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45) 진화 학회의 본진 - 4
유 박사는 천장의 안전 캡슐에서 공동을 내려다보며 전장을 조율했다. 그리고 정말로 모든 게 제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좋아, 생각보다 어렵지 않군.”
네크로맨서가 어떻게든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몇 가지 수를 내놓는 게 보였지만, 유 박사는 그의 의도를 족족 잡아냈다.
뼈 이무기를 재빨리 얼려버린 뒤, 전격 마법을 집중시켜 박살 낸 것도 그의 순발력 덕분이었다.
“네크로맨서, 설마 다른 수는 없는 건가? 이게 끝인가?”
그때, 수상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언데드 무리 사이에서 거대한 흑색 말 한 마리가 땅을 박차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자신의 실험체 중 하나였던 ‘듀라한’이었다.
“오, 좋아. 새로운 수가 떠오르신 모양이군?”
유 박사는 네크로맨서의 수를 읽기 위해서 듀라한의 움직임을 쫓는 동시에 다른 곳까지 두루 살폈다.
“아니지, 아니야. 네크로맨서, 네 진짜 목적은 듀라한이 아니잖아? 이미 다 알고 있다.”
듀라한은 눈속임일 가능성이 컸다. 현재로서 놈이 할수 있는 건, 텅 빈 바닥 위에서 홀로 질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유 박사는 마침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건 예상외로 듀라한이 었다.
“저놈이······ 머리가 있었던가?”
목 없는 기사인 듀라한에게 머리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해골바가지가
“아! 젠장!”
그 순간, 유 박사는 네크로맨서의 다음 수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건 예상 밖인 동시에 너무나 기상천외했기에 미쳐 대응할 시간이 없어 보였다.
듀라한은 미끼가 아니었다.
두두두두두!
공동을 주파하여 벽 근처까지 다다른 듀라한이 제 머리, 아니 제 모가지 위에 얹혀 있던 ‘고블린 스켈레톤’을 집어들었다.
흥!
그리고 벽면의 배기구를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텅-
고블린 스켈레톤의 몸이 정확히, 배기구 안으로 들어갔다. 골인이었다. 우당탕 부딪치는 소리가 배기구 깊은 곳으로 이어졌다.
“······설마!”
유 박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계기판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 경고! ‘엔진-3’에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곧 6개의 엔진 중에서 3번 엔진 꺼졌다.
“아, 안 돼! 하필이면!”
엔진이 공격당할 때를 대비해서 엔진 룸을 6개로 분리해두기까지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엔진이 당하고 말았다.
네크로맨서에게는 우연이겠지만, 유 박사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다.
우우우우-
이내 3번 엔진과 연결된 2대의 크레인이 멈췄다. 그건 핵심 전력인 ‘프리스트’들이 매달려 있던 것이었다.
동시에 모든 보호막이 사라졌다. 그의 전력에 치명적인 공백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유 박사는 그 정도 문제는 대비해둔 상태였다.
“괜찮아. 비상 동력이 들어올 때까지 만 버티면 된다. 단 1분이다. 1분만 버티면······.“
주 엔진이 꺼진다면 시설의 전기를 끌어올 수 있게 설비해둔 상태였다. 유박사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 보호막이 풀린 크레인을 맨 뒤로 뺐다.
- 시설 전력이 비상 전력으로 전환 중입니다. (34%)
그때였다. 되살아난 ‘뼈 이무기’가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똑같은 수작은 안 통한다!”
유 박사는 곧장 마법사 크레인을 움직여, 뼈 이무기를 향해 빙결 마법을 쏟아부었다. 놈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번에도 허무하게 박살나고 말 것이었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 뼈 이무기는 마치 활주로처럼, 자신의 몸을 사선으로 곧추세웠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놈의 등에 올라탔다.
그건 검은색 말, 듀라한이었다.
“안 돼! 전격 공격 ! 놈을 박살 내!”
전격 마법이 얼어붙은 뼈 이무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뼈 이무기의 몸뚱이를 완전히 얼려버렸다.
두두두두!
하지만 듀라한이 더 빨랐다. 놈은 마치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전투기처럼, 사선의 점프대를 타고 맹렬하게 튀어 올라갔다.
그리고 듀라한의 몸이 뼈 이무기의 콧잔등을 박차는 순간, 놈의 좌우로 유령 기사단이 피어올랐다.
“안 돼······.“
8마리의 보랏빛 기사단이 수십 미터를 활공하여, 방어막이 꺼진 크레인 위에 올라탔다.
콰과과과과!
유 박사가 뜨거운 날숨을 내쉬는 그 찰나의 사이, 이미 하나의 크레인이 통째로 기울어졌다. 20명의 ‘인형’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벌써, 유령 기사단은 다른 크레인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적진의 후방을 헤집는 기사단처럼, 엄청난 속도로 경악할만한 파괴력을 선보였다.
쿵— 쿵—
그건 재앙이었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크레인이 마치 썩은 가지처럼,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
이음새가 파괴되고 레일이 끊어지면서 곳곳에서 굉음과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정갈하게 움직이던 그 무기들은 이내 흉물스러운 고철 덩어리로 전락했다.
“아, 안 돼. 말도 안 돼. 이 무슨······.“
틈을 보이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1인 군단의 최대 약점이었다.
성우는 그 점을 언제나 의식했다. 언제나 그의 목덜미를 노리는 저격수들을 상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 박사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이었다.
“······.“
경험이 없는 자에게 1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 * *
성우의 시선을 따라 듀라한이 도약했다.
쾅! 콰과과과!
유령 기사단이 곡예를 펼치며 방어막이 해제된 상태의 크레인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기울어진 크레인 위를 아슬아슬하게 내달리며 20명의 플레이어를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뜯어내 버렸다.
뇌와 척추에 연결된 전선과 호스가 잘려나가자, 그들의 반쪽짜리 몸뚱이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마치 태풍을 맞은 과실과 같은 꼴이 었다.
퍽- 퍼-억-
그들의 육신이 땅에 처박히며 산산이 조각났다.
- 죽지 못하는 자들에게 ‘안식’ 제공(112/240)
그건, 해방이었다.
- 죽지 못하는 자들에게 ‘안식’ 제공(121/240)
- 죽지 못하는 자들에게 ‘안식’ 제공(144/240)
퀘스트 메시지가 우후죽순 떠올랐다.
“옥상의 캡슐을 뜯어버려!”
신성 보호막이 꺼진 상태였다. 그 뜻은, 유 박사, 그놈이 현재 무방비 상태라는 의미였다. 성우는 곧장 본 와이번 무리를 움직였다.
콰드드드!
녀석들은 우악스러운 발톱을 들이밀어 천장에 박혀 있던 캡슐을 통째로 뜯어내 버렸다. 그리고 성우의 앞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쿵!
걸레짝이 된 안전 캡슐 속에서 유 박사가 기어 나왔다. 놈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큭, 이렇게 허무하게······.“
성우가 그의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혼자 다 해먹을 생각이었다면, 조금 더 깊게 고민했어야지. 넌 여기서 끝이야.”
유 박사는 충혈된 눈으로 성우를 올려보았다.
“네가, 네놈 따위가 뭘 안다고 나한테 그딴 소리를 내뱉지?”
그는 피가 질질 흐르는 입을 벌려 고함을 토해냈다.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준비해 왔는지 알아? 너 같은 놈들은 아무것도 모를 때! 나는 이 지옥 같은 상황을 예언했어!”
성우는 코웃음 쳤다.
“그래서? 미리 알았으면 뭐? 결국, 아무것도 못 했잖아. 네가 도대체 뭘 했는데?”
이에 유 박사가 벌떡 일어서며 성우에게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 이이! 다 큰 계획이 있었다! 그런 게 있었다고!”
어느새 신사다운 지식인은 어디 가고 고집스러운 노인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놈은 성우에게 달려들며 눈을 후빌 듯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전부 너 때문에! 너 같은 놈이! 너 같은 무지한 놈이 훼방만 놓지 않았······.“
그 순간, 삿대질하던 팔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으아아아!”
유 박사는 절단 부위를 움켜쥐고 몸을 구부렸다. 성우는 어깨 위에 그림리퍼를 얹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부인 척 생존자들을 유혹해서, 도와주는 척 수인들을 끌고 와서 네 멋대로 실험체 삼은 거, 그게······ 이 지옥 같은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있던 네가 할 수 전부였나? 응?”
“으으으······.“
“너 같은 제정신이 아닌 놈이 세계의 최고 엘리트 행세를 하고 있어서 인류가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한 거야.”
성우가 놈의 목덜미에 낫을 들이밀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걸 미리 알고 있었다면, 조금 더 책임감 있게 행동했어야해. 이 쓸모없는 새끼야.”
“채, 책임감? 책임감은 책임질 수 있는 일에 필요한 거다! 나는 이 거지 같은 인간 세상을 책임질 자신도 책임질 필요도 못 느꼈다. 어차피 이 세상이 끝이야. 그 끝에서 뭘 찾는가, 그게 중요한 거다! 이 무지한 새끼야!”
놈은 끝내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본인이 옳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넌 뭘 찾았는데?”
“······월드 이터.”
월드 이터? 성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낯선 단어였지만, 어딘가 불길함이 물씬 느껴졌다.
“우리를 초월로 이끌 절대적인 존재다. 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지 금 이 순간도······.“
유 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공동의 한가운데, 바닥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뭔가가 지금, 이곳을 보고 있다고?’
성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 OFF AIR (-)
‘적어도 이무기가 말한 창조자와는 다른 존재인 걸까?’
그렇다면 유 박사가 섬기는 알 수 없는 존재인 ‘월드 이터’ 역시 시스템의 한 가지 요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월드 이터? 그게 뭔데?”
“나는 그들에게 맹세했다.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방법을 대신, 이 땅을 바치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으니······.“
유 박사는 여전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 아래에 무언가 들어있기라도 한 듯, 잔뜩 경계 어린 표정이었다.
“······곧 그들이 찾아올 거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물었잖······.“
궁—
성우의 질문이 끝나기 직전, 땅이 한차례 움직였다. 성우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비틀거렸다.
구구구구-
이내 공동 전체가 거칠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느낄 수 있었다. 그 진동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성우 씨, 뭔가가 곧 솟아오를 거예요. 엄청 크고…… 엄청 무거워요.”
“이건 저도 느껴질 정도네요.”
쩌저저저一
유 박사가 바라보고 있던 지점, 바닥 한가운데에 균열이 번져나가더니 이내 싱크홀처럼 움푹 꺼져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검은 어둠이 솟구쳤다.
우우우우우-
검은 일렁거림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마치 거대한 스크린처럼 넓게 펼쳐졌다. 막이었다.
그리고 그 넓은 막의 한 가운데가, 뒤에서 손을 밀어 넣은 것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막 위에 동그란 무언가가 도드라졌다.
“······눈?”
그건 거대한 눈알이었다. 그것이 장막 안에서부터 천천히, 어둠을 밀고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부위 없이 오로지 단 하나의 눈알이 었다.
꾹— 꾹—
그것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지며 공동 전체를 둘러보는 듯 했다.
“저게 도대체······.“
성우와 일행은 감히 움직이지 못한 채, 뻣뻣한 자세로 그것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전투를 대비했다. 하지만 놈의 눈에 닿는 순간······.
- ‘외부 차원의 존재’의 위압감에 짓눌립니다.
*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60 %)
이 메시지는 ‘마굴의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서 기어 나온 마물을 목격했을 당시에 표시된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설마 마굴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는 걸까?’
그런데 당시에는 성우의 ‘신격’이 마물을 역으로 짓눌러버렸었다. 성우가 마물보다 격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즉, 저 눈알은 신격 이상의 존재라는 뜻이었다.
“······워, 월드 이터!”
유 박사가 탄식하며 무릎을 꿇었다. 잘린 팔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눈앞의 존재에 경도된 상태였다.
“제, 제발······.“
꾹— 꾹—
월드 이터 (World Eater), 그 눈동자가 유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 거대한 동공이 천천히 확장되었다.
“아, 안돼!”
그와 동시에 유 박사의 몸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우둑! 우둑!
두개골이 움푹 들어가고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였다. 사방에서 강력한 중력이 작용하는 거처럼, 마치 관절 인형을 으스러뜨리는 것처럼, 한 사람의 몸이 허공에서 압축되기 시작했다.
“······억! 어! 억!”
그건 계약 위반에 대한 징벌이었다.
“제, 어! 제발! 컥! 억!”
살과 뼈가 찌그러지며 핏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내 핏물마저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준까지 접히고, 또 접혔다.
철퍽一
그렇게, 작은 살덩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일행은 깨달았다. 지금은 감히 덤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걸 말이다.
꾹— 꾹— 꾹—
그것이 동공을 들어 올려 다시금 일행을 바라보았다. 조리개가 움직이며 동공이 축소되었다. 성우에게 시점이 맞춰졌다.
- ‘알수 없는 존재’가 당신을 응시합니다.
눈알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성우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 얼굴 부위, 심지어 눈꺼풀조차 없으니 눈알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만······.
- 당신은 ‘알 수 없는 존재’의 분노를 샀습니다.
성우를 지독히 싫어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