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58) 전후 수습, 두 번째 시스템 오류 - 1
발키리가 마무리한 서울 전장을 끝으로 한국 서버에서 벌어진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내 모두의 눈앞에, 그리고 공식 채널 화면을 통해 전쟁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끝났습니다.”
안 기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산, 수원, 서울까지 모든 순간이 치열했다.
그렇기에 중계하는 것만으로도 직접 전장에 있었던 것처럼 녹초가 되어버렸다.
옆에 있던 조수 역시 이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주먹을 꽉 쥐며 뒤늦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 겨, 결국! 우리 서버가 이겼습니다!”
안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수의 해설을 조금 교정하려는 듯 한 가지 첨언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우리 서버가 이겼죠.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어쩌면 그저 네크로맨서가 또 한 번 증명한 겁니다. 그가 없으면······ 우리 서버는 안 된다는걸 말입니다.”
이에 조수는 손바닥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확실히 지난 한일전도 그렇고 이번 중국전도 그렇고 네크로맨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걸 넘어서······ 판도를 좌우했다고 봐야겠네요?”
“맞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지수라는 이름의 검객도 엄청났습니다. 극소수로 서울 전장에서 시간을 끈 건 물론이거니와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사실 상 그녀가 장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조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 멋있었습니다. 끄,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잔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어, 그, 무슨 스킬인지, 단 한 번에 수백 명의 목이 잘리며 와르르 쓰러지는 장면은 정말이지······ 솔직히 오늘 저는 발키리의 팬이 되었습니다.”
“저도입니다. 흠, 어쨌든······.”
안 기자가 자세를 고쳐잡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수만 명의 시청자가 이 방송을 보고 있었다. 마무리 멘트를 할 시간이었다.
“······자, 그러나 끝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게 있습니다. 역시 아주 중요한 일이죠.”
“그게 뭐죠?”
안 기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안 기자의 추측은 자주 빗나갔지만, 이번에는 유독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어떤 확신이 있는 것이었다.
“아? 그럼 또 한 번 어떤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보시는 건가요?”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한 번 받았으니 다시 돌려줄 차례가 아닙니까?”
“아?”
“역사 속, 우리 민족이 겪은 전쟁은 대부분 방어전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는 분명······ 더 크게 갚아 줄 겁니다.”
조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럼 이번에는 우리가 중국 서버를 공격할 차례란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 네크로맨서가 언제 중국을 칠 것인가, 그게 우리 서버의 다음 기로가 될 것입니다.”
한국 서버는 어느새 세계수 진영의 그늘 속으로 들어와서 하나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제 한국 서버의 모든 것이 네크로맨서의 선택으로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는 네크로맨서가 이길 거라고, 이번에는 무조건 확신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의 선택을 믿었다.
* * *
W·P·U의 수뇌부는 한국 서버에서 벌어지는 전쟁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 봤다.
여유가 없어서 직접 돕지는 못했지만, 세계수 진영은 W·P·U의 가장 중요 한동맹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동맹이란 자들은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봐 조니, 내가 본 게 잘못된 게 아니지?”
러브 의장이 물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조나단 역시 멍한 표정이었습니다.
“의장님······ 사실 그건 제가 묻고 싶습니다.”
러브 의장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는 내가 뭘 본 건지 모르겠어. 전쟁이라는 게 원래 저런 것이었나? 내가 그 개념을 잘못 알고 있던 건가?”
“아닙니다. 우리가 방금 본건 분명,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뭐랄까, 전쟁이 아니라 중세 기사도 문학에 나오는 영웅담에 가깝군요.”
한두 명이 좌우하는 전쟁이라······ 그건 분명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국 서버의 전쟁에서는 그러한 상황이 몇 번이고 벌어졌다. 부산의 대폭발, 수원의 빌딩 낙하, 서울의 학살까지······ 하나 같이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가 가기 전에 말했지. 이번 전쟁으로 드래곤을 막아낼 힘을 보충해올 것이라고······ 그건 진짜였어.”
러브 의장의 눈에 경악과 동시에 희망이 어렸다.
“그 포부가 사실이라면, 이제 시작입니다. 네크로맨서는 아직 만족하지 못할 겁니다.”
“자네 말이 맞아. 그는 분명 중국 서버로 갈 거야. 그리고 그가 하려는 건 전쟁이 아니라······”
러브 의장이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남쪽 하늘, 그 어딘가에 최악의 생명체가 숨 쉬고 있었다.
“······종말 대비인 거야.”
드래곤을 막을 방법······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던 그 비책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 사람이 드래곤을 죽이고 우리를 구원해 낼지도 몰라.”
* * *
전투가 끝난 서울의 전장은 고요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나니 할 일이 태산이네······.”
경수가 한탄했다. 승리했음에도 모두가 단맛 같은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전후 수습을 위한 상황 점검은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경수는 차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산은 전멸이지만 수원에서 1천 명, 서울에서 3천 명, 이렇게 중국군 포로가 4천 명이나 됩니다. 하, 아군 피해보다 이게 골칫거리네요.”
전쟁은 거칠었고 그 결과 엄청난 수의 적군을 사살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전의를 잃은 적군의 항복이 연이어졌다. 그들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에 민흠이 고전적인 포로 처리 방안을 내놓았다.
“이거, 아무래도 북한산 탄광을 비워야겠는데요? 진화 학회에서 잡아 온 포로들을 전역시킬 때가 된 건가?”
그건 일명 ‘무보수 탄광 노예’였다. 전쟁 범죄를 일으킨 포로의 운명으로 제격이긴 했다.
“아, 북한산에 광산 지형이 나타났다고 했죠? 그쪽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아직 갱도가 3개밖에 뚫리지 않아서 하루에 고작 1천 명이 일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듣기로, 투쟁 길드의 본진이 있었던 강원도 쪽에도 광산 지형이 몇 개 있다고 합니다.”
“음, 그렇다면 대산맥의 왕인가, 그 사람한테 물어봐야겠군요. 우선 성우 씨에게 말해보겠습니다. 어떻게든 쉬지 않고 일시킬 수 있는 곳을 마련해야죠.”
“맞아요. 적어도 그놈들 밥값은 나와야지, 식량이 얼마나 귀한 시대인데······.”
그렇게 대략적인 상황을 정리한 뒤, 서울 쪽 전후 수습과 포로 관리는 광복 길드가 맡기로 했다.
그리고 성우 일행을 비롯한 나머지 인원은 ‘하이퍼 게이트’를 열여 수원으로 돌아왔다.
“······으으! 진짜 너무 피곤한데? 후, 우리 이제 좀 쉴 수 있는 거죠?”
“저도······ 쉬고 싶어요.”
오죽하면 지수가 피곤을 호소했다. 그 어느 때보다 거칠었던 전투가 끝났다. 긴장이 풀리며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리는 게 당연했다.
끄르르······
미르는 성우의 품에 안긴 채, 진작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모두에게 휴식이 간절했다.
“어, 어? 그런데 다들 안 쉬고 뭐 하는 거죠? 다들 대짜로 뻗어서 잘 줄 알았는데?”
한호의 말처럼, 전쟁이 끝났음에도 수원의 마을은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여기저기 짐을 실은 트럭이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성벽 복구 작업에 착수한 것이었다.
이내 성벽의 무너진 곳을 살피고 있던 무연이 성우 일행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오셨군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싸움이 었습니다.”
무연의 표정에는 안도와 여유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왜 쉬지 않고 있습니까?”
“아, 비전투 인원들은 아직 작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급한 대로 큰 구멍을 임시 복구하려고 합니다. 잠깐이면 되니, 끝나고 휴식하면 됩니다.”
무연의 ‘자동 건설’ 기능을 활용한다면 복구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3개의 구멍 정도야 큰 힘 들이지 않고 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겼다고 하지만 또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성벽은 언제나 만일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죠.”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의 안녕을 위해서는 무연 같은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성벽 덕분에 오래 버틸 수 있었네요. 일찌감치 성벽을 쌓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성우의 칭찬에 무연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좀 더 보강해야겠습니다. 사실 제 생각보다 일찍 무너져서······ 그 순간은 정말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베이커 제독을 필두로 한 중국군의 폭격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결계는 물론이거니와 성벽도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엄청난 피해를 보았을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자자, 여긴 걱정하지 마시고 여러분은 가서 쉬시죠.”
“그래야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성우 역시 피곤함에 찌들어서 더는 서 있을수 없었다.
그들은 세계수 진영의 본관, 구 미술관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다.
성우의 개인 사무실 입구에는 어느새 ‘서버 마스터실’이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총무부에서 바쁜 와중에 이런 일처리까지 해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죽을 것 같은 피로야······.”
온몸이 찌뿌둥했지만 ‘서버 마스터’답게 쉬기 전에 아직 처리할 일이 있었다.
사실 큰일은 아니었고 정신없는 가운데 잠시 밀어두었던, 온갖 보상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언제나 쏠쏠한 능력 향상을 가져다주는 ‘칭호 획득’ 메시지였다.
- ‘전쟁 영웅(2단계)’ 칭호가 ‘전쟁 영웅(3단계)’ 칭호로 대체 됩니다.
* 모든 능력치 상승 (+5)
1차 한일전, 2차 한일전에 이어서 3번째 전쟁 영웅 칭호를 획득했다. 그렇게 얻은 능력치 상승은 엄청났다.
“플레이어 프로필을 열어.”
[플레이어 프로필]
- 이름 : 유성우
- 레벨 : 23
- 직업 : 네크로맨서, 흑마법사
- 능력 : 근력(44+13), 민첩성(31+11), 체력(37+15)
- 보유 골드 : 338,500,412
그는 뻐근한 눈으로 프로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평상시 근력이 57이다. 여기에 리치 효과로 10, 아누비스 상태로 15, 총 모든 능력치가 25 상승한다. 그럼 근력이······ 82다.’
성우는 예전에 비밀 상점에서 얻었던 신화 등급 아이템 ‘천근궁(千斤弓’)을 꺼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천근궁(干斤弓)
- 등급 : 신화
- 분류 : 활
- 효과 :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당길 수 없다. (사용 조건 : 근력 수치 100 이상)
시위를 당길 때 자동으로 화살이 생성되며 타격 지점에 ‘해의 추락’ 스킬이 발동된다.
+ 해의 추락 : 타격 지점 근방에 광범위한 폭발·화염 마법을 일으킨다. 일대를 초토화할 수 있기에 사용에 주의가 필요하다. (재사용 대기 : 10일)
+ 미확인 세트 효과 : 천근살(千斤) 보유 시 발동
힘을 주어 당겨보았지만, 철근 같은 시위는 고작해야 눈꼽만큼 미동할 뿐 이었다.
실제 철근도 우그러뜨릴 수 있는 약력이거늘, 이걸 제대로 당기기 위해서는 근력 수치가 18이 더 필요했다. 도대체 얼마나 무지막지한 물건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은 아무런 쓸모없었다.
“······역시나 계륵이었군.”
성우는 또 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 ‘서버 마스터’에게 ‘전쟁 승리 보상’이 주어집니다.
* 전쟁 상금 : 300,000,000골드
“3억 골드라······.”
사실 엄밀히 따지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은 전쟁이었다. 적들의 숨통을 끊고 얻은 골드, 적들에게 노획한 아이템, 공성 병기, 비행선 등 이번 전쟁은 한국 서버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수만 명이 목숨을 내건 싸움의 보상으로 고작 3억 골드라니? 영 탐탁지 않았다.
그런데 메시지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 한국 서버 측에 ‘전쟁 상대(중국 서버)’에 대한 ‘반격의 기회(주도권)’ 이 주어집니다.
* 반격을 선택할 시 주도권을 가지고 ‘전장’과 ’종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 서버 마스터의 권한으로 ‘종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추가 보상 없이 전쟁이 마무리됩니다.)
— 48시간 이내에 ‘반격’을 선택할 시 모든 아군에게 ‘역습’ 효과가 부여됩니다.
* 모든 능력 치 상승 (+3)
* 이동 속도 상승 (+10%)
‘역습 효과라? 그래, 끝까지 물어뜯어,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길 권유하는군?’
시스템이 원하는 게 중국을 공격하는 거라면, 적어도 지금만큼은 고분고분하게 따라줄 생각이었다.
중국 서버의 황제라는 놈을 그냥 남겨둘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그 결정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반격을 선택한다면 모든 이들의 눈에 전쟁이 재개된다는 메시지가 떠오를 것이었다.
방금 전쟁이 끝났다. 당장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마음 편히 쉬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성우는 그 메시지를 잠시 한쪽에 넣어두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하지?”
새삼스레, 이제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왜?’
* * *
성우는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러나 3시간 뒤, 경수가 잦아오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성우 씨, 말씀하신 대로 전부 확인했지만, 그 작은 석상 같은 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뭔가 나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싱 장군의 소지품을 모두 확인했지만 두 번째 석상 ‘축복의 증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국, 베이징에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중요하지만 전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만큼 안전한 곳에 보관했을 거다.’
성우는 방을 나가려는 경수를 불러 세웠다.
“아, 경수 씨, 싱 장군, 그 사람 시체는 따로 보관해주세요. 아무도 접근 못하게 해주시고요.”
“그렇게 하죠.”
나중에 ‘기억 파편’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한 번 깨고 나니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성우는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는 미르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밤이 내려 있었다. 그러나 세계수 진영 안은 푸른 빛으로 가득 차 어둠이 내려앉을 틈이 없었다. 세계수에서 뿜어져 내오는 광채였다.
“응? 벌써 일어났나?”
광장의 거대한 뿌리 위에 대산맥의 왕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곰방대를 물고 담배 연기를 뻑뻑 내뿜는 중이었다.
“내 장담하는데, 그렇게 혹사하다가는 전투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죽을걸세.”
“······.”
대산맥의 왕이 무언가 내밀었다.
“자, 이거 하나 먹고, 지수 낭자에게도 하나 전해주게. 기적적으로 부활했지만, 워낙 끔찍한 전투였기에 피곤한 걸 넘어서 한동안 후유증을 앓을지도 몰라.”
경단 모양의 아이템이었는데, 체력과 원기 회복에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우는 달리 용건이 있었다.
“너, 나랑 얘기 좀 해.”
“응?”
성우의 난데없는 대화 요청에 대산맥의 왕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던 차였다. 그동안 정신이 한도 없어서 미루어왔는데, 지금이 기회였다.
“······뭐야, 무섭게 굳이 지금?”
성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이무기의 비늘을 손에 쥐었다.
- OFF AIR (-)
“보는 눈은 없어.”
“아니, 나는 자네 눈이 무서워서 그런 걸세.”
그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뿌리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마치 끌려가는 죄수 같은 표정으로 성우를 따라와, ‘서버 마스터실’로 들어왔다.
“음, 그래, 이 밤에 말동무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발키리, 지수씨의 신격 말이야.”
그 말에 왕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래! 그거 아주 멋들어졌지 자네도 직접 봤어야 해 정말 일생일대의 구경거리 중······.”
“그거 네가 유도한 건가?”
그 밝았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응? 무슨 말인가?”
그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성우의 시선을 피했다.
“그 검, 지수 씨가 쓰는 바이킹의 검, 그게 신격의 조건 중 하나였어. 네가 준 거라고 하던데 전혀 몰랐다고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지 않아?”
성우는 오래전부터 대산맥의 왕을 의심했다. 몬스터 출신인데 지수의 각성을 도운 데다가 얼마 전에는 이무기가 했던 것처럼, 어떤 경고를 해오기까지 했다. 그건 무언가 알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그는 털털하게 웃어 보였다. 이 역시 의심스러웠다.
“허허, 이보게 세상은 생각보다 우연이 많아. 어떻게든 연결 지으려고 하면 오히려 혼란해지는 법이라네.”
“우연?”
성우는 피식 웃었다.
“너는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 그리고 너라는 존재도 우연으로 여기 와 있는 게 아니잖아?”
“음, 그럼 역시 운명인가?”
“아니, 이건 조작이야.”
굳이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이 세계가 게임으로 변한 이후, 아니, 어쩌면 그 한참 이전부터 이 세계에는 우연이나 운명 따위는 없었던 건지도 몰랐다.
전부 누군가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철저하게 조작되고 있었다.
“······너는 어디에서 와서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있지? 말해 봐, 몬스터의 왕.”
성우가 아픈 곳을 건드렸는지 대산맥의 왕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몬스터······ 그렇다. 분명 그의 정체성은 몬스터였다.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걸 알고 싶군. 첫 만남 때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내가 대체 왜 여기에 있을까? 그리고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아니, 그건 목소리가 아니야······ 계시라고 해야 할까? 모르겠어, 그건 뭘까?”
성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목소리란 게 대체 뭐야? 네가 저번에 말한 대로, 정말로 신 같은 건가?“
성우는 일평생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게임이 시작된 이후, 신이 징벌이 내려졌다는 것만큼 합리적인 추론도 드물었다.
“글쎄, 신이라? 신의 개념이 뭘까 나는 그것부터 궁금하군.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일세······.“
“말장난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정말 모르는 거야?”
성우는 공격적으로 물었다. 조급했다. ‘OFF AIR’인 상황에서 최대한 캐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산맥의 왕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몰라 그런데······.“
별안간 대산맥의 왕이 몸을 뒤틀었다. 불안감을 느낀 성우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익숙한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 뀕궭$%%%&@긝!(%67#)
- 쉙뉅벩밝#!!$귉%$꿹$##%!!&*
- 치명적인 오류로 인하여 클라이언트 서버 연결이 종료됩니다. (ERROR CODE:0014231532)
“ 이건······.“
메시지가 서서히 사라지자 대산맥의 왕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가 아니 었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알지.”
바로 지금, 시스템 저편의 누군가가 성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유성우, 의문이 많은 건 이해해. 그러나 네가 하는 건 너무 큰 위험을 무시하는 행동이야.”
성우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마침내 정체불명의 조력자와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성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말할 수 없다.”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성우는 절대로 대답을 얻어낼 수 없다는 걸 느꼈다. 그는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난 누구지?“
어렵게 꺼낸 질문이었다. 이 세상이 게임으로 변해버린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성우 역시 이게 현실인지, 그게 아니라면 ‘통속에 들어 있는 뇌’ 같은 게 아닐지 고민했다.
그 질문을 이해한 듯, 상대가 싱긋 웃었다. 생기가 전혀 없는 인위적인 웃음이었다.
“넌 그냥 너야. 괜한 고민하지 마.”
이게 과연 안심해야 하는 대목일까?
“너를 비롯한 이 세계는 자연스러운 존재다. 그저 외부의 침략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내가 해방을 도와 줄 거라고 믿으면 된다.”
성우는 혼란을 느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네 궁금증을 해소해줄 시간은 없다. 알다시피 이럴 수 있는 시간도 잠깐뿐, 더 중요한 조언을 한가지 해주마.”
“조언?”
“내 조언은 언제나 유효했다는 걸 잊지 말고 잘 새겨들어. 잠시 후, 누군가 찾아올 거다.”
그가 고개를 쭉 내밀어, 성우의 머리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 사람을 죽여라.”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 시스템이 긴급 복구되었습니다.
대산맥의 왕은 기절하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이마를 박았다.
“으, 머리야······.”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온 것이다. 성우는 손을 움직여 허리춤의 핸드 캐논을 잡았다.
덜컥一
노크도 없이 급히 문이 열렸다.
“저, 성우씨!”
경수였다. 성우는 당황했다. 찾아오는 사람을 죽이라고? 설마 그게 경수? 그럴 순 없었다.
“어, 그게······.”
경수는 험학 표정의 성우와 그 앞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해롱거리는 대산맥의 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꼭 성우가 한 대 친 것 같은 상황이었다.
“아, 제가 실례를 했나요?”
“경수씨······ 무슨 일입니까.”
성우는 경계심을 억누르며 물었다.
“정훈 씨가 찾아왔습니다. 크루세이더 팀도 다 함께 왔는데, 급한 일이랍니다. 빨리 좀 내려와달라고······.”
예정된 방문자는 경수가 아니라 정훈이었다. 그렇다면 죽여야 할 사람도······.
그런데 대체 왜?
“이딴 식이면 결국 가지고 노는 건, 다르지 않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