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네크로맨서-179화 (179/244)

# 179

60) 악마의 세계수, 월드 이터 - 1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은 건 드래곤의 뼈였다.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적어도 150미터는 되어 보입니다.”

어찌나 거대한지 탐사대가 챙겨온 작은 랜턴으로는 전체를 비출 수도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드래곤일 줄 이야? 보스 몬스터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 뼈의 정체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건 역시나 ‘용기사’의 권속일 가능성이었다.

무엇보다 미르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녀석은 무슨 이유에선지 드래곤의 뼈를 발견하고는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끙! 끙!

마치 그리운 혈족을 만난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는데, 이 뼈가 드래곤임을, 그것도 자신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는 드래곤임을 느낀 게 분명했다.

“선배, 이건······성체 드래곤 맞죠?”

“맞아.”

“그런데 죽었네요? 그러니까 무언가가 이 녀석을 죽였네요?”

그게 중요했다. 이 드래곤은 사냥당했다.

“그······ 우리도 언젠가 드래곤이랑 싸워야 하잖아요?”

한호의 말처럼, 중국 황제와 전쟁이 끝나면 그 다음은 드래곤을 막아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방법으로 드래곤을 죽일 수 있는 건지, 정보를 얻을 기회였다.

“경수 씨, 이곳 전체를 수색해야겠습니다. 위험 요소가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이참에 버려진 아이템도 싹 수거하겠습니다.”

탐사대는 드래곤 주변을 시작해서 공동 전체를 훑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지나지 않아 첫 번째 힌트가 나왔다.

“날개 뼈 근처에 떨어져 있는 물건입니다.”

경수가 가져온 건, 거대한 선박을 선착장에 묶을 때 쓸만한 아주 두꺼운 밧줄이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영험한 올가미

- 등급 : 불명

- 분류 : 플레이어 제조

- 효과 : 알 수 없음

- 설명 : 특별한 힘이 담긴 재료로 만들어졌으나 힘의 근원이 사라져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이다.

‘이건 세계수의 줄기를 이용해서 만든 아이템이다.’

성우는 대번에 알아봤다. 성우가 일전에 세계수의 줄기를 바탕으로 뼈 무기 제조를 활용, 거대한 갈고리를 만들었던 것처럼, 이 아이템 역시도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이걸로 날개를 묶은 거야.’

역시 드래곤을 사냥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놈의 날개를 묶어 땅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전투 장소가 다소 협소한 동공 안이었던 만큼, 드래곤을 끌어내는 게 비교적 쉬웠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탁 트인 곳에서는 쓰기 어렵다.’

즉, 이 드래곤은 이곳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을 것이며, 절벽을 수놓은 발톱 자국은 추락 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흔적이 분명했다.

그때, 백색 늑대가 다가와 드래곤의 뼈에 손을 얹었다. 기억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이런 거물에게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을 것이었다. 성우는 그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음.”

이내 그가 눈을 떴다.

“이 괴물, 필사적이었다. 날개가 묶인 채 추락한 이후에 이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어.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면서도 마치 무언가를 지키려고 했던 것 같아.”

“······지켜?”

지키려고 했다면 드래곤은 방어측 진영이었던 모양이었다.

“여기! 또 뭔가 있습니다!”

이어서 또 다른 힌트가 발견되었다. 드래곤의 흉부 바로 아래였다. 성우는 거대한 뼈 아래로 들어갔다.

“여기 바닥에 검 한 자루가 박혀 있습니다.”

대원의 말대로 드래곤의 가슴뼈 바로 아래, 바닥에 검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언뜻 봐도 상당히 고풍스러운 물건이 었다. 특히, 금빛이 감도는 자루와 가드가 눈에 띄었다. 성우는 그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아스칼론

- 등급 : 신화

- 분류 : 대검

- 효과 : 모든 능력치 상승(+5), 마법 면역력 상승(+10%) ‘드래곤 슬레이어’ 효과가 부여되어 드래곤 계열 공격시 추가 데미지가 적용됩니다. (+300%)

- 설명 : 본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던 검이지만, 드래곤의 심장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함으로써, 천적의 이름을 얻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대충 그림이 나왔다. 이 검이 드래곤의 심장을 찔러 최후를 선사한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드래곤의 가슴팍에 꽂혀 있었는데, 비늘과 사라지면서 떨어져 땅에 박힌 모양이었다.

‘예상 못한 비수를 얻었다.’

날개를 묶고 심장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드래곤을 쓰러뜨린 모양이었다.

물론 드래곤의 심장에 이 칼을 꽂아 넣는 게 문제였다. 드래곤 정도 되는 영물이 순순히 가슴을 열어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움직이지 않고 버틴 대가가 바로 그거야. 무력하게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거야.”

백색 늑대의 말처럼, 드래곤이 스스로 한 곳에 웅크리고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성우 씨! 이쪽에 거대한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드래곤이 지키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 드러났다. 드래곤의 뼈 뒤쪽 벽에 엄청난 크기의 철문이 발견되었다. 그건 마치 핵 방공호 같은 모양새였다.

“드래곤은 저기를 틀어막으려고 한 건가?”

“내가 본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무래도 그런것 같군.”

경수가 문을 확인하더니 성우에게 소리 쳤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강제로 여는 건 어려울 것 같고, 아무래도 성우 씨가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성우는 드래곤의 뼈 앞에 섰다. 그리고 그것의 앞발에 손을 얹었다.

“······일어나라.”

다른 무엇도 아닌 드래곤의 뼈다. 최고의 권속을 얻을 기회였지만······.

- 해당 망자를 권속(卷屬)으로 일으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자격 증명)이 필요합니다.

역시 쉽지 않은 일인 듯했다. 그런데 그 메시지 안에서 익숙한 단어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격 증명?”

드래곤과 관련된 자격 증명이라면, 성우는 이미 한 차례 해낸 바 있었다.

‘주인 잃은 검’을 5000일이나 소지함으로써 ‘지배자의 검’으로 변화시키고 미르를 부화시키는 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성우는 즉시 민석을 소환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지배자의 검’을 전해 받았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지배자의 검

- 등급 : 신화

- 분류 : 양손 검

- 효과 : 근력(+10), 공격 대상의 방어 효과를 일부 무시한다. (20%)

- 설명 : 이 검은 드래곤을 깨울 수 있는 열쇠이자 드래곤을 다룰 수 있는 목줄의 상징입니다.

당신이 이 검의 주인이며, 당신의 행적을 통하여 이 검에 ‘새로운 이름’이 부여될 것입니다.

그 검을 한 손에 쥔 채 다시 한번 시도했지만······.

- 해당 아이템 이미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우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아, 그런 건가?”

드래곤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거느리기 위해서라면, 5성의 용기사라고 할지라도 ’자격 증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열쇠가 바로 ‘지배자의 검’이었는데, 한 마리의 드래곤 당 하나의 검이 직접 연결되는 것이었다.

즉, 다른 검, 이 드래곤과 연결된 검이 필요했다.

“경수 씨, 혹시 아이템 중에서 주인 잃은 검이라는 게 발견됐습니까?”

이곳 어딘가에서 용기사가 전사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 잠시만요.”

경수는 탐사대 전원에게 물었지만, 그런 걸 봤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획득한 아이템 중에서 그런 무기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탐사대는 다시금 동공 내부를 수색했다. 뼈와 돌무더기 아래, 깊게 파인 구덩이, 벽에서 돋아난 뿌리 등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러나 ‘지배자의 검’은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성우는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의 뼈가 몸으로 막고 있는 곳, 거대한 문 뒤에 무언가 있다.

‘그래, 드래곤이 지키려고 했던 건 용기사다. 그는 여기서 죽지 않았다. 어디론가 간 거다. 그리고 아마도 저 안이다.’

성우는 철문을 향해 다가갔다. 금속 재질이었는데, 청동으로 만든 것처럼 청록색의 빛을 발했다.

“이걸 어떻게 열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대원 한 명이 접촉했을 때,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고합니다.”

성우는 철문에 손을 얹었다.

- 강력한 마법으로 봉인된 공간입니다. ‘특별한 자격’을 지닌 자만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경수의 말처럼 입장 제한이 걸린 곳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 입장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수호자의 전당’이 열립니다.

성우는 그 메시지를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입장 조건? 수호자? 입장 조건이 수호자 칭호를 가진 자인 건가?

그런데 ‘악마의 세계수’ 안에 ‘수호자의 전당’이라니? 도무지 매칭되지 않는 이름이었다.

구구구구—

철문은 웅장한 소음과 함께 천천히 열렸다.

“전투대비!”

경수의 외침과 함께 탐사대 전원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일부는 드래곤의 뼈 뒤에 엄폐했다.

겉으로 봤을 땐 성우가 문을 연 게 아니라 저절로 열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혹시 모를 적의 출연에 대비한 것이다.

궁—

이내 철문 완전히 열렸다.

후우우우—

녹색 불빛을 머금은 실내가 드러나고 오랫동안 갇혀 있던 공기가 새어 나왔다. 옅은 화학 약품 냄새가 담겨 있었다.

성우는 문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 히든 스테이지 ‘수호자의 전당’에 입장하셨습니다.

역시나 수호자와 관련된 메시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경계 상태 유지하고 진입합니다.”

탐사대는 성우의 뒤를 따라서 들어왔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변을 경계하는 걸 잊지 않았다.

“공간이 복잡해서 어디서 뭐가 튀어 나올지 모릅니다. 사주 경계 늦추지 마세요.”

내부는 지나쳐온 동공만큼이나 넓은 공간이었다만, 텅 비어 있던 동공과 달리 아주 복잡한 시설이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녹색 불빛이 빛나고 있어 희미하게나마 시야가 확보되었다.

좌우로 다층의 화랑 구조가 이어졌는데, 마치 거인의 도서관에 들어온 것처럼 화랑 안으로 직사각형의 물체가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멀리서 볼 땐 두꺼운 책을 꽂아 놓은 것만 같았다.

“······저건?”

“실험용 수조 같습니다.”

그건 책이 아니라 액체가 담긴 직사각형의 수조였다. 자세히 살피니 천장에서 튀어나온 녹색 넝쿨이 수조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하물며 그 안에 담긴 액체도 식물 뿌리에 의해서 공급되는 것으로 보였다. 전반적인 외양이 실험용 캡슐 장치 같았다. 그런데 그 캡슐 안에 들어 있는 건······.

“성우 씨, 캡슐 안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사람, 플레이어였다.

“몬스터 같은 게 아니라 하나 같이 사람입니다. 그리고 공기 방울이 배출 되는 걸 보면······ 살아 있습니다.”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개의 수면 캡슐이 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특별한 기술을 통하여 산 채로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게 무슨······말도 안돼.”

리웨이가 중얼거렸다. 성우도 동감이었다.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월드 이터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지배하는, 마물의 세계에 플레이어가 남아 있다니? 그것도 수호자만 들어올 수 있는 수호자의 전당에 보존된 인간이라면······.

‘이들이 이 세계의 수호자?’

리웨이가 성우 옆으로 다가왔다.

“네크로맨서, 지금 이 장면······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성우 역시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젓자 리웨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전에 말했지? 여기는 이미 엔딩을 맞이한 또 다른 세계일 수도 있다고? 그럼 저 사람들은······ 어떤 상태이고 어떤 목적으로 저기에 들어가 있는거지?”

폐기된 세상에서 잠들어 있는 플레이어들, 잠들었다는 건 언젠가 깨어나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불길하다.’

마치 알면 안 되는 비밀을 파헤쳐 가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질 무렵 또 한 번의 분기점이 나왔다.

“전방에 또 다른 문이 보입니다.”

이번에도 금속 재질의 문이 나타났다 . 방금 지나온 문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은 사자가 반응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그 문을 노려보았다.

“······저곳이다. 저곳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마침내 저 문 너머에 성우가 찾아온 게 있었다. 그는 경수를 돌아보았다.

“전투 준비하세요.”

탐사대는 무기와 스킬을 점검했고 성우는 민석과 듀라한을 소환한 뒤 문을 열었다.

손을 얹자 육중한 문이 저절로 열어젖혀졌다.

구구구구—

- 히든 스테이지 ‘승리자의 요람’에 입장하셨습니다.

성우는 그 메시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승리자? 이건 또 무슨 의미지?’

이해할 수 없는 퍼즐 조각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젠장, 여기, 사방이 뿌리로 뒤덮여 있습니다.”

이곳의 풍경은 기괴했다.

천장에서부터 뿌리와 넝쿨이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렸다. 그것들은 엉키고 덩어리지며 이곳저곳에 암막 커튼처럼 흐드러졌다.

하물며 바닥 위에 죽은 뿌리와 넝쿨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울퉁불퉁한 길을 형성했다. 제대로 걷기조차 쉽지 않았다.

“······이거, 주의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뿌리는 전부 악마의 세계수가 아니던가? 앞으로 어떤 악영향을 끼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령, 갑자기 움직이며 일행을 습격할 수도 있었다.

일행은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깊숙한 곳까지, 아주 천천히 전진했다.

“전방에 캡슐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대한 캡슐이 하나를 발견했다.

“······뭔가 다릅니다.”

마치 고대의 재단처럼, 돌로 만들어진 받침대 위에 녹색의 빛을 발하는 캡슐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천장에서 내려온 뿌리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다.

우우우우—

그리고 그 안에는 새하얀 피부를 가진 장발의 남자가 담겨 있었다. 그의 입에서 공기 방울이 흘러나와, 천천히 상승했다.

“이 사람은······ 누구죠?”

탐사대는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지의 세계, 숱한 의문 끝에서 한 사람을 마주했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굴까? 그 누구도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승리자라는 걸까?’

성우 역시 그런 막연한 생각을 품으며 캡슐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어렴풋하게나마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이 스산함, 언젠가 느껴봤다. 그래, 위압감이었다. 외부 차원에서 온 압도적인 존재를 마주했을 때의 그 느낌······.

그 순간, 남자가 눈을 떴다.

- 제31월드의 승리자 ‘월드 이터’가 출현했습니다.

쩡!

별안간 캡슐이 폭발하듯 깨졌다. 사방으로 액체가 튀고 찢어진 뿌리 조각이 튀었다.

후두두—

플레이어들은 자세를 낮추며 몸을 감싸 안았고 성우는 미르를 감싸 안고 뼈 방패를 생성했다.

회색 연기가 방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연무를 배경으로, 장발의 남자가 재단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네크로맨서, 여기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남자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성우는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월드 이터, 너는 누구지?”

창백한 얼굴과 퀭한 눈동자가 성우를 내려다보았다. 월드 이터, 그 거대한 눈알의 형태로 등장하던 그 기괴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월드 이터는 이곳, 엔딩을 맞이한 서버에서는 그저 평범한 인간의 모습, 그러니까······ 멸망한 월드의 플레이어였다.

그는 피곤한 듯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플레이어, 수호자, 마왕, 그리고······ 월드 이터다.”

익숙한 단어가 연달아 등장했다. 플레이어, 수호자, 마왕, 월드 이터······ 그 모든 게 일직선으로 이어진다는 건, 그동안 거쳐온 칭호를 말하는 걸까?

그런데 무엇보다 거슬리는 게 있었다.

“네가 수호자라고? 타락자가 아니라? 악마의 세계수는 타락자의 소유일 텐데?”

그의 얼굴에 조소가 피어났다.

“그래 너희 세계에서 나는 분명 악신이다. 하지만 우리 세계에서 나는······ 유일무이한 구원자다.”

“구원자?”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나는 타락자를 물리치고 악마의 세계수를 차지한 뒤, 이곳에 ’방주’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 방주를 유지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수급해오는, 이 세계 최후의 플레이어다.”

방주라면 지나쳐온 그 캡슐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는 성우가 한 걸음 다가갔다. 이건, 이 게임에 대한 본질적인 정보를 얻어낼 기회였다.

“우리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이유가 그건가? 에너지? 그건 어디에 쓰이는 거지?”

“······.”

“캡슐 안의 플레이어에게 생명력을 공급하는 건가? 응? 똑같이 이딴 게임에 연루된 상황이라면, 대화해볼 여지가 있지 않아?”

성우는 무엇이라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월드 이터는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놈은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등 뒤에서 웬 뿌리 다발이 내려왔다.

츠츠츠 —

뿌리가 조금씩 벗겨지며 검 한 자루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검, 성우에게는 아주 익숙한 모양새였다.

‘지배자의 검, 저거다. 드래곤의 소유 권을 얻을 수 있는 물건······.‘

민석이 가지고 있는 ‘지배자의 검’ 즉, 용기사의 검과 같은 생김새였다.

그렇다. 월드 이터가 바로 용기사였다.

공동의 드래곤은 이곳에 잠든 수호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타락자들에게 맞서다 죽은 것이었다. 성우는 그 진실이 불쾌했다.

“그래,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 거지?”

“······.”

역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검을 꺼냈다는 건, 대화보다 폭력을 쓰겠다는 뜻이었다. 성우는 오른손을 뻗어 그림리퍼를 소환했다.

“······궁금하긴 하지만, 사실 네가 누구인지, 뭘 원하는 건지는 상관없어.”

서로의 입장을 터놓고 이야기 해보았자 소용없다는 걸, 놈은 알고 있는 듯 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것, 그게 이 게임의 법칙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네가 가진 검과 나머지 전부를 얻고 이 게임의 끝까지 가서 직접 진실을 보면 돼.”

진실은 끝까지 살아남는 자만이 목격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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