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45) 진화 학회의 본진 - 1
처참하게 널브러진 시체들, 기마대가 짓밟고 지나갔기에 그 형체를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푸르르―
성우는 단 몇 초 만에 벌어진 참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듀라한, 앞으로 중요한 전력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성능 확인은 이걸로 충분했다. 성우는 듀라한을 ‘공허의 안식처’에 집어넣었다.
“자, 아래로 파고 들어가는 건 이쯤하고······ 일단 안쪽으로 가보죠.”
경비 병력이 추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동 경로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놈들에게 당하는 일이 없을지라도 계속해서 발목 잡힐 경우, DOCTOR 그놈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셈이 될 테니 말이다.
성우와 지수는 지하 2층의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CCTV를 파괴한 뒤, 벽면에 부착된 ‘시설 지도’를 확인했다.
그 결과 이곳의 위치가 ‘심연 연구 표본 센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연 연구 표본이라? 언데드 종류를 말하는 걸까요?”
“그런 것 같군요.”
지수의 추측대로 좀비, 구울, 스켈레톤 등 언데드 몬스터를 가두어둔 격리 시설이 복도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듀라한’이 있던 방은 그중에서도 가장 끝자락, 최상위 레벨의 보안 시설이었다.
‘내가 잡혔으면 듀라한 안쪽 자리를 차지했겠군.’
이런 놈들이라면 성우를 가장 중요한 표본이라고 여겼을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지도로 볼 땐 지하 5층이 가장 밑이네요. 거기에 놈이 있을까요?”
지수가 시설 지도의 가장 끝자락을 짚었다.
“그럴 거라고 봅니다.”
성우와 지수는 복도를 따라 이동했다. 그 길의 양측으로 온갖 종류의 언데드들의 ‘정화의 에너지’가 흐르는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녀석들은 성우가 지닌 죽음의 권능을 느낀 것인지, 성우가 지나갈 때마다 조용히 물러섰다. 마치 경의를 표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끝자락의 철창 안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건 언데드가 아니었다.
“······네크로맨서.”
다름 아닌, 사이코메트리 능력자, 백색의 웨어 울프였다.
“벌써 세 번째 만남이군.”
놈은 벽에 기댄 채, 그렇게 능청을 떨어댔다.
“원래 이런 곳에 계실 분이 아닌 거로 알고 있는데? 사수의 대마법사?”
한국 서버의 수인들을 이끄는 리더 그룹인 사수(四獸) 중에서도 일명 ‘백색의 기수’로 불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행색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철창 안에 갇힌 채 목에 두꺼운 사슬을 차고 있었다. 영락없는 죄수 신분으로 보였다.
“힘이 약해지니 부려지게 되더군. 나는 결국, 한 마리 사냥개였던 거야.”
놈이 허탈하게 웃었다.
“세력 다툼이 있었나?”
성우는 잠입할 때 보았던 노예 신분의 수인들을 떠올렸다. 진화 학회 내에서도 권력 투쟁이 있었던 거로 보였는데, 아무래도 백색의 늑대 쪽이 패한 모양이었다.
“세력 다툼이라? 세력?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모든 게 생존 경쟁, 생존 문제였다. 카드를 뽑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냥감으로 전락한 이후부터 말이야.”
놈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섞여 있었다. 이에 성우는 냉소를 머금었다.
“테러도 생존 경쟁의 일환인가?”
다분히 질타를 담아 물었다. 영등포역에서 발생한 심연의 호흡 테러, 그건 어떤 이유에서라도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백색 늑대는 고개를 푹 떨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모든 게 시스템이 내린 퀘스트였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시스템이 우리에게 너희를 공격하도록 종용했다면?”
애초에 수인에게 최초로 주어지는 퀘스트는 10명의 플레이어를 잡아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이성을 복구시켜주었다.
그걸 토대로 유추하길, 시스템이 바라는 건, 플레이어와 수인의 화합이 아닐 터였다.
백색 늑대가 말을 이어나갔다.
“······시스템은 카드를 선택하지 않는 우리에게 짐승이 되는 벌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를 악당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극악무도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이 게임의 주역인 너희, 플레이어들의 적대 세력이 되는 방향으로······.”
수인의 존재 목적이 그런 것이었을 거라고는, 성우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 그 선택은 너희 몫이었다.”
“맞아. 이런 짐승의 모습이라도 그저 살아남고 싶었기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선택했다.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스템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말이야······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니다. 바뀌는 것 없이, 변명할 여지 없이, 우리는 악당이다.”
그 말처럼, 수인들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바뀌는 건 없었다. 놈들은 성우의 적이다. 그리고 반드시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성우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성우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니, 분명 시스템에 순응하여 플레이어를 공격했을 것이다.’
성우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 거리낌 없이 행동해 왔으니 말이다. 결국, 최대 악은 ‘시스템’이다.
“네크로맨서, 너에게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널 도와주겠다. 진화 학회의 우두머리를 제거할 수 있게······.”
“유 박사?”
백색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지만 우리는 애초에 놈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 수인으로 변한 우리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수족으로 부리고 심지어······ 실험 재료로 사용했다. 결국, 우리는 참지 못하고 반기를 들었다가, 이렇게 전부 노예가 됐지.”
성우는 백색의 늑대를 믿을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고민했다. 다만, 이게 유 박사의 함정일 리는 없다는 점은 확실했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쓸모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유 박사, 그놈은 어딨지?”
백색 늑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바닥을 가리켰다.
“이 건물 지하 8층, 숨겨진 방에 있을 거다. 아마 유 박사도 너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겠지.”
“준비라고?”
“놈은 절대 종족 말고 다른 걸 모시고 있다. 아마 그 괴상한 후광의 힘을 빌리려고 할 거야. 그전에 빨리 내려가길 권한다. 지하 6층부터 8층까지는 제한 구역이라서 뚫고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려울 테니 말이다.”
역시나 지도에 표시된 지하 5층이 끝이 아니었다. 그 아래 더 큰 시설이 있는 것이었다.
‘역시 놈은 내가 올 때를 대비해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시간을 더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성우는 백색 늑대의 눈을 쳐다보았다.
“쉽게 내려가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한때 진화 학회의 간부였던 놈이기에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었다. 성우에게는 그게 필요했다.
놈이 처음으로 씩, 웃었다.
“놈을 죽이고 나서······ 노예 생활을 하는 수인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말해주지. 그들은 애초에 플레이어들을 죽이는 일에 회의적인 수인들이었다.”
놈은 목숨과 자유를 거래 조건으로 내세웠다.
“전제를 달지. 시스템이고 뭐고 앞으로 아무 짓도 안 하고 어디 구석에서 평생 조용히 살기로 약속해라.”
“······약속하겠다. 그런 짓을 하면 너한테 죽게 된다는 걸, 이제 모르는 것도 아니야.”
“그럼 말해.”
“이 시설은 원형이다. 저쪽 방향, 12시 지점의 벽을 뚫으면 비밀 승강기 통로 나올 거다. 지하 8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직행 통로야.”
“안전한가?”
“나도 모른다. 놈이 무슨 짓을 해 놓았을지는 모르지만, 거기만큼 빠르게 내려갈 수 있는 건 없다. 그게 아니라면 꽤 공들인 수비 병력을 뚫고 가야 할 거야.”
성우는 그 말을 듣고 곧장 몸을 돌렸다. 더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이봐, 네크로맨서!”
그때, 백색 늑대가 철창을 붙잡고 멀어지는 성우를 향해 소리쳤다. 그건 경고였다.
“유 박사가 모시는 어떤 존재, 나도 그게 뭔지 모른다! 하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사악한 존재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반드시 조심해야 할 거다. 명심해라!”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애초에 절대 종족을 적으로 돌린 건 물론이거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창조주’에게 맞설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성우는 백색 늑대의 조언대로 원형 건물의 12시 지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벽을 무너뜨리자 거대한 수직 통로가 나타났다.
“엘리베이터 맞네요.”
놈이 말한 대로 비밀 엘리베이터가 지나다니는 통로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내밀어 확인했다. 까마득한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불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지하 8층은 이곳에서부터 불과 5층 아래였지만, 층계가 높은 편이기에 상당히 깊어 보였다.
성우는 좀비 괴조를 소환하여 천천히 내려갔다. 다행히도 지하 8층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항시 감각을 열어두고 주변을 경계하던 지수도 긴장을 한 층 누그러뜨렸다.
“확실히 아무런 저항도 없네요. 조용해요.”
“놈이 제대로 알려주긴 한 것 같군요.”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거니와 바닥을 으스러뜨리면서 한층, 한층 내려갔다면 상당한 저항에 부딪혔을 것이었다.
“곧 바닥이에요.”
마지막 층, 지하 8층에 도착했다.
“길은 하나뿐이네요.”
갱도 같은 거대한 폭의 수평 통로가 펼쳐졌다. 상층부의 연구 시설과 다르게 전혀 정비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땅속을 헤집고 지나가면서 만들어진 것처럼, 인간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성우와 지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후우우우―
불쾌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은 수평 통로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뜨거워요.”
지수의 말처럼 지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당히 습하고 뜨거웠는데, 맨살에 닿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의 열풍이었다. 그녀는 땀을 닦아내며 불안함을 내비쳤다.
“성우 씨? 계속해서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어요. 이 정도라면······.”
아직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바람 온도는 급상승 중이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확실히 불길했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위협은, 그 누구보다 지수가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경악했다.
“······이거 위험해요! 당장 나가야 해요!”
구구구구구!
이내 엄청난 진동이 통로 전체를 뒤흔들었다. 무언가, 거대한 무언가가 통로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뜨거운 무언가가 말이다.
“뒤로 빠져요!”
성우는 지수를 뒤로 잡아끌며 바로 앞에 ‘본 드레이크’와 ‘본 와이번 알파메일’을 소환했다. 거대한 통로를 통째로 틀어막은 것이다. 동시에 뼈 방패를 형성하여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내 통로의 정면이 주황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무언가 매우 가까워졌다.
‘불이다. 엄청나게 뜨거운 불이 쏟아져 나온다.’
탈출할 시간이 없었다. 곧 충돌하고 말 것이었다.
“빨리 밖으로 나가요! 막고 있을게요! 저는 화염 면역이 있어요!”
다행히도 성우는 ‘전문 용 사냥꾼’ 칭호로 40%의 화염 면역력, 그림자 왕의 로브에 ‘드레이크의 가죽’을 조합하여 30%의 화염 면역력, 총 70%의 화염 면역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수는 견딜 방법이 없었다. 성우는 오우거 스켈레톤으로 그녀를 감싸 안은 뒤, 들어온 입구로 달려나가게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언데드를 소환하여 동굴을 막았다. 지수가 탈출할 때까지 버텨야만 했다.
- 경고! ‘지하의 분노’가 몰아칩니다!
사방이 시뻘건 빛깔로 물들었다.
“이건 또 무슨······.”
이전에 경험했던 지옥의 불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뜨거운 열기였다.
‘이건 나도 버틸 수 없다!’
성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70%의 화염 면역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 순간, 성우는 한 가지 아이템이 떠올리고는 품속에서 작은 구슬 형태의 아이템을 꺼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헬 파이어 갑주
- 등급 : 특수
- 분류 : 귀속 아이템
- 효과 : 장착 시 ‘헬 파이어 갑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방어력 +50% 마법 면역력 +30% 화염 면역력 +100%, 화염 데미지 상승 +20%)
- 설명 : 장착 시 저절로 사이즈가 조절되며, 사용자에게 귀속되어 해제가 불가능합니다.
그건 지옥에서 나온 화염 그 자체인 존재, ‘헬 무빙 아머’를 잡고 얻었던 아이템이었다.
착용 시 화염 면역력이 무려 100% 증가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70%의 면역력을 더하면 총 170%에 이를 정도였다.
- ‘헬 파이어 갑주’를 착용하시겠습니까? (Y/N)
* 귀속 아이템입니다. 착용 시 해제가 불가능합니다. (단, 미사용 시에는 마나 형태로 ‘손목의 문양’ 속에 보관됩니다.)
귀속 아이템이지만 항상 입고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탈착하듯, 평상시에는 무형으로 보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깊이 고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거대한 불기둥이 들이닥치기 직전이었다.
“착용!”
- ‘헬 파이어 갑주’가 당신에게 귀속됩니다.
그 순간, 성우의 몸에 갑옷이 장착되기 시작했다. 흑색의 철갑이 온몸으로 뻗어 나가며 성우의 체구에 맞게 조립되었다. 동시에 온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효과는 곧장 나타났다.
‘뜨겁지 않다.’
- ‘화염 면역력’이 일정 수치(150%)를 초과하여 ‘샐러맨더의 아우라’가 부여됩니다.
* 모든 직접 공격에 ‘화상’ 효과가 부여됩니다.
* ‘화염 공격’에 맞으면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1%)
그 메시지와 함께 몸을 뒤덮고 있던 ‘붉은 불꽃’이 ‘파란 불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뜨겁기는커녕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동굴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불의 온도는 높을수록 청색에 가까워진다. 즉, 통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화염보다 성우의 몸이 더 뜨거운 상태였다.
다음 순간, 붉은 일렁임이 소용돌이치며 달려들었다. 불기둥이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콰과과과과!
모든 언데드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버텨낼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니었다.
성우의 몸 역시 집어 삼켜졌다. 고막이 뜯겨 나갈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귓바퀴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동굴의 외벽이 갈려 나가며 흙더미가 등 뒤로 날아가 버렸다. 마치 믹서의 칼날처럼, 통로 안이 모든 걸 갈아버렸다.
“······.”
하지만 성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꿋꿋이 서 있을 수 있었다. 그저 거센 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우우우―
이내 한차례의 돌풍이 스쳐 지나가듯, 강력한 불기둥이 성우의 등 뒤로 사라졌다.
성우는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준비한 게 이것밖에 없다면······.”
이내 시뻘건 잿더미 속에서 녹색 안광이 하나둘 점등했다. 그리고 수백의 언데드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너희는 끝이다.”
거대한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길, 그 길을 따라, 이번에는 네크로맨서의 군단이 진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