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47) 북한에서 내려오는 죽음 - 1
시즌2〈지옥의 도래〉성우는 예언석을 통해서 본 끔찍한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본 와이번에 탄 리치 한 마리가 광화문대로에 가득 쌓인 시체를 언데드 군단으로 일으키던 그 장면을······.
하지만 성우가 그림리퍼를 차지하고 리치가 된 이후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말 그대로 미래를 바꾼 셈이 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북한 서버에서 일어났다고?’
하물며 시즌2 업데이트가 예정된 새해 첫날까지 아직 한 달이 넘게 남은 시점이 아니던가?
‘역시 정해진 대로 굴러가는 건 아니다.’
이 게임을 풍성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변수’였다. 어딘가에 또 다른 리치가 힘을 키워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또 다른 리치가 존재한다면······ 그게 플레이어든 몬스터든 없애는게 좋다. 나에게는 같은 자원을 소비하는 경쟁자나 다름없으니까.’
일전의 ‘각성 퀘스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당시의 설명을 되새겨보면 ‘사신의 낫’을 선점하라는 내용이었다.
즉, 그림리퍼라는 아이템은 단 한 개뿐이며 현재는 성우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어딘가에 성우와 비슷한 직업군의 플레이어가 있더라도 성우를 죽이지 않는 이상 그림리퍼를 차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만일 또 다른 전용 아이템이 존재한다면······.’
반대로 경쟁자가 그 아이템을 선점하여 성우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경쟁자는 제거하는 게 이롭다는 판단이 섰다.
“성우 씨, 지금 바로 이동하실 건가요?”
지수의 물음에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요. 언제나 큰 싸움을 앞두고는 업그레이드가 필요하죠.”
“네? 업그레이드요?”
성우는 웨어 울프 스켈레톤 한 마리를 소환했다. 등에 멘 배낭이 유독 부풀어 있었는데, 일종의 인벤토리 역할을 하는 녀석이었다.
“수도권 쟁탈전을 전설 등급 아이템 상자를 아직 열지 않았거든요”
수도권 쟁탈전 승리를 통하여 무려 5개의 전설 등급 아이템 상자를 얻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정신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상자 오픈을 미루다 보니 아직도 그냥 들고 있는 상태였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성우는 아이템 상자를 모두 꺼내었다.
“와, 대박 이게 다 얼마야?”
한호가 감탄하는 가운데, 그중 한 개를 들어 올렸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전설 등급 아이템 상자
- 등급 : 특수
- 분류 : 이벤트 아이템
- 효과 : 오픈 시 랜덤으로 1종의 ‘전설 등급’이 지급된다.
“와, 전설이 5개? 진짜 기대되는 순간이네요. 선배가 나도 한 개쯤은 챙겨 주시겠지? 그렇죠? 흐흐!”
그런데 상자를 뜯으려는 순간, 별안간 튀어나온 메시지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 5개의 ‘전설 등급 아이템 상자’를 1개의 ‘신화 등급 아이템 상자’로 교환할 수 있습니다.
“······뭐?”
생각도 못 한 특전이 발생했다. 아이템 상자 5개를 모으면 상위 등급의 상자로 교환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신화 등급이라니?’
성우가 지금까지 얻은 신화 등급 아이템은 단 3개였다.
첫 번째는 ‘세계수의 씨앗’이었으며 두 번째는 아직 사용하지 못하는 ‘천근궁’ 그리고 세 번째는 세트 아이템으로 얻은 ‘그림자 왕의 왕관’이었다.
‘지금까지 보건대 신화 등급은 사용에 엄청난 제약이 따른다.’
당기는데 체력 수치가 100이나 필요한 천근궁을 말할 것도 없었으며 세계수의 씨앗도 그냥 심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림자 왕의 왕관 역시 유산 세트를 모아야 사용할 수 있었다.
즉, 신화 등급 아이템은 자칫 계륵이 될 수도 있었다. 차라리 전설 등급 아이템 5개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상위 등급이다.”
“······네?”
“한호야 미안하지만, 못 챙겨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 와 치사해······.“
천근궁은 아직 쓰지 못하고 있지만, 세계수의 영향력이나 그림자 왕의 왕관의 효과를 볼 때, 신화 등급은 5개의 전설 아이템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 아이템을 교환하시겠습니까? (Y/ N)
성우는 Y를 클릭했다. 그러자 5개의 전설 등급 아이템 상자가 금빛 가루가 되더니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내 작은 케이스가 탄생했다. 에메랄드빛으로 감도는 게, 확실히 한 단계 위 등급으로 느껴졌다.
‘고민할 것 없이 연다.’
성우는 과감하게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공중에서 작은 막대기 하나가 떨어 졌다.
- ‘신화 등급’ 아이템이 교환되었습니다.
받아서 살피니, 그건 부채였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비형랑의 부채
- 등급 : 신화
- 분류 : 완드
- 효과 : 마법 면역력 상승(+15%), 죽은 이의 영혼(귀신)을 부릴 수 있습니다. (최대 10개) 사용자의 ‘죽음 속성 친화력’에 따라 귀신의 성능이 달라집니다.
- 설명 : ‘귀신을 부리는 자’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정말 다행히도 성우와 퍽 어울리는게 튀어나왔다. 사용 조건도 딱히 없는 듯했다.
그런데 아이템 설명으로만 봤을 땐, 앞선 신화 등급 아이템보다 미약해 보이는 감이 있었다.
’귀신을 부릴 수 있다?’
그게 얼마나 효과적인 건지는 써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전력이 단숨에 2배나 증가했던 ‘그림자 왕의 왕관’ 정도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런데…….
- 일정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리치(죽음을 다루는 자) + 비형랑의 부채(귀신을 부리는 자) + 알수 없음(추가 획득 필요)
‘······조건?’
아누비스 처음 얻었을 때와 비슷한 메시지였다. 당시, 리치 상태에 수인 상태가 추가되면서 임시로 아누비스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또 어떤 퍼즐이지?’
무려 3가지 조건이 필요한 걸 보면 아누비스보다 강력한 것일까? 아무런 힌트가 없으니 당장은 알 도리가 없었다.
성우는 몸을 돌려 지수와 한호를 바라보았다.
“됐어요. 이제 가죠. 한호야 너도 준비 끝났지?”
역시 눈앞의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아이템도 몇 개 없는 저 같은 거지가 준비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래? 잘됐네.”
“아니 뭐가 잘돼······.”
성우는 한호를 지나쳐 지수 앞에 섰다.
“하늘에서 내려다봐도 산세가 복잡할 텐데, 대산맥의 왕이 있는 곳을 알아보실 수 있나요?”
“아, 그게, 날아가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처음에는 메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피니 그건 ‘마패’였다.
“대산맥의 왕이 다음 만남을 기약하면서 산채로 바로 갈 수 있는 아이템을 하나 챙겨줬었어요.”
“그 몬스터가 지수 씨를 되게 좋게 봤나 보네요.”
생각해보면 대산맥의 왕 덕분에 각성은 물론이거니와 수원과 부산을 순식간에 오고 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 뭐······.”
그녀가 아이템을 사용했고 청록색 포탈이 열렸다.
세 사람이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 * *
포탈에서 빠져나오자 안개 낀 골짜기가 펼쳐졌다.
“오······.”
성우와 한호는 산자락의 신비로운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분명 수학여행 때 왔었는데, 설악산이 이렇게 몽환적인 곳이었나? 글쎄, 기억이 안 나네요?”
한호의 말처럼 익히 알고 있던 모습에 무언가 더해진 느낌이 었다.
일행은 지수의 인도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면서도 산의 풍경에 정신이 팔렸다.
후우우-
백색의 서리가 얇게 쌓인 가운데, 앞으로 나아갈수록 옅은 안개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졌다.
굽이치는 골짜기 좌우로 산봉우리가 이어졌으며 그것들의 머리맡에 조각난 구름이 커튼처럼 걸려 있었다.
우우우우-
산바람이 구름 끝자락을 힘주어 잡아당기며 커튼을 걷어내자, 먹색의 돌산이 서서히 드러났다. 마치 거대한 거인의 머리가 일행을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음, 뭐랄까, 뻔한 표현이긴 한데 신선이 살 것 같달까? 그렇지 않아요?”
산세가 가파르게 변하자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수백 년 묵은 소나무들이 단단한 뿌리가 강줄기처럼 이어졌으며 녹음 사이로 치고 올라온 백색의 바위가 계단처럼 이어졌다.
바위틈 사이사이에 이름 모르는 붉은 꽃들이 무리를 지어 피어있기도 했다.
“확실히 원래부터 이런 풍경은 아니었던 것 같아. 어딘가 이질적이네.”
“그렇죠? 우리 아빠가 딱 좋아할 곳인데, 여기서는 등산복 입고 프로필 사진 찍어도 인정합니다.”
기존의 산 역시 충분히 신비로운 모습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 이 모습은 시스템에 의해 어딘가 변주된 느낌이었다. 고유의 특징이 과장되게 두드러졌다고 해야 할까?
“조금 더 가면 산채가 나올 거예요.”
왕의 산채는 설악산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등산로에서 한참 벗어난 건 물론이거니와 마땅한 길조차 없는 곳이었다.
일행은 골짜기에서 벗어나 소나무 사이를 따라 올라갔다. 가파른 오르막이었지만, 바위와 나무뿌리가 계단 역할을 해주어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었다.
“저기에요.”
지수가 검지를 들어 올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앵?”
한호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그건 성우도 마찬가지였다.
산 중턱에 너와 지붕을 얹은 오두막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으니 말이다.
“저기가 왕이 사는 곳입니까?”
“맞아요. 그 대단한 칭호와는 좀 거리가 있죠?”
“······네. 상당히요.”
무려 강원도 일대를 통일하고 플레이어 집단까지 몰아낸 ‘대산맥의 왕’이 아니던가? 그런 왕의 거처가 고작 저런 너와집 한 채라니?
“자연인 할아버지가 마로 짠 옷 입고 나오실 것 같은데······.“
한호의 표현은 무리가 아니었다. 사이즈가 조금 크긴 하지만 정말 자연인이 살 법한 낡은 오두막일 뿐이었다.
그리고 산채로 다가갈수록 나타나는 풍경은 더욱 기가 막혔다.
“제가 너무 기대했나요? 용궁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건 좀?”
오두막 주변은 평탄한 지형이었는데, 감자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 주변으로 쟁기나 낫 같은 농기구가 굴러다녔으며 한쪽에 손수레가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밭 한가운데에 세 명의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들 중 둘은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저거, 웨어 타이거?”
호랑이 모습을 한 수인이 무명 저고리를 입은 채 곡괭이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웨어 타이거’와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그 둘의 덩치가 5미터에 이를 정도로 엄청 나다는 것이다. 그들 앞에 선다면 웨어 타이거 따위는 고양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 중 하나가 성우 일행을 발견했다.
“응? 형님! 지수 낭자가 왔습니다!”
“····뭐?”
그러자 밭 위에 쭈그려서 호미질하던 사람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수 낭자?”
잘생긴 흑발의 사내였다. 그는 두 괴물의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오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양손을 벌려 일행을 맞이했다.
그 순간, 성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 올랐다.
- 필드 보스 몬스터 ‘대산맥의 왕’이 출현했습니다.
“아! 드디어 오셨군! 자자, 모두 어서 오시게. 환영, 대환영일세!”
대산맥의 왕이······ 감자를 뽑고 있다? 그는 오른손에 호미를 쥐고 왼손에는 막 뽑아 몰린 감자를 주렁주렁 든 채 엉거주춤 다가왔다.
성우와 한호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황당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가······ 감자를 사냥해?“
“심지어 감자밭 옆에는 무랑 배추에요. 전하께서는 양식으로 사냥하시나 보네요.”
그러나 대산맥의 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며 친근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 이거 참, 오늘 먹을 감자를 캐던 중에 이렇게······ 내 꼴이 말이 아닌데······.“
왕은 호미와 감자를 거대한 호랑이에게 넘기더니 바지에다가 손을 쓱쓱 문 질렀다. 하얀 무명 바지가 흙으로 얼룩졌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어쩌지? 미안하지만, 가마솥이 박살 나서 밥은 못 했네. 우리 막내한테 밥을 시켰는데 솥뚜껑을 반으로 쪼개버렸지 뭐야.”
왕은 그렇게 말하며 제 등 뒤에 서 있는 5미터짜리 호랑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막내 호랑이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거 툭 치니까 깨지던데······.“
“이놈아! 내가 힘 조절 잘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얼마 전에는 자다가 발길질을 해서 벽을 무너뜨리더니! 쯧쯧!“
왕의 얼굴에 노여움이 번지자 막내 호랑이는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덩치가 워낙 큰 탓에 허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돌풍이 일어날 정도였다.
“아무렴! 삼대가 멸한 죄이다! 네 이 놈, 일단 손님들 안으로 모셔라.”
“예! 이쪽으로 오시죠!”
성우 일행은 그렇게 누추한 왕궁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