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 작가 주) 본 작품 내에 등장하는 절대 종족 ‘악마’는 ‘지옥 차원’에 서식하는 몬스터(과거 등장한 ‘헬 무빙 아머’ 등)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51) 용산역, 시베리아의 냉기 - 4
궁극의 뼈 무기 제조, 그건 상식을 뛰어넘는 형태로 발현되었다. 수십, 수백 마리의 언데드가 하나로 합체하여 거대한 거인의 팔과 다리를 형상화한 것 이었다.
“으으······.”
차르는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아무리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던 ‘악마 드루이드’일지라도 거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데몬 비스트’를 움직였다.
“이리 와! 이걸 뜯어버려!”
분명 그 괴물들의 공세라면 거인의 팔을 무너뜨리고 탈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발사!”
하지만 성우가 더 빨랐다. 성우의 명령이 떨어지자, 미리 깔아둔 ‘뼈 발리스타’ 뒤에 서 있던 스켈레톤들이 거대한 공성 병기를 작동시켰다.
퉁! 퉁! 퉁! 퉁! 퉁!
역시나 뼈로 만들어진 창대가 총알처럼 쏘아졌다. 무려 14발이었다. 그것들이 거인의 손을 꿰뚫고 단 하나의 점에 명중했다. 차르의 몸뚱이였다.
하지만······.
“크······.”
놈은 멀쩡했다. 찰나의 순간, 곰의 형상이 앞발을 휘둘러 날아드는 창대를 쳐낸 것이었다. 엄청난 순발력이 아닐 수 없었다.
단 한 발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 지만, 그것만으로는 놈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회복하기 전에 한 방 더 먹여야 한다.‘
성우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거인의 발은 어느새 데몬 비스트 떼거리에 의해서 벌집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처음 한 방은 기습으로 성공했지만, 또 한 번 거대한 크기의 무기를 조형한다면 놈이 눈치채고 막으려고 들 것이었다.
‘추가적인 수가 필요하다.’
성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빅터와 천여 마리의 좀비 군단을 발견했다. 그리고 빅터에게 소리쳤다.
“빅터! 전부 소환 해제해!”
“······예? 딱?”
“좀비에서 마나를 회수하라고!”
“아? 예!”
녀석은 성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의아한 듯했지만, 일단 그 명령에 따랐다.
이내 빅터의 ’권속’에서 제외된 좀비들이 힘을 잃고 우르르 쓰러지는 게 보였다. 그렇게 시체 밭이 펼쳐졌다.
- 당신의 무기에 ‘악령 폭격’이 깃듭니다.
성우는 다시 한번 악령 폭격을 시동했다. 그리고 차르를 향해 쏘아 보냈다.
당연하게도, 거북의 형상이 떠오르며 그의 몸을 보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북 형상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직전에 거북 형상을 푸는 순간, 머리 위에서 거인의 다리가 떨어지면서 한 방 크게 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오히려 그 점을 파고 들었다. 확연하게 느려진 놈을 향해······.
“황혼 습격.”
- ’황혼 습격’이 시작됩니다.
성우는 검은 회오리바람이 되어 몰아쳤다.
구우우우-
제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한들, 황혼 습격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차르의 몸이 검은 회오리 속에 뒤엉킨 채 휩쓸려갔다.
그리고 단 몇 초만에 바닥에 처박혔다. 동시에 바닥에서 망령의 손이 올라 오며 차르의 몸을 구속했다.
“······큭! 이 새끼가!”
그런데 주변에서 악취가 올라왔다. 그곳은 조금 전에 조성된 ‘좀비 시체밭’이었다. 성우는 차르를 내려다보며 작게 읊조렸다.
“계속 잘 웅크리고 있어. 잘 구워지게.”
성우는 바닥을 박차, 시체 밭에서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소리쳤다.
“폭발!”
쾅! 쾅 쾅! 쾅! 쾅!
놈은 등 뒤의 형태를 바꾸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폭발에 휩싸였다.
끙!
그런데 지수의 품에 안겨 있던 미르가 성우와 동시에 마나를 방출했다. 시체 폭발 마법이었다. 그리고 빅터 역시 눈치껏 연쇄 폭발에 동참했다.
“터져라! 터져! 딱딱!”
콰一과一과一과一과一광一
성우, 미르, 빅터의 합심에 천여 마리의 좀비가 차례차례 폭발하며 엄청난 충격과 열기를 내뿜었다. 마치 정유 공장이 폭발한 것만 같은 대폭발이었다.
한 개의 폭발이 멎으면 두 개의 폭발이, 세 개의 폭발이 연달아 이어졌다. 용산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쿠우우우우-
그 후끈한 열기가 밀려 나오며 시베리아처럼 변했던 공기를 순식간에 데워버렸다. 폭발 지점에서 장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끄, 끝이에요?”
한호가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결과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역시나 지수였다.
“······아니에요.”
이내 폭발로 인한 연기가 가시고, 그 중심에서 어떤 움직임이 보였다.
“크으······.“
그건 분명, 차르였다.
‘살아 있다고? 이 정도까지 했는데?’
차르는 누더기가 된 채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놈의 눈에는 증오심이 가득했다.
“네크로맨서······.“
그의 등 뒤로 ‘데몬 비스트’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다시 한 대 뭉치며 전혀 다른 형상을 만들었다.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리겠어.“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검은 개였다.
‘케로베로스? 저게 놈의 신격인가?’
차르가 고개를 들자, 세 개의 머리가 성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몸을 날려서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아슬아슬한 순간, 성우는 그림자 이동을 통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콰—과—과—광!
세 개의 머리가 용산역 건물에 내리 박혔다. 쇠 구슬을 단 철거 크레인 3대가 동시에 움직인 것처럼, 천장과 외벽이 유리 깨지듯 무너져내렸다.
연쇄적인 붕괴가 일어나며 용산역은 완전히 대파되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치 세 개의 손이 모래성을 한 움큼 끌어내린 것만 같았다.
’이건 위험하다.’
거대한 세 개의 대가리가 고개를 돌려 성우를 찾았다. 그것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검은 연기를 내뱉는 장면은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네크로맨서······ 머리 잘 굴렸어. 인정하지만, 그게 끝인 것 같군. 덕분에 술이 확 깼어.”
“······.“
놈은 성우가 준비한 두 번의 회심의 공격을 모두 견뎌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단 한 방이라도 허용하면 즉사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분명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성우는 그렇게 믿으며 머리를 쥐어짰다.
‘방금 폭발이 데미지가 없던 건 아니야. 다시 한번 틈을 노릴 수 있다면······.‘
그때였다.
쩡 —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하늘과 바닥이 모두 빛에 집어 삼켜졌다. 모든 응달이 사라지고 물체의 윤곽이 희미해졌다.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빛?’
그 어떤 전조도 없었다. 그저 빛이 이 자리에 도달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쩌一저一정一
시야가 백색으로 물든 가운데, 하늘에서부터 한 줄기 섬광이 내리꽂혔다. 이어서 수십 가닥의 번개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파지지지一
난데없는 현상에 성우는 물론이거니와 차르 역시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저벅一 저벅一
그리고 그 빛줄기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흑색의 ‘하드 레더 아머’를 입고 매가 조각된 목각 지팡이를 든 남자······.
“지옥의 기운을 느끼고 왔는데 뭐야, 고작 순례자였어?”
랭킹 1위, 한강석이었다. 그는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차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4성 카드, 지옥 순례자, 북쪽에서 이따금 역겨운 냄새가 내려왔는데 그게 너였군?”
그리고 강석의 어깨 위에서 페어리, 나비가 날아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이, 시시해! 잔뜩 기대했는데!”
나비는 성우 일행을 향해 날아오며 손을 흔들어댔다.
“안녕! 오래만이야!”
“······.“
“······.“
하지만 아무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비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더니 다시 강석의 어깨 위에 앉았다.
“흥! 다들 재수가 없어졌어!”
그 상황을 바라보며, 차르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얜 또 뭐지?”
하지만 상대의 수준을 알아본 걸까? 여유와 분노가 뒤섞여 있던 표정 위에 황당함이 번져나갔다.
강석이 차르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 너, 지옥 순례자, 천사 진영의 지원을 받으면서 ‘지옥 차원’의 힘을 가져다가 쓰고 있지?”
“······.“
“등 뒤에 개새끼 세 마리를 떡하니 달고 있으면서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 다 알고 왔어. 그런데 그거, 정규 신격도 아니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거지?”
강석이 싱긋 웃었다. 그의 미소 안에는 오만함이 어려 있었다. 그는 차르를 향해 천천히,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과감하게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차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소의 그였다면 곧장 신경질을 냈을 테지만, 지금은 어쩐 일인지 가만히 서서 강석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내 강석이 입을 열었다.
“나는······ 지옥의 주인, 마왕이 될 사람이다.”
차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우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마왕?‘
그게 무슨 말인지, 성우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한강석, 그가 왜 ‘지옥 차원’이라는 곳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어떤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마왕이라니? 설마 지옥 차원의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는 권능 같은 건가?’
게임의 배경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졌다. 월드 이터가 지배하는 ‘마굴’에 이어서 ‘지옥 차원’ 역시 단순한 던전에 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겠다. 너, 한국 서버 랭킹 1위지? 일본의 남쪽 섬을 전기 찜질해버렸던 그 플레이어? 그래, 기억나.”
러시아 서버 랭킹 1위와 한국 서버 랭킹 1위가 마주 보고 섰다.
“······방송으로 봤을 때도 대단하다는 걸 알았다만, 실제로 보니 현장감이 차원이 다르긴 하네.”
차르의 말에 강석은 그저 웃었다. 그는 차르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리며 말했다.
“야, 자존심 세우지 말고 지금이라도 그냥 도망가.”
이제는 취기가 완전히 가셨음에도, 차르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분노와 수치였다.
“하, 뭐라고?”
그는 러시아 제일의 전사였다. 어디서 이런 취급을 받고 조용히 돌아섰다면, 그 거친 툰드라 벌판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는 씩 웃으며 등 뒤, 세 개의 머리를 조종했다. 아무리 강력한 상대일지라도 이 거리 안에서는 즉사시킬 자신이 있었다.
“너희 민족은 원래 이렇게 오만하······.“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한 번의 번쩍임이 일어나자 그의 몸이 저 멀리, 대로로 날아가 녹슨 트럭 한 대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컥!”
강석이 피식 웃었다.
“수작 부리지 마. 네가 숨 쉬는 속도보다, 네가 머리 굴리는 속도보다 내가 더 빠르니까.”
“느려! 멍청이!”
실제로 강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의 지팡이에서 한 줄기의 빛을 쏘아졌을 뿐이었다.
“으······.“
차르는 온 세상이 뒤틀리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하하······.“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러면서도 적을 죽일 방법을 모색했다. 사냥꾼의 본능이었다.
‘어차피 놈은 마법사 계열이다. 데미지는 막강하지만 다 한 방만 먹이면 끝이다. 거북 형상으로 번개를 방어하고 파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의 팔이 모이기도 전에 또 한 번의 번쩍거림이 일어났다.
그의 몸이 공처럼 튕겨 나가 트럭을 밀어내고 콘크리트 바닥 위를 사정없이 굴렀다. 머리가 깨지고 핏물이 쏟아졌다. 왼쪽 무릎이 거꾸로 접혔다.
이렇듯, 모든 게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무능력한 것도 모자라 그렇게 멍청하면 오래 못살아.”
이어서 강석이 지팡이를 내밀었다. 전투가 벌어진 이후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러자 지팡이의 머리 부분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수백 가닥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마치 분사되듯 쏟아져 나가 차르의 몸뚱이에 휘감겼다.
파지지지지!
차르이 몸이 자석에 이끌리듯 상승했다. 가공할만한 전류가 그의 몸 구석구석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으아아! 으아아아!”
강석은 지팡이를 앞으로 내민 채 천천히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전류의 강도가 강해지는 것 같았다.
“네 게임은 여기까진 것 같군.”
그런데 그 순간, 차르는 전류를 헤집고 손을 뻗어,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성우의 눈에는 익숙한 물건이었다.
‘저건, 천사의 날개 조각이다.’
사용 시 일정 범위 내에 있는 ‘천사의 석상’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대만 기습 당시에 사용한 적 있었다.
놈이 그걸 사용했다. 탈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어라?”
강석이 공격을 멈추고 지팡이를 뒤로 뺐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차르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었다.
나비가 날아오르며 눈을 부릅떴다.
“안 돼! 놓친 거야?”
“······그러게? 방금 포탈이 열렸던 것 같은데, 음, 전기를 뒤집어쓴 채로 팔을 움직일 줄은 몰랐네? 터프한 놈이긴 한가 봐‘?”
“그걸 말이라고 해! 빨리 끝냈어야지!”
“뭐, 어차피 내 계획에 방해가 될만한 놈은 아니었어.”
“다 핑계야!”
나비가 징징거리며 강석의 어깨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강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서 성우를 바라보았다.
“네크로맨서, 오랜만이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의 눈이 지수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지수가 아니라 지수가 앉고 있는 미르를 바라본 것이었다.
“······세계수에 이어 드래곤이라? 아이템 복이 넘치는군? 내가 가진 아이템은 시끄러운 녀석 하나인데.”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여긴 어떻게 온 거죠?”
성우의 물음에 강석이 볼을 긁적였다
“사실, 네가 여기 있는 줄은 몰랐어. 그냥 내가······ 지옥의 힘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진행 중인 퀘스트 때문에 온 거야.”
“······마왕?”
“아, 들었나?”
강석은 머쓱하게 웃었다.
“유치하고 웃긴 이름이지? 그냥 숨겨진 신격 같은 거로 생각하면 돼.”
“그래서 지옥의 문을 쫓아다니는 겁니까? 퀘스트를 깨고 그 마왕이라는게 되기 위해서?”
강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무 긴 퀘스트인데, 이제 슬슬 질리기 시작해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
“으, 나약해! 찡찡”
마왕이라, 그 단어가 풍기는 의미만 생각해본다면 극악무도한 존재가 되겠다고 선포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사실, 성우 본인의 직업인 네크로맨서 역시 악한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건 ‘의도’였다. 지옥 차원의 주인이 된 뒤에 무엇을 하려는 지, 그게 중요한 것이었다.
“좀 이상한 질문인지도 모르겠는데, 마왕이 되면 뭐가 좋은 겁니까? 지옥 차원의 몬스터는 지구를 침공하고 있지 않나요? 그걸 막을 수 있는 겁니까?"
“월드 이터라고 아나?”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왕 눈깔! 재수 없어!”
“나비, 저리 좀 가 있어. 부탁이야.”
성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 발 뻗고 있다가는 걔들한테 지구가 먹힐 거고, 운이 좋더라도 안일하게 굴다가는 천사나 악마한테 지배당하겠지. 방법이 다를 뿐, 결국 똑같은 침략자야. 그렇다면 우린 뭘 해야 할까?”
성우는 곧장 대답을 내놓았다.
“그 어느 쪽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주적인 힘을 길러야겠군요.”
강석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점에서 네가 아주, 완벽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땐, 최후에는 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승리해. 내가 하고 있는 것도 그 길 중 하나지.”
별안간 칭찬이었다. 성우는 솔직히 헷갈렸다. 이 남자, 아군이라고 봐야 할까?
그때 나비가 날아올랐다. 녀석은 손바닥을 이마에 붙이고는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강석! 또! 또! 동쪽! 동남쪽!”
“하, 망할 퀘스트, 쉴 틈을 주질 않네. 또 어딘가에 지옥의 문이 열린 모양이야.”
강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얼굴 한 면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나중에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한테 그럴 기회가 있을까?”
“살아 있다면 언젠가 기회가 오겠죠.“
“그래. 부디 죽지 마.”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나비가 연 포탈로 사라졌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시끄러운 나방 왱왱거리는 소리만 기억나네.”
성우도 동감이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민흠이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성우 씨, 남은 놈들 좀 부탁합니다. 저는 바로 크루세이더 팀을 확인하러 가겠습니다.”
그래, 아직 한가롭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승리했으니 뒤처리를 해야 할 때였다.
* * *
차르가 홀로 도주하자 시베리아의 사냥꾼은 순순히 항복했다. 제 아무리 거친 성격을 가진 이들일지라도 머나먼 타향에서 끝까지 저항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성가신 빙결 마법사인 타타냐는 전투 중에 사망했다. 그 결과, 크루세이더 팀을 통째로 얼어붙게 했던 저주가 사라졌다.
광역감시팀을 통해서 정훈과 크루세이더 팀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 그런데 커맨더께서 네크로맨서님께 급히 말씀드릴 게 있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은 아닐 듯 싶었다. 약 10분 뒤, 헬리콥터 한 대가 도착했다.
그곳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정훈이 내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는데, 민흠이 부축하여 간신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우 씨, 이렇게 도와주셨는데 좋지 않은 소식을 또 전해드려야 하니······.“
“편하게 말씀하시죠.”
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어제, 천사의 석상을 부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광복 길드는 꽤 오랫동안 천사 진영에 속해 있었다. 사실상 한국 서버 내 천사 진영의 핵심 지주나 다름없었다.
“······그걸 부수자 저주가 내려졌죠.”
“저주라면?”
“지금부터 11시간 뒤, 영등포역에 천사가 강림할 겁니다. 그리고 서울 전체를 심판할 거라고 합니다. 절대 종족이······ 직접 내려오는겁니다.”
오랫동안 온갖 수를 동원하여 한국 서버를 장악하려고 했던 놈들이 마침내 직접 나선 것이었다.
걱정이 가득한 정훈의 얼굴을 마주보며, 성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천사도 뼈가 있답니까?”
강석이 지옥의 정벌하여 마왕이 되려고 한다면, 천사 종족이 사는 곳도 정복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