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52) 영등포역, 천사 강림 - 1
천사 강림 10시간 전이었다.
“측정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남산 부근, 현재 영하 34도로 측정됩니다! 중심부는 근접하여 추가 정밀 측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광역감시팀이 보고해왔다. 남산 상공에 뜬 헬리콥터에서 전문 장비로 측정한 결과였다. 서울 기온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성우 일행과 정훈은 남산 인근의 한 건물 안에서 몸을 녹이는 중이었다. 잠시 후, 민흠이 와서 상황을 보고했다.
“러시아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 놈들이 남산에 심은 건 ‘프로즌 시드(Froze n Seed)’라는 겁니다. 단순 직역하면 얼어붙은 씨앗, 겨울의 씨앗 정도 되겠네요. 말 그대로 주변 온도를 빠르게 낮춰서 일대를 완전히 얼려버리는 전략 병기입니다.”
“그걸 제거하면 냉동 기능이 정지한답니까?”
성우가 물었고 민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문제는······ 그 타타냐라는 여자 마법사가 없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답니다. 워낙 온도가 낮아서 웬만한 냉기 저항이 없으면, 가동 중일땐 집을 수 없답니다.”
정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답답할 따름이었다.
타타냐는 크루세이더 팀을 통째로 얼려버릴 정도의 빙결 마법을 구사하는 자였다. 그만한 냉기 저항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정훈이 아는 한 없었다.
그때, 성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법이 있습니다.”
“예? 성우 씨, 설마? 냉기 저항력까지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비슷한 게 있습니다.”
양극은 통한다고 하던가? 성우는 냉기 저항력과 정반대인 화염 속성의 효과인 ‘샐러맨더의 아우라’를 통하여 강력한 추위를 견뎌낼 수 있었다.
물론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과연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당장은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천사가 내려오기 전에 끝내야 하니, 빨리 움직이죠.”
* * *
특수 개조된 방한 장비를 입은 광역 감시팀의 대원들이 남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다가 이내 서리가 되어 어깨에 내려 앉았다.
“하아, 하아······.”
“전방 눈보라다!”
방독면을 쓴 건 물론이거니와 ‘아이스 트롤’의 가죽으로 만든 외투 안에 ‘파이어 골렘’을 잡으면 얻을 수 있는 ‘버닝 스톤’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온 몸에 히터가 달린 것처럼 후끈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만발의 준비를 했음에도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칼날 같은 한기가 몸 곳곳을 찔러왔다.
“눈보라가 너무 심하다! 로프를 잡고 일렬로 이동한다!”
“일렬 이동!”
그렇게 고된 산행 끝에 봉우리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면 눈보라 속에 서 있는 남산 타워가 보였는데, 마치 빙하기를 맞은 것처럼 두꺼운 얼음이 들러붙어 있었다.
“장비를 설치하고 중심 온도를 측정한다!”
그들은 정밀 온도 측정 장비를 설치하여 눈보라의 중심부를 레이저로 겨냥했다. 계기판 위에 숫자가 떠 올랐다.
“심도 온도 영하 259도입니다!”
흔히 우주 공간의 온도라고 알려진 ‘절대 영도’가 영하 273도였다. 프로즌 시드의 중심부 온도는 우주와 비슷할 정도였다.
“미친······ 자, 우리는 눈보라 밖으로 나간다! 이제부터는 네크로맨서가 작전을 수행한다!”
“눈보라 밖으로 후퇴!”
대원들이 물러서는 중, 헬리콥터 한 대가 남산의 경사면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딱 그 지점이 한계였다. 더 깊숙이 진입했다가는 눈보라에 휘말려 추락할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정지 비행하는 헬리콥터에서 한 사내가 뛰어내렸다.
“왔다. 네크로맨서다.”
“저 사람은 대체······ 안 되는 게 뭐지?”
네크로맨서는 푸른 불꽃이 일어나는 흑색 갑주를 입은 채, 눈이 쌓인 오르막을 걸어 올라왔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이 부채꼴모양 으로 녹아 사라졌다.
치이이이一
작전 팀장이 앞으로 나가 네크로맨서를 맞이했다.
“온도 측정 결과 목표물은 N 타워 바로 아래에 박혀 있으리라 추정됩니다!”
눈보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자세한 위치는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심도 온도는 절대 영도에 가까운 영하 259도라 일반인이라면 숨만 들이쉬어도 폐가 얼어붙을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만일을 대비해서 저희 팀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지만······ 저 안에서 사고가 벌어졌을 때, 저희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 드리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성우는 담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다른 준비 없이 곧장 남산 타워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옆에 나란히 따라오던 작전 팀장은 어느 지점부터 자연스레 뒤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살을 에는듯한 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성우는 그대로 눈보라 안으로 사라졌다.
“······가능할까요?”
뒤에서 다가온 팀원의 물음에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안 된다면······ 짐 싸서 서울을 탈출해야지.”
“하, 참······ 그런데 왜 언제나 저 사람이 마지막 희망인 걸까요?”
팀장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야 실패한 적이 없으니까, 저 사람을 마지막으로 모든 사건이 끝났으니 다음 주자가 없는 거지.”
하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 * *
후우우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였다. 등산로 역시 눈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제대로 된 길을 짚어나갈 수 없었다. 설원에서 벌어지는 화이트 아웃(White Out) 현상이었다.
다행히도 성우에게는 물리 법칙에 국한 받지 않는 눈이 있었다. ‘스펙터’였다. 녀석들의 시선을 빌려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보라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구구구구一
거대한 얼음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긴 기둥의 중간 부분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백색 구슬 한 개가 그 구멍 안, 허공에 떠오른 채 진동하고 있었다.
- ‘프로즌 시드’가 작동 중입니다.
* 해당 지역(서울)에 빙하기를 일으킵니다. (22:44:00)
* 작동 정지를 원한다면 ‘타워’에서 분리해야 합니다.
‘빙하기라? 역시 엄청난 물건이었군.‘
러시아의 플레이어들이 심문 끝에 실토한 대로, 일정 지역의 생태계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무기였다.
‘더 다가가는 건 무리다.’
아무리 헬 파이어 갑주를 입고 샐러맨더의 아우라를 두르고 있다지만, 모든 냉기를 이겨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온몸이 급속도로 식어가며 손가락과 발가락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동상을 입은 건지도 몰랐다.
성우는 ‘트롤 스켈레톤’ 두 마리를 소환했다. 직접 들어가는 게 불가능하다면, 대신해 줄 수 있는 녀석들이 잔뜩 있었다.
“저걸 뽑아.”
하지만 소환 직후부터 트롤 스켈레톤의 온몸에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뼈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관절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덜······ 그럭! 덜······ 그럭!
어떻게든 밀어붙였지만, 프로즌 시드의 기둥에 손을 뻗는 순간,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임이 정지했다.
‘형체가 있는 존재는 다가갈 수가 없다.’
성우는 두 번째 수를 사용했다. 비형랑의 부채를 펼치고 귀신 무리를 소환한 것이다. 녀석들은 성우가 제작한 뼈 무기를 염동력으로 들어 올리고 프로즌 시드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 일대의 강력한 마법 에너지가 ‘영적 존재’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귀신들은 바람에 날리는 천 조각처럼 허무하게 밀려나 버렸다. 프로즌 시드, 역시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결국, 직접들어가야 하나?”
다른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는 심장근처에 넣어두었던 ‘불의 정령석(상급)’을 꺼내 들었다. 그나마 이것 덕분에 피가 얼어붙지 않는 중이었다.
“가자.”
성우는 그 물건을 오른손에 꽉 움켜 쥐고 눈보라 안으로 전진했다.
저벅一 저벅一
프로즌 시드와 가까워질수록 사지의 감각이 조금씩 사라졌다. 관절을 굽히는 게 어려워졌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내뱉는 입김이 고체가 되어 흩어졌다. 어느 순간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이대로면 곧 죽는다.’
단 1분도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한계를 느끼며, 마침내 프로즌 시드 앞에 섰다.
- 심각한 냉기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 모든 신체 능력 감소 (-70%)
주변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면, 프로즌 시드 자체에 손을 가져다 대는 건 자살행위였다. 장작불 근처에 서 있는 것과 장작불에 손을 얹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불의 정령석’을 이용한다면, 그 냉기를 상쇄하고 중격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성우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불의 정령석으로 프로즌 시드를 내리쳤다.
쩡 —
프로즌 시드가 거칠게 흔들렸다. 성우는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껏 내리쳤다.
쩡一
마치 선로를 이탈하는 열차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던 프로즌 시드가 얼음 타워의 구멍 밖으로 튕겨 나왔다. 성공이었다.
- ‘프로즌 시드’가 작동을 정지합니다.
그러자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눈보라가 멎었다.
후우우-
새하얀 커튼이 끊어져 내려앉는 것처럼, 백색 장막이 땅 위로 주저앉았다. 남산의 탁 트인 설경이 펼쳐졌다. 새삼 아름다웠다.
- 강력한 추위 속에서 살아남아 냉기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2%)
성우는 눈밭 위에 떨어진 백색 구슬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차가웠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프로즌 시드
- 등급 : 특수
- 분류 : 오브
- 효과 : 100일 이상 소지할 ‘설인’ 속성 부여, 냉기 저항력 상승(+10%), 빙결 계열 마법 사용 시 마나 소모 감소(-80%), 높은 지대에 설치할 경우 일정 지역을 ‘빙하기’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울에 빙하기가 도래하는 걸 막아낼 수 있었다.
* * *
목숨을 걸고 하나의 사건을 해결했건만, 곧장 또 큰 사건을 마주해야만 했다.
성우 일행과 정훈의 크루세이더 팀은 영등포역 입구에 모여 있었다. 천사의 강림을 막아야 할 차례 였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석상은 뭔가 달랐습니다.”
정훈은 일반적인 천사의 석상보다 더 높은 등급의 석상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했다. 4장의 날개를 가진 석상······.
그 때문일까? 오로지 천사 진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말도 안 되는 퀘스트의 선봉장이 되길 강요받아 왔다.
정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석상을 부숴버렸다. 일종의 탈출이었다.
“하지만 한번 발을 들인 이상, 석상을 부순다고 탈퇴할 수 있는 게 아니더군요.”
천사의 석상을 대검으로 내리쳐 깨부수는 순간,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고 했다.
- 당신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일정 시간 이후에 ‘천사 심판관’이 강림합니다.
* 해당 천사의 석상을 통해 진영에 가입한 모든 플레이어가 ‘심판’ 받을 것입니다. (천사 심판자와 마주할 시 모든 능력치 90% 감소합니다.)
* 심판 대상자는 서울 지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디에 숨어 있더라도 ‘천사 심판관’이 추격해올 것입니다.
* 강림 당일, 500명의 제물(플레이어)을 선정하여 바치고 죄를 뉘우친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성우 씨 말이 맞았습니다. 절대 종족이라는 것들에게 놀아나는 건, 해피 엔딩과 거리가 멀다는 걸······ 이제야 깨닫네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천사 심판관’의 강림까지 남은 시간은 약 7시간이었다. 아직 대비하여 맞설 수 있었다.
다만, 정훈이 설명한 대로라면, 천사 진영에 속해 있는 광복 길드는 심판자에게 맞설 수 없었다. 90%의 능력치 감소는, 사실상 싸울 생각을 접으라는 말과 같았다.
“맞습니다. 저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쉽게 포기했다면······ 진작 다 죽었겠죠.”
정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기가 있었다.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훈 씨, 이제부터 자주적인 힘을 길러야만 합니다. 우리를 노리는 건 천사뿐만이 아닙니다.”
“악마······.“
“더 있습니다. 더 끔찍한 것들이······.“
천사, 악마, 월드 이터, 셋 모두 다를 게 없었다. 방법만 다를 뿐 결국, 이 세계를 장악하길 원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월드 이터’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리고 그것들보다 위, 더 위에서 모든 걸 지켜보는 누군가도 있다. 일명 창조주. 모든 걸 막더라도 그 존재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면 역시나 놀아날뿐이다.’
그때, 성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용 퀘스트]
- 이름 : 수호자의 의무-2
- 유형 : 목표 수호
- 목표 : 천사 진영의 ‘심판 대상자’ 보호
- 보상 : ‘신격(神格) 상승’, ‘직업 변경권’중 택1
절대 종족이라고 알려진 외부 차원의 존재, 천사 종족이 이 땅의 생명체를 학살하기 위해서 내려올 예정이다.
당신은 이 땅의 ‘수호자’로서 외부 차원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제거할 의무가 있다. 천사 종족의 계획을 저지한다면, 그들에게 큰 상실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 ‘심판 대상자’가 80% 이상 사망할시 실패합니다.
* ‘천사 심판관’을 제거할 시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오랜만에 발동된 ‘수호자’와 관련된 퀘스트였다. 지옥 차원과 마굴의 문이 열렸을 때 발동했었다.
‘그럼 절대 종족도 마물과 다른 게 없다는 소리잖아?’
이걸 통해 알 수 있었다. 성우가 가지고 있는 ‘수호자’라는 칭호는 그 어떤 외부의 힘이 아닌, 오로지 자주적인 힘으로 이 땅을 지키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수호자는 극히 소수 일 수 밖에 없었다. 멸망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절대 종족의 유혹에 넘어가, 그들의 힘에 의지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신격 상승이라?’
당연하게도 보상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가지고 있는 ‘아누비스의 권능’은 1단계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2단계가 된다는 뜻일까? 그럼 또 한 번 비약적인 능력 상승이 일어날까? 뭐가 됐든 기 대할만한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정훈이 물었다. 성우는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물과 불을 다루는 직업군을 최대한 모아주세요.”
“물과 불이요?”
“맞습니다. 달갑지 않은 손님에게 물벼락을 선사하죠.”
그러나 사실, 성우가 준비하고 있는 건 물벼락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속 강렬한 에너지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