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66) 다중공간전투 - 1
1성짜리 직업에 각성도 없는 한호가 신격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은 아주 단순했다.
“오! 그래! 지금까지 내 투자는 틀리지 않았어!”
신격이라는 건 신의 권능을 끌어내는 것으로, 해당 신이 지닌 어떤 ‘특성’을 만족해야만 했다.
이는 성우나 지수의 사례처럼 신의 특성을 연관성이 있는 다양한 ‘조건’이 모여 만들어진다. 그건 마치 퍼즐 풀듯 어려운 데다가 운까지 따라줘야만 했다.
그렇기에 ‘조건’을 수집하는 건 일종의 ‘히든 루트’인 셈이었으며 ‘정식 루트’는 따로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한호의 사례였다.
- 축하합니다! ‘정규 신격’ 획득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 개인의 방어막 수치 200,000 초과 (방어의 귀재)
그렇다. 이처럼 하나의 무언가가 ‘극’에 달하는 게 ‘정규 신격’ 달성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내가 방어막이 언제 이렇게 높아졌지? 아! 방패를 막 들어서 그렇구나?”
현재 방어막 수치 225,000······ 심지어 세계수 진영의 결계인 ‘신목의 그늘’보다 높은 수치였다.
방대한 지역을 안전하게 감쌀 만큼 엄청난 수준의 방어막이 오직 단 한 사람의 몸 주변에 압축된 셈이었다.
“후······ 이렇게 될 줄은 진짜 몰랐는데?”
한호 자신도 의아했다.
“그래도, 누가 뭐래도,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이 현명한 선택이었던 거지?”
한호는 끔찍한 잡종이기도 했지만, 은근히 외골수이기도 했는데, 무언가를 선택할 때 오로지 ‘멋’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을 고수했다.
즉, 끔찍한 잡종이 된 이유 역시 그때 그때 멋있어 보이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호는 자신의 방어막이 상당히 멋들어진다고 생각했고 레벨업을 할 때마다 방어막과 관련된 스킬을 올리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스킬 정보]
- 이름 : 신념의 처단자
- 등급 : 장인
- 분류 :액티브
- 소모 : 10
적의 숨통을 끊는 순간, 120초간 성스러운 방어막을 얻습니다. 또한, 모든 저주와 상태 이상에 대한 면역력을 얻습니다. (+50%)
+ 신념 고취 : 적의 숨통을 끊을 때마다 추가 방어막 수치(+100)를 얻습니다. (최대 200 중첩)
[스킬 정보]
- 이름 : 피의 고행
- 등급 : 숙련
- 분류 : 패시브
- 소모 : 0
전투가 시작된 이후 5분이 지난 시점부터 10분마다 ‘붉은 깨달음’를 얻습니다. (최대 5 중첩) 그 효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방어력 상승(+5%), 최대 마나 상승(+50), 방어막 형성 및 상승(+1%), 회복 속도 상승(+1%)
이외에도 친위대의 정신, 아킬레우스의 방패, 아이기스 등 수많은 방어 효과가 있는 아이템을 두름으로써 압도적인 방어막 수치를 얻게 되었다.
하물며 정훈에게 얻은 방패인 ‘성지 수호자의 방패’는 방어력에 비례하여 방어막이 형성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다른 무엇도 아닌, 방패만 무려 5개 들었으니 그 효과가 뻥튀기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그렇게 얻은 신격은······.
- 북방의 신 ‘현무’의 힘을 얻습니다. (정규 신격)
* 신격을 발휘할 때마다 ‘데미 갓’ 상태가 됩니다.
*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10)
* 〈절대 방어(장인)〉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음기 지대(장인)〉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화신 발현(장인)〉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판타지에서 최강의 방어력과 음기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현무(玄武)’였다.
즉, 현무 신격을 얻기 위해서는 방어력이나 음기 중 하나가 ‘극’에 달해야 만했다.
“······으흐흐! 이게 멋의 궁극이다!”
한호는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고 어느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어디 한번더 퍼부어 보시지? 응?”
조금 전, 황제가 새로운 신격이 탄생했음을 느끼고 모든 화력을 동원했지만, 한호는 ‘절대 방어’ 스킬을 통하여 그 공격을 모두 흡수, 반사해버렸다.
그렇게, 강력한 빛줄기에 의해 압제자의 손이 성벽 밖으로 튕겨 나가는, 예상외의 장면이 연출된 것이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화신 발현(현무)’이 시작됩니다.
그러한 메시지가 일대의 전파되고 한호의 등 뒤로 검은색과 녹색의 빛무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어떤 형태로 변해갔다.
우우우우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거대한 등껍질이었다. 집채만한 크기의 등껍질, 그건 거북이었다. 그런데 괴상한 점이라면 머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츠츠츠츠一
등껍질 너머에서 머리 하나가 더 나타났는데, 그건 거대한 뱀의 머리였다. 그렇다. 거북의 꼬리가 뱀이었다.
“역시······ 멋있어!”
이처럼 ‘현무(玄武)’는, 거북과 뱀이 뒤섞인데다가 네 개의 긴 다리를 가진, 오묘한 형태로 묘사되었다. 어찌 보면 끔찍한 잡종인 한호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한호는 그 거대한 존재의 그림자 안에서 걸어 나오며 압제자의 손을 올려다보았다.
“후, 내가 이런 멋진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호가 5개의 방패를 일제히 들어 올리자 그의 등 뒤로 나타난 ‘현무의 화신’이 몸을 일으켰다.
“······여긴 못 지나간다, 애송이!”
그 대사······ 누가 들어도 별로 멋지지 않다는 건,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가기 쉽지 않다는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호가 그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지수의 앞선 예상대로 네크로맨서가 움직이고 있었다.
단순한 힘 싸움이 아니라, 적을 괴멸시킬 수 있는 방향을 향해······.
* * *
전장의 후방, 성우는 언데드 군단을 조종하면서 멀찍이 물러서 있었다.
꽤 맹렬하게 몰아붙였지만, 황제의 테라코타 군단과 중국군 ‘창 제대’까지, 도합 10만이 넘는 대군단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성우는 리웨이를 바라보았다.
’리웨이의 파도마저도 힘을 못 쓰는군.’
그녀는 바닥에 고인 다량의 물을 조종하여 집채만 한 파도를 연신 일으켰다.
처음 일으켰을 땐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매서웠지만, 적진에 가까워졌을 때는 현저하게 작아져 제대로 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제, 젠장!”
재해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범위 공격이었지만, 아무런 보조 없이, 다양한 직종으로 구성된 플레이어 군단을 뚫어내는 건 어려웠다.
“으,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어!”
중국군 측의 마법사 부대 때문이었다. 정령을 무력화할 수 있는 ‘제어 마법’이나 파도 자체를 깨뜨릴 수 있는 ’바람 마법’ 혹은 ‘빙결 마법’을 쏘아 파도를 무너뜨렸다.
“그래도 조금만 버텨. 어차피 주의만 끌면 돼.”
성우는 담담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애초에 저 엄청난 대군단을 뚫어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쯔쉬안이 구름을 몽땅 끌어내렸기 때문에 이곳의 하늘은 비교적 맑은 편이었다.
’온다.’
높은 하늘, 옅은 구름 안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그것은 성우를 향해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삐이이一
독수리의 울음, 저건 그리핀이었다.
“······네크로맨서님!”
혜연과 돌풍이이가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가져왔어요!”
성우는 무전기 아이템을 통하여 성벽 안과 교신, 무언가를 급히 조달해주길 요청했다.
그에 따라 기동력이 가장 좋은 ‘그리핀 라이더’ 혜연이 해당 물품을 전해온 것이었다.
성우는 그 물건을 받아들었다.
“좋아, 이제 시작하자.”
히든카드가 준비되었다.
* * *
안 기자의 스튜디오는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갔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전황이 뒤바뀌는 줄다리기가 이어졌으니, 안 기자와 웡 모두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물론 새로운 신격의 탄생은 놀라운 일이었기에 잠깐이나마 새로운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오! 저 남자, 네크로맨서의 동료입니다! 팔을 6개나 가지고 유도탄도 몸으로 막아내던 그 도적? 프리스트? 전사? 음, 아무튼, 뭐, 그런 사람입니다! 예상 밖이네요!”
그러나 현무의 등장은 성벽이 뚫린 뒤 급격하게 무너지던 균형을 되찾아 주었을 뿐이었다.
“······.“
다시금 별반 다르지 않은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치열하지만, 지겹게 반복되는 싸움이었다.
“음······.“
그렇게 전쟁 양상이 다소 지지부진해질 무렵······.
“어!”
다시 한번 화면이 돌아갔다.
“드디어 네크로맨서입니다!”
네크로맨서의 출연은 언제나 극단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기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어디죠?”
어두운 건물 안이었다. 전쟁의 함성이 다소 작게 들리는 것으로 추정할 때, 전장과 어느 정도 떨어진 곳, 결계 밖에 있는 건물로 추정되었다.
절그럭一 절그럭一
네크로맨서는 긴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걷는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쩍! 쩍!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내 카메라 앵글이 천천히 돌아가 뒤쪽을 비추었고, 그 순간, 검은색 칼날이 테라코타 두 기를 동시에 꿰뚫었다.
쩌一 억!
그 파편이 무너져내리며 복도 전경이 드러났다.
“후······.“
데스나이트, 민석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듀라한, 고블린 스켈레톤이 따라 오고 있었다.
그들의 발아래에 으스러진 테라코타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그걸 통해 이들이 테라코타가 남몰래 지키고 있는 곳으로 침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최정예 병력으로 보이는데? 그리고 여기는 대체 왜······ 황제의 테라코타가 지키고 있는 걸까요?”
“음······.“
안 기자가 물었지만 웡은 그럴싸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사실 황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황제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황제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네크로맨서일 수도 있었다.
카메라는 네크로맨서 일행을 뒤따라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꽤 큰 건물인 모양인지 넓은 로비가 나타났다.
절그럭一 절그럭一
그리고 이번에 역시 다수의 테라코타가 앞을 막아섰다. 약 30여 기 였다.
“이거, 이번에는 뭔가 다릅니다.”
민석이 경계하며 말했다. 언뜻 봐도 상당한 수준의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즉, 이것들은 졸병이 아니었다.
‘성벽 쪽으로 갔던 여포와 관우, 그것들과 같은 영웅 테라코타다.’
성우는 성벽 쪽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영웅의 모습을 한 테라코타가 선봉에 섰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저건······ 항우 같습니다.”
민석이 가장 덩치가 큰 테라코타를 가리켰다. 두꺼운 갑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오른손에 큰 칼을, 왼손에 긴 창을 쥐고 있었다.
꽈득!
큰 손아귀가 창대를 움켜쥐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이 풀풀 풍겼다.
“항우라면, 초한지에서 가장 강한 영웅 아닙니까?”
성우는 삼국지는 읽었어도 초한지를 읽은 적은 없었기에 항우라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만, 민석은 초한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는 듯했다.
“맞습니다. 중국 전설 속 영웅 중에서 굳이 가장 강한 자를 뽑자면, 역시 패왕 항우죠.”
역발산기개세(方拔山氣蓋世), 만인지적(萬人之敵), 패왕(霸王)이라고 불리는 영웅으로, 여포 이상의 최강자로 받아들여졌다.
‘역시, 황제를 지키고 있을 만한 놈이다.’
성우는 쯔쉬안의 기억을 통하여 이곳, 황제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긴 채, 기습을 위하여 단 셋의 권속만을 데리고 침투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철저한 방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정도 병력이야 예상한 수준입니다. 그럼, 저놈들을 붙잡아주세요. 될 수 있으면 처리해주시고요. 저는 황제를 치러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성우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자 항우가 한걸음 나왔다.
“미안하지만, 네 상대는 나다.”
민석이 그렇게 말하며 대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항우가 검과 창을 번갈아 휘둘렀다.
공기가 퍽, 하고 터졌다.
콰—아—앙!
바닥과 천장이 갈려 나가며, 일행을 덮쳤다. 그 충격에 모두가 뒤로 튕겨 나갔다.
“······큭, 걱정하지 마시고 가세요!”
민석이 소리쳤다. 성우는 그 공격에 당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림자 이동’을 사용한 것이었다.
“부탁합니다!”
성우는 테라코타의 등 뒤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왼손에 든 겨울 포식자를 사방으로 쏘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그림리퍼를 머리 위로 휘둘렀다.
그렇게 주변에 있는 3마리의 테라코타를 박살 내고, 몸을 돌려 후방에 있는 테라코타를 마주 보았다.
‘저 상자다.’
놈은 작은 궤를 하나 들고 있었다.
쩡! 쩡!
성우는 겨울 포식자를 쏘아 놈의 발을 얼린 뒤, 놈의 손을 단숨에 도려냈다. 작은 궤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성우는 바닥을 박차는 동시에 겨울 포식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왼손을 뻗어 상자의 뚜껑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성우의 몸이 사라졌다.
이미 알려져 있듯, 황제는 전장에 없었다. 그는 특별한 안전 구역에서 모든 걸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네크로맨서가 도착했다.
* * *
- ‘시황제의 고묘(古廟)’에 입장 하셨습니다.
* ‘침입자’로 분류되어 강제 퇴장되지 않습니다.
후우우우—
기분 나쁜 공기였다.
‘역시, 내 힘이 다 빠져나갔다.’
어둠과 연기로 이루어진 긴 회랑이 나타났다. 좌우로 거대한 석상 줄지어지며 기이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쿠국— 쿠국—
석상들의 머리가 거칠게 돌아가며 노골적으로 성우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실수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들려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나의 권역에 직접 뛰어들다니, 이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을 텐데? 그래, 무슨 술수를 부리려고 하겠지······ 하지만 분명 실수다.」
성우는 오른손으로 그림 리퍼를 움켜 쥐고 왼손으로 겨울 포식자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 이 공간은 ‘특정 신격’에 의해 지배 받는 ‘신의 권역(權域)’입니다. 이곳에서는 다른 신격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치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처럼 이 공간 안에서는 성우의 신격이 발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공간에 영향을 주는 소환 스킬도 사용할 수 없었다.
「죽음을 무기로 다루는 자가 죽음을 향해 제 발로 들어오다니, 넌 한심한 최후를 자처했다.」
성우는 그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우우웅—
성우의 등 뒤, 허공에 드론 한 대가 떠 있었다. 공식 채널의 드론 역시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보는 눈 많다고 이딴 허례허식으로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지 말고 직접 나타나시지?”
성우의 말에 대답이 없었다.
쿠국— 쿠국—
그 대신, 좌우로 늘어서 있던 거대한 석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언월도와 도끼를 든 거구들이 제자리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왔다.
총 12기, 그것들은 2열로 서며 성우의 앞길을 막아섰다. 놈들의 몸 사이사이로 향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일렁거리자, 그 거대한 풍채에 묘한 양감(量感)이 더해졌다.
「이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네 주력, 아무것도 소환할 수 없을 텐데? 반면 나는······.」
절그럭! 절그럭!
저 멀리, 안쪽에서부터 소란이 들려 왔다. 발소리였다. 수많은 발소리······ 대군이 운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우뚝 선 석상을 쭉 살폈다.
“돌이라······ 뭐, 골드 가드보단 낫지.“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도 비슷한 놈과 맨몸으로 맞선 적 있었다.
숫자는 이쪽이 훨씬 많았지만, 위압감은 ’골드 가드’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그때 얻은 게 경험만은 아니다.’
성우는 숨을 고르며 눈앞에 메시지 한줄을 띄웠다.
[스킬 정보]
- 이름 : 드래곤 로드-레드
- 등급 : 특수
- 분류 : 액티브
- 조건 : ‘레드 드래곤’ 아이템을 3개 이상 보유
* 세트 구성 아이템에 따라 사용 가능한 스킬이 달라집니다.
1) 브레스 필드 : ‘레드 드래곤 스피어’를 통하여 발동한다. 창이 박힌 곳 일대(100m)를 용암 지대로 바꾼다.
2) 보일링 아머 : ‘레드 드래곤 아머’를 통하여 발동한다. 사용자의 주변을 강력한 화염 회오리로 감싼다.
3) 용아병 소환 : ‘레드 드래곤 팔찌’를 통하여 발동한다. 10마리의 용아병을 소환하여 조종할 수 있다.
골드 가드와의 전투 도중 얻게 된 월드 이터의 유산, 레드 드래곤의 아이템을 통하여 얻게 된 ‘세트 효과’였다.
‘드디어 사용할 때가 왔다.’
성우는 새로 얻은 무기를 마구잡이로 사용하지 않았다. 상대가 모르는 방법으로 허리를 찌르는 것, 즉 ‘히든카드’의 존재는 언제나 주요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바로 히든카드가 필요할 때다.’
마침내 황제의 목전에 도달했다. 놈이 모르는 방법으로 한 방 먹여줄 때가 온 것이다.
성우는 3가지 스킬 중에서 하나를 사용했다.
“용아병 소환.”
그 순간, 성우의 손목, 레드 드래곤 팔찌가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힘줄로 꿰어진 이빨들이 저절로 풀리더니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총 10개, 드래곤의 이빨은 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더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그것들은 파충류의 두개골 같은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모양이 완전히 잡히는 순간······.
화—륵!
두개골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몸뚱이로 변했다. 이족 보행에 긴 팔과 긴 꼬리를 가진 모습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소환할 수 있어.”
용아병 소환은 ‘공간’을 열어 끄집어 내는 게 아니었다. 팔찌로 꿰어진 이빨이 모습을 변화하는 것이었으므로 황제의 권역에서도 소환할 수 있었다.
크르르······.
그것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을린 턱뼈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졌다. 다음 순간······.
카아아아!
거친 포효와 함께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녀석들이 밟는 곳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도움닫기를 한 뒤, 석상을 향해 몸을 던졌다.
퍼—어—어—
폭발적인 도약이었다. 말 그대로 폭발이었다. 화염으로 만들어진 몸뚱이가 뒤로 치솟으며, 마치 불똥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콰一 직!
용아병들은 그대로 선두의 석상을 관통했다. 거대한 몸뚱이가 그대로 무너졌다.
크아아아!
그리고 그 뒤, 석상에 들러붙은 용아병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화염으로 만들어진 팔, 다리, 꼬리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석상을 잡아 뜯어 댔다.
콰직! 콰직! 콰직!
그러자 그 바위로 만들어진 몸이 마치 스펀지를 쥐어뜯듯, 뭉텅뭉텅 떨어져 나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역시 드래곤의 힘이야.’
드래곤에 이빨에 불과하지만, 특별한 마법으로 제작된 만큼 웬만한 스켈레톤을 상회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내 12기의 석상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쿵— 쿵— 쿠— 웅—
그렇게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것들 사라지자······ 마침내 황제가 앉아 있는 단상이 드러났다.
검은 계단, 회색 연기, 붉은 천막, 그리고 그 뒤에 드리운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후우우우—
석상이 쓰러지는 충격에 바람이 일었다. 그에 의해 황제의 모습을 가리고 붉은색 얇은 천이 거꾸로 뒤집혔다.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회색 수염이 난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성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역시 잡스러운 술수가 있었군?”
처음으로 듣는 육성이었다.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어딘가 떨리고 있기도 했다. 노쇠함 때문일까?
성우는 놈을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골방에 처박힌 채 세상만사에 대해서 통찰력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노인네한테 이제부터 내가 재밌는 구경 좀 시켜드리려고 하니까······.”
성우에게는 ‘히든카드’가 여러 개 있었다. 용아병 소환 외에도 2개의 ‘세트 효과’ 스킬, 그리고 혜연을 통하여 받아온 어떤 물건까지······.
“······중간에 쓰러지지 않게 뒷골이나 잘 잡고 있어.”
이제부터 그것들을 한 장씩 꺼내 놓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