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66) 다중공간전투 - 3
이 전쟁,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치열한 승부가 펼쳐지고 있었다.
누가 이기더라도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으며 누가 지더라도 그가 보여준 위용이 역사에 남아, 아주 오랫동안 명예를 드높였을 것이었다.
이에 안 기자 덧붙였다.
“이번 전쟁이 사실상 월드에 대한 ‘잠정적 패권’을 결정하는 싸움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둘 다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누가 세계의 패자가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월드 전체가 수긍할 만한 장면이 계속되었는데, 아, 이거는 좀······.”
하지만 어떤 이야기든 결말이 중요한 법이었으며, 마지막 인상이 역사에 남을 첫 구절을 결정하기 마련이었다.
쩍!
대형 스피커에서 살벌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안 기자와 웡이 몸을 움찔했다.
“······근데 이건 끝이 너, 너무 안쓰럽네요.”
안쓰럽다? 그게 전장에서 패한 지휘관이 들을만한 표현일까?
보통은 장렬했다, 처절했다, 용맹했다 등으로 쓰이지 않던가?
쩍! 쩍!
하지만 ‘안쓰럽다’ 그 말 말고는 딱히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없었다.
안 기자와 웡은 공식 채널에 나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연신 인상을 찌푸렸다.
“두 지휘관이 병력과 떨어져 홀몸으로 결투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거, 너무 일방적인 게임이 되었습니다.”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 진입한 이 후, 말 그대로 ‘구타’가 이어지고 있었다.
“······컥!”
네크로맨서의 오른손이 황제의 콧잔 등을 강타했고, 왼손 주먹이 황제의 옆 구리에 꽂혔다. 황제는 발작하듯 몸을 꿈틀거렸다.
황제는 천으로 만들어진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분명 좋은 옵션이 붙어 있겠지만, 물리적인 데미지에 대한 방어력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끄으으······.”
황제는 뒤뚱거리며 뒷걸음질 쳐, 성우를 향해 외손을 뻗었다. 그러자 5가닥의 실이 뿜어져 나왔다.
추추추추추!
압제자의 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손에서 실을 뿜어내 공격이나 조종을 할 수 있는 듯했다.
그러나······.
화아아아!
5가닥의 실은 성우의 몸에 닿기도 전에 산화하여 사라졌다.
성우의 몸을 뒤덮고 있는 ‘보일링 아머’의 불길 때문이었다.
“계속 실패했으면서 또 실을 던져? 아직도 이해 못 했나? 아니, 이해가 아니라 인정을 못 하는 건가?”
그건 조금 전, 황제 했던 말이었다. 성우는 슬며시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허, 헉, 혀······.”
황제는 숨을 헐떡이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떨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만한 방법을 고민하는 듯했지만, 아직 못 찾은 듯했다.
손발, 아니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던 ‘테라코타’를 소환할 수 없으니 반쯤 공황에 빠진 것이다.
“그래, 너야말로 군단을 배제하면 아무것도 아니군?”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성우가 들어온 모욕이었다.
네크로맨서를 비난하는 이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았다. 네크로맨서는 언데드 군단 뒤에 숨어 있는 겁쟁이이며, 그 군단을 제외하면 유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전투 계열 직업과 비교하여 전투에 특화된 스킬은 부족할지언정, 네크로맨서의 능력치나 아이템 수준은 그 누구보다 높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엄청난 수의 권속을 활용하여 압도적인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일명 스노볼링(Snowb ailing)이었다.
그런데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비록 주먹이지만 정타를 수없이 때렸는데 아직 멀쩡하다. 역시 능력치가 상당하다.’
황제 역시 남다른 능력치와 아이템을 두르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반면 움직임은 형편없다.’
아무리 장비가 좋다고 한들 훈련이 되지 않으면 소용없었으며, 아무리 훈련을 거듭했다고 한들 실전을 경험하지 않으면 노련해질 수 없었다.
성우가 남들보다 앞서는 가장 큰 이유, 그건 사실 수많은 전장의 최전선에 뛰어들어 다양한 적수와 싸워오며 축적된 ‘노련함’ 때문이었다.
“너는 딱 방구석 노인네, 그게 맞았어.”
성우는 몇 차례 치고받으며 느꼈다. 황제는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즉,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그 입, 다물어!”
그때, 황제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 서 두 줄기의 실이 흘러나와 그의 품 속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다음 순간, 두 줄기의 실이 튀어나왔는데, 그 끝에 달린 무언가가 번뜩이며 성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쉭! 쉭!
회심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고개를 젖혀 쉽게 피해냈다. 두 자루의 단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그었다.
“네까짓 게, 감히!”
칼날이 녹색 빛깔을 띠는 걸 보아하니 맹독을 품은 듯했는데, 황제는 손을 휘저으며 두 자루의 단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 웅! 부— 웅!
성우는 차분히 움직이며 그 공격을 쉽게 피해냈다.
“그래, 역시 몸을 제대로 써본 적도 없는 게 느껴져. 초반부터 왕 놀이를 하면서 너무 안일하게 살아온 거야.”
황제의 공격은 엉성하기만 했다.
턱—
성우는 뻔한 궤적으로 날아드는 단검 한 자루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집어 던졌다.
푹!
직선으로 날아가, 황제의 왼쪽 허벅지에 명중했다.
“······억!”
황제는 끔찍한 고통에 몸을 굽혔다. 그러면서 오른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실이 쏘아졌다.
그런데 그건 공격이 아니었다. 한 가닥의 실은 성우를 지나쳐, 저 멀리 우측벽에 박혔다.
웅—
순간 황제의 몸이 빛으로 변하더니 마치 전류처럼 실을 타고 흘러가, 실이 박혀 있던 우측 벽면 근처에 번쩍이며 나타났다.
’탈출하려고 한다.’
이동 기술이었다. 놈은 그곳에서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역시 실이 쏘아졌다. 이번에는 복도의 안쪽 끝자락, 모루 앞에 박혔다.
웅—
다음 순간, 그는 모루 앞에 서 있었다.
“됐다.”
놈은 고개를 돌려 성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네놈 잘난 척은 이제 끝이다. 다시 내 공간으로 기어 나올, 마음의 준비나 해라!”
턱!
놈은 모루를 짚었다. 성우가 이곳에 들어올 때 언급했던 것처럼, 이 공간을 탈출하기 위해서 모루에 손을 얹은 것이었다.
“퇴장!”
그러나······.
- ‘헤파이스토스의 모루’를 이용할 경우 ‘성공 확률’과 ‘추가 효과 부여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또한, 기본 내구성이 300% 상승합니다.
“······.”
그의 앞에 떠오른 건 평범한 강화 메시지였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그 메시지를 이리저리 살피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 하고 있어?”
“······.”
“출발 드림팀도 아니고 정말로 장애물을 통과해서 결승점 같은 걸 찍으면 미션 성공할 줄 알았던 거야?”
황제, 그는 냉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만 처맞아 본 적이 없는 냉철한 사람, 그러니까 위기를 겪어본 적 없는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런 냉철함은 언제 어디서 깨져버릴지, 검증되지 않은 불안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게 바로 노련함의 부재다.
성우는 화로의 불꽃에 의해 길게 번져 나온 황제의 그림자 위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동시에 황제의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다리가 곡선으로 꺾였다.
“······큭!”
그렇게 놈의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 성우의 주먹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퍽! 퍽! 뻑!
옆구리, 복부, 턱 순서대로 주먹이 꽂혔다. 더는 서 있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황제의 몸이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무너져내렸다.
“커, 커어······.”
황제는 배를 움켜쥐고 몸을 말며 이마를 땅에 대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었다.
‘이 정도 보여줬으면 됐다.’
사실 무기를 이용했으면 단숨에 목을 쳐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구태여 격투를 선택, 구타하여 무너뜨린 건 일종의 ‘과시’였다.
전쟁을 통해 ‘선전’을 하려는 건 황제 뿐만이 아니었다. 성우 역시 공식 채널의 방송을 의식하며 월드에 대한 ’선전’을 노리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보고 있다. 그리고 느끼고 있다.’
이건 미래를 위한 전쟁이다. 즉 어떤 변곡점에 불과했으며 이후의 ‘통제 기구’ 설립을 위하여 월드 전역의 플레이어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 세계수 진영의 주가를 드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전쟁의 끝이 이리도 일방적인 구타로 끝나버렸으니······ 이 방송, 이 장면을 지켜보는 모든 플레이어가 심경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네크로맨서의 이미지가 한층 더 단단해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 서버의 기를 죽일 수 있다는 점이 유효하다.’
만약 황제를 간신히 이기는 모습으로 결말이 났더라면, 그들을 지배하게 되더라도 필연적으로 저항이 발생할 것이었다.
‘공포로 통치했던 황제를 압도적으로 꺾으며, 더 큰 공포를 심는다.’
즉, 황제가 보여왔던 모든 위용이 단 한 순간에 네크로맨서에게 모조리 흡수된 셈이었다.
“황제 놀이를 더 오래 하고 싶었으면, 그냥 너희 땅에 처박혀 있었어야 했어.”
성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박혀 있던 그림리퍼를 뽑아들었다. 황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 했다.
그렇게, 놈의 목 위로, 거대한 흑색낫이 떨어졌다.
- 플레이어를 살해하여 29,000골드를 얻었습니다.
‘······끝났다.’
하지만 성우의 바람과 달리,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우우우—
축 늘어진 황제의 몸뚱이에서 황금색의 영혼이 피어올랐다.
“뭐야 이건?”
그 영혼은 기분 나쁠 정도로 찬란한 빛을 발하더니, 이내 증발하듯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불길한 징조였다.
“아직 끝이 아니군.”
놈에게 다른 카드가 남아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끝까지 가야지.”
성우 역시 카드가 남아 있었다.
진정한 클라이맥스를 위해, 월드에 강렬한 한 장면을 각인시켜줄 만한, 마지막 카드였다.
* * *
성벽 쪽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3번 구멍 수리 완료!”
상황은 훨씬 좋아졌다. 어느새 성벽 안으로 침투한 테라코타를 모두 처리했으며, 무연을 필두로 한 대장장이들이 총력을 기울여 무너진 성벽을 복구했다.
“전 함대, 포격과 함께 전진한다!”
우우우우—
성벽 뒤에 숨어 있어야만 했던 연합 함대 역시 성벽 밖으로 전진하며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저 미친 황금색 손이 구속을 풀지 못하게 막아!”
이렇게 전황이 넘어올 수 있었던 건 ‘압제자의 손’ 중 왼손이 사라지고 오른손이 속박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쪽으로 균형이 넘어갔다고 해서 한순간에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중국군의 숫자는 엄청났으며, 무엇보다 승패가 이곳에서 결정되지 않는 점이 컸다.
“몰아붙여! 황제께서 돌아오시면 우리의 승리다!”
이곳에 있는 테라코타 군단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이상 황제는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중국군은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심정으로 끈질기게 공세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 저게 뭐지?”
성벽 위, 관측병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결계 너머에서 밝은 빛이 일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우—
이내 결계의 상단 부분이 녹아내리듯 뚫리며 황금색 구체가 하나 날아 들어 오더니, 마치 별똥별처럼, 테라코테 군단의 후방 어딘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곳에 서 있던 정예 테라코타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자리에는 정체불명의 검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황금색 구체는 바로 그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퍼一 엉!
불과 몇 초 뒤, 검은 상자가 폭발하며 그 안에서 무언가 걸어 나왔다.
저벅一 저벅一
그건 황제였다. 성우에 의해 목이 달아났던 황제가 멀쩡한 모습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
- 당신의 영혼이 ‘복제 테라코타’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는 황제가 가진 신격의 스킬이었다. 일정 거리 내에 자신의 모습을 닮은 테라코타가 남아 있다면, 그것에 빙의하여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황제는 처음부터 최악을 위한 대비를 해둔 상태였다.
“하······ 그래, 내 복제 인형을 3개나 준비해두길 천만다행이다.”
그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성벽을 노려보았다.
“후······ 개싸움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한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등 뒤, 허공에서 찬란한 빛줄기가 일렁거리며,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압제자의 시선’이 발동합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신격, ‘압제자의 시선’과 ‘압제자의 오른손’이 다시금 나타났다.
오오오오—
전장의 한 가운데 피어오른 거대한 손과 거대한 눈······ 그것들은 이 전장에 있는, 그리고 방송을 시청 중인 모든 이들의 시선을 빼앗아 오기에 충분했다.
“저, 저게 뭐야!”
“······놈이 다시 왔다.”
성벽 위,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 서버의 플레이어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서, 설마······ 네크로맨서가 진 거야?”
“뭐? 말도 안 돼!”
이들은 방송 내용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황제의 재등장을 네크로맨서의 패배로 받아들이기는 게 당연했다.
“그게 사실이면······.”
“······우린 끝난 거야.”
그 한 장면만으로도 좌절 그 자체였으며, 이어지는 황제의 공세는 절망으로 다가왔다.
- ‘압제자의 시선’에 노출되었습니다. 모든 신체 기능이 저하됩니다.
* 주의! 해당 상태에 오래 노출될 경우 ‘정신 지배’에 취약해집니다.
황금색 시선이 성벽을 훑고 지나가자, 성벽 위에 서 있던 플레이어들이 와르르 쓰러졌다.
“으, 윽!“
“모, 몸이, 안······.“
쓰러진 플레이어들은 누군가 머릿속을 주무르고 있는 것만 같은, 역겨운 기분을 느꼈다.
“악! 내 머리! 머리가! 이, 이상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손길이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폐, 폐하······ 윽, 내가 지금 뭐라고······.“
‘정신 지배’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이처럼 ‘압제자의 시선’은 대규모 전쟁을 단숨에 끝내버릴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이걸 미리 꺼내지 않은 건, 전적으로 네크로맨서를 의식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선보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선택을 후회했다.
“그래, 역시 쉽다. 차라리 처음부터 총력을 드러냈으면 더 적은 피해로 승리할 수 있었을 텐데······.“
수를 아끼다가 오히려 네크로맨서의 수에 잡아먹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손해를 복구한다.”
성벽 위, 성벽 안, 여기저기서 고통과 좌절 뒤섞인 신음이 울렸다.
반면 성벽 밖의 중국군은 이미 전쟁에서 이기기라도 한 듯, 열렬한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다시 한번 승기가 넘어가는 듯싶었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별똥별이 나타났다.
후우우우!
이번에는 성벽 안쪽에서부터 날아들었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며 나타났다.
그것은 성벽 위, 가장 높은 곳에 내려앉았다. 연기가 가시자, 바닥에서 망자의 손들이 우후죽순 올라오는 가운데, 그 위에 누군가 우뚝 서 있었다.
네크로맨서였다.
“왔다! 네크로맨서다!”
좌절뿐이던 성벽 위로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성우는 ‘세계수(링크)’ 스킬의 ‘귀환’ 효과를 통하여 세계수로 곧장 돌아간 뒤 ‘황혼 습격’을 이용해 고속 이동한 것이었다.
그의 등장에, 황제가 압제자의 손 위에 올라탄 채 공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성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조금 전까지 두들겨 맞으며 지었던 울상을 싹 지워버리고 다시금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먹질에서는 네가 이겼다. 하지만······.“
황제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위엄 있어 보이려는 몸짓이었다.
“······이 전쟁은 짐의 승리다.”
신격이 없는 상태에서 두들겨 맞은걸 ‘주먹질’이라 격하하여 없던 일 치부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시 신격을 되찾은 지금, 이 전쟁에서는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듯했다.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도 이해 못 하고 있군?”
성우는 얼굴에 조소를 가득 머금었다. 그 순간, 그의 두 눈, 두 눈동자 안에서 녹색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처음부터 이미 내 판 위에 있었어.”
그의 말이 멎자, 무언가 시작되었다.
고一오一오一오一오一
기괴한 바람 소리가 귓가에서 울부짖었다. 분명 바람 소리였다만, 이건······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지옥의 곡성(哭聲)과 같았다.
성우의 머리 위에 떠 오른 둥근 광채, 염라의 아우라가 서서히 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다. 작아지는 건가? 혹은 깊어지는 걸까? 왠지 모르게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그 무엇도 형언할 수 없었으며 아주 조금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저 어떤 빛보다 눈이 부셨으며 그 어떤 어둠보다 까마득히 깊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고— 오— 오— 오— 오—
그리고 네크로맨서가 부리고 있던 수 천 마리의 귀신들이 덩달아 울부짖으며 일제히 비상했다.
그것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무언가를 환영하는 것처럼,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이리저리 뒤흔들어 댔다.
“뭘······ 하려는 거지?”
황제는 저도 모르고 뒤로 물러섰다. 분명 무언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주 불길한 무언가······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 수 없기에 두려웠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 중에서 가장 큰 공포는 미지(未知)에 대한 공포라고 했던가?
고一오一오一오一오一
모두가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황제, 중국군, 하물며 한국 서버의 플레이어들까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무치는 공포를 느꼈다.
그때, 하늘로 떠올랐던 귀신들이 하나의 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 점은 천천히 불어나더니 어느 순간······.
구— 웅—
육중한 폭발음과 함께 단숨에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건 구멍이었다. 아주 깊은 구멍······ 그걸 바라보며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늘이······ 통째로 열렸어.”
그건, 다른 세계와 이어지는 통로였다.
“대체 뭐, 뭘······.”
그리고 이내 이 이름 없는 공포의 실체가 드러났다.
- 주의! 해당 지역에 ‘명계의 문’이 열립니다.
그 순간, 세상이 색이 사라졌다.
- 생사부(生死簿)에 당신의 이름이 기재됩니다.
오로지 백색과 검은 선만이 존재하는 공간······.
- 명계(具界)에 입장하셨습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아니, 이 미지의 공간 자체가 현실 위로 범람했다.
그리고 그 무색의 공간 위, 유일하게 녹색의 빛으로 물들어 있는 존재가 성벽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나에게도, 권역이 있다.」
그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내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감추고 있던, 그리고 미래를 위해 끝 내 감추려고 했던, 염라(閻羅)의 마지막 권능이 발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