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네크로맨서-176화 (176/244)

# 176

59) 제주도, 마굴 공략 - 7

무력감, 박탈감······ 어린 지수를 지배했던 감정이었다.

손가락질받는 태생, 눈치 보고 사는 일상, 그 모든 걸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운동했지만······ 그것마저도 이복형제들보다 못했다.

‘그 모든 게 억울했어.’

무력감은 억울함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 된다.

하필이면 가정이 있는 남자와 사랑하여 지수를 낳았으며, 무책임하게 죽었으며, 끝내 유약한 신체를 물려준 엄마를, 지수는 매일 밤 잠들기 전까지 원망했다.

‘도망치지 않으면, 그 벽 안에 갇혀 숨막혀 죽을 것 같았지.’

조금 머리가 커질 무렵, 결국 그 감정들과 맞서기를 포기하고 탈출해버렸다.

꽤 이른 나이인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은 속 편했던 것 같아. 아주 잠깐은······.’

하지만 그 증상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평범한곳에서 조금 나은 실력자로서, 높은 벽을 쳐다보지 않고 살았기에 잊고 지냈을 뿐······.

이 지옥 같은 게임이 시작된 첫날이었다. 학교 뒷산에서 오크라는 덩치 큰 괴물을 마주했을 때, 그놈과 맞부딪치고 엎어지고 말았을 때, 다시금 선천적인 무력감과 억울함이 피어오름을 느꼈다.

‘그때 다시 한번 벽을 느꼈는데······.’

그러나 그때는 무언가 달랐다.

‘······그 이후로 벽을 깨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깰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어렸을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걸까?

“······낭자, 두 마리인 것 같습니다. 저 괴물, 한마리 더 있습니다.”

호걸의 목소리가 지수를 현실로 불러 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라색 포탈과 그 앞에 선 끔찍한 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맞아요. 저도 느꼈어요.”

그녀의 감각이 오래전부터 공격하고 있었다. 이내 포탈에서 ’마굴의 문 수문장’이 한 마리 더 걸어 나왔다.

크르르······.

이로써 중간 보스가 무려 2마리라는 게 밝혀지자 사방에서 동요가 울려 퍼졌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끔찍한 놈이 2마리라고?”

세계수 진영의 플레이어들은 용맹했지만, 능력치가 절반이나 떨어져 나간 상태로 맞서 싸우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은 인호 역시 홀로 나아가는 지수를 바라 볼뿐이었다.

‘우리가 공세를 퍼부어 댄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가장 큰 무기인 지수 씨가 마음껏 싸울 수가 없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지수에게 부탁의 말을 전했던 게 그런 이유였다. 결국, 그녀의 고독한 싸움이 될 예정이었다.

후우우우-

바람 한 줄기가 오름의 정상을 슬며시 넘어가는 가운데, 지수는 검을 단단히 쥐고 두 마리의 괴물을 노려보았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뒤이어, 지수의 좌우로 선 호걸들이 망치를 치켜세우며 의기를 표출했다.

“후,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한바탕 놀 준비, 진작 끝냈습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예끼! 이놈들아, 이제는 네 형님한테는 인사도 안 하는 것이더냐! 어떻 게 눈인사 한 번을 안 한단 말이냐!”

거대한 뿌리 다발 위에 올라탄 대산맥의 왕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역시 멀쩡한 상태였다.

“쯧쯧,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이었구나, 살아가며 깨닫는다더니······.“

그는 지수의 권속인 ‘에인헤랴르(Einherier)’가 된 호걸들에게 그렇게 투덜 거리더니, 이내 지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낭자, 저놈들 쉽지 않은 상대가 될거요. 뭐, 이미 알고 계시겠소만······.“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만 전투 당시, 신격을 보유한 21레벨의 네크로맨서가 단 한 마리를 상대로 고전했었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이번에는 무려 두마리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요. 광범위한 마법을 쓰는 놈들이라서······.“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언니 지민을 바라보았다.

“······주변에도 피해가 속출할 거예요.“

저 사람이 저렇게 무력하게 보였던가? 새삼 이상했다.

“그럼 내가 우측, 한 놈을 맡겠소. 낭자와 거기 은혜도 모르는 두 짐승이 좌측을 맡으시오.”

“아, 형님 진짜······.“

“끙······.“

지수는 곧장 왼쪽으로 움직였다.

“알겠어요. 당장 시작하죠.”

그에 따라 호걸들도 같이 움직였다.

더 지체할 것 없이 싸움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크르르······

수문장의 표정 없는 얼굴이 지수를 향했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수는 저 괴상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 어떤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싸움만을 고민했다.

‘첫 번째 공격은 광선이다.’

이미 한번 경험한바, 놈들의 공격 패턴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수가 왼쪽으로 돌아 접근하자 좌측의 수문장이 사람의 상체가 달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불빛이 번뜩거렸다.

콰아아아—앙!

붉은 광선이 지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녀는 땅을 박차고 도약하며 광선을 피해냈다. 광선이 바닥 위로 그어지며 그 궤적을 따라 깊은 도랑이 패였다.

콰아아아—앙!

재차 공격이 허공에 떠오른 지수를 요격하기 위해서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섬광처럼 쏘아져, 어느새 수문장 근처로 다가간 상태였다.

우웅—

그리고 그녀의 위치로 두 호걸, 에인헤랴르가 함께 이동되었다. 지수와 연결된 ‘영혼’이기에 언제든지 근처로 소환할 수 있었다.

“저는 좌측으로 갑니다!”

“저는 우측으로 가겠습니다!”

그들은 등장과 동시에 좌우로 흩어졌다. 지수는 정면으로 뛰어들어갔다. 3방향에서 놈을 칠 계획이었다.

쩌저저저一

그때, 놈의 몸을 감싸 안고 있던 뿔과 돌기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 역시 한 번 봤던 공격이었다.

뿔과 돌기가 촉수가 된 것처럼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일순간 튀어 올라, 사방에서 송곳처럼 찌르고 들어왔다.

쩍! 쩍! 쩍! 쩍! 쩍!

지수는 좌우로 움직이며 아슬아슬하게 피해냈지만, 두 호걸은 그 공격에 얻어맞고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컥!”

“제, 젠장······ 뭐 이리 무식해?”

성우의 언데드 군단을 순식간에 괴멸시켰던 만큼, 상당히 파괴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다른 걸 느꼈다.

‘이거, 벨 수 있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 강력한 뿔과 돌기······ 결국 저놈의 육체다. 저놈을 벨 수 있다면 이것 역시 절단해낼 수 있다.

뿔 공격이 다시금 날아들었고, 지수는 스텝을 밟아 최대한 피해내는 동시에, 검을 휘저어 뿔을 쳐냈다.

촤一 악!

단숨에 2개의 뿔이 잘려나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크······

그러자 놈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반격에 놀란 것일까?

하긴, 공격한 건 자신인데 오히려 피해가 들어오다니, 놈도 황당할 것이었다.

‘그래, 나는 내 생각보다 강해졌다.’

그녀는 지금 이 싸움이 생각보다 쉽다는 걸 깨달았다. ‘각성’과 ‘신격’을 거듭해서 얻으며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제 자리에 멈춰섰다.

‘그렇다면?’

수문장이 지팡이를 내밀었다. 광선 공격이었다.

콰아아아—앙!

지수는 옆으로 도약하여 그 공격을 피해냈다.

“그나저나 부릴 수 있는 재주가 그 두개가 끝이야?”

지수는 자세를 고쳐 잡고, 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열 걸음 정도로 가까워졌다.

놈은 다시 한번 뿔과 돌기를 날렸다.

“정말이네.”

쩌저저저저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검에 푸른 검기가 물들었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날아드는 뿔과 돌기를 향해, 시퍼렇게 물든 검을 힘껏 휘둘렀다

콰과과과과과과!

수십 개의 푸른 칼날이 뿜어져 나가 놈의 뿔과 돌기와 맞부딪쳤다.

처음에는 힘겨루기가 일어나듯, 뿔과 맞붙은 푸른 칼날의 회전 속도가 잠깐 느려지는 듯하더니······.

촤좌좌좌좌좌좌!

이내 뿔과 돌기가 죄다 갈려 나가며,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지수의 한 방이, 놈의 모든 걸 뚫어버린 것이다.

“이제 부릴 수 있는 재주, 한 개 밖에 안 남았네?”

지수는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이 게임, 이제 꽤 쉬워진 것 같아.”

* * *

모두가 두려워한 두 괴물이 쓰러졌다. 그것도 너무나 손쉽게, 발키리의 칼 아래 잠들었다. 지켜보는 이들은 두 눈을 의심했다.

- 마굴의 문(2층) ‘웨이브 2단계’가 마무리되었습니다. 20초 뒤에 다음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지수야, 너······.“

지민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되돌아오는 지수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동생에게 품고 있던 생각이 단숨에 뒤바뀐 것이었다.

“······그 사이에 많이 달라졌구나? 내가 아는 옛날의 너와 많이 다른 것 같아. 정말로.”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다만 집을 떠나온 5년 사이가 아니라, 고작해야 게임이 시작된 이후부터 확연하게 달려진 것이었지만 말이다.

“도장에 있을 때 나는 아마도 이기는 방법을 몰랐어. 그때 나는······.“

그때는 어째서 벽을 깨지 못했을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저 살아남으려고 했던 것 같아. 방법이 잘못된 거야.”

집안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서 관심을 받기 위해서 노력했다. 개인적인 성취보다, 다른 이의 눈에 다르게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잊고 싸웠다. 그게 문제였다.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안위를 위해서 싸운다면, 그래, 잠깐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 꾸준한 성장을 위해서는 더욱 진취적인 동력이 있어야 했다.

‘이 게임도 똑같아.’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게임에 참여했다면 그저 그런 생존자가 될 수 있을 지 언정, 남다른 영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성우 씨는 처음부터 달랐어.’

네크로맨서, 그는 살기 위해서 싸우기도 했지만,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서 더 큰 힘을 추구했다. 그게 답이었다.

“이기는 방법이라? 아빠가 가르쳐주지 않았던 건가? 그건 어디서 배웠는데?”

지민의 물음에 지수는 포탈 쪽을 바라보았다.

“······늘 이기는 사람한테.”

* * *

“비행선을 지키고 있을 인원이 필요해요.”

마굴의 심장을 제거한 뒤, 긴급 탈출을 준비하기 위해서 몇 명이 남아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승무원 중 6명이 자원해 비행선에 남기로 했다.

“마물들이 곧 이 구멍으로 들어오겠지만······ 몸을 숨기고 소리를 죽인다면 마물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행운을 빌죠.”

경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생존을 쉬이 장담할 수 없는 임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꼭 살아남아서 탈출 준비 완료하겠습니다.”

하지만 세계수 진영의 플레이어들은 희생을 겁내지 않았다. 여기까지 살아 남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던 건, 네크로맨서를 중심으로 수많은 이들이 힘을 합쳐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기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들은 강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고 그건 연대 의식이었다. 강력한 연대 의식은 조직을 위한 희생을 주저하지 않게 만든다.

“지금 바로 강하 시작합니다! 모두 이쪽으로 모이세요!”

그리고 사실, 악마의 세계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생존과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들어온 모두가 그리고 밖에서 싸우고 있을 모두가 죽을 각오로 왔다. 어느 쪽이라도 실패하면 전멸이었다.

‘······그렇기에 세 곳 모두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

경수가 수직 통로로 다가가니 이미 모두가 모였다.

“한 번에 한 명밖에 내려갈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 구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악마의 나무 세계수, 그것의 혈관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스켈레톤을 먼저 보내죠.”

성우는 ‘웨어 울프 스켈레톤’ 4마리를 소환하여 내려보내 안전을 확보한 뒤, 승무원들을 차례차례 내려보냈다.

그리고 미르 녀석을 끌어안고 가장 마지막에 레펠을 탔다. 바닥까지는 5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여기, 생각보다 넓습니다.”

먼저 내려가 있던 경수가 손전등을 건넸다.

“뭐, 그래도 날개 달린 그 괴물들은 못 들어오겠지만 말이죠.”

내부는 토굴을 연상시켰다. 세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 완만한 내리막이 이어졌는데, 역한 곰팡이 냄새가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으, 이게 나무가 죽는 냄새일까요?”

경수의 말대로 이 공간 자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이게 한때는 그 무엇보다 생기를 띄웠을 세계수의 속이라니······ 죽음은 영험한 따위를 남기지 않았다.

“그럼 선발대 먼저 내려보내겠습니다.”

탐사대의 안전을 위하여 3명의 도적 계열 플레이어가 선발대로 출발했다.

그들이 이동 경로를 먼저 확인하고 위험 요소를 발견하여 경고해올 것이었다.

“······자, 그럼 우리도 출발하죠.”

선발대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성우를 포함한 본대가 출발했다.

“평범한 동굴이 아니라 나무 속이니까 이거, 어떤 지형이 나올지 예상할 수가 없겠네요. 절벽만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한동안은 완만한 길이 이어졌다. 다행이었다. 또다시 수직 통로가 나온다면 이동이 지연될 테니 말이다.

“나무 속을 탐험하다니······ 뭔가 흰 개미가 된 기분이에요.”

일행은 사방이 꽉 틀어막힌 어두운 나무 속을 걸어 내려가며 불안감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숱하게 치렀지만, 이런 미지의 공간을 탐험한 경험은 없었다.

기껏해야 수원 지하에 발생한 대규모 던전인 ‘트롤의 토굴’ 정도? 하지만 이곳은 그곳과 차원이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함을 풍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의아한 점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가령 나무 속에서 수분이 올라가는 길 같은, 엄청나게 긴 수직 통로가 등장해 길이 뚝 끊기는 지점이 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벽면이 파여 곡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때때로 나오는 급격한 오르막 구간에는 일정 간격으로 계단이 파여 있기까지 했다. 분명 누군가 길을 낸 흔적이었다.

“여기, 아무래도 인위적인 공간 같습니다. 설마 세계수 안에도 마물 같은게 사는 걸까요?”

경수가 말했다. 성우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한 가지는 다르게 생각했다.

“마물이 아닐 수도 있죠. 마물이 계단을 파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면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 걸까요?”

성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전에 리웨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곳은 엔딩을 맞이하고 폐기된 서버 같았다. 하지만 명확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아직 의구심에 불과했다.

‘분명, 앞으로 뭔가 더 나올 거다.’

그때, 앞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선발대 쪽에서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성우와 경수는 걸음을 멈추고 보고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내 앞서가던 대원 한 명이 고개를 돌렸다.

“선발대 쪽의 보고입니다. 전방에서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이겁니다.”

대원은 선발대로부터 전달받은 물건은 경수에게 내밀었다.

“······횃불?”

이걸 횃불이라고 해야 할까? 기름으로 불을 붙이는 게 아니라 긴 막대 끝에 빛을 내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게 벽면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경수는 성우를 쳐다보았다.

“설마 누군가 먼저 왔던 걸까요?”

“온 게 아니라······ 있었던 걸 수도요“

의심에 불과했던 것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시 마굴의 정체는······ 또 다른 지구인가?’

이 세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던전’ 따위가 하나의 또 다른 지구였다는 의심······ 성우는 그 횃불 아이템을 백색 늑대에게 가져갔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필요했다.

“이 물건에 담긴 기억을 볼 수 있나?

백색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횃불을 양손으로 움켜쥐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약 30초 뒤, 다시 눈을 떴다.

“너무 흐릿해서 보이지 않지만······ 이건 분명 사람의 기억이다. 아주 오래 된 물건인 것 같군.”

역시나 이곳에 플레이어,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백색 늑대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이 본 것을 선명하게 재현해 내려고 노력했다.

“······내가 본 건 불투명하고 파편적인 이미지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 전쟁과 학살이 있었던 모양이야. 누군가 여기를 공격했고, 누군가 방어했다. 그게 다야.”

악마의 세계수 내부에서 전쟁이 있었던 걸까?

‘세계수에 뚫린 구멍 역시 그 전쟁의 일환인가?’

누군가 한국 서버 전체를 집어삼킨 ‘악마의 세계수’를 공격했다. 그리고 누군가 방어했다.

‘타락자와 수호자······ 그들 간의 전 쟁일까?’

현재 성우가 있는 세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악마의 세계수를 지키는 쪽은 ‘타락자’가 분명했다.

예언석 ‘배드 엔딩-2’에 접촉했을 때도 타락자를 막지 못할 시 일어날 미래라는 메시지가 나왔었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서서 전쟁을 수행한 이들이라면, 성우와 같은 ‘수호자’일 것이었다.

‘그래서 이 전쟁의 결말은 뭐지?’

끝으로 가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선발대로부터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앞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시체?”

성우와 경수는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통로가 넓어졌다. 그리고 벽면에 횃불을 걸어 둘 수 있는 고정대가 심심치 않게 박혀 있었다.

이나 선발대가 있는 곳에 도달했는데, 앞서 나가던 한호와 리웨이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선배, 여기 좀 봐요!”

그들은 큼직한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너비만 10미터에 이를 듯 싶었는데, 내리막 한가운데가 바닥으로 푹 꺼진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완전히 으스러진 뼈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형체가 불분명했기에 몇 구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거, 함정이군요.”

경수가 말했다. 성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횃불을 통해 본대로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져서 누군가 악마의 세계수를 공격했다면······ 그 공격자들의 시체가 분명했다.

즉, 이들이 이 세계의 ‘수호자’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선배! 저기 저것들 다 아이템 아니에요?”

한호가 구덩이 아래를 가리켰다. 확실히 잿더미로 변해버린 뼈 무더기 사이에,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물건들이 보였다.

“오! 뭔가 좋아 보이는데? 내려가서 주워······.”

“안돼!”

리웨이가 소리치며 한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왜, 왜 그래요?”

그녀는 벽면에서 나무 껍데기를 뜯어 내더니, 구덩이를 향해 내던졌다. 그 순간······.

콰과과과과과!

구덩이 안을 시뻘건 화염이 가득 채워버리는 게 아닌가?

“으, 윽!”

“뜨거워!”

성우를 제외하고, 주변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주춤 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괜히 함정이겠어? 이런 끔찍한 장소에 들어올 만한 놈들을 태워죽일 만큼, 강력한 뭔가가 있겠거니 생각해야지!”

한호가 구박을 받는 동안, 성우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구덩이 안을 살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쩝一 쩝一 쩝一

’저건?’

그래 이 함정, 본 적 있었다. 진화 학회의 본진의 지하통로에서 보았던, 화염을 토해내는 거대한 입이 분명했다.

쩝一 쩝一 쩝一

그 역겨운 생김새의 입이 구덩이 곳곳에 튀어나와 있었다. 당장 이 각도에서 보이는 것만 무려 5개였다.

’이건 월드 이터의 권능 중 하나다.’

저걸 파괴하는 순간 알 수 없는 존재, 즉 ‘월드 이터’의 분노를 샀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역시 마굴의 심장, 악마의 세계수, 월드 이터는 연관이 있다.’

그러는 한편 구덩이 안에 흩어진 아이템을 확인했다.

’리웨이의 말대로 이곳까지 들어올 정도의 침입자라면 분명 질 좋은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테고······.’

뼈 무더기 사이에서 번쩍이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이 여기 묻혔다는 뜻이기도 하지.’

저런 인위적인 광채를 발휘하는 건, 상당한 등급의 아이템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성우가 감정사는 아니기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아이템인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만······.

“······어?”

그럴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익숙한 물건이 하나 눈에 띄었다. 어두운 기운 풍기는 흑색의 낫, 저곳에······ 그림리퍼가 있었다.

“말도 안 돼.”

성우는 두 눈을 의심했다. 사신의 낫 ‘그림리퍼’는 직업 퀘스트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아이템이었다.

’저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그림리퍼인 걸까? 그렇다면······ 두 개 를 얻을 수 있는 걸까?’

그건 직접 확인해봐야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성우는 구덩이 끄트머리에 섰다. 남들이 보기에 위험천만한 자세였다.

“네크로맨서!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성우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리웨이가 소리쳤다. 성우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걱정 마. 나는 저 불에 안 죽어.”

“뭐? 그, 그걸 어떻게 알아! 방금 못봤······.”

“이미 한 번 해봤어.”

성우는 구덩이 속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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