이라고 한들, 압도적인 능력치를 보유한 성우의 일격을 견딜 수 없었다.
성우는 잘려나간 머리통을 걷어차 버리고 그레이스를 돌아보았다. 여유 넘치던 그녀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번져 나갔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시간 끄는 게 전부야. 그냥······ 저 문 열어.”
그런데 그때······.
쿠구구구—
진동이 울렸다. 굳게 닫혀 있던 석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 어스름한 어둠 안에서 붉은 일렁임 하나가 보였다.
화아아아—
불꽃이었다. 불꽃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소란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불꽃으로 뒤덮인 사람이었다.
매끈한 몸 위로 돋아난 붉은 비늘, 붉은 머리칼, 붉은색 뿔, 세로로 찢어진 주황색의 눈동자, 그렇게 온통 붉은 여인이었다.
“응? 파울로의 머리가 왜 여기에 있어?”
그녀는 석문 근처에 굴러다니는 머리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슬쩍 돌려, 뒤쪽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하······ 강석, 어쩌지? 나는 저것들하고······ 말로 하기 싫어지는데?”
역시, 드래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