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70) 마왕의 목적 - 1
천사 챔피언 두 마리를 모두 쓰러뜨린 뒤, 성우는 반쯤 무너진 피라미드 앞에 섰다.
성우가 피라미드 내부에 마왕과 드래곤이 있다고 밝힌 이후, 상황이 다르게 돌아갔다.
다음 차례가 될 거라 여겼던 ‘마왕성’과의 전투가 지금 당장 벌어질 수도 있었다.
“소수 병력으로 진입해야 합니다.”
이 피라미드는 실로 엄청난 크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부에 함대를 끌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인호 씨, 함대는 일정 거리를 두고 피라미드를 포위하고 경계태세 유지해주세요.”
본 드래곤은 유사시 벽을 뚫고 들어 올 수 있겠지만, 비행선은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별공격대 중 소수만 입구에 대기하게 하고, 나머지 역시 피라미드를 포위하세요.”
그렇게 내부에 진입하기로 한 사람은 성우, 지수, 한호, 정훈, 리웨이까지 다섯 명이었다.
‘몇 명 더 데려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성우는 이 끝에서 만날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그리고 만일 그 사람과 충돌이 일어난다면, 플레이어가 아무리 많더라도 개죽음일 것이다.
‘더군다나 드래곤도 있다.’
드래곤 피어에 노출되는 순간, 신격이 없는 이들은 경직 상태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그리고 경수 씨,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 들어가서 마스터 허스트께 말 좀 전해주세요.”
경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얼마 전에 부탁드린 그 물건······ 아직 테스트를 못 했더라도 지금 필요하니 바로 준비해달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바로 전해서 메신저호에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렇게 성우는 극소수의 동료와 함께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갔다.
* * *
피라미드 내부는 벌집같은 구조였다
“와, 진짜 크다. 문제가 생기면 제 필살기, 현무를 꺼내도 되겠는데요?”
지상에 있던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물은 사실상 덮개에 불과할 정도로 넓었다.
석회석 채광 현장이 연상되었는데, 방대한 너비의 구덩이를 중심으로 하여, 가장자리로 나선형의 내리막길이 연이어지고 있었다.
“악마의 세계수, 그 밑바닥이 떠올라요.”
지수의 말이었고 성우도 공감했다. 그때보다 밝은 톤이긴 하지만, 전반적인 지형이 비슷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 공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 그때처럼 본 와이번을 타고 내려가죠. 주의 경계를 해주세요.”
성우는 본 와이번을 소환했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 본 드래곤은 유용하지 못했다.
후우우우—
“윽, 이게 무슨 냄새죠? 아래에서 뭐가 타고 있나?”
한호가 코를 감싸 쥐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매캐한 탄내가 코를 찔렀다.
“저기, 피라미드의 천장을 뚫고 들어 온 불기둥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정훈의 추측이었다.
“이건······ 뭔지 몰라도 엄청나게 강력한 공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라미드를 관통하여 들어온 두 개의 불기둥, 그건 피라미드 내부, 아래로 향하면서 점차 넓게 분사되었는데, 어느 정도 내려가자 불에 녹은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커먼 잿더미들이 가장자리의 내리막길을 따라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천사들이 깡그리 죽었네요. 놈들이 그 구멍으로 탈출하려고 했던 이유가······ 정말로 살충제를 맞은 벌레 떼 같습니다.”
듬성듬성 비교적 형태가 유지된 덩치 큰 파편도 있는 걸 보아하니, 일반 천사 외에도 간부급 천사들마저 단숨에 녹아버린 모양이었다.
하물며 불기둥이 직접 긁고 지나간 곳은 벽이든 바닥이든 시커멓게 녹아 내려, 지금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저 연기, 들이마시지 마세요. 유독 가스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거예요.“
지수가 소매로 코를 막으며 말했다.
‘정황상 단 두 번의 공격으로 이 모든 천사를 끝장내버렸다.’
이 정도 위력의 공격이라면······ 딱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드래곤 브레스······.‘
역시 살아있는 성체 드래곤은 그 수준이 다른 듯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열기라면······ 성우의 화염 저항력조차 버텨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쿵—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구덩이의 밑바닥에 닿았다.
거대한 통로가 하나 보였다.
쿠— 궁—
그리고 그 안에서 범상치 않은 진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쿵— 쿠— 웅—
이에 지수가 그 소리에 집중하여 감각을 열더니, 성우를 쳐다보았다.
“이거 싸우는 소리······ 같아요.”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공략하려는 겁니다.”
강석, 그 역시 월드 이터가 되기 위한 퀘스트를 받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나보다 먼저 받았다.’
월드 이터 관련 퀘스트를 받는 방법이 한 가지 루트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역시 월드의 최강자로서, 또 한 차원의 지배자로서 한 월드의 우승이나 다름없는 ’월드 이터’에 도전할 자격은 충분했다.
‘마왕과 드래곤에 이어서 월드 이터까지 된다면,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을 거다.’
강석의 ‘목적’은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하지만 그딴 게 뭐든 성우는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그 사람이다. 어리바리하게 있을 수는 없다.’
애초에 전쟁을 걸어왔다. 무려 ‘재앙 퀘스트’가 발행되지 않았던가?
그 의도가 무엇이든 혹시 대의가 있더라도, 직접 밝히지도 않고 알아낼 수도 없는 한, 당장은 맞서야 하는 게 정답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죠.”
성우는 두 마리의 ‘스펙터’를 소환하여 먼저 들여보냈다.
“안전을 확인하면서 진입하죠.”
그리고 민석과 빅터를 소환했다.
“둘은 혹시 모를 후방 기습을 대비하여,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따라와 주세요.”
강석은 성우가 따라 들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저들이 성우의 추격을 방해할 생각이 있다면 함정을 파두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들어가죠.”
성우 일행은 민석과 빅터를 남겨두고 통로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저벅一 저벅一
성우는 스펙터의 눈을 빌려 약 50m 안쪽을 앞서 살피며 나가아갔다.
별다른 건 없었다. 종종 천사 시체가 나동그라져 있을 뿐이었다.
’응?’
그런데 어느 정도 깊어졌을 무렵, 무언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그림자처럼 보였다.
성우는 서둘러 스펙터를 움직여 그 그림자를 쫓았다. 그리고 순간, 빛이 번쩍이더니······.
- 당신의 ‘권속(스펙터)’이 소멸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성우는 다시 자신의 시야로 돌아왔다 . 스펙터가 무언가에 의해 공격받은 것이었다.
“역시 앞쪽에 누군가 있습니다. 적대적이네요. 준비하세요.”
일행은 전투 채비를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후우우우一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바닥을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어느새 천장이 높아지며 로비 같은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백색의 ‘석문’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요새의 성문으로 보일 만큼 큼직한 크기였다.
“저 안에서 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저기 누군가 있네요.”
지수가 어둠 속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문의 양측에는 시퍼런 횃불이 여러 개 매달려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그림자가 하나 서 있었다.
사람이었다.
“······아, 저기 오네!”
그가 성우 일행을 맞이하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낯선 얼굴이었다.
“그 유명한 네크로맨서와 발키리! 그리고 기타 등등 들러리들! 안녕!”
가까이에서 보니 키가 2미터는 될법한 거구의 사내였다. 딱 달라붙는 티셔츠 한 장만을 거치고 있어서 우락부락 한 근육 위로 시커먼 문신이 도드라졌다.
라틴족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 인종으로 보였는데, 멸망한 브라질 서버 출신인 걸까?
“······뭐, 들러리? 하, 이제 아닌데?”
한호가 불만이 있는지 중얼거렸고 지수는 칼등에 손을 얹었다.
“······셋이에요.”
지수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벽 쪽 그림자 속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히스패닉계의 키 큰 여자와 역시 히스패닉계의 호리호리한 체구의 남자였다. 복장을 볼 때 각각 마법사와 암살자 같았다.
언젠가 로즈 의장이 말했던 멕시코의 ‘카르텔’ 조직이 떠올랐다. 그들 역시 아마존의 드래곤에게 붙었다고 했던가?
“셋 다. 살기가 느껴져요. 특히 오른쪽 저 남자, 그림자 속에 뭔가 있어요.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이에요.”
지수가 성우를 향해 속삭였고 성우는 그 남자를 슬쩍 바라보았다.
언뜻 봐도 음침한 놈이었다.
“······.”
더벅머리에 검은 로브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대치 상황임에도 고개를 직각으로 꺾은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드러난 얼굴에는 온갖 피어싱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림자라?’
확실히 지수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남자의 그림자가 어딘가 더 짙고 길었다. 일반적인 그림자가 아니었다.
“저 그림자, 스킬일까요?”
“그런 것 같아요. 조심하세요.”
지수의 경고는 주요했다.
‘긴장좀 해야겠군.’
성우는 숨을 들이쉬며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과 드래곤의 동료였다.
하물며 평소에 솔로 플레이를 즐기던 강석이 기용할 정도라면 분명 상당한 실력자일 것이었다.
“······한강석은 어디에 있지?”
성우는 그렇게 말하며 그들이 막아서고 있는 거대한 석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근육질 남자가 성우의 시선을 가리며 입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아, 우리 마왕 각하는 볼 일이 있으셔서, 뵙고 싶으면 조금 더 기다려줘야 할 텐데? 내가 이렇게 양해를 구해도 될까?”
그는 실실 웃으며 말하더니 끝에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과장된 몸짓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래? 그런데 나도 다른 볼 일도 있어서 말이야. 좀 비켜줘.”
“응? 다른 볼 일? 설마 일면식도 없는 여왕을 보러온 건 아닐테고?”
여왕? 드래곤을 뜻하는 걸까? 성우는 검지를 들어, 노골적으로 석문을 가리켰다.
“그 사람들 말고 볼 일이 또 있어. 우리와 싸울 생각이 없다면 그냥 지나가도 될까?”
저 문 안쪽에 이번 퀘스트의 해답이 있었다. 강석이 먼저 왔다고 하지만 무조건 양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근육질의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턱을 긁적였다.
“음, 뭐······ 마왕 각하가 당신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말을 안 들을 때 싸우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싸우지 말라고는 하시지 않아서 말이야? 이거 좀 고민인데? 그레이스! 네 생각은 어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성우에게 등을 보였다. 이 태도, 대놓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감이었다.
그레이스라고 불린 여 마법사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귀찮다는 듯 아무 말 안하며 고개를 저었다.
“음, 그럼······ 어이! 비보나! 네 생각은?”
비보나, 우측 벽에 기대고 있는 음침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 역시 아주 잠깐 눈동자를 이쪽으로 굴렸을 뿐, 다시 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땅을 보는 게 아니었다.
“이것 참, 내 친구들이 워낙 과묵해서 건설적인 토론이 전혀 안 돼서 말이야. 이거 싸울지 말지 결정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는데, 기다려줄 수 있겠어?“
결국, 말장난이고 도발이었다. 성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지수가 발을 슬쩍 움직였다. 성우는 그녀의 반응을 느끼고 멈춰 섰다.
’뭐지?’
그녀는 바닥, 정확히는 앞을 가로막은 근육질 남자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 었지만, 그녀의 감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성우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오른쪽 벽에 기대고 있는 그림자의 남자, ‘비보나’라고 불린 이이게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
어쩌면 노골적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목을 베겠다는 신호라고 해야 할까?
“······.”
비보나는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만, 그 역시 이 공간 전부를, 하나도 빠짐없이 훑는 중일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이곳의 공기가 날카롭게 곤두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두 사람은 이미 수차례 칼을 맞부딪치고 있는 듯했다.
‘충돌하는 순간, 저 암살자가 내 목을 치려고 할거다.’
암살자가 무서운 이유는 상대의 전력을 모조리 무시하고, 단숨에 숨통을 끊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암살자 직업군이라면 으레 가장 중요한 전력부터 노릴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네크로맨서였다.
하지만 성우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지수 씨를 믿는다.’
그런데······.
“하······.“
어울리지 않게 지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턱선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렀다.
‘······무슨 일이지?’
평범한 감각을 초월하여, 이미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경지에 오른 지수가 통제할 수 없는 긴장감을 느끼고 있다니?
성우도 덩달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근육질 남자가 턱을 긁적거리더니 앞으로 두 걸음 다가왔다.
“아, 이런 분위기 싫은데, 미안하게 이거······ 우리가 손님 모실 줄 몰라서 말이야.”
“파울로, 넌 말이 너무 많아.”
그레이스라고 불린 마법사였다. 그녀는 긴 고목 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툭 내리찍으며,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고혹적이고 냉소적인 미녀였다. 그녀가 성우를 지그시 쳐다보며, 늘어질 정도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다가······ 저 멋진 남자, 네크로맨서가······ 욱해서 네 턱을 갈길지도 몰라. 쟤들 지금, 잔뜩 흥분한 것 같거든?”
파울로라고 불린 근육질 사내는 놀라는 척을 과장하며, 뒷걸음질쳤다.
“워! 설마! 초면에 그런 비신사적인 행동을 할 리가 있겠어? 내가 뛰었던 발리 투도의 전사들도 그렇게 무식하지는 않았어!”
발리 투도(Vale Tudo), 브라질식 무규칙 격투기였다.
파울로라는 저 남자, 저 덩치에 무기 하나 안 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격투 계열 플레이어인 듯했다.
쿵— 쿵—
이렇게 시간 끌기에 당하는 동안에도 석문 안쪽에서는 진동이 울렸다.
성우는 지수를 힐끔 보았다. 싸움이 벌어지면 그림자의 사내가 성우의 목을 치려고 할 것이었다. 지수는 성우를 지키려고 할 테고······.
’지수씨를 믿는 수밖에 없다.’
성우는 그림리퍼를 들어 올렸다.
‘셋뿐이니, 물량으로 한 번에 몰아붙인다.’
바로 그 순간······.”
쩡!
순식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