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 작가주 : ‘윌리엄 제독’이라는 호칭을 ‘베이커 제독’으로 수정했습니다. (라스트 네임과 직책을 붙였어야 했는데 퍼스트 네임과 직책을 붙여서 쓰고 있었네요.)
54) 창원, 대규모 함대전 - 2
W·P·U 소속 윌리엄 베이커 제독의 기함 ‘Bird of Washington’의 함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오로지 통신 장교의 고함만이 울리고 있었다.
“······블루 윙! 응답하라! 응답하라!”
하지만 무전기 아이템에서 들려오는 건 잡신호뿐이었다. 적의 선내 침투에 대응하겠다는 보고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응답이······ 없습니다.”
함교에서 보이는 3번 함 ‘Blue Wing’은 전열을 이탈하여 서서히 뒤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치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블루 윙을 덮친 거대한 본 와이번은 포격으로 쫓아내 버렸지만, 이미 상당한 숫자의 언데드 군단이 선내로 침입한 뒤였다.
저 안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들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
그 불안한 고요 속에서, 60대 후반의 윌리엄 베이커 제독은 담담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어? 블루 윙이 다시 움직입니다!”
표류하듯 천천히 가라앉고 있던 블루윙의 고도가 조금 상승했다. 그건 분명 인위적인 조작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다시 연락 시도해보겠습니다!”
그 보고에도 제독은 눈썹을 조금 꿈틀거렸을 뿐, 여전히 호밀밭을 지키는 노인같이 한가로워 보였다.
그는 천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느릿느릿한 어조로 한 마디 내뱉었다.
“격추해.”
“······예?”
그 한 마디에 함교의 모든 승무원이 돌아보았다. 그 누구도 제대로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침투를 허용했다고 한들, 비행선이라는 귀중한 자산과 수십에 달하는 승무원의 목숨을 버리겠다는 게 아니던가?
“······.”
모든 승무원이 머뭇거리자 베이커 제독의 눈썹이 두 번 꿈틀거렸다. 그건 그가 진정으로 언짢을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격추해. 네 머리에 구멍을 뚫기 전에, 당장.”
그의 어조는 여전히 느릿느릿했지만, 그 안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전 승무원이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저, 전 함대에 저, 전한다! 블루 윙을 향해······.”
하지만 늦었다. 별안간 블루 윙의 포구가 기울어지며 불을 뿜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4발의 포탄이 기함의 오른쪽에 정렬해 있던 2번 함에 명중했다. 하부 갑판이 벌어지며 나무 조각이 가을 낙엽처럼 휘날렸다.
“어, 어?”
2번 함이 궤도를 잃고 기울어지며 6번 함과 충돌했다. 두 척의 함선이 전열을 이탈하여 몇십 미터 뒤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
모두의 사고가 정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째서 블루 윙이 아군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 순간, 베이커 제독이 처음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 놓여 있던 4자루의 장총 중, 한 자루가 정전되었다.
타—앙!
동시에 포격 명령을 내리다가 멈춘 통신 장교의 뒤통수가 뚫렸다. 그가 계기판에 머리를 처박자 그 옆에 있던 승무원이 즉시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저, 전 함대! 블루 윙을 포격하라!”
그와 동시에 나머지 5척의 함선이 블루 윙을 향해 포탄을 쏟아부었다.
그 총공세에 반파된 블루 윙은 균형을 잃었고, 저 아래로 밀려나 버렸다.
“브, 블루 윙 추락합니다!”
저 정도로 파괴되었으면 엔진도 손상되었을 터, 다시 날아오를 일은 없었다.
베이커 제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청한 것들······ 언데드라고 전부 너희처럼 멍청할 줄 알았나? 저것들은 인간이 조종하는 언데드다. 그것도 너희보다 몇 배는 똑똑한 놈이 조종하고 있겠지.”
그의 등 뒤로 4자루의 장총이 모두 떠오르며 일발장전되었다.
“자, 지금부터 쓸모 있는 부품만 남긴다.”
승무원들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 * *
성우는 본 와이번 알파메일을 탄 채 높은 고도로 치솟았다. 블루 윙을 공중에서 습격한 직후, 집중 포격을 당했지만 아슬아슬한 순간에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 숨은 채로, 몇 분째 이상한 작업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소환.”
그의 한 마디에 본 와이번 알파메일의 넓은 등뼈 위로 해골 한 마리가 소환되었다. 그건 빅터였다.
“딱딱······.”
빅터는 어딘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소환되자마자 철퍼덕 주저앉을 정도였다.
“저, 주인님? 딱?”
하지만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공허의 안식처’로 귀환 처리되어 버렸다.
“소환.”
그리고 다시 소환되었다. 벌써 11번째의 재소환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눈 길 한 번 주지 않고 그저 허공을 바라 보고 있었다.
“딱······.”
“됐다.”
그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싱긋 웃었다.
- 팀플레이로 인해 ‘시너지 효과’가 부여됩니다.
[시너지 목록]
5) 죽음의 하모니(히든)
- 구분 : 직업 시너지
- 조건 : ‘리치’ 단계의 죽음 마법 사용자 3명 이상
- 효과 : 전용 스킬 ‘궁극’ 단계로 격상(랜덤 1종)
* 플레이어 한정
- 〈뼈 무기 제조(숙련)〉 스킬이 일시적으로 〈뼈 무기 제조(궁극)〉 등급으로 격상됩니다.
성우는 랜덤 스킬 강화 중에서 〈뼈 무기 제조(궁극)〉을 얻기 위해서 시너지 발동 조건의 허점을 노렸다.
〈죽음의 하모니(히든)〉시너지는 3명의 리치가 한 팀에 있을 때 발동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빅터의 소환과 귀환을 반복시키면, 시너지 ‘발동’과 ‘취소’가 거듭되며 시너지 적용 대상 스킬이 계속해서 ‘재설정’ 되는것이었다.
“······딱딱.”
그리고 무려 11번 만에 원하는 스킬을 얻을수 있었다.
“그럼 서, 설마! 앞으로도 이렇게 해야 합니까? 딱, 멀미가 나서······.”
그 말에 성우가 빅터를 바라보았고 빅터는 움찔했다.
“멀미가 나?”
“그렇습니다!”
“너는 멀미가 나도 토할 게 없잖아. 멀미 난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데?”
“······그, 그렇게 치면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딱!”
“······.”
성우는 빅터가 보기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빅터는 성우의 침묵 앞에 자신이 말실수한게 아닌가 하고 노심초사했다.
“이제 구름 밖으로 나가자.”
본격적인 함대전을 펼쳐볼 시간이었다.
후우우우-
본 와이번 알파메일이 바람을 밀어내며 순식간에 구름 위로 상승했다.
성우는 드높은 하늘 위에서 시퍼런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베이커 함대가 저 아래에 자그마하게 보였다.
‘2대가 전열 이탈, 남은 건 5대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베이커 함대의 전열이 상당히 흐트러진 상태였다. 성우가 한 대를 점거한 뒤, 다른 한 대에 포격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놈들은 후퇴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본 와이번 무리를 바라보며 여전히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궤멸시킬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마음껏 부숴봐라.”
성우는 북쪽 하늘에 있는 자신의 군단을 조종했다. 십여 마리의 본 와이번이 상하좌우로 넓게 퍼졌다. 적의 화력 공세에서 최대한 피해를 덜 받기 위한 대열이 었다.
그에 따라 베이커의 함대 역시 조금씩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넓은 면적에 포격을 퍼붓기 위한 위치 변환이었다. ‘전열함대’가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런 광범위한 공격 범위였다.
‘하지만 역시 본 와이번에 비하면 느리다.’
성우는 베이커 함대의 약점을 확인했다. ‘비행석’의 힘으로 무게가 줄어든 상태라고 하지만, 그 안에 탑재된 화물과 승무원의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지 상태에서 기동할 때는 느릴 수 밖에 없다.’
가속도가 붙은 상태라면 30노트(55.5km/s)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겠지 만, 저렇게 정지해 있다가 다시 움직일 때는 굼뜰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한 개씩 부순다.’
성우는 재차 명령을 내렸다. 모든 본 와이번들이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베이커 함대의 맨 왼쪽 비행선을 목표물로 삼은 것이었다.
물론 베이커 함대도 바보가 아니었다. 목표물이 된 맨 왼쪽의 비행선이 뒤로 서서히 빠지며, 오른쪽 비행선들이 서서히 전진했다. 마치 나침반 바늘이 천천히 돌아가는 것 같은 구도였다.
그렇게 기함을 중심축으로 두고 대열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본 와이번 무리 전체를 포격 범위 안에 가둘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수십 개의 포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쾅! 콰—과—광! 쾅! 콰—광! 쾅!
하늘을 뒤흔드는 엄청난 진동과 함께 산발적인 폭음이 울렸다. 단 한 번 일제 사격이 벌어졌음에도, 그 충격에 베이커 함대의 전열이 10미터 정도 뒤로 밀려나버렸다.
다양한 정령의 힘이 담긴 형형색색의 포탄이, 무려 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단 3초 만에 본 와이번 무리를 집어삼켰다.
쿠—구—구—구—구—
그 포격의 영향권은 본 와이번 무리의 전체를 뒤덮은 것도 모자라 시야에 담을 수 있는 북쪽 하늘의 3분의 1가량을 완전히 가득 채워버렸다.
“미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막강한 화력이었다.
온갖 색깔의 폭발이 뒤엉키며 거대한 안개층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 밖으로 박살 난 뼛조각이 이리저리 튕겨 나가는 게 보였다.
말 그대로 궤멸이었다. 성우의 모든 군단이 단 한 순간에 증발해버렸다.
“신났군.”
베이커 함대의 선루 갑판 위, 병사들이 환호하는 게 보였다. 이미 승리를 확신한 분위기 였다. 하지만 성우는 조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이를 텐데······.”
다음 순간, 형형색색의 안개층의 왼쪽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구구구구구-
그건 마치 수평으로 움직이는 토네이도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가장 왼쪽의 비행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갑판 위의 병사들은 그제야 환호를 멈추고 저 멀리, 궤멸한 적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그게 뭔지 몰랐다.
마치 안개층 안에 있는 거대한 괴물이 촉수를 뻗어낸 것만 같았다.
성우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작게 읊조렸다.
“뼈 무기 제조.”
그건,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의 ‘파편’이었다. 그것들이 이리저리 뒤엉킨 채, 마치 메뚜기 떼처럼 허공을 활공했다. 그리고 가장 왼쪽의 비행선을 향해 몰아쳤다.
베이커 함대는 서둘러 후속 공격을 준비했지만, 자신들의 포격으로 발생한 두꺼운 안개층이 시야를 가리고 있던 상태였기에 대응이 늦고 말았다.
그렇게 충돌 직전의 순간, 그 뼈 토네이도 중심에서 분명한 형태를 가진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건, 주먹이었다.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주먹······.
콰—앙!
그 주먹이 비행선 한 척을 후려쳤다. 분명 선체를 감싸고 있는 보호막을 내리쳤거늘, 비행선이 통째로 뒤로 튕겨 나갔다. 동시에 선체 곳곳에 균열이 일어났다.
쩌저저저一
그리고 중심을 잃고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선루 갑판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주인님! 으하하! 저들이 우왕좌왕합니다! 딱딱!”
나머지 비행선들이 서둘러 포구를 돌렸지만, 다른 비행선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기에 원활한 사격이 불가능했다.
전열(戰列)의 약점이 바로 여기서 드러났다. 단단한 방어력과 화력으로 전방의 적을 궤멸시키기에는 최적화되어 있지만, 적이 아군 대열 안으로 들어올 때는 그 무엇보다 느리고 비효율적이었다.
쾅! 쾅! 쾅!
몇 개의 포구가 어떻게든 사격 각도를 만들어내어 견제 사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인의 손’이 워낙 부피가 큰 만큼, 어떻게 쏘더라도 명중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파괴되었다.
퍼— 버— 버—
그런데 분해되는 순간, 거인의 손은 기이한 움직임을 펼쳤다. 마치 피를 흩뿌리듯, 부서져 내리는 제 파편을 베이커 함대 위로 내던지는 게 아닌가?
후두— 후두두—
그렇게 함대 위로 뼈, 시체, 핏물 등 온갖 끔찍한 것들이 날아들었다.
‘작전대로다.’
사실 본 와이번 무리의 등 뒤에는 ’언데드 군단’과 ‘몬스터 사체’가 가득 실린 상태였다.
그리고 ‘거인의 손’이 만들어질 때도 그 거대한 무더기 속에 뒤섞여 있었다.
이내 그것들이 비산하여 비행선의 보호막 위를 자욱하게 뒤덮는 순간, 성우가 외쳤다.
“시체 폭발!”
쾅! 쾅! 쾅! 쾅 쾅 쾅
예전에는 시체 폭발만으로는 이런 대규모 보호막을 벗겨내지 못했지만, 능력이 대폭 강화되면서 보호막이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몬스터의 사체와 함께 날아갔던 뼈 무더기가 와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덜그럭! 덜그럭!
파편에 불과했던 그것들은, 이내 검은 연기에 휩싸이며 하나로 조립되더니 육중한 몸뚱이를 일으켜 세웠다.
“으아아! 저, 저게 뭐야!”
“어서 대응해!”
시체 폭발의 충격에 넘어져 있던 갑판병들은 기겁하며 뒤로 기어갔다.
시체 폭발이 내뿜은 ‘심연의 호흡’이 갑판 위로 내려앉는 터에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또 한 번의 선내 침투를 허용하는 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압 폭발!”
성우는 일반 시체 폭발보다 4배나 강력한 ’고압 폭발’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 11개의 시체에 ‘고압 폭발’이 적용 되었습니다. (폭발 29초 전)
비행선 곳곳에 떨어진 몬스터 사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폭발까지 30초, 하지만 갑판 위에는 그것들을 처리할만한 인력은 없었다.
쿵! 쿠—궁! 쿵! 쿵!
이내, 엄청난 폭발과 함께 갑판이 풀썩 주저앉고, 훨씬 많은 양의 심연의 호흡이 선내로 유입되었다.
“딱딱? 이거, 어느 정도 끝났군요?”
그렇게 베이커 함대는 순식간에 2척의 비행선을 더 잃고 말았다. 선발대 전력의 절반을 빼앗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세계수 진영은 여느 때처럼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 * *
기함 ‘버드 오브 워싱턴’의 함교, 그곳에서는 추락하는 비행선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7번 함 ’피츠버그’ 추락합니다! 함교까지 함락당했다는······ 마지막 보고입니다.”
“마, 말도 안 돼. 지금까지 단 척도 파괴된 적 없었는데······.”
“이어서 ‘월 오브 버팔로’도 궤도를 잃었습니다. 내부로 다수의 언데드가 침투한 것 같습니다.”
연이은 절망스러운 보고 앞에도 베이커 제독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꽤 자주 눈썹을 꿈틀거렸으며 그의 등 뒤에 떠올라 있는 장총들이 때때로 연기를 뿜고 있었다.
심지어 함교 곳곳에 시체 몇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베이커 제독은 원래부터 부하를 부품처럼 여기기로 유명했다만, 이렇게 많은 숫자를 죽인 건 이번에 처음이었다.
그만큼 베이커 함대 역사상, 지금이 최악의 위기라는 뜻이었다.
“후퇴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했지만, 승무원들은 그 안에 담긴 진한 역정이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내륙에서 작업 중인 ‘하이퍼 게이트’ 쪽에 철수 명령 내려. 일단 본대 소환 작전은 보류한다.”
W·P·U 임시 의회가 공식 승인한 ‘세계수 진영 보복’ 작전은 표면상 보류,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그간 단 한 번의 패전을 겪은 적 없는 미국 서버의 함대는 너무나도 쓰라린 첫 번째 실패를 겪었다.
그리고 단순한 승패를 떠나서,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비행선을 한국 서버에 상납하고 만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W·P·U의 전력 자체가 반 토막이 나 버린 상황이었다.
* * *
베이커 제독의 함대는 패퇴했다. 네크로맨서에게 점령당하고 파괴당한 비행선을 버려둔 채, 견제 사격을 하며 전속력으로 멀어져갔다.
성우는 굳이 쫓지 않았다. 먼바다로 나아가면 성우에게 유리할 게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점령 완료예요.”
그 먹잇감은 바로 ‘하이퍼 게이트’였다.
‘공간 이동의 돌’을 통하여 창원으로 온 건 성우뿐만이 아니었다. 지수와 한호를 비롯하여 가장 레벨이 높은 20명의 플레이어가 동원되었다.
성우가 베이커 함대를 궤멸시키는 사이에 이들은 내륙의 ‘하이퍼 게이트’ 점령 작전에 나선 것이었다.
“눈치 못 채게 급습해서 처리했어요.“
지수는 칼에 묻은 피를 닦고는 고개를 돌려 하이퍼 게이트를 가리켰다.
“손을 대면 설치 완료까지 97퍼센트라고 뜨는 걸 보니까 마나를 조금만 더 주입하면 열릴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우우우-
창원 시내의 빌딩 위, W·P·U의 본 함대를 옮겨올 예정이었던 하이퍼 게이트가 가동 중이었다.
그 물건은 두 개의 쇠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평으로 박혀 있는 기둥 사이, 비행선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파란색 마법진이 그려진 상태였다.
“아, 그리고 준비해둔 체인을 꺼내주세요.”
“그건 이미 꺼내서 저기 트럭에 실어둔 상태입니다.”
인호였다. 그는 ‘진영의 금고’의 사용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의 인벤토리를 활용하여 미리 챙겨둔 ‘세계수의 넝쿨’ 아이템을 일찌감치 꺼내두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인 만큼, 전부 미리 준비해둬야죠. 이런 잡동사니 관리하는 건 제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계속 수고해주세요.”
그때, 조나단이 성우에게 다가왔다.
“정말······ 압도적이었습니다. 할 말이 없네요.”
그는 경이로운 수준의 전투를 목격했기 때문에 상당히 경도된 표정이었다. 베이커 제독의 함대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지금쯤 W·P·U 본진에도 패전 소식이 들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이 쪽 팀이 연락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면 눈치채고 대비하려고 하겠죠.”
그 말을 듣고 있던 지수가 방금 복귀시킨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럼, 기습이 되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치고 들어가야겠네요.”
지수의 말에 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걸음은 이미 하이퍼 게이트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 가죠.”
다음 전장은 미국 본토, 워싱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