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네크로맨서-128화 (128/244)

# 128

45) 진화 학회의 본진 - 2

지수는 무사했다. 성우가 재빨리 뒤로 빼내어 불길이 닿지 않는 지점까지 대피시켰기 때문이었다.

성우는 통로를 따라 진군하기 전에 그녀에게 당부했다.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고 또, 중간에 불길이 닥친다면 그땐 정말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지수 씨는 뒤를 맡아주세요.”

“······.”

말이 좋아 뒤를 맡아달라는 거지, 사실상 뒤에서 기다리라는 소리였다.

지수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성우의 말이 옳았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다가는 개죽음을 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성우 씨가 들어가고 한동안 불길이 안 나오면 그땐 저도 들어갈 거예요.”

“신중하셔야 합니다.”

지수는 은근히 고집 있는 스타일이었다. 처음부터 짐이 되는 걸 대단히 싫어했으니 말이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성우는 통로로 들어갔다. 그의 앞에는 이미 언데드 부대가 출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

성우는 민석과 함께 수평 통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네크로맨서님, 저기 끝이 보입니다.”

“생각보다 짧네요.”

수평 통로는 높낮이가 존재했지만, 대체로 직선으로 뻗어있었다. 그렇기에 그 끝에 도달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통로 끝은 거대한 공동으로 이어졌다. 지하 8층의 층계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는데, 이 공동 역시 바닥부터 천장까지 20m가 넘어 보였다. 성우는 그 거대한 어둠 속에 우뚝 서서 랜턴을 들어 올렸다.

“저건······.”

그리고 이상한 걸 발견했다. 통로를 마주 보고 있는 벽에 다소 기괴한 게 달라붙어 있었다.

쩝― 쩝― 쩝―

그건 사람의 입이었다. 폭이 10m는 될 법한 거대한 입이 한쪽 벽에 돋아나 있었다.

쩝― 쩝― 쩝― 쩝― 쩝―

창백한 입술은 바짝 마른 채 뻣뻣한 각질이 일어나 있었으며, 입이 벌어질 때마다 누런 이빨 사이로 침이 뚝뚝 떨어졌다. 때때로 검은 혀가 꿈틀거리는 것까지 보였다.

그것은 마치 무엇을 씹고 있는 것처럼 시종일관 우물거렸는데, 그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쩝쩝거리는 소리가 역겹게 울려댔다.

“이게 대체 뭐죠?”

민석 역시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게 불을 토해내는 것 같군요.”

“불이요?”

성우는 그 입이 수평 통로를 휩쓸어버리는 거대한 불기둥의 발원지라는 걸 눈치챘다. 그 근처 바닥이 유독 검게 그을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저걸 뜯어내 버리죠.”

“가까이 가기도 싫지만······ 알겠습니다.”

성우는 권속을 풀어 그 입을 공격했다. 불길을 내뿜을까 걱정이었는데,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인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벌렁거리며 역겨운 괴성을 내지르더니, 이내 혀를 쭉 내밀고 움직임을 멈췄다.

- ‘알 수 없는 존재’를 제거하여 ‘알 수 없는 존재’의 분노를 샀습니다.

‘이게 뭐야.’

골드를 주는 게 아니라 분노를 샀다고? 이건 또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리고 알 수 없는 존재라니······. 시스템이 구태여 숨기고 있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백색 늑대가 경고한, 유 박사가 섬기고 있다는 그건가?’

백색 늑대 역시 자세히 모른다고 한 ‘그 존재’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만, 당장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더 깊숙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쪽에 문이 있습니다!”

민석이 공동 한쪽에 있는 큼직한 문을 발견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밀폐형 문이었는데, 작은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조금 정상적인 공간이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성우는 직접 다가가지 않고 웨어 울프 스켈레톤을 보내 문을 열게 했다.

그런데 녀석이 손을 뻗어 문고리를 움켜쥐려는 찰나,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웬 꼬마가 나왔다.

“반갑습니다.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산하 특별기구 ‘이상 현상 대응 센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녀석은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넘기고 턱시도에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귀족의 자제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넌 뭐지?”

“제가 네크로맨서님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녀석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성우는 리피팅 크로스보우를 들어 올렸다. 아이라고 해서 쏘지 못할 건 없었다.

“안내?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 너무 대놓고 보여주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당신이 너무 강력해서 저 같은 아이를 보내서 다시 한번 설득하려고 하는 겁니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성우는 그제야 확신했다.

‘아이가 아니다.’

외양만 아이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놈이군.’

성우는 눈치챘다. 이 녀석, DOCTOR였다. 그놈의 클론 중 하나가 분명했다. 언뜻 보니 어느 정도 닮은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렇다는 건 드디어 놈의 심장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성우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수 싸움에 밀리면 안 된다.’

놈과의 대결에서 언제나 승리해왔지만, 놈은 언제나 기상천외한 수를 내놓았다. 방심했다가는 단 한 순간에 함정에 빠질 수도 있었다.

성우는 남몰래 ‘스펙터’를 소환했다.

“정부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성우는 대화를 이어갈 여지를 내비쳤다. 그러자 녀석이 싱긋 웃었다.

“너희가 정부라는 건가?”

“정부 소속이었습니다. 행정안전부 산하의 연구 기관 중 하나인 이상 현상 대응 센터, 일명 ‘S·P·R·C’라고 합니다.”

녀석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정중한 자세로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성우는 민석과 함께 문 안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복도가 펼쳐졌다.

“정부는 나름 이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외부의 힘이 지구에 관여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는 걸 말입니다.”

그건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 세상이 게임으로 변한다는 걸 미리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니?

“그런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됐군? 이 사태가 벌어진 이후에 정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이 게임의 초반부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진 거야.”

“맞습니다. S·P·R·C의 실무 연구진들만 그걸 믿고 경고했거든요. 돈과 권한을 주는 고위 부처는 믿고 싶어 하지 않았죠. 세상이 게임으로 변한다니? 어떤 정치인이 그런 연구 결과를 신뢰하겠습니까?”

뚜벅― 뚜벅―

세 사람은 LED 등이 줄줄이 켜진 새하얀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 끝자락에 흰색 문이 하나 보였다.

“결국, 게임이 시작된 당일, 센터장인 유희승 박사와 그 휘하 연구진들이 대응에 나섰습니다. 게임이 시작된 동시에, 일대의 생존자 4천 명을 선별하여 이 시설로 대피시켰죠. 그리고 독립된 체계를 만들며 미래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유희승, 그게 진화 학회의 우두머리인 ‘유 박사’의 본명이었다. 그는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세상이 이렇게 변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무슨 준비였지?”

“무능한 정부가 잃어버린 대한민국을 재건하는 걸 넘어, 이 사태가 의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만족하기 위해서 계획을 짜고 실행해나가는 것입니다.”

성우는 그 계획이 뭔지 알았다. 범계역 지하의 비밀 시설, 그곳에서 DOCTOR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궁극적인 목적이라······ 너희가 말하는 초월, 신인류, 그건가?”

성우의 맞장구에 꼬마는 해맑게 웃었다. 마치 좋아하는 만화 줄거리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유희승 박사는 누구나 그렇듯, 시스템에 의해 두 장의 카드를 뽑았습니다. 첫 번째 카드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두 번째 카드는 ‘대주교’라는 카드였죠. 그 결과, 진리를 추구하는 두 장의 카드가 시너지를 냈고, 그렇게 그 누구보다 먼저 ‘정답’에 가까워졌습니다.”

“정답?”

“유 박사가 보기에, 이 게임은 일종의 테스트입니다. 어떤 존재가 인류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 내린 시험이죠.”

녀석은 신이 나서 떠벌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걸 통과할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하하! 인류라는 고전적인 형태를 탈피하여 더 큰 존재로 나아갈 방법을요! 그래서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난제인 ‘죽음’을 연구하고 있던 겁니다. 네크로맨서, 당신은 그 연구에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 겁니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보시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를 이해······.”

“틀렸어.”

성우가 녀석의 연설에 고춧가루를 뿌렸다. 그 순간, 녀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예?”

그리고 복도 한가운데에 우뚝 멈춰 섰다. 성우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 초월자라는 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는 몰라도······ 이건 우리를 위한 시험 같은 게 아니야.”

성우는 주머니 속 이무기의 비늘을 만지작거렸다.

- OFF AIR (-)

성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난 걸까? 정체불명의 시선이 성우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성우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그저 그놈들의 오락거리일 뿐이야.”

성우는 말을 잇지 못하는 녀석을 향해 한 층 더 강력하게 쏘았다.

“그리고 너희는 그 오락거리 중에서도 헛된 사상을 품고 있는 멍청하고 광적인 악역을 맡고 있어.”

아이의 눈이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입꼬리만큼은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끝내 저희의 대의에 함께 하시지 않겠다는 뜻을, 굉장히 무례하게 표현하시는군요?”

“이 정도로? 앞으로는 훨씬 더 무례해질 것 같은데, 그땐 울고불고해도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럼······.”

녀석이 옆으로 슬쩍 물렀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가볍게 흔들었다.

“안녕.”

그 순간, 복도 끝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창 3개가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백색 빛깔이 감도는 게, 언데드에게 치명적인 신성한 힘이 담겨 있는 게 분명했다.

“미안하지만 다 보고 있었어.”

하지만 성우는 그런 흉물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우우우우―

벽에서 두 마리의 유령이 튀어나왔다. 복도로 들어오기 직전, 스펙터를 내보내 벽 너머를 정찰하고 있던 것이었다.

“쏴!”

꼬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성우는 등 뒤에 매고 있던 ‘산도깨비의 목각 방패’를 끌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3개의 창이 날아들었다. 마치 미사일이 날아드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였다.

궁― 구―궁!

하지만 그 강력한 마법은 성우의 방패에 막히며 허무하게 소멸하고 말았다. 딱 3번의 마법 공격을 ‘무효화’ 하는 아이템 효과가 발휘된 것이었다.

“이이!”

꼬마 녀석은 그사이에 복도를 달려 도망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말 아이처럼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프, 프리스트 10명이 20분간 준비한 마법인데! 너 같은 걸 즉사 시킬 수 있는 건데! 그걸 그렇게 막다니!”

성우와 민석은 녀석의 뒤를 쫓아 복도 밖으로 나갔다. 그곳 역시 거대한 공동이었다.

“위쪽입니다!”

자세히 살필 틈도 없이 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프리스트 10명이 급히 새로운 마법을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그놈들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하반신이 잘려나간 채, 상반신만이 각종 체인과 호스를 통해 천장에 매달린 상태였다. 얼굴은 백색 두건을 통해 가려져 있었다.

“저것들······ 자의로 움직이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꼭두각시입니다.”

민석의 말대로였다. 신성 마법을 다루는 프리스트인 건 확실했다만, 그들은 몸뚱이만 존재할 뿐, 마치 기계처럼 조종을 받는 듯했다.

촤르르― 촤르르―

체인이 휘감기는 소리와 함께, 그것들의 몸뚱이가 줄에 매달린 채 움직였다.

덜컹!

이내 성우와 민석을 포위하는 구도로 배치되더니, 부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놈들의 뇌와 척추에는 전선과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퉁! 퉁! 퉁! 퉁!

성우가 그것들을 향해 리피팅 크로스보우를 난사했다. 발화 기능을 물론이거니와 ‘헬 파이어 갑주’를 입으면서 얻은 ‘샐러맨더의 아우라’ 효과로 화염 데미지가 증폭된 상태였다.

프리스트들의 몸에 화살이 적중하고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 플레이어를 살해하여 16,000골드를 얻었습니다.

- 플레이어를 살해하여 14,000골드를 얻었습니다.

- 플레이어를 살해하여 14,000골드를 얻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만 본다면 분명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 어떤 목적인지 알 수 없었지만, 플레이어를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만들어서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때요? 저런 모습 어떻습니까?”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디귿 모양의 계기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포마드 머리, 익히 알고 있는 DOCTOR의 모습이었다.

“네크로맨서님도 저렇게 만들어드리고자 하는, 저희의 오랜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솔직히 이 정도 시설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죠? 하반신을 도려낼 거라서 똥오줌 가릴 필요도 없습니다.”

놈도 DOCTOR였다. 다만, 조금 더 어린 모습이었다. 고등학생 정도?

그리고 그 뒤에 성우를 안내한 꼬마가 서 있었다. 녀석은 심술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사람 고집이 장난 아니던데? 아마 무슨 말을 해도 안 넘어올 거야. 진짜 짜증 나.”

성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연령대별로 클론을 만들었단 말인가?

“······가관이군. 더 없나?”

성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명이 더 등장했다.

“더 있습니다. 기대에 부응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이번에는 중년 모습이었다. 그는 심지어 휠체어 한 대를 밀면서 나타났다.

성우는 휠체어 탄 사람, 백발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노인은 성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어딘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왔어, 왔군······ 내가 그토록 바라던 표본이 이렇게 제 발로 오셨군.”

그 노인이 바로 유희승의 본체, DOCTOR-000였다.

“어서 오게. 멀리서 자네를 지켜보면서 언젠가 만나게 될 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지. 나의 연구를 완성 시켜 줄, 단 하나의 존재여······.”

“미안하지만, 나는 그 연구를 박살 내려고 왔어.”

노인은 킬킬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저 위의 친구들처럼, 네 팔다리를 다듬어내고 군말 없이 내 품에 안기게 해줄 테니까.”

노인이 싱긋 웃었고 성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젊은 모습의 클론들은 신사적인 척이라도 하더니, 늙은 본체는 대놓고 변태 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아하니 추하게 늙었군.”

“나이가 들수록 날 것이 되는 법이야.”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의 등 뒤에서 무언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꿀럭! 꿀럭!

그건 선홍빛의 촉수 다발이었다. 성우는 그게 놈의 무기일까 싶었는데······ 직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다.

푹! 푹! 푹! 푹!

노인의 촉수가 날아가 제 클론들의 목덜미에 박힌 것이다. 그리고 마치 빨대로 내용물을 빨아먹듯, 뇌와 척수액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흐어어······.”

클론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지를 바들바들 떨며 눈깔을 천천히 뒤집을 뿐이었다.

“······가족들끼리 우애가 아주 좋아? 너희가 말하는 한 몸이 되는 게 이런 거였어?”

성우의 비아냥 속에서 포식을 마친 노인, 유 박사는 휠체어에서 일어섰다. 그는 목 근육을 풀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언젠가 이렇게 모두가 한 몸이 되는 거다. 그게 바로······”

그가 그렇게 말하며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화다.”

철컥― 철컥―

그러자 어디선가 스위치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며 천장에 설치된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그러자 어둠에 잠겨 있던 공동이 그 민낯을 드러냈다.

돔구장 정도의 드넓은 공간이었다. 벽면과 천장에는 온갖 기계 장치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매달려 있는 건 기계 장치뿐만이 아니었다.

“맙소사······.”

민석이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었다.

수백 명의 플레이어가, 하반신이 잘려나간 채 천장에 줄지어 걸려있었다.

그들의 뇌와 척추에는 전선과 호스가 연결되어, 종전의 프리스트들처럼 원격 조종이 가능해 보였다.

우우웅―

이내 기계음과 함께 천장에 매달려 있는 플레이어들이 레일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운반되었다. 마치 대규모 정육 가공 현장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철컥― 위이이이―

또한, 십여 개의 크레인이 벽면에서 분리되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크레인에도 레일이 달려 있었는데, 천장에서 운반되고 있던 몸뚱이들이 레일을 타고, 각기 다른 크레인으로 배치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 철컥! 철컥! 철컥!

크레인의 끄트머리부터 두 명씩 차곡차곡 쌓이며 총 20명의 플레이어가 하나의 크레인에 고정되었다.

치지지!

전류가 흐르자 크레인에 매달린 플레이어들이 하나의 세트처럼, 동시에 같은 행동을 취했다. 손을 들거나 고개를 돌렸다.

한 번의 명령만으로도 20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같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

푸쉬이―

그리고 뒤쪽 벽면, 환기구처럼 생긴 구멍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푸쉬이―

이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원이 가스를 내뿜는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소란스러운 엔진 소리가 울리며 공동을 요란하게 만들었다.

우웅― 우웅― 우웅―

그렇게, 원활하게 움직이는 기괴한 장치를 바라보며, 유 박사가 뿌듯함을 내비쳤다.

“멋지지 않나? 아직 하나의 몸은 아니지만, 하나의 정신 아래에서 통제받으며 하나의 움직임을 가지게 됐다.”

그때, 천장의 중심에서 굵직한 케이블 다발이 내려오더니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며 유 박사를 향해 다가갔다.

이어서 유 박사의 등 뒤에서 촉수 다발이 뻗어 나가 케이블 다발과 이리저리 뒤엉키기 시작했다.

치지! 치지지!

스파크가 거칠게 튀었지만, 유 박사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좋아······.”

유 박사의 몸이 케이블 다발을 따라 상승했다. 그리고 그 모든 장치의 한가운데, 허공에 멈춰 섰다.

그리고 마치 지상을 굽어살피는 신이 된 것처럼,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자, 이게 바로 진화를 위한 초기 단계다.”

이에 성우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진화?”

성우의 오른손에 거대한 흑색 낫이 떠올랐다. 동시에 온몸에 검은 털이 번져나가며 한 마리의 검은 늑대로 변하기 시작했다.

“······계속 진화라고 하는데 말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중한 흑색 갑주가 입혀졌다. 그의 몸에서 푸른 열기가 번져 나왔다.

그건, 죽음의 권능과 강렬한 화염의 힘이 뒤엉킨, 형언할 수 없는 종류의 힘이었다.

“······너희에게는 멸종이 어울려.”

드디어 오랜 악연의 끝맺음 할······.

“내가 멸종시켜 줄게.”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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