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네크로맨서-168화 (168/244)

# 168

58) 전후 수습, 두 번째 시스템 오류 - 2

정훈과 크루세이더 팀을 죽이라고?

‘적어도 이유는 말해주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성우는 당황스러웠다. 찾아오는 사람을 죽여라, 그 극단적인 한 마디를 조언이랍시고 던져 놓고는 제대로 된 이유도 알려주지 않는다니?

화가 났다. 시스템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도움을 준다고 하지만 결국 성우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닐까?

‘······아니, 아니야. 감정을 배제해.’

그러나 이내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날 가지고 놀건 말건 그건 둘째 치자, 일단 지금 이 상황이 중요하다. 분명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이무기 굴의 시스템이 오류 이후 벌써 3번째 접촉이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조력자’는 지금까지 잘못된 조언을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시간에 쫓기며 최적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파편적인 내용만 전해주는 걸 수도 있었다.

그래, 시스템의 눈을 피해야 할 텐데, 그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닐 것이었다.

‘지금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정훈과 크루세이터 팀을 죽이는 게 꼭 필요하다고 치자, 그건 어렵지 않다. 여기는 그 어디도 아닌 성우의 본진이기 때문이다.

다만 왜 죽여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다짜고짜 죽이라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체 어떤 점이?’

짧은 시간 동안 고민했지만, 정훈이 위험이 될만한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정훈은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이자 가장 중요한 조력자였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최적의 대처는 단 한 가지였다. 정훈과 크루세이더 팀을 ‘위험 요소’라고 판단하고 최대한 조심하는 것뿐이다.

성우는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 씨, 크루세이더 팀, 지금 어디에 있죠?”

경수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도착해서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겁니다. 아마 지금쯤 성벽을 통과했겠네요. 결계 때문에 외부에 착륙했다고 하더라고요. 열어달라고 하시지······.”

다행히도 마을의 중심부까지 들어온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진영 소속자 외 마을 중심부 접근을 불허합니다. 세계수에 접근 못 하게 하고 잘 감시하세요. 저는 조금 이따가 나가겠습니다.”

이에 경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감시요?”

“그 사람들은 아직 우리 진영 소속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때 적이기도 했죠. 우리 마을, 그리고 세계수는 언제나 최상의 보안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이었던 경수지만,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안전은 아무리 신경 써도 모자란 일이죠.”

경수가 급히 문밖으로 사라졌다.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서 무기를 챙기기 시작했고 대산맥의 왕은 빙의 후유증인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으, 나는 여전히 세상만사 하나도 모르겠는데, 자네는 어떤 깨우침이 있었나?”

“아니. 더 복잡해졌어.”

왕은 시큰둥한 얼굴로 곰방대를 물었다.

“흠, 그래도 자네가 고집부려서 접촉했는데, 자그마한 것이라도 얻은 건 있지 않은가?”

성우는 겨울 포식자를 둘러메며 대산맥의 왕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내가 가짜는 아니라는 거, 그거 하나는 얻었군.”

“음, 그럼 난 가짜인가?”

끙一

그때, 미르가 칭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성우가 무기를 챙기는 소리 때문에 깬 모양인데, 하품하며 몸을 일으키더니 다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켜더니 성우의 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넌 왜 하필 이럴 때 일어나고 그래?“

성우는 어쩔 수 없이 미르를 데리고 미술관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벌써 왔군.’

저 멀리,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약 서른 명 남짓, 정훈과 크루세이더 팀이었다.

‘연락도 없이 온 것도 이상하다만, 완전히 무장한 크루세이더 팀을 저렇게 데려올 만한 이유가 뭐가 있지?’

성우는 그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당연하게도 정훈이 가장 앞에 서 있었다.

‘뭔가 다르다.’

성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들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만, 평소 정훈에게서 느껴지던 어떤 ‘아우라’가 없었다. 다소 밋밋하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경수와 마을 경비대가 앞으로 나아가 그들을 제지했다. 성우가 명령한 대로 세계수와 미술관이 있는 ‘마을 중심부’로의 접근을 차단한 것이다.

그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끄르르!

“응? 왜 그래?”

- 주의! 해당 지역에 대강령(大江學)이 시작됩니다.

“······응?”

미르가 난데없이 대강령을 열어버린 것이다.

푸쉬이一

성우의 등 뒤에 검은 연기가 터져 나왔다. 그 안에서 소환된 건 역시나 치킨 스켈레톤 6마리였다.

덜그럭! 덜그럭!

그 기괴한 녀석들은 다짜고짜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

퍽! 퍽! 퍽!

요란한 추락과 함께 뼈 몇 조각이 박살 나 튕겨 나간 것 같은데, 녀석들은 그런 건 아랑곳 하지 않고 어디론가 뛰어나기 시작했다.

”어, 어어?”

그 목표물은 다름 아닌 크루세이더 팀이었다.

덜그럭!

치킨 스켈레톤들은 땅을 박차고 날아 올라, 정훈의 머리를 향해 몸을 던졌다

찰나의 순간, 정훈은 고개를 쓱 피했고, 그 뒤에 서 있던 크루세이더 대원의 얼굴에 치킨 스켈레톤이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윽!”

대원이 코를 움켜쥐고 주춤거렸다. 황당한 걸 넘어서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저것들을 잡아!”

경수와 경비대원들이 서둘러 치킨 스켈레톤을 붙잡기 위해 움직였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한호도 기겁하며 팔을 걷어붙였다.

“어? 어어? 뭐야! 닭 뼈가 왜 사람을 공격해? 서, 선배? 어딨어요! 이것 좀 말려요!”

성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미르를 바라보았다. 미르는 성우의 품속에서 머리만 내민 채, 크루세이더 팀을 향해 쉭쉭, 경계 어린 숨소리를 내뱉었다.

“이게 무슨······ 하, 그래도 네가 이런 못된 짓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끄릉!

성우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치킨 스켈레톤의 공격을 받은 대원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치킨 스켈레톤이 발톱을 디밀었는지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성우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긁혔는데······ 보호막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피가 흐르지도 않는다.’

크루세이더 팀은 특유의 황금색 보호막에 의해 보호받는다. 그건 ‘크루세이더’라는 직업의 특성이었다.

웬만한 공격은 거의 튕겨낼 정도로 강력할 텐데······ 어째서 그 효과가 발동하지 않았을까?

‘그 보호막은 크루세이더의 직업 특성이다. 어떤 상황이건 발동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 즉, 이들에겐 그런 능력이 없는 거다. 어째서?’

성우는 정훈과의 거리를 좁히며 생각을 정리하며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걸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상황이 당연한 일이 된 시대에 보이는 대로 믿는 것만큼 미련한 건 없었다.

그렇다면 가장 당연한 것부터 무너뜨려서, 눈앞에 있는 이 사람들은······ 성우가 아는 그 사람들이 맞긴 한 건가?

‘그래, 이들이 크루세이더가 아니라면, 진짜가 아니라면 모든 게 설명된다. 그러니까 보호막을 펼칠 수 없는 거고······.‘

끄르르!

성우는 크루세이더 팀을 향해 으르렁 거리는 미르를 쓰다듬었다.

’미르 역시 돌발행동을 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어떤 초월적인 감각으로 적대자를 구별하고 공격한 거다.’

생각해보면,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조언한 건 어떤 방문자를 죽이라는 것이지 정훈과 크루세이더 팀을 죽이라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방문자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함정이다.’

성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정훈을 바라보았다.

“정훈 씨, 괜찮으십니까? 뒤에 한 분이 다치신 것 같은데? 한호야, 네가 치료 좀해줘.”

“아, 뭐, 그러죠. 저 정도 상처쯤이야. 저의 성스러운 터치 한 번이면 금방 나을겁니다.”

한호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다가갔다. 그런데 정훈은 털털하게 웃으며 한호를 막아섰다.

“아닙니다. 당황스럽긴 한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드래곤이 아직 어려서 거친 장난을 치나 봅니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저기 저 세계수 말입니다. 가까이에서 봐도 되겠습니까?”

말투와 표정은 정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역시나 특유의 강렬한 인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성우는 정확히 모르는 정보였지만, 그 강렬한 인상은 크루세이더 커맨더에게 주어지는 패시브 효과인 ‘전쟁 영웅의 아우라’였다.

‘역시 위험하다.’

성우는 한 걸음 다가서며 허리춤, 핸드 캐논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잘 모르시는 게 있네요. 드래곤은······ 어리더라도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꿰뚫어 볼 줄 압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

성우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핸드 캐논을 뽑아, 총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정훈의 등 뒤, 크루세이더 팀 한 명을 겨누었다.

정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콰—앙!

크루세이더 대원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두개골이 으스러지며 그 파편이 하늘로 흩뿌려졌다.

“선배! 지금 뭐 하는······.“

한호와 경수를 비롯한 세계수 진영의 모든 이들이 경악을 내비쳤다.

“······응? 저, 저게 뭐야?”

그러나 그들 역시 이상함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두두-

핸드 캐논에 의해 산산이 조각난 대원의 머리통에서 솟아오른 건 살점과 뇌수가 아니었다. 그건 마치 찰흙이나 도자기 조각 같은 것이었다.

즉,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 플레이어의 ‘상급 테라코타’를 제거하여 10,000골드를 얻었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가 성우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증명했다. 테라코타(te rracotta), 쉽게 말해 ‘토기 인형’이다.

기잉! 기잉!

그것들은 정체를 들키자 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더니 마치 서커스 단원처럼 공중제비 같은 곡예 를 펼치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잡아!”

경기병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것들의 가슴팍에서 붉은빛이 점등했다.

‘붉은빛? 폭탄이다. 그리고 목표는 세계수다.’

즉, 저것들의 목적은 테러였다. 성우는 등 뒤에서 ‘겨울 포식자’를 끌어내리고 재빨리 총구를 들어 올렸다.

“전부 뒤로 비켜요!”

이어서 레버를 내려 ‘확산 모드’로 전환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놈들을 항해 방아쇠를 당겼다.

쩌저저저저저一

50여 발의 빙결 탄환이 일제히 뿜어졌다. 그것들의 폭죽처럼 뻗어 나가며 부채꼴 모양으로 확산하였다.

놈들은 기괴한움직임을 펼치며 어떻게든 세계수를 향해 파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한 마리조차 겨울 포식자의 피해 반경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쩌적一 쩌적一

그것들은 전부 얼음 조각상이 되어버렸다.

“ 우와······.“

“뒤로 안 비켰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렇게 단 일격에 상황 종료였다.

성우는 얼어붙은 테라코타 한 기를 깨부쉈다. 놈의 몸에서 나온 건 동그란 모양의 플레이어 제조 아이템으로, 역시나 폭탄 종류였다.

성우는 고개를 돌려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 씨, 당장 영등포에 연락해서 저는 지금 수원에 있고 그 누구도 보낸 적 없으니 절대로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세요.”

누군가 한국 서버의 동맹 관계를 이용하여 세계수 진영을 노렸다면, 반대로 영등포의 광복 길드 역시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 그리고 이 메시지는 한국 서버의 모든 곳으로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죠.”

더 나아가 한국 서버 전체를 겨냥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 씨! 좀 쉬려니까 이게 뭐야? 그런데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누구죠? 역시 중국 서버인가?”

“······그렇겠지.”

안일했다. 큰 전투가 끝났으니 다음 전투까지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양쪽 모두 심히 지쳤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지치지 않았으며, 다음 전투까지 한가롭게 기다리고 있을 생각 따위는 없는 듯했다.

그리고 이렇게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주려고 들었다.

“현 시간 부 경계 비상사태 선포! 모든 구역 경비 강화! 전부 통제를 따라서 움직여주십시오!”

이내 마을 내 방송이 울리며, 세계수 진영의 마을을 비롯한 한국 서버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지금 바로 싱 장군, 그놈에게 가야겠습니다.”

성우는 잠깐의 휴식을 끝으로 다시금 전쟁에 돌입했다. 그 첫 단계는 역시 정보수집이었다.

* * *

싱 장군의 시체는 보안이 가장 철저 한 ‘0번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성우는 그 앞에 섰다.

- 망자의 ‘기억 파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놈의 시체를 스켈레톤으로 일으키자 역시나 영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좋아. 도움이 될만한 걸 보여줘.’

언제나 그렇듯, 적의 시체에서 뽑아내는 ‘기억 파편’은 큰 힌트를 던져줄 것이었다.

그리고 싱 장군은 중국 서버의 이인자인 만큼, 어쩌면 놈들의 허를 찌를 만한 게 나올 수도 있었다.

타닥- 타닥-

화면이 밝아지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장작불이었다. 이곳은 아주 큰 화로가 놓인 방이었다.

그리고 그 한쪽에 놓인 원형 탁자 앞, 콧수염 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싱 장군은 그 남자와 마주 앉은 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대화가 오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리고 콧수염의 남자는 차를 홀짝이며 싱 장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다른 이의 기억을 보는 것임에도 그 시선이 어딘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됐다.’

성우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무렵, 콧수염의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날렸다.

“안녕하신가?”

“······.”

“자네한테 인사한 건데?”

그렇다. 이건 기억이 아니었다. 이 콧수염 난 남자는 기억의 주인이 아니라 성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사이코메트리?”

그리고 이건 이미 한 번 당해본 적 있는 기술이었다. 백색 늑대와 같은 ‘사이코메트리’ 능력자가 분명했다.

“오, 이걸 아시는 군 그래? 대륙 전체에서도 2명 밖에 없을 정도로 아주 희귀한 능력인데 말이야. 그 작은 서버에도 있긴 있나 봐?”

“······.”

“과묵한데? 그래, 맞아. 우리는 네가 시체에 감추어진 정보를 읽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이렇게 찾아올 줄도 알고 있었다. 전능하신 황제는 패배의 가능성까지 겸허하게 인정하시고 미래를 대비하신 게지!”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 싱 장군에게 미리 어떤 수작을 부려놨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상대한 그 어떤 세력보다 강성한 곳인 만큼, 정보력이나 인적 자원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났으며 그 모든 걸 바탕으로 철두철미하고 움직이는 듯했다.

놈은 찻잔을 쥔 채 탁자에서 일어섰다.

“이봐 네크로맨서, 잘 생각해 봐. 너희는 족속은 황제의 칼을 빗겨낼 수 없어. 너희 땅으로 보낸 병력은 황제의 군대 중 아주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더니 성우를 향해 일장연설을 해대기 시작했다.

“작은 나라의 왕이여, 분수를 알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황제께 자비를 구하라. 그분께서는 자애로운 분이시니 너를 종으로 삼아주실 것이다.”

이거, 이미 여러번 겪은 것 같은 레파토리였다. 성우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비? 정말이지, 이거 하난 확실해. 세상이 멸망하면 광신도가 들끓는 모양이야. 국적 문화 불문하고 전부 숭배할 거리를 찾아다니다니?”

“뭐? 광신도? 네놈 눈에는 우리가 고작 광신도처럼 보이나? 우리의 거대한 제국이······.”

“아, 너희는 좀 다른가? 멸망 전에도 섬기는 게 있었으니 말이야. 그럼 전통인가?”

상대는 감정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는 뒷짐지고 창가 앞에 섰다.

“그래 신나게 떠들어라. 황제 폐하께서 너에게 하사할 수 있는 건 머리를 조아릴 때 종으로 받아줄 자비, 혹은 죽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을 끝으로 영상은 강제 종료되었다. 놈에 의해서 기억 밖으로 쫓겨나버린 것이었다.

“······선배? 뭐 좀 봤어요?”

한호의 물음에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앵? 왜요?”

“놈들한테 사이코메트리 능력자가 있어서 기억을 보는 걸 봉쇄당했어.”

“아, 뭐야, 그럼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거예요?”

성우는 곧장 창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늑대의 도움이 다시 한번 필요해.”

백색 늑대, 그는 예전에도 성우를 도운 적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한국 서버 소속인 만큼, 서버의 운명을 위해서 다시 한번 나서줄 것이었다.

성우는 그를 다시 한번 호출했다.

* * *

세계수 진영, 아니, 한국 서버 전체가 다시금 바빠졌다. 아주 잠깐의 휴식을 털고 일어나 더 큰 싸움을 준비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성우는 얼려 놓은 ‘테라코타’를 분해하여 적의 전력을 분석했다.

그것들은 작동 정지한 시점부터 생기를 잃어 갔는데, 이제는 완연한 도자기 인형의 모습이었다.

’이건 분명 상당히 강력한 능력이다. 최소 4성, 어쩌면 5성의 직업군인데······ 황제의 능력인가?’

지금까지 만나온 5성 직업은 모두 한 집단의 우두머리였다. 그러나 중국 서버 정도의 규모라면 황제 휘하에 5성 직업군이 여럿 있을 수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 성우의 뒤로 다가왔다.

경수였다.

“성우 씨, 방금 누군가 찾아 왔습니다.”

“아, 백색 늑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웬 여자인데······.”

경수는 긴장이 만연한 표정이었다. 검문 실패로 인해 마을 내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 여자가 성우 씨를, 그러니까 네크로맨서를 찾습니다. 방금 전 사건도 있고 그래서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수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여자가 자신이 리웨이랍니다. 중국 2서버의 그 정령술사 리웨이······.”

리웨이? 성우는 즉시 성벽으로 향했다. 황제와 맞선 적 있는 그 여자가 이 곳에 왔다고?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쉽게 믿어선 안 됐다. 현재로선 황제의 또 다른 수작일 가능성이 있었다.

성우는 성벽에 올라가 결계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전투의 흔적이 만연한 도로 한가운데, 웬 여자 한 명이 우뚝 서 있었다.

“네가 리웨이라고?”

“내가 리웨이다!”

생각보다 젊은 여자였다. 먼 거리에 서 있기에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지만, 얼룩지고 솜이 튀어나온 패딩 점퍼를 입은 차림새는······ 한 서버를 호령했다기에는 다소 누추한 행색이 분명했다.

“너를 어떻게 믿지? 그리고 여긴 왜 왔지?”

성우의 물음에 그녀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머리를 헝클어댔다.

“젠장! 나도 오고 싶진 않았어······ 그리고 내가 만난 적도 없는 사람한테 나임을 증명하라고?”

그리고는 신발을 혼자 무어라고 구시렁거리더니 다시금 성우를 올려다보았다.

“이봐, 네크로맨서! 혹시 우릴 지켜 보는 눈이 있나?”

지켜보는 눈? 성우는 그 대목에서 본능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이무기의 비늘’을 움켜쥐었다.

— OFF AIR (-)

‘저 여자, 설마 이걸 물어본 건가?’

단 한 마디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없다.”

그렇다면 저 여자가 어째서 대산맥의 왕과 똑같은 레퍼토리의 질문을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은 그녀가 직접 내놓았다.

“아, 그래? 다행이야. 날 보낸 놈이 그 눈을 조심하라고 하더라고!”

“······널 보낸 게 누군데?”

그녀는 씩 웃으며 팔짱을 꼈다.

“이봐! 신의 가호를 받는 대단하신 영웅 양반, 어쩌다 보니 나도 그 망할 신의 심부름꾼이다!”

망할 신이라, 신이라고 불릴 말한 존재는 많지만, 눈을 경계하는 신은 드물었다.

이내 그녀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건, 아주 작은 검은색 석상이었다.

“자! 이걸 찾고 있지?”

그건 베이커 제독에게 얻은 작은 석상인 ‘축복의 증표’와 같은 물건이 분명했다.

성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성벽 난간을 붙잡았다. 그러자 리웨이가 싱긋 웃는 게 보였다.

‘두 번째 석상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다.’

이로써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성우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한 듯했다.

그렇다는 건, 성우의 앞에 놓인 미래가 아주 험난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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