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52) 영등포역, 천사 강림 - 2
천사의 강림 예정지는 ‘영등포역 상공’이었다. 사실 구체적으로 명시된 적은 없었으나 광복 길드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우리를 심판하러 내려온다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떨어지겠죠. 어차피 서울을 벗어날 수도 없으니까요.”
민흠의 말대로, 잘난 절대 종족이 서울 구석진 곳에 남몰래 강림한 뒤에, 슬금슬금 다가와 암살을 시도할 것 같진 않았다.
광복 길드의 핵심 전투원들은 그 추측을 기반으로 대응을 시작했고, 이내 영등포역 전체가 방비를 위한 작업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자, 대형 차량 들어옵니다! 비키세요!”
“물탱크는 이쪽으로 쭉 배치해!”
정훈과 민흠은 영등포역 옥상에 서서 그 모든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업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내 각 분야의 팀장들이 차례차례 올라와 경과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보급팀장이었다.
“살수차를 전부 동원했습니다. 모아둔 빗물 탱크도 전부 인근으로 옮겨두었고요.”
“잘 하셨습니다. 근처에서 더 동원할 수 있다면 싹 긁어와 주세요.”
“예. 더 확인해보겠습니다.”
서울 전역에서 끌어온 소방차들이 군데군데 들어와 있었다. 모두 만수(滿水), 물이 가득 차 있는 것들이었다.
이어서 또 다른 팀장, 경비팀장이 보고를 시작했다.
“옥상마다 빙결 및 화염 계열 마법사와 물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플레이어를 배치했습니다. 그들이 마법을 쓸 때, 살수차에서 분사되는 물과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그들을 보호할 수 있게 다수의 탱커를 배치하세요. 이번 전투의 핵심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수송팀장이었다.
“소방헬기에 물을 가득 채운 상태입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수십 톤의 물을 단숨에 쏟아부을 수 있습니다.”
“조종사들 항시 대기 해주세요.”
수송용으로 쓰이던 소방헬기들이 오랜만에 제 역할로 돌아갔다.
이렇듯, 영등포에서 끌어올 수 있는 물이란 물은 모두 이 자리에 집중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추가 사항 있으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그 모든 보고를 받은 민흠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작 이 작전을 지시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커맨더, 그런데 성우 씨는 어디 가신 겁니까?”
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대응 작전이 시작된 이후부터 성우를 보지 못했다. 다만, 나름대로 중요한 행동을 취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물을 이렇게 잔뜩 동원하는 이유······ 짐작 가십니까? 수영장도 이 정도 물은 안 쓸 텐데요?”
심지어 성우는 그저 끌어올 수 있는 모든 물을 한군데 모아서 쏠 준비를 하라고 했을 뿐, 그 물이 왜 필요한 것인지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평소였다면 이의를 제기했을 테지만, 지금은 모든 게 성우의 손에 달린 상태였기에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성우 씨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천사 진영에 소속된 만큼, 정보가 흘러 들어갈 수 있으니······ 그러니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게 안전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네요.”
절대 종족은 이 땅을 살피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장 유력한 건 제 휘하의 플레이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물론 천사의 석상을 부수면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탈출했으나 아직 ‘심판 대상자’로 등록되어 있는 상태였다.
“놈들이 아직도 우리의 눈과 입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조심하겠지요.“
약자 주제에 감히 맞서기로 작정했다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다. 눈앞의 숫자가 하염없이 떨어져 갔다. 그럴 때마다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 ‘천사 심판관 강림’까지 남은 시간(00:01:42)
이제 고작 1분여, 대기 중이던 광복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거 아니야? 뭐 해볼 겨를도 없이 그냥 꽤 하고 죽으면 어떡하지?”
“아니, 왜그런 불길한 소리를 해? 어떻게든 싸워보려고 다 모여 있잖아.”
“그런데 무려 절대 종족이잖아. 과연······ 승부가 될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이 모시던 존재가 고해온 심판이 었다. 어딘가 찝찝했다. 마치 신에게 반기를 든 이단이 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새로운 정신적 지주가 필요했다. 절대적인 존재에게 맞서 싸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지지대가 되어줄 영웅이 말이다.
“우린 몰라도 네크로맨서는 계속해서 절대 종족이랑 싸우고 있었어. 지금 여기에는 그 사람이 있잖아.”
그리고 자연스레 네크로맨서의 이름이 되새겨지기 시작했다.
“아, 생각해보면 그 잘난 절대 종족도 그 사람한테는 계속 지지 않았나?”
“맞아. 월드 퀘스트까지 열어서 징징거렸지 아마? 그런 걸 보면 절대적인 존재는 아닌지도 몰라.”
절대자라면 패배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수차례나······ 이들은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그러자 어렴풋한 용기가 피어올랐다.
“좋아. 제대로 발악해보지 뭐!”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 갔지? 계속 안 보이던데? 그래도 분명 무슨 계획······.“
그러나 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 ‘심판’까지 남은 시간 (00:00:00)
시간이 다 됐기 때문이었다.
“······시작이다.”
시간이 멈춤과 동시에 침묵이 찾아왔다.
“······.”
그리고 공기가 무거워졌다.
정확히는 공기의 흐름이 멈췄다. 그러자 세상에서 바람이 사라지고 소리란 게 증발한 것처럼 완벽한 고요가 찾아왔다.
모두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
푸른 하늘, 육중한 구름 한 덩어리가 영등포역의 상공을 천천히 지나가는 중이었다. 아직은 그 어떤 것도 이상한 게 없어 보였다.
“어,저, 저기······.”
그러나 이상 징조는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구름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그리고 이내, 구름 전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구, 구멍이다.”
누군가 작가 읊조렸다.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건, 엄청난 크기의 포탈이었다.
포탈은 문이다. 그렇다, 누군가 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문에서 무엇이 나올 것인가?
우-우-우-우-우-우-
사라졌던 바람과 소리가 돌아왔다.
우-우-우-우-우-우-
바람과 소리는 어느새 미쳐 있었다. 그것들은 잠들어 있던 태고의 본성이 깨어난 것처럼, 짐승 울음 같은 굉음이 되어 머리 위에서 날뛰어 댔다.
“······.”
이내 저쪽 세상에서 거하게 열어젖힌 문으로부터, 무언가 아주 천천히 내려 오기 시작했다. 그건······
투명하도록 새하얀 발끝이었다.
“저게 천사?”
천사가 이 세상에 발을 집어넣었다.
- ‘천사 심판관’의 강림이 시작됩니다.
* ‘천사 심판관’의 권능으로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대폭 감소합니 다. (-90%)
한국 서버 최초, 아니, 어쩌면 월드 최초로 절대 종족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윽! 모, 몸에 힘이······.”
“다리가 풀릴 것 같아.”
예정된 저주 앞에 광복 길드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지켜! 작전대로 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다리를 덜덜 떨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명령을 기다렸다.
그리고 네크로맨서를 기다렸다.
우-우-우-우-우-우-
천사의 몸이 줄에 묶인 듯, 서서히 내려졌다. 날개 따위는 없었다. 그저 거대하고, 하얗고, 밋밋하고, 부드러웠다. 갓 태어난 아이 같이 그 하얀 살 속에 분홍빛이 섞여 감돌고 있었다.
그것의 태양을 등진 채 가까워지자 엄청난 그림자가 영등포역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백색의 몸이 불러온 어둠 안에서,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들어 올려 까마득한 높이의 천사를 바라보았다.
“······아.”
천사도 플레이어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흐드러진 금발이 찬란했지만, 정작 그 얼굴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었다.
“시, 시발, 저게 천사라고? 우리가 믿었던 천사라고?”
“······말도 안 돼.”
하얗고 부드러운 얼굴에는 오로지 입밖에 없었다. 이마부터 턱 끝까지 세로로 길게 찢어진 분홍빛이 입이, 서서히 벌어지며 반투명한 타액이 질질 흘렀다.
그게 천사의 실체였다.
“지, 지금이야! 뿌려”
기다릴 수 없었다. 지체했다간 저 끔찍한 존재가 어떤 벌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
“물을 분사해!”
네크로맨서가 지시한 대로, 사방에 배치된 고압 호수가 물을 뿜어댔다. 엄청난양이었다.
이어서 누군가가 조종하는 물의 정령들이 뚜껑이 열린 물탱크에서 파도와 같은 물길을 일으켜, 천사를 향해 진군시켰다. 마법 한 번에 수 톤의 물이 치솟았다.
“화염 마법을 허공에 쏜다!”
“목표는 놈이 아니라 허공이다! 물을 증발시켜라!”
이어서 화염 마법이 작열했다. 엄청난 양과 뒤엉키며 습식 사우나 같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쏴아아아—
그러나 모두 헛수고였다. 애초에 그깟 물이 어떤 피해를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힘으로 물을 분사하더라도 천사의 몸 근처에서는 힘을 잃고 흩어졌다. 주변의 공기와 마나가 모두 천사의 것이었다.
이곳을, 놈이 통제하고 있었다.
공중에 서 있는 천사의 어깨 위로 무지개가 펼쳐졌다. 정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성우 씨······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뭘 하려거든 하든 빨리 좀 해주십시오.”
그때, 그것이 목소리를 내었다.
「너희들은 오늘, 가늘었던 삶의 끝에 선다.」
그 순간, 가장 가까이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몸에 힘을 잃고 자지러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랐다. 그저 전지전능에 가까운 권능처럼 느껴졌다.
“무, 무슨? 대체 저, 저걸 어떻게······.”
“틀렸어 우린 다 죽었어!”
천사는 왼손을 앞으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자신의 주변을 가득 메운 물방울들이 허공에 멈춰 섰다.
신이 기적을 행하는 것만 같았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하여라.」
더 넓은 지역의 더 많은 이들이 픽픽 쓰러졌다.
“뭐에 죽는 거야? 모, 모두 뒤로 물러나!”
천사의 힘이 미치는 면역이 점점 넓어져 가는 중이었다. 죽음이 영등포를 천천히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절망은 그보다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 그냥 도망쳐!”
“안 돼! 계속 물을 분사해!”
“팀장님 미쳤습니까?”
살고자하는 의지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입 닥쳐! 물을 쏴!”
“대체 언제까지 그걸 합니까! 다 죽습니다!”
“여기서 도망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은 그가 유일한 답이라고!”
“그래서 그 사람이 대체 언제 온다는 겁니까! 예?”
바로 그때, 그가 나타났다.
쿵! 쿠구구구!
천사의 발아래, 땅이 폭삭 주저앉았다. 지하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푸른 불꽃 한 줌이 치솟았다.
거대한 천사에 비교하면 너무나 보잘 것없는 움직임이었지만, 모든 이들의 시선이 바로 그 한 점에 몰렸다.
“······왔다!”
한국 서버에서 절대 종족의 세력을 지워버린 장본인, 천사의 대적자, 네크로맨서였다. 그가 지상에 우뚝 선 채, 천사를 올려보았다.
“우리 땅에 온 걸 환영한다.”
그의 왼손에는 붉은 기운을 내는 보석이, 그의 오른손에는 푸른 기운을 내는 보석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가 등장하자 일대의 물이 부글부글 끓으며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 자체가 엄청난 열기를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사의 긴 입이 꿈틀거렸다.
「죄악의 존재, 넌 나에게 미치지 못 한다.」
“그래? 근데 널 상대할 건······ 내가 아니야.”
성우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에 들린 푸른 기운의 보석 ‘프로즌 시드’를 천사의 발 바로 아래, 바닥에 내리꽂았다. 동시에 바닥을 박차며 몸을 뒤로 내뺐다.
쩌一엉!
보석이 바닥에 꽂히는 순간, 바닥에서 얼음 기둥이 치솟으며 ‘프로즌 시드’를 품었다. 그 순간, 일대의 온도가 급랭하기 시작했다.
쩌저저저一
- ‘프로즌 시드’가 작동합니다.
* 일대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합니다.
* 강력한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순식간이었다. 분사해두었던 물방울 들이 얼어붙으며 급속도로 팽창했다. 엄청난 양의 물이, 아니, 얼음 덩어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계속 뿌려!”
“분사해!”
“그리고 증발시켜!”
천사가 권능을 발휘하여 자신의 주변에 물방울을 멈춰 두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놈의 몸 주변에 떠 있던 수십, 수백 톤의 물과 수증기가 일제히 얼어붙으며 천사의 몸을 구속복처럼 옭아맸다.
물을 뿌리고 증발시켰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구구구구구-
눈보라가 일며 영등포역 상공에 거대한 빙하가 생성되었다. 천사의 몸뚱이가 그 빙하 안에 통째로 파묻혔다. 몸을 움직일 틈이 없었다.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 ‘프로즌 시드’가 작동 중입니다.
* 해당 지역(서울)에 빙하기를 일으킵니다. (49:59:59)
* 작동 정지를 원한다면 ‘타워’에서 분리해야 합니다.
「감히, 나에게 이딴 장난을······.」
놈의 긴 입이 빠르게 굳어갔다.
“그러니까 여행 전에 현지 날씨 정도는 확인했어야지. 한국의 겨울, 뼛속까지 시려 울 거야.”
거대한 천사가, 통째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