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55) 워싱턴, 함대 강탈 - 1
워싱턴 D.C의 이스트 포토맥 공원, 한때는 공공 수영장과 조깅 코스가 있는 평범한 시민공원이었지만, 지금은 비행선들이 이착륙하는 ‘도크(Dock)’ 로 바뀌어 있었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들이 공원 위를 뒤덮고 있었으며 비행선들이 그 구조물 위에 착륙하는 중이었다.
- 전 함대 도킹 후 ‘2급 준비태세’를 유지하라.
포토맥강이 마주 보이는 3번 도크에 방송이 울렸다. 그 방송은 모든 비행선에서도 똑같이 재생되고 있었다.
- 다시 한번 알린다. 전함대 도킹 후 ‘2급 준비태세’를 유지하고 관제탑의 명령을 기다려라.
“······예, 알겠다고요. 몇 번째야? 올 해 제일 많이 들은 말 같네.”
워싱턴 함대의 3번 함, ‘Lincoln’의 선루 갑판수들은 거의 5시간째 지루한 대기를 하고 있었다.
무려 4시간 동안 출격을 준비했는데, 30분 전에 취소 명령이 떨어진 뒤 내리 대기 중인 것이다.
“이봐 데이비드, 방송에서 저렇게 똑같은 말만 반복되는 이유가 뭔지 알아?”
갑판장의 물음에 갑판수 데이비드는 고개를 저었다. 워싱턴 함대의 하급 승무원들은 작전이 일시 중단된 이유를 전해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에도 온갖 소문이 돌았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소문으로는 베이커 제독 쪽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거 아니에요? 월터가 그러는데······ 함교 쪽에서 흘러나오는 말 들어보니까 제독 함대가 침몰한 것 같다고 하던데?”
데이비드가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갑판장이 코웃음 쳤다.
“전부 낭설뿐이야. 베이커 제독이 졌다고? 그것도 한국 서버로 출전한 지 반나절도 안 돼서?”
갑판장이 데이비드의 어깨를 툭 쳤다.
“필라델피아 도적 떼를 상대할 때도 단 1명의 사상자 밖에 안 나왔던, 심지어 그 1명의 사상자도 본인이 직접 쏴 죽인 베이커 제독이 반나절 만에? 어림도 없지.”
“하긴, 차라리 그 더러운 성깔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서 바다에 수장됐다고 하는 게 더 믿을만하지 않겠습니까?”
“······오, 그건 일리 있어. 베이커 제독이라면 그렇다면 아마 아틀란티스를 정복하고 올라올 거야.”
둘은 마주 보고 낄낄거렸다.
“그래서 갑판장님이 추측하는 이유는 뭔데요?”
갑판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하이퍼 게이트 쪽을 바라보았다.
우웅- 우웅-
포토맥강을 가로지르는 ‘Arland D.Williams Jr 기념 브리지’ 위에는 3개의 하이퍼 게이트가 작동하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워싱턴 함대는 30분 전 에 저 구멍을 통과하여 한국 서버에 도착했어야만 했다.
“관제탑에서 똑같은 말만 계속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우리도 좆도, 하나도 모르겠다!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아마도 베이커 제독 쪽에서 제대로 보고를 안 하는거야.”
“네? 왜요?”
갑판장은 하이퍼 게이트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미 전쟁을 끝낸 거지.”
그의 말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벌써요?”
“이봐, 무려 베이커 제독이라고! 운이 좋아서 명성 좀 얻은 아시아의 애송이와 견줄 수 있을 것 같나?”
“음, 그래도 하루도 안 돼서······.”
“쉽게 설명하면, 근대화 보병이 원시인 때려잡듯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원시인이 지키고 있던 진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혼자 독식하기 위해 보고를 안 하는 거야.”
갑판장은 제멋대로의 추측을 믿고 있는 듯했다.
“정말 그럴까요?”
“이거 확실하다. 두고 보라니까?”
그가 베이커 제독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만, 베이커 제독이 임시 의회를 장악한 이후에는 노골적인 찬양을 서슴지 않았다.
우우우우-
“······어?”
그때, 하이퍼 게이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작동하고 무언가 나오려는 것이었다.
그 근처에 정지 비행 중이던, 경계 임무의 비행선이 빠르게 고도 상승하여 자리를 피했다.
“갑판장님 저길 보세요! 게이트가 작동합니다! 반대쪽에서 문을 연 걸까요?”
“오, 뭐야······ 베이커 제독이 그 거대한 나무를 통째로 뽑아서 가져오는건가?”
하지만 게이트가 완전히 개방되는 순간,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되는 장면이 펼쳐졌다.
쩍! 쩍! 쩍! 쩍! 쩍!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쏘아져 나와, 하이퍼 게이트 근처를 비행 중이던 비행선의 선체 곳곳에 처박혔다.
“저게······ 뭐지?”
그건 쇠말뚝 같은 것이었는데, 그 끝에는 녹색 넝쿨이 달려 있었으며, 넝쿨은 하이퍼 게이트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넝쿨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꽈드드드!
하이퍼 게이트 너머에서 무언가 엄청난 힘이 넝쿨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비행선이 게이트를 향해 기울어졌다.
“안 돼! 끌려간다!”
“당장 줄을 끊어!”
이대로면 하이퍼 게이트로 빨려 들어갈 것이었다. 비행선이 전속력으로 후진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트, 틀렸어! 꽉 잡아!”
결국, 이렇다 할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하이퍼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한국 서버로 강제로 끌려가 버린 것이다.
마치 카멜레온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파리를 보는 것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행선이 사라진 직후, 3개의 하이퍼 게이트를 통과하여 등장한 건, 베이커 제독의 함대의 영광스러운 귀환이 아니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수십 마리의 ‘본 와이번’이, 발에 온갖 시체와 뼈 무더기를 움켜쥔 채, 포토맥강 위로 쏟아져 나왔다.
“허······.“
갑판장의 얼굴 위에 어려 있는 뿌듯함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로 짙은 그림자가 번져나갔다.
- 전 함대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당장 출격해라! 당장 날아올라! 젠장!
사이렌과 함께 비상 출동 명령이 떨어졌지만, 방금 하이퍼 게이트 안으로 끌려 들어간 경계 임무의 비행선을 제외한다면, 모든 함대가 도크에 정박 중인 상태였다.
날아오르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하늘을 장악한 괴물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도크 위로, 비행선 위로, 시체가 떨어졌다. 그리고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거대한 폭음이 워싱턴을 울렸다.
* * *
한편, 하이퍼 게이트 너머, 창원에서도 중대한 작전이 진행 중이었다.
“······온다!”
인호와 세계수 진영의 플레이어들은 하이퍼 게이트 너머에서부터 팽팽하게 당겨진 넝쿨을 바라보며 전투 준비 태세를 갖췄다.
마치 작은 호수 안에 던져 넣은 낚싯대에 거대한 무언가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오는 즉시 올라타서 점령해야 합니다! 선루 정리는 2팀에 맡기고 1팀은 함교를 점령하십시오!”
하지만 월척을 앞두고 설렘보다는 걱정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넝쿨 끝에 매달린 채 튀어나올 물건이 수십 명의 적이 탑승해 있는 엄청난 크기의 비행선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새삼 세계수가 사기긴 하네. 군함을 통째로 훔쳐오다니······.“
이런 무지막지한 작전이 가능한 건 모두 세계수에서 떨어져 나온 특수 아이템 ‘세계수의 넝쿨’ 덕분이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세계수의 넝쿨
- 등급 : 신화
- 분류 : 특수 장비
- 효과 : 넝쿨 한쪽을 어딘가에 묶고, 다른 한쪽을 물체에 연결하면 강력한 힘으로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물체라도 세계수의 넝쿨에 묶이는 순간, 딸려 올 수밖에 없었다.
- 곧 하이퍼 게이트가 폐쇄됩니다. (00:07:49)
하지만 하이퍼 게이트라는 물건이 무한정 열어 둘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욕심만큼 함대 전체를 훔쳐올 수는 없었다.
퉁—
“나왔다!”
“진입하라!”
마침내 첫 번째 하이퍼 게이트에서 비행선이 튀어나왔다. 세계수 진영의 플레이어들은 일사불란하게 비행선 위로 뛰어들어, 혼란에 빠진 승무원들을 제압, 배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반파된 상태의 2대까지, 총 3대의 비행선이 차례차례 한국 서버로 배송되었다.
* * *
성우는 정박 중이던 워싱턴 함대를 폭격함으로써 손쉽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W·P·U 최대 전력인 워싱턴 함대가 전멸했다고 해도W·P·U 전체가 무력화된 건 아니었다.
“지상군인 ‘캐피털 가드’가 움직일 겁니다. 그전에 러브 의장을 구출해야 합니다.”
조나단은 창원 전투에서 미국 서버 커뮤니티와 연결된 핸드폰을 얻은 뒤, 비밀리에 측근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결과 러브 의장과 그 측근들이 억류된 곳을 알아낼 수 있었다.
“우와 미국이다!”
한호는 감탄하며 발아래의 낯선 땅을 둘러보았다. 분명 익숙함과는 거리가 먼 이국적인 느낌의 도시이긴 했다.
“미국······ 근데 별거 없네?”
한때 세계 최강국의 수도로써 남다른 찬란함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그저 상처로 가득한 도시일 뿐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하나 보였다. 워싱턴의 중심지, 국회의사당 주변에 정체불명의 건축물들이 솟아나 있다는 것이었다.
“어라 저건 뭐죠?”
한호가 그것들을 가리켰다. 거대한 크기의 반듯한 사각형의 석조 건물이 었는데, 벽면에 온갖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 게 특징이었다.
그건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었으며 게임이 시작된 이후에 지어진 게 분명했다.
‘저게 드워프의 기술?’
W·P·U는 비행선부터 시작해서 온갖 특이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정보마다 ‘드워프’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성우는 그 점이 신경 쓰였다.
드워프(Dwarf)는 판타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종족이었다. 북유럽 신화에서 기인했는데, 키가 작은 난쟁이이며 손재주가 아주 좋아 남다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묘사된다.
“아, 저기가 드워프 공방입니다. 마법이 담긴 각종 무기를 만들어내죠. 비행선도 저기서 제작하는 겁니다.”
조나단의 입에서 나온 설명 역시 ‘드워프’라는 단어를 동반했다.
“드워프라면 설마, 난쟁이 종족을 말하는 건가?”
성우는 자신이 진행 중인 ‘신화 퀘스트’가 떠올랐다. 앞으로 세계수가 ‘완성 단계’가 되면 ’용인족(龍人族)’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설마 그런 신화 퀘스트를 끝내고 새로운 종족 특성을 얻은 걸까?
“아, 그건 별명일 뿐입니다. 100명의 대장장이가 모인 허스트 공방이라는 곳인데, 시너지 효과가 드워프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워싱턴에는 드워프라는 종족은 없었다.
일행은 이내 ‘가필드 공원 감옥’ 인근에 착륙했다. 감옥 자체에도 경비가 철저할 테니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보다 은밀하게 습격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이었다.
그런데 감옥 건물에 도착했을 때, 예상 밖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라? 뭔가 단단하게 지키고 있는 느낌이 아닌데요?”
한호의 말처럼 감옥 곳곳이 뜯겨나가 있었다. 방금 전투가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쭉 훑어본 조나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맙소사, 아군입니다. 아군이 먼저 도착해 있습니다.”
조나단의 연락을 받은 뒤, 러브 의장을 지지하는 이들을 다시 밀집하는 중이라고 했는데, 포토맥강 전투 소식이 퍼지며 일찌감치 행동에 나선 모양이었다.
“어‘? 조니!”
그들이 조나단을 알아보았다. 같은 세력의 동료들인 모양이었다. 조나단은 한 백인 남자와 포옹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운이 좋았어. 날 도와준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나이 지긋한 백발의 백인 여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녀가 바로 러브 의장인 듯했다.
“케이지 팀장, 고생했어.”
그녀의 주름진 눈매에서는 명성에 걸맞은 힘이 느껴졌다. 강단과 함께 자애로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피부도 생기 넘쳤는데, 감옥에 억류된 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초췌한 모습은 없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잘 대처하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잘못된 정보 때문에 많은 이들이 베이커 제독에게 돌아섰지만, 진실이 밝혀지면 상황이 다시 바뀔 겁니다.”
러브 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바뀌고 있다네.”
그녀의 시선이 조나단의 어깨를 지나 성우 일행에게 닿았다. 조나단이 러브 의장에게 성우 일행을 소개해 주었고 러브 의장이 걸어와 성우 앞에 섰다.
“자네에게 어떤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군. 물론 말의 감사보단 물질적인 보상이 신사적인 것이겠지?”
성우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러브 의장이 이어서 말했다.
“나와 같이 우리의 국회로 가주게. 그곳에 있는 잘못된 사상이 있는 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걸······.“
그녀는 익히 듣던 대로 전 세계 플레이어의 통합을 주장했다.
글쎄, 혼자의 힘으로 살아남아 온 성우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의사당으로 가는 건 찬성이었다. W·P·U의 핵심을 단번에 무너뜨릴 기회였으니 말이다.
* * *
W·P·U, 정확히 말해서 ’미국-1서버’의 플레이어들은 생각보다 약한 편이었다.
“중심부를 지키는 정예병 치고는 평균 레벨이 낮아 보여요.”
지수의 직감대로, 의사당을 지키는 캐피탈 가드는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성우의 언데드 군단이 밀고 들어가자 파도 앞의 부초처럼 휩쓸려 버린 것이다.
“미국 1서버는 사실상 그 함대가 전부였네요.”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러브 의장의 리더십이 잘 통한 덕분에 초기부터 ‘통합 세력’을 형성했다.
그렇기에 플레이어 간의 이권 다툼이 현저히 적은 편이었고, 당연하게도 전투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이른 평화 때문에 제대로 된 전사가 없다.’
또한, 일명 드워프로 불리는 ‘허스트 공방’의 기술력 덕분에 직접 싸우기보다 각종 병기를 활용한 일방적인 전투를 벌여 왔다.
이로써 많은 생존자를 바탕으로 한 풍족한 생활 기반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되, 개개인의 무력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일 수밖에 없었다.
그 한계점은 오늘이 되어서야 여실히 드러났다. 함대가 무너지는 순간, 단 몇 명의 강자에게도 무력하게 심장을 내주고 만 것이 었다.
“······컥!”
의사당 입구를 지키고 있던 마지막 가드가 쓰러졌다.
덜그럭! 덜그럭!
성우 일행과 러브 의장 세력은 스켈레톤 군단을 대동하고 백색의 돔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지금도 긴급회의가 진행 중일 걸세.”
“워싱턴 함대가 무너진 지가 20분이 넘었는데, 아직도 여기서 버티고 있다는 겁니까?”
성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의사당 내부에 비상 상황을 대비하여, 탈출용 하이퍼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는데, 워싱턴 함대의 잔존 병력과 캐피탈 가드가 그게 가동될 때까지는 버텨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데 이 정도 격차가 날 줄은 나도 몰랐다네.”
러브 의장은 혀를 찼다. 자신이 일궈 놓은 W·P·U의 크나큰 빈틈을 발견했으니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철컥!
이내 거대한 문이 열리자 영화 속에서나 보던 상원이 드러났다.
상단 곳곳에 앉은 미국의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황과 경멸이 어려 있었다.
“······이, 이 무슨!”
“러브 의장! 젠장, 이 신성한 공간에 감히 시체 군단을 끌고 들어오다니!”
“이 배신자!”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러브 의장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임시 의회의 구성원들을 둘러보며 목청을 높였다.
“모두 정신 차리시오!”
“······.”
방금까지만 해도 감옥에 억류되어 있던 그녀의 한 마디에, 좌중은 순식간에 침묵했다. 평소, 그녀의 입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여기, 메신저호의 희생자로 알려진 조나단 케이지 외무 1팀장과 메신저호를 공격했다고 알려진 한국 서버의 네크로맨서가 함께 왔으니, 모두 내 말 들으시오!”
그녀의 말에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정말 케이지 팀장이잖아?”
“오, 맙소사 무슨 상황이야 이게······.“
그들로서는 황당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믿고 있던 사실이 뒤집히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러브 의장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베이커 의장은 오래전부터 임시 의회 장악을 위한 계획을 꾸며왔습니다!“
거기까지는 모두가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또한, 흔한 권력 투쟁의 일환이기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메신저호에 자신의 부하를 심어두었으며 한국 서버에 도착했을 때, 메신저호의 승무원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메신저호를 추락시킨 뒤, 마치 네크로맨서의 소행인 것처럼 조작했습니다! 우리 모두 속은 겁니다!”
러브의 주장은 조나단과 네크로맨서가 나란히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입증 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
“······그게 모두 조작이었다고?”
“윌리엄 베이커 그 자식! 그럴 줄 알았어!”
모두가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오로지 한쪽 구석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기지 마라!”
“모두 속지마라!”
“저 사람이 조나단 케이지는 맞는가? 도플갱어의 변신 마법이 분명하다! 도미닉 러브는 속고 있다!”
그들만 해도 적지 않은 수 였다.
“······베이커 제독의 최측근들입니다.”
조나단이 옆에서 속삭였다. 그때, 베이커의 측근 사이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베이커 제독은 아직 멀쩡히 살아 계시다!”
엄청난 고성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양복을 빼입고 있지만, 보디빌더처럼 우락부락한 남자였다. 그는 백인 특유의 엉덩이 턱을 씰룩거리며 다시 목에 핏줄을 세웠다.
“그분은 우리의 또 다른 동맹인 일본 서버에서 힘을 보존한 뒤, 곧 한국 서버에 복수할 것이다! 굽히지 마라!”
그는 흥분을 이기지 못한 듯, 러브 의장 앞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양손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지만 러브 의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고든, 무의미해. 이번에도 무의미한 희생이야.”
고든이라고 불린 이는 콧방귀를 끼었다.
“무의미한 희생? 러브, 그게 네 선거 캐치프레이즈인가? 인도주의에 매몰되면 강한 미국을 되찾을 수 없다! 저런 시체 조종사의 지배 아래 있게 될 뿐이다!”
그는 임시 의회를 둘러보며 호소하듯 소리쳤다.
“우리는 무너졌지만, 여전히 미국이다! 역사상 유례없는 자유의 국가란 말이다! 이 자리에서 자유와 자존심을 한 번에 잃을 텐가?”
조나단이 한숨을 쉬며 귓속말을 했다
“······베이커 제독의 오른팔, 아서 고든입니다. 우리 서버 랭킹 7위의 강자인데, 엄청난 완력의 소유자인 데다가 성질이 더러우니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특히 조심하시죠.”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고든이 성우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썹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조나단, 재수 없는 새끼! 우리의 자유를 갉아먹으러 들어온 좀비한테 무슨 귓속말을 해대는 거지? 네놈은 미국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나?”
고든이 흥분한 불도그처럼 씩씩거렸다. 이에 성우는 피식 웃어버렸다. 고든의 눈매가 성우에게 향했다.
“······웃어?”
“자존심은 절대적인 게 아닌데, 네 자존심이 그 큰 콧대만큼 높다면, 내가 강제로 낮춰 줄 수도 있어.”
성우의 조소가 그 짐승의 마지막 이성을 끊어놓았다. 놈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그 앞을 막고 서 있던 러브 마저 불안함을 느끼고 옆으로 물러섰다.
“······이봐, 고든 진정해.”
러브의 만류는 소용없었다.
“닥쳐!”
놈이 바닥을 박차고 성우에게 달려들었다. 제 딴에는 한 번에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수가 칼을 뽑았다. 성우 옆에 서 있던 조나단 역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손을 뻗어 바닥의 대리석을 조각내어 들어 올렸다.
쩌一 억!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거구는 짐승처럼 달려들어 대리석을 단숨에 쪼개어버리고 성우의 머리를 향해 망치같은 주먹을 휘둘렀다.
촤-악!
충돌의 순간, 무언가 일어났고, 다시 조용해졌다.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려나?”
고요 속에서 성우가 말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듯했다.
“어어어······.”
맹렬하게 돌진하던 거구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큼직한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조나단에 의해 갈라진 대리석 바닥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성우의 손에는 어느새 거대한 흑색의 낫이 들려있었다. 무력이 약한 서버의 랭킹 7위 따위, 지옥 같은 시나리오를 밟아온 한국 서버의 랭킹 2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성우가 그림리퍼를 어깨에 걸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혹시 이 중에서 아직 그 옛날의 자존심이 아직 드높아서, 조금 조절할 필요가 사람이 있나?”
그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성우가 상원 의장석의 테이블에 걸터 앉았다. 임시 의회의 구성원들이 입을 쩍 벌린 채, 성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땅에서 일으킨 전쟁 범죄에 대해, 그리고 합당한 보상 방법에 대해서 논의해볼까?”
아무리 성우에게 우호적인 러브 의장이 힘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