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43) 부산 대첩 - 2
두 칼잡이가 마주 보고 섰다.
짙은 고요가 멸망한 도시 위로 번져나갔다. 폐허 곳곳에서 지켜보는 이는 많았지만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공식 채널의 드론 카메라는 정지 상태로 그 장면을 담았으며 소란을 부리던 채팅창마저 완연하게 사그라들었다.
그렇다는 건, 두 칼잡이가 풍기는 중후한 기운이 모두에게 오롯이 전해졌다는 뜻이었다.
“······.”
“······.”
지수의 칼이 먼저 조금 위로 들렸다. 공격을 위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풍기기 시작했다.
- ‘사냥 본능’을 발동합니다.
* 120초간 전투 지속 시 ‘사냥 개시’가 열립니다.
태백산맥에서의 ‘히든 퀘스트’를 완수하고 얻은 ‘각성 스킬’인 ‘사냥 본능’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세로로 찢어지며 한 마리의 맹수 같은 외양을 풍기기 시작했다. 험악한 이빨이 드러난 마스크에 더불어 짐승의 눈, 그리고 붉은 살기······.
- ‘사냥감’이 지정됩니다.
그녀는 상대,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도 어떤 메시지가 떠올랐다.
- 주의! ‘피포식자의 블랙 아웃’에 빠졌습니다.
* 모든 감각 둔화 (-50%)
“······이 무슨?”
맹수의 초저주파라고 하던가? 아키라는 마치 범을 마주한 사슴처럼, 온몸이 저릿하며 어딘가가 단단하게 굳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키라와 같은 칼잡이에게 감각이란 건 하늘을 나는 새에게 바람을 읽는 본능과 같았다. 그것이 틀어막히면 바람에 휩쓸려 버릴 것이었다.
‘위험하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내성을 가질 수 있었다.
- 당신의 냉철한 정신력이 일부 감각을 되살립니다.
* 모든 감각 회복 (+30%)
그러면서 오른발을 슬며시 앞으로 내딛는 순간, 아키라는 이미 자신의 눈앞에 쇄도해 있는 상대를 발견했다.
“큭!”
그는 급히 몸을 뒤틀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방어하는 방향으로 칼을 휘둘렀다.
챙! 채―앵!
순식간에 두 번의 불꽃이 튀었다. 그는 뒤로 재빠르게 물러서며 칼을 들어 올렸다.
“발자국 추적······. 하하하!”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읽어 그 이동 경로에 나타나는 능력, 그건 아키라 역시 가지고 있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비장의 순간을 위해서 아껴두고 있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상대가 먼저 그걸 꺼내 들었으니 이제는 아낄 이유가 없었다.
“좋아, 제대로 해보자고!”
이번에는 아키라가 달려들었다. 땅을 박차고 칼을 찔러 넣었다. 맞길 바라는 공격은 아니었다. 마치 바둑처럼 그저 첫수를 둔 것이었다.
지수는 뒤로 물러서며 찌르고 들어오는 칼을 올려쳤다. 평범한 맞수였다. 그리고는 뒤로 크게 크게 도약하며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붕!
검기가 쏘아졌다. 아키라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따라온 머리카락 일부가 잘려나갔다. 그는 지수를 향해 빠르게 따라붙었다.
다음 순간, 둘의 모습이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서로가 발을 뻗으려고 했던 그 자리에 위치가 바뀌어 나타났다.
교차한 발자국 추적, 단 두 걸음 거리, 아키라는 급히 몸을 돌려 칼을 휘둘렀다.
챙! 챙! 챙! 채―앵―기기기기!
순식간에 4합이 이루어지고 그 끝에서 칼이 맞붙었다. 두 자루의 칼이 이를 맞대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조금 더 불안한 떨림을 보이는 건 아키라 쪽이었다.
지수는 중국 서버의 후에이와의 대결에서도 그렇듯, 일반적인 칼잡이치고는 ‘근력 수치’가 지나치게 좋은 편이었다. 순간, 지수의 눈에 미소가 떠올랐다.
쩍!
그건 로우킥이었다. 힘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걸 느낀 지수가, 비교적 힘이 덜 실리는 뒷발을 들어 올려 킥을 날린 것이다.
아키라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틈에 지수의 칼날이 그의 허벅지를 슥, 긋고 지나갔다.
“······큭.”
“비실비실하네.”
이렇게 첫 번째 피가 터졌다. 한국 측에서 작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키라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숨을 고르더니, 금세 정면으로 쇄도했다.
지수는 자세를 낮추고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키라가 칼을 휘둘렀다. 지수 역시 맞수를 뒀다.
훙!
하지만 아키라의 칼날이 흐물거리며 지수의 칼날을 통과해 들어오는 게 아닌가?
‘······환영?’
이어서 진짜 칼날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아키라의 환영을 뚫고, 지수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푹!
지수의 왼쪽 어깨에 칼날이 박혔다. 순간적으로 몸을 뒤틀었기에 깊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 피를 보고 말았다.
“자, 내 건 어땠나? 꽤 괜찮았지?”
그와 동시에 일본군이 도심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키라는 기고만장한 표정이 되어 손을 들어 보였다. 카메라를 향해 씩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드러냈다.
“자, 이제 네 차례다. 다음으로 보여줄 게 더 있나? 있으면 어서 꺼내보지?”
“······다음 걸 보여주면 넌 죽어.”
지수의 엄포에 아키라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으하하하!”
그는 몸을 뒤로 꺾어대며 웃더니 다시금 칼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도발했다.
“해 봐. 허세만 가득한 한국 놈들······ 나도 너를 꿰뚫어 봤어. 너는 딱 거기까지야. 너는 나한테 죽는다.”
그때, 지수의 눈에 한 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사냥 개시’가 열립니다.
‘사냥 본능’ 사용 후 120초간 전투를 지속할 경우 ‘사냥 개시’라는 추가 스킬이 열린다. 지수가 말한 ‘다음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개시.”
그녀의 한 마디와 함께, 등 뒤에 떠 있던 푸른 불꽃이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 시퍼렇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스크의 틈에서 파란 입김이 치솟았다.
- 1분간 ‘사냥 개시’를 발동합니다.
*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20)
* ‘사냥감’에 대한 공격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50%)
이는 지정된 사냥감을 도륙하기에 최고의 능력치를 부여한다.
단 1분이다.
‘59, 58, 57······.’
마치 모든 걸 쏟아부어 한 마리의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 맹수가 그러하듯, 지수는 죽이기로 마음먹은 상대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래 와라!”
그리고 단단히 버티기로 작적한 아키라를 향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쩡! 쩌―정! 쩡!
조금 전과 다르게 어딘가 함부로 휘두르는 듯하지만, 그 모든 건 압도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한 본능에 지배받고 있었다.
‘52, 51······.’
단 3합 만에 아키라의 팔이 뒤로 밀려났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몸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무언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쩡! 쩡! 쩡!
“큭! 크으!”
정확성, 타이밍, 힘이 모두 담긴 연속 공격에 아키라는 감히 벗어나거나 반격을 가할 틈을 찾지 못했다.
함부로 방어를 풀고 다른 행동을 취했다가는, 저 포악한 칼날에 반 토막이 나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쩡! 쩡! 쩌―엉!
그는 하염없이 뒷걸음질 치며 반격할 틈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 무슨 이, 이런! 마, 말도 안 되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버텨낼 수 있는 것조차 아니었다. 지수의 칼날이 사방에 장대비처럼 쏟아지자 그의 관절이 고통스럽게 들썩였다.
쩡! 쩌―엉! 쩡!
그리고 그 충격이 전해질 때마다 무릎, 팔꿈치, 허리가 조금씩, 강제로 접히기 시작했다.
“······으, 으, 윽!”
아키라의 자세가 확연하게 흐트러지더니 끝내, 무릎이 바닥에 닿는 치욕을 겪었다.
“아, 안 돼!”
그는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방어를 이어나갔지만, 서 있을 때와 같을 수 없었다. 칼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칼자루가 손에서 마구잡이로 들썩였다.
쩌―엉!
결국, 칼자루를 놓쳤다. 아키라의 칼이 허공으로 치솟아 어느 가로등의 중단에 꽂혔다.
“······.”
그는 빈손이 된 채 무릎을 꿇고,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마, 말도 안 돼······.”
“말했잖아······.”
푸른 안광을 가진 짐승 같은 여자가 그늘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시퍼런 색의 숨결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 검은 칼날이 올곧게 치솟아 있었다.
“······다음 걸 보면 넌 죽는다고.”
이내 직각으로 떨어졌다.
촤―악!
아키라의 머리가 공중으로 치솟았고 그의 몸뚱이는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
도시는 여전히 고요했다.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일본군의 본대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한국 측 역시 지수의 압도적인 기량 앞에 환호를 지르는 것조차 잊은 상태였다.
- 한국 서버 ‘kor-339’ 승리!
- 한국 서버에 ‘승리 버프’가 부여됩니다!
* 2시간 동안 공격력 상승 (+30%)
“······이겼다!”
“우와아!”
“대박이야! 대박!”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뒤에야 한국 서버는 잊고 있던 환호성을 터뜨렸다.
비록 병력 대다수가 캠퍼스에 남은 탓에 이 자리에 나온 건 서른 명 남짓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찬 함성이었다.
하지만 지수의 손아귀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어떤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아키라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아니야. 아직 안 끝났다.’
그리고 그녀의 예감처럼, 예상외의 괴상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커, 커허어······.”
잘려나간 아키라의 머리가 저 혼자 움직이더니 공중으로 떠오르는 게 아닌가?
이어지는 장면은 역겹기 짝이 없었다.
츠츠츠츠―
그 목의 절단부에서 핏줄이 다발로 뻗어 나왔다. 그것들은 한 곳으로 뭉치며 마치 찰흙처럼, 거대한 몸뚱이를 조형하기 시작했다.
“크, 크으······.”
이내 덩치 큰 거인의 형상이 완성되었다.
약 4미터가량의 붉은 몸뚱이, 등 뒤에서 솟아난 검은 날개, 일본 신화에서 나오는 ‘텐구’라는 요괴에 비슷한 생김새였다.
“잘도 날······ 최후의 수단까지 쓰게 만들었겠다······ 용서하지······ 않는······ 다.”
놈은 어눌한 음성으로 분노를 표현했는데, 아무래도 어떤 아이템에 의한 변이처럼 보였다. 목숨이 연장되는 대신 저런 괴물이 되어야 하는 걸까?
“저게 뭐, 뭐야?”
“사람 맞아?”
한국 측 진영이 술렁이는 가운데, 지켜보고 있던 성우가 앞으로 나왔다.
“지수 씨, 이제 제가 처리하죠. 덩치 큰 놈들은 제 전문이니까요.”
이제는 1대1 대결이 아니다. 성우는 언데드를 이용하여 저 괴상한 놈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남은 시간 14분이면 충분할 것이었다.
일본군 본대 쪽에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걸 보아하니, 자신들의 지휘관이 이런 꼴로 변할 줄은 꿈에도 모르던 모양이었다.
파직! 파지지―지!
놈은 양손에서 전류가 흘렀다. 아무래도 단순한 물리적인 공격만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성우는 등 뒤에 본 드레이크와 오우거 스켈레톤을 소환했다.
“와라······ 찢어······ 발겨주마······.”
그때였다.
“아니에요. 성우 씨······.”
그녀는 다른 것도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위에요!”
지수가 또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성우는 지수의 경고를 믿고 본 드레이크 움직여 머리를 보호하게 했다.
피이이이!
고개를 드니, 포탄으로 보이는 물체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들고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가 부산의 도심 곳곳에 떨어지고 있었다.
“저게 뭐야!”
“우리한테 날아온다! 피해!”
그런데 그 목표물은 특정 세력이 아니었다.
“어! 여기로도 날아온다!”
한국 측, 일본 측 구분할 것 없이, 이 장소의 모두가 피해 범위 안에 들어가 있었다. 무차별적인 폭격이었다.
펑! 펑! 펑! 퍼―엉!
피할 틈도 없이, 곳곳에서 포탄이 폭발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터져 나 골목을 따라 도심 전역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모든 걸 집어삼켰다. 사방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후, 후퇴! 커! 커어!”
특히나 일본군 본대는 다수의 포탄에 직격당했는데, 검은 연기를 들이마신 일본의 플레이어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심연의 호흡이다.’
성우는 포탄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자연스럽게 기습의 배후까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진화 학회, 무슨 속셈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 ‘심연의 호흡’에 의해 마나가 대폭 증가합니다.
- ‘심연의 호흡’이 체내에 축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연의 호흡은 네크로맨서에게 엄청난 버프를 가져다준다. 놈들이 그걸 모르는 건 아닐 것이었다. 분명 어떤 계획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 ‘그림리퍼’ 유지 시간이 증가합니다.
- ‘아누비스’ 유지 시간이 증가합니다.
‘뭐가 됐든 오늘 싹 쓸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