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40) 세계수의 진영 – 4
전쟁을 대비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대비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세계수 진영처럼 훈련과 물자 축적을 통하여 전력을 보강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반면, 공작과 첩보를 통하여 적대 세력의 전력에 타격을 입히는 방법이 있다. 상대의 전력에 손실을 입혀 격차를 벌려두는 것이다.
이 방법은 상당히 어렵지만, 비용 절감에 탁월하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훈련된 ‘요원’을 필요로 한다.
“길 좀 물읍시다.”
안산시 상록구, 한때는 번화가였지만 세상이 게임으로 변한 이후, 이곳에서 누군가를 마주친다는 건 굉장히 께름칙한 일이 되었다.
그것도 길을 묻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라면 말이다.
“······.”
그 질문을 받은 남자, 승태는 당황스러운 한편,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긴장되진 않았다. 길에서 마주친 상대는 2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봐 승태, 무슨 일이래?”
승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3대의 트럭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26명의 동료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앞을 막아선 사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여 마법 드론까지 띄워 놓은 상태이기에 무력 충돌이 벌어진다면,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나도 몰라 길을 잃으신 것 같은데?”
“우리 바쁘니까 112에 신고하라고 조언해드려. 경찰 아저씨가 집 찾아줄 거야.”
그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잠깐만 기다려봐.”
동료들의 후광에 자신감을 얻은 승태는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길이라뇨? 무슨 길 말입니까?”
“수원으로 가려면 이 길이 맞습니까?”
“허, 참······.”
승태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려 대로변의 녹색 표지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서울과 수원 등, 인근 대도시까지의 거리가 표기되어 있었다. 굳이 사람을 붙잡고 묻지 않아도 알 수는 상황이었다.
“······.”
사내의 눈이 승태의 손가락을 천천히 따라가, 이내 표지판에 닿았다.
하지만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심지어 눈동자가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글자를 읽지 못하는 것처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쪽이 수원 방향이라는 겁니까?”
승태는 슬슬 짜증이 났다.
“아니 저기 떡 하니 쓰여 있는데 왜 자꾸 묻는 거요? 글자를 못 읽는 건 아닐 테고, 혹시나 다른 수작 있는 거라면 미리 경고하는데······.”
“아, 좋아요. 그런데······.”
사내가 말을 끊고 앞으로 다가왔다. 위협을 감지한 승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어어, 형씨, 조심해요. 더는 다가오지 마.”
그가 이 손을 내리면 뒤에 있는 동료들이 일제히 사격하여 두 명의 사내를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릴 것이었다.
“어이, 어이 진정해. 내가 찾는 건 표지판이 아니라고······ 그리고 너희의, 그 이상하게 생겨 먹은 문자에는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멍청아.”
그 말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뭐? 너 지금······.”
“한심한 조센징, 이 정도로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도 참 웃음 포인트란 말이지. 하하.”
상대의 도발에 승태는 콧방귀를 뀌며 돌아보았다.
“얘들아, 이 새끼 지금 뭐라······ 어? 으아아!”
하지만 당찬 기세는 단숨에 꺾여버리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클리어.”
승태는 두 눈을 의심했다. 일행의 트럭 3대는 온통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허, 허어!”
사방에 잘려나간 신체 부위가 나동그라져 있었으며 트럭 아래로 핏물이 떨어지며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칼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
분명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접근하는 인기척이나 싸우는 소리 하물며 비명조차······.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란 말인가?
승태는 상황 파악을 하기에 앞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생존본능이었다.
“제, 제가 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사내가 승태 앞에 쪼그려 앉았다.
“사실 우리가 필요한 건 길잡이가 아니야.”
승태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 그럼······.”
“정보! 너와 네 핸드폰, 한국 서버 커뮤니티에서 지속해서 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얻길 원한다.”
“어이, 조센징 아무래도 너, 운이 정말 좋은 것 같단 말이야? 우리 1번대의 칼이 한 번 뽑혔다가 복귀하는데도 숨을 쉬고 있다니? 전례 없는 놈일세!”
“이쿠후미, 함부로 나불대지 마. 겁먹어서 글자를 까먹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해?”
“으하하!”
너스레를 뒤로하고 사내가 다시금 승태를 바라보았다.
“이봐, 알아들었나? 너는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얻어서 우리에게 보고한다.”
“예! 예!”
핸드폰으로 커뮤니티를 이용할 수 있는 건 해당 서버에 속한 플레이어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에 승태는 용기 내어 물어보았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시, 실례가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대체 누구십니까?”
리더로 사내가 복면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너희 서버의 썩은 머리를 도려내러 온 선생님들이다. 그러니 우리를 머리, 네크로맨서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라.”
***
지옥의 트레이닝이 시작된 지 23시간, 세계수 진영의 플레이어들은 ‘트롤의 토굴’ 던전 3층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은 보스 방이었다.
우어어!
팔이 6개 달린 트롤, 보스 몬스터 ‘지하세계의 왕’이 거칠게 포효했다. 125명의 플레이어는 대열을 유지한 채, 단 한 마리의 적에 맞서고 있었다.
쿵― 쿠궁!
무려 15미터에 이르는 체구에, 6개의 팔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흉측한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조금의 접근이라도 허용했다가는 그 풍차 같은 공격에 수십 명이 휩쓸려버릴 것이었다.
“다리가 얼어붙은 틈에 데미지를 넣어라!”
다만 지금은 왼쪽 다리에 빙결 마법이 먹힌 상태인지라, 위협이 한층 누그러진 상태였다.
“4조 장전!”
“2조 사격!”
“3조 사격!”
쩌저―쩌저저―
하지만 빙결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놈은 엄청난 힘으로 얼음을 으스러뜨리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2조, 빙결 마법 준비 완료!”
“지금이야 오른 다리에 쏴!”
두 번째 빙결 마법이 적중하자 놈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그리고 방금 빙결이 풀린 왼쪽 다리를 향해, 궁수 부대의 집중 사격이 이어졌다.
푹! 푹! 푹!
육중한 다리에 수십 발의 화살이 쏟아지며 무릎과 허벅지가 밤송이처럼 변했다.
우어어!
하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해왔고 오른 다리에 들러붙은 얼음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쩌저저―
“3조, 빙결 마법 준비 완료!”
“4조, 완료!”
“오른 다리가 풀리는 즉시 왼쪽 다리로 발사 준비!”
하지만 빙결 마법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총 5개의 조가 차례대로 마법을 준비하며 ‘재사용 대기 시간’을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1조 다시 준비 완료!”
이처럼 공략은 매우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스킬을 함부로 난사하는 게 아니라, 정확한 타이밍을 계산하여 사용했고 그게 연쇄되면서 최적의 공략 패턴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놈의 세 번째 왼팔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거대한 크기의 새총이었다. 이내 두 번째 왼팔이 가죽 주머니에서 돌덩이를 끄집어냈다.
“······저건?”
단순한 새총이 아니라, 투석기 수준의 피해를 줄 수 있는 초대형 새총이었다.
“놈이 새총을 당긴다! 5조 방어 마법!”
지휘관 중 한 명이 그 움직임을 포착해냈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미리 시전되어 있던 ‘대규모 방어막’이 형성되며 대열 전체를 뒤덮었다.
기기기! 투―웅!
무식한 돌덩이가 쏘아졌지만, 이미 반구형의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이번에는 놈의 왼팔! 원거리 공격을 못 하게 묶어라!”
“쏴라!”
거대한 동굴 안에서 125명, 5개 조의 플레이어들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놈을 포위하고, 교란하고, 회피하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효율적으로 데미지를 넣었다.
그러자 놈의 팔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놈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좋아 계속 몰아붙여!”
압도적으로 강력한 플레이어가 없었기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끝내 놈을 무릎 꿇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어어······.
- 보스 몬스터 ‘지하세계의 왕’을 사냥하여 115,000골드를 얻었습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에 125명의 플레이어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우와! 성공이다!”
“드디어 깼다!”
“또 레벨 업이다!”
그들의 환호가 동굴 안을 가득 메우며 쩌렁쩌렁 울렸다. 네크로맨서의 도움 없이도 희생자가 0명,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얻은 골드가 총 3,500,000골드였으며 무려 34명이 동시에 레벨 업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까지 했다.
“벌써 14레벨이다. 하루 동안 2나 오른 거 실화냐?”
“저는 13레벨, 3업이나 했습니다.”
세계수 진영의 전력이 실시간으로 껑충 뛰어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전리품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기 좀 보십시오! 벽에 뭔가 있습니다!”
누군가 특별한 걸 발견했다. 그건 동굴의 가장 깊은 곳, 막다른 벽면이었다.
“이게 뭐지?”
“그냥 벽은 아닌데? 안에 공간이 있는 것 같아.”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일종의 문이었는데 인간이 이용할 만한 크기는 아니었고 딱, 보스 몬스터인 ‘지하세계의 왕’이 드나들 수 있는 크기였다.
하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어 보였다.
- 문이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 문에 ‘각인된 존재’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 3등급 이상의 ‘봉인 해제’ 주문이 필요합니다.
* 장인 등급 이상의 ‘자물쇠 해제’ 스킬이 필요합니다.
“마법으로 막혀 있군요.”
인호가 벽면을 쓰다듬더니 말을 이어갔다.
“두 번인가 이런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던전 안에 따로 힌트가 없는 것 같고, 오로지 개인의 스킬로 열 수 있는 히든 보상인 것 같네요. 우리 중에는······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습니다.”
인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성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에 쓰여 있는 오픈 조건은, 확실히 처음 보는 스킬이네요. 상위 등급의 도적 직업군이 필요하겠어요.”
성우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런데 저한테 다른 방법이 있네요.”
그건 얼마 전, 비밀 상점에서 뽑았던 ‘만능열쇠’ 아이템이었다. 언제 사용하게 될지 몰라도 언젠가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하여 사둔 물건이었다.
“······그건?”
성우는 말없이 문을 향해 다가갔다.
- 잠긴 상태의 문이 존재합니다. ‘만능열쇠’ 아이템을 통해 개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사용.”
- 문이 열립니다. (지하세계 왕의 대형 금고)
메시지와 함께 벽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음침한 빛을 발하더니, 거대한 석벽이 진동하며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이내 금고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보물 상자를 여는 건 언제나 도박이다. 그 상자를 찾기까지의 노력에 상응하는 보물이 들어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아니 트롤이 이런 걸 모은다고?”
“기가 막히네······.”
이번 도박은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