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62)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 - 3
허스트는 낡은 상자 앞에 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성우를 바라보았다.
“이게 뭔가?”
“열어보시죠.”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턱을 긁적거렸다.
“혹시 멀리서 날아온 이 늙은이한테 쓸데없는 장난을 치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문화가 다르더라도 용서하기 힘들 거야.”
성우가 헤파이스토스라는 이름을 내뱉었을 때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 무거운 이름에 이끌려 마주한 게, 고작 이런 볼품없는 상자라는 점에서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듯했다.
“마스터 허스트, 기술이라는 건 외양이 아니라 포장지 안에 내재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성우의 말을 이해했는지, 그는 한층 너그러워진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상자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 이건?”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이 현실 세계에 겹치어 나타난 것이다.
“Y를 선택하시면 그 공간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우의 말을 들은 허스트가 허공에 손가락을 뻗었고, 이내 그의 몸이 사라졌다.
아공간 안으로 진입한 것이다. 성우도 그를 따라서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우—
성우가 복도에 도착했을 때, 허스트는 이미 복도 끝자락 거대한 화로 앞, 모루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오, 말도 안 돼······.”
그는 감탄을 마지않으며, 허공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이것저것 눌러보고 있었다.
“맙소사, 이게 이렇게 쉽게 된다고?”
성우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메시지가 출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성우는 허스트 옆에 서서 모루 위에 손을 얹었다.
- ‘헤파이스토스의 모루’를 이용할 경우 ‘성공 확률’과 ‘추가 효과 부여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또한, 기본 내구성이 300% 상승합니다.
그러나 성우에게는 이런 아주 짧은 메시지가 전부였다.
“저랑 다른 게 보이시군요?”
허스트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지만, 정작 성우에게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아, 그런가? 아, 그럴 수밖에, 그, 나는 그 어떤 모루에 접촉하더라도 다른 플레이어와 전혀 다른 걸 볼수 있지. 그게 내 직업의 특성 중 하나야.”
대장장이 직업군은 일반적인 대장간의 모루에서도 남다른 옵션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허스트의 경우에는 무려 5성의 대장장인 만큼 훨씬 다양한 기능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마치 구닥다리 8비트 컴퓨터를 쓰다가 윈도우95가 나왔을 때 충격, 그 이상의 기분이야.”
그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전설 등급에 준하는 장비를 제작할 수 있는 설명서가 따로 있고 온갖 특수 효과 부여에······ 맙소사, 그동안 사냥으로 구해야만 했던 각종 제작 매개체까지 만들 수 있다니? 이것만으로도 생산력이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증가할 거야.”
허스트는 연신 감탄하며, 두 손 바삐 성우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조작해댔다.
마치 외계 문명의 초고도 기술을 마주한 과학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모든 기능을 한 차례 살펴봤는지, 마침내 성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자네가 말했듯, 이 말은 안 하고는 못 배기겠군. 솔직히······.”
그가 손을 내밀었다.
“······고맙네.”
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잡았다.
“그래, 인정해. 비행선 몇 척을 가져 다주더라도 아깝지 않은 보상이야. 그리고 세계수에 의한 생산력 증대 효과도 막대하고 정말 여기에서 연구한다면······ 내 신격을 완성할지도 몰라.”
“신격이라면, 어떤 거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모르겠어. 대장장이의 신 중 하나가 나오겠지만, 당장은 알 수가 없어 많은 조건 중에서 뭘 완성하는지에 따라다를 테니······.”
그는 품속에서 시가를 꺼냈다. 그런데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다시 집어넣었다.
시가에 불을 붙이는 것조차 마다할 만큼, 그에게는 이 공간이 특별한 곳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음, 그리고 부탁 하나 하고 싶은데······ 우리 공방의 직원 몇 명을 데리고와서 같이 연구해도 되겠나? 물론 우리가 제작하는 아이템은 전부 자네에게 양도하겠네.”
스카우트 제의를 하지 않았음에도, 최고의 대장장이들이 알아서 오겠다고 하는 걸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성우는 곧장 손을 뻗었고 허스트가 급히 맞잡았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당연히 모셔야죠.”
“역시 중요한 건 절대로 놓치지 않는군?”
좋은 시설이 있으면 좋은 인재가 모이기 마련이었다.
* * *
아놀드 허스트가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에서 나름의 연구를 시작한 사이, 성우는 세계수 근처로 나왔다. 그리고 품속에서 ’세계수의 정기’를 꺼냈다.
‘이게 분명 세계수에 큰 영향을 미칠거다.’
일찌감치 진행하려고 했던 건데,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이 발견되며 늦어졌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세계수의 정기
- 등급 : 신화
- 분류 : 알수 없음
- 효과 : 알 수 없음
- 설명 : 경이로운 힘이 담겨 있다.
성우는 그걸 쥐고 세계수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세계수의 현재 정보가 떠올랐다.
- 세계수(성숙 2단계)가 성장 중입니다. (11%)
그동안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성숙 1단계’에서 ‘성숙 2단계’로 성장한 상태였다.
그 덕분에 세계수와 링크된 성우 역시 소량의 능력치 상승을 얻을 수 있었지만, 고작 민첩성 1 상승에 불과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성숙 단계를 넘어, 다음 단계에 도달한다면 분명 엄청난 효과가 발생할 거다.’
세계수는 언제나 경이로운 혜택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오늘날 세계수 진영이 이렇게 풍요로울 수 있는 것 역시 그 혜택 덕분이었다.
외부에서 많은 물자를 얻어 온 것도 중요했지만, 그걸 최고의 효율로 활용 할 수 있는 건 전부 생활·제조 분야의 플레이어들 덕분이었으며, 그들에게 날개를 달게 해준 게 바로 세계수였다.
’그래, 처음에는 단순히 개인의 무력이었지만 장기적으로 결국은 기술이 중요하다.’
노획한 비행선을 고치고, 각종 공성 병기를 개발하고, 성벽을 쌓아 올릴 기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승리도 없었다.
대부분의 RPG 게임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더 많은 사냥을 통하여 레벨을 올린 플레이어가 앞서겠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게임 전반에 영향을 미칠 만한 ‘인프라’를 갖춘 거대한 길드가 패권을 쥐게 된다.
‘오늘 그 인프라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
성우가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자 한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세계수(성숙 2단계)에 ‘양분’이 될 수 있는 아이템을 소지 중입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Y/N)
당연히 ‘Y’였다.
우우우우—
성우의 왼손에 들려 있던 ‘세계수의 정기’가 순간 괴이한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엄청난 크기로 팽창하며 여러 갈래로 나뉘더니, 세계수의 줄기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직후,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비틀렸다. 성우는 뿌리 한 줄기를 움켜쥐고 균형을 잡았다.
“윽, 이 정도면 주변 건물이 다 무너지는 거 아니야?”
이내 세계수가 새하얀 빛에 휩싸이며 비현실적인 속도로 생장하기 시작했다. 단숨에 몇십 미터를 치솟아 올랐으며, 하늘 가득 뻗어 있던 가지들은 몇 킬로미터는 번져나간 것 같았다.
그런 폭발적인 성장에 주변 건물들이 파도 위의 선박처럼 들썩거렸다. 뿌리가 땅속을 미꾸라지처럼 헤집어 놓았기 때문인데, 무너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으로 보였다.
‘미술관 건물도 더는 못 쓰겠군.’
세계수 진영이 시발점이자 오랫동안 본청으로 사용된 시립미술관 건물도 피해를 면하지 못했다. 이미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 세계수가 ‘성숙(3단계)’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 피해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성과가 분명했다.
이내 몇 배는 확장된 세계수에서 빛이 빠져나오며 다시금 그 윤곽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후우우우—
이제는 웬만한 빌딩보다 두꺼웠으며 그 어떤 마천루보다 높게 솟아올랐다. 우듬지는 구름 안으로 사라져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가지는 성벽을 넘어, 더 넓은 지역까지 장대한 그늘을 드리웠으며 그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맴돌았다.
- 세계수와 ‘링크’되어 능력치가 일정량 상승합니다.
* 체력수치 상승(+1)
- 세계수(성숙 3단계)가 성장 중입니다. (55%)
이렇듯, 세계수의 수준이 한 단계 성장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무려 55퍼센트까지 단숨에 점프했다.
‘아마 다음이 완성 단계다.’
이제 곧 완성 단계에 도달한다. 그리고 ‘용인족(龍人族)’이 되기 위한 ‘진화의 단서’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 * *
중국 서버와의 마지막 결전을 위하여, 세계수 진영의 동맹군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동맹군 합류를 위한 ‘임시 통제 센터’를 운영할 예정입니다. 그를 위해 30명의 추가 행정 인원을 배치했습니다.”
경수와 총무팀은 이럴 때를 대비하여 통제 계획을 수립해둔 상태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합류 전에 미리 연락을 취하도록 사전 공표를 해둔 상태여서 전과 같은 혼란은 없을 겁니다.”
합류 대열의 첫 번째 주자는 역시나 ‘광복 길드’였다. 무려 8대의 헬리콥터가 세계수 진영의 비행장에 착륙한 뒤, 신원 확인과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광복 길드는 서울에 기반을 두고 꽤 긴 시간 동안 큰 피해 없이 발전하고 있었기에, 그동안 아주 이상적인 확장세를 이어나갔다.
“성우 씨, 현 시간까지 도착한 동맹군 명단입니다. 이런 양식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경수가 광복 길드의 참전 명단을 정리하여 성우에게 전해주었다. 사실 이 보고도 형식일 뿐, 모든 과정은 경수가 최종 책임자로 통제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크루세이더 팀도 상당하네요. 제주도 마굴의 문 전투 때 많이 전사했는데, 임시 인원을 많이 뽑아둔 모양입니다.”
경수의 말처럼 크루세이더 팀은 어느 새 350명에 달했으며, 드넓은 비행장 한편에 정렬해 있는 그들의 위용은 실로 엄청났다.
절그럭一 절그럭一
하나 같이 육중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장착했고 거대한 방패는 물론이거니와, 온갖 중장비를 들고 있었다.
이제는 중세의 기사가 아니라 SF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미래의 중장갑 보병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표정은 그런 압도적인 외양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우와······.”
“와, 저것 좀 봐!”
대부분 입을 쩍 벌린 채, 놀이동산에 놀러 온 아이와 같은 감탄사를 이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저 많은 비행선은 다 어디에서 오는 거지? 우리는 아직 한 대도 없는데······ 대형 수송기도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세계수는 언제 저렇게 커진 거야? 무슨 세상을 다 덮을 것 같아. 진짜 비현실적이라서, 솔직히 약간 무서워.”
그럴 만도 한 게, 아무리 고공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광복 길드라고 하지만 세계수 진영의 본진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우리는 병력을 차곡차곡 늘려나가는데, 여기는 무슨 치트키를 쓰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강해지는 느낌이네.”
“그러게 진짜로······.”
엄청난 수의 비행선이 격납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며 적지 않은 숫자가 항시 비행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하물며 세계수 진영의 전역이 하늘까지 솟아오른 세계수의 그늘에 덮여 있었다. 외부에서 온 플레이어들에게는 이 공간 자체가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이며, 경이를 느끼는 게 당연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민흠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성우에게 다가오면서도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성우 씨, 그동안 또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이미 오래전에 세계수 진영이 한국 서버 최대의 조직이라는 걸 인정했지만, 그런데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진짜 비법이 뭡니까? 이제는 어이가 없어서 원······.”
비법이라? 비법이란 게 있을까?
“글쎄요. 하도 시비 거는 적이 많아서 하나하나 상대하다 보니 얻는 것도 많아 지네요.”
성우의 답변에 민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정녕 비법이라면 따라 하고 싶지는 않네요.”
지금까지 그 시비 걸어온 적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옆에서 지켜봤으니 말이다.
그 이후에도 한국 서버 곳곳의 대규모 조직들이 훌륭한 병력을 파견해왔다.
한일전의 피해를 완전히 복구한 화랑 길드, 한때 적대했지만, 이제는 세계수 진영에 충성을 맹세한 파주·의정부 연합군, 소수지만 엘리트 플레이어로 구성된 헌터 컴퍼니 등등······.
하지만 반응은 하나 같이 똑같았다.
“와, 미친, 이게 뭐야?”
“······우리가 이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긴 될까?”
나름 한 지역의 패권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세계수 진영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건, 언제나 회의감이 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병력은 결코 사양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하물며 이토록 다양한 세력이 하나의 뜻으로 모였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었다.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재앙에 대응하기 위한, 단 하나의 구심점이 탄생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 * *
인호의 진행과 함께 지휘관 회의가 시작되었다.
“우선 세계수 진영을 대표하여, 이 큰 전쟁에 힘을 보태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게임이 시작된 이후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 서버 각지는 물론이거니와 미국 서버, 대만 서버, 캐나다 서버, 중국 2 서버 등 다양한 출신의 플레이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는 성우가 방송으로 말한 ‘통제 기구’의 기본 틀이 될 이들이었다.
“자, 종목과 전쟁 선택까지 6시간 남았습니다. 그 전에 작전 회의를 통하여 어떤 환경과 어떤 규칙이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될지 결정할 계획입니다. 그에 앞서 중국 서버의 예상 전력에 대한 브리핑 및 정보 공유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 브리핑은 유일하게 ‘황제’와 맞선 경험이 있는 리웨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첫 번째 발언은 의기 소침한 고백이었다.
“······사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놈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리웨이는 꽤 오랫동안 중국 서버를 두고 황제와 경쟁했지만, 사실은 놈들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급급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놈 휘하의 장군들 역시 하나같이 대단한 실력자들인 데다가, 놈이 부리는 ‘테라코타’가 워낙 많아서······.”
그리고 대부분의 5성 직업이 그러하듯, 황제 역시 대규모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 구체적인 직업명은 알 수 없지만, 일전에 크루세이더 팀으로 변장하고 침투한 적 있는 토기 인형 ‘테라코타’를 다루는 것으로 볼 때, 5성의 ‘인형술사’로 추측되었다.
“······그건 솔직히 네크로맨서의 군단과 비슷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부활은 불가능하지만, 그 역겨운 장난감들을 제한 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도 계속 생산되어 베이징 지하에 쌓이고 있을 겁니다.”
마치 진시황릉의 병마용처럼, 엄청난 숫자의 토기 인형이 지금 이 순간에도 쌓여가는 중이라는 건,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렇다면 공격을 지체해서 좋을 건 없겠군요. 놈의 병력을 쌓는 시간을 주는 셈이니까요.”
리웨이의 설명이 끝난 이후에 각 세력이 나름의 방법으로 확보한 정보를 공유했다.
언제나 그렇듯 광복 길드의 광역 감시팀과 헌터 컴퍼니의 정보팀이 가장 많은 정보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정보를 바탕으로 설전이 이어졌다.
“우리가 한 차례 크게 이기고 공격하는 상황이지만, 베이징을 전장으로 선택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놈들은 바로 그곳, 베이징에 공을 들이고 있을 테니까요.”
“음, 그냥 복잡한 걸 뒤로하고 전면전을 선택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다수의 비행선을 바탕으로 하는 화력과 죽지 않는 언데드 군단의 방어력이면, 어렵지 않게 격퇴할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도 결코 쉽게 뚫리지 않는 방어 라인을 구축했을 겁니다. 시간은 적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겁니다.”
성우는 말없이 사방에서 쏟아져나오는 의견을 들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다른 변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건 바로 그 황제라는 플레이어다.’
황제의 전력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단 한 가지, 그가 부리는 게 생명체가 아니라 인형이라는 점만 알 수 있었다.
‘인형술사라······ 인형술사는 나에게 최악의 상성일 수도 있다.’
망자를 일으키고 시체 폭발을 주력으로 삼는 성우에게는, 되살릴 수도 없고 터뜨릴 수도 없는 인형 군단은 그다지 이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굴을 공략하면서 놈들의 중요 전력을 거세시켰다. 동시에 나는 몇 배나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걸 다 떠나서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보험도 한 가지 있었다.
‘물론 최적의 전략을 찾아 싸워야겠지만, 만약 내 모든 예상이 빗나가서 최악의 상황을 겪는다면······.’
성우는 미리 준비해둔 물건을 품속에서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아이템 정보가 떠올랐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부활 주문서(위치지정)
- 등급 : 특수
- 분류 : 소비
- 효과 : 사망 시 지정된 위치로 부활합니다.
‘그래도 다음 기회는 있다.’
아주 오래전, 김포국제공항의 비밀 상점에서 구매했던 아이템이었다. 지금까지 패한 적 없기에 사용할 일이 없었다.
다만 이걸 사용할 순간이 올 경우······ 성우를 믿고 모인 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해낼 수 있다고는 장담 못 했다. 그렇기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길 생각이었다.
“······아니,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음, 오히려 쉬운 게 답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작전 회의는 쉽사리 해답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공성은 수성에 비교하여 따져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뜨거운 회의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
“이게 뭐······.“
모두가 눈앞에 떠오른 무언가를 바라보며 침묵하고 말았다. 성우 역시 그 메시지를 바라보며 구겨지는 얼굴을 통제할 수 없었다.
[월드 메시지]
- 축하합니다! 월드의 플레이어 중에서 ‘지옥 차원’의 지배자 ‘마왕’이 탄생했습니다!
* ‘마왕의 성채’가 ‘월드’ 내에 지정되었습니다. (장소 : 브라질 서버 아마존강 유역)
“······뭐죠? 마왕이라니?”
“브라질 서버는 멸망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서 마왕에 대해서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마왕이 된 플레이어가 그 누구도 아닌······ 한국 서버 랭킹 1위 ‘한강석’이라는 걸 아는 이는 성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난데없는 변수의 등장에 성우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한강석, 그 남자가 꾸준히 자신만의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때, 조나단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그 누구보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동맹 여러분, 감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왕이 뭔진 모르겠지만, 문제는 그게 하필이면 아마존에 나왔다는 겁니다. 그곳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성우를 돌아보았다. 성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대신 이어갔다.
“······드래곤이 있는곳이죠.”
언제나 거슬렸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무슨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