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34) 열병식의 몰래 온 손님 - 1
10초는 긴 시간이었다. 특히나 움직이지 못하는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카악! 카아―카아―
하지만 ‘와이번 알파메일’은 상당히 거대한 몸집을 가진 존재였기에, 10초 안에 목숨을 끊는 건 불가능했다.
그 점에서 지수의 역할이 컸다.
촤악!
그녀는 그 거대한 육체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알았다. 어디를 어떻게 베어서, 어떤 근육과 힘줄을 파괴해야지 꿰뚫고 있는 것이었다.
촤악!
말 그대로 통찰력이다. 체육학 전공 지식을 바탕으로 그동안 수많은 생명 베어 왔다. 여기에 절묘한 감각까지 작용하자, 남다른 판단이 가능했다.
푸―욱!
그녀의 칼날이 두꺼운 비늘을 헤집고 질긴 살을 파고 들어가 힘줄을 절단했다.
“······끝났어요. 이제 날지도 걷지도 못해요.”
그렇기에 놈은 10초가 지난 다음에도 숨이 붙어있었지만, 날아오를 수는 없었다.
단 10초의 시간이 더 긴 찬스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들이 그 중대한 찬스를 놓칠 리가 없었다.
민석이 ‘주인 잃은 검’으로 놈의 숨통을 끊었다.
- 필드 보스 몬스터 ‘와이번 알파메일’을 사냥하여 4,324,500골드를 얻었습니다.
- ‘지배자 몬스터’를 사냥하여 특별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비밀 상점 쿠폰)
- ‘하늘의 정복자’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 민첩성 수치 상승 (+2)
* 체력 수치 상승 (+2)
* 물리 방어력 상승 (+10%)
* 바람 저항력 상승 (+20%)
사실상 플레이어는 성우와 지수, 둘이서 잡았음에도 상당량의 골드가 들어왔다. ‘헬 무빙 아머’보다 한 단계 위의 난이도인 셈이었다.
또한, 확정적으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비밀 상점 쿠폰’까지 얻었으니 앞으로 쇼핑할 날짜를 잡아야 할 것 같았다.
- 자격 증명까지 남은 시간 : 2,733일
그리고 방금 전 한 방으로 무려 700일의 시간이 감소했다. 이런 놈을 4마리만 더 잡으면 ‘자격 증명’이 완료된다는 뜻이었다.
보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뭔가 또 뜨겁다.’
이제는 익숙한 기분이었다. 성우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한 장의 카드였다.
우우웅―
헬 무빙 아머를 잡으며 얻었던 ‘B급 경험치 카드’가 녹색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레벨 업이다.’
예전에 한 번 사용했던 것처럼, 쿠폰 사용으로 레벨 업이 가능할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 현재 레벨 업 할 수 있는 경험치에 도달했습니다. 쿠폰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성우는 쿠폰을 사용했다.
- 레벨 업 하셨습니다. (LV. 21)
레벨 업 카드에서 ‘스킬’ 항목을 골랐고 최대 권속이 무려 3마리나 증가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엄청난 이득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림리퍼를 얻은 뒤, 무한정으로 되살릴 수 있으므로 숫자에서는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더 많은 언데드를 다룰 수 있다면, 그만큼의 화력이 향상될 테니 적지 않은 전력을 얻은 셈이었다.
“하늘 쪽도 끝나가네요.”
지수가 칼을 닦아내며 말했다. 와이번 알파메일이 잡혔으니 나머지 와이번들도 사실상 정리 수순이었다.
숫자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끝없이 되살아나는 본 와이번들과 힘겨루기에서 이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 서버의 하늘이 완전히 정복되었다.
***
성장하는 건 성우뿐만이 아니었다.
엄청난 놈들을 대거 사냥했으니, 세계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질 좋은 양분이 공급되었다.
우웅! 우웅!
세계수가 빛을 발하더니 이번에도 순식간에 생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물감이 번지듯, 단숨에 3층 건물 크기까지 솟아났다.
- 세계수가 ‘성장 2단계’에 도달했습니다.
플레이어들 역시 그 장면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라는 속도가 눈에 보이는 걸 넘어서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우, 우와.”
“한 번에 이렇게까지?”
“나중에는 구름을 뚫는 거 아니야?”
달라진 점은 크기뿐만이 아니었다. 뿌리에서부터 이파리까지 번져나가던 빛줄기가 조금 혼탁한 색깔로 변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분명 어떤 변화를 시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세계수가 당신의 영향을 받아 ‘성향’을 형성합니다.
“······성향?”
네크로맨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게 과연 긍정적인 건지 의심이 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세계수가 새로운 능력을 얻습니다. <신목의 그늘>
* 신목의 영험함이 일대에 강력한 ‘결계’를 형성합니다. 이는 강력한 보호막 역할을 하는 동시에 원하지 않는 자들의 출입을 금지할 수 있습니다.
- 세계수가 새로운 능력을 얻습니다. <영혼을 머금는 자>
*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다른 생명을 앗아갈 때마다 그들의 영혼이 세계수에 구속됩니다.
이처럼 세계수가 ‘성장 2단계’가 되면서 특별한 능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단 <신목의 그늘>이라는 자체적인 방어 능력이 생겼는데, 이 점은 정말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이기도 했다.
‘사실 테러 킴, 그놈이 기습적으로 폭탄을 던졌으면 세계수가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먼 거리에서 ‘뇌신의 철퇴’ 같은 공성 병기를 쏜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듯 일대를 초토화할 만한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불안했었다.
그러나 <신목의 그늘>이 생기면서 원거리에 날아오는 강력한 공격은 물론이거니와 은신을 이용한 침투까지 막을 수 있게 됐다. 한 시름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영혼을 머금는 자, 이건 뭐지?’
이어서 얻은 <영혼을 머금는 자>는 아직 구체적인 활용 방안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추측하건대, ‘아누비스’의 능력을 얻었을 때, 스킬 사용에 소모되는 ‘영혼’을 저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아누비스를 최대한의 능률로 쓸 수 있다.’
아누비스 상태가 해제될 때, 남은 영혼은 저장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와이번 무리를 사냥하기에 앞서, 미리 영혼을 모아두는 준비 과정을 거쳤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투가 시작된 초반은 화력이 모자를 수밖에 없었으며, 필요한 수만큼의 영혼을 쌓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은 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영혼을 공급받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옵션인 셈이다.
‘아무리 그래도 영혼을 먹는 세계수라? 영 불안한데?’
뭔가 생명의 나무라는, 세계수의 고전적인 이미지와는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뭐, 튼튼하게 성장하고 있네.”
그러나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 천사 진영에서 당신에 대한 현상금을 상승 조정합니다.
* 천사 진영 현상금 : 70,000,000골드
- 악마 진영에서 당신에 대한 현상금을 상승 조정합니다.
* 악마 진영 현상금 : 25,000,000골드
- 당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현상금 퀘스트가 ‘서버 퀘스트’에서 ‘월드 퀘스트’로 격상됩니다. 이제부터 월드의 플레이어들이 당신의 목숨을 노릴 것입니다.
“이건 또 뭐야.”
“선배, 세계 진출하셨네요?”
한국 서버, 네크로맨서라는 이름과 제3 진영의 존재가 세계 무대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한국 서버 내에서는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으니, 절대 종족 쪽에서 더 큰 대안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네크로맨서를 강제로 세계 무대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근데 이러면 중국 서버 쪽에서 환장하겠는데요?”
한호의 말처럼, 네크로맨서에게 두 차례나 당한 적 있는 ‘중국-2서버’ 플레이들은 눈이 뒤집힐만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과 앙숙 관계인 네크로맨서를 잡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보상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어······ 방금 혜연 씨가 보내온 비밀 댓글인데, 중국 애들 커뮤니티에서 선배 얘기가 계속 나온대요. 아주 대륙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으십니다.”
강화도의 플레이어들은 포로로 잡아 둔 중국 플레이어를 통해서 중국 서버 커뮤니티를 염탐하는 중이었다.
혜연이 그 내용을 비밀 댓글을 통해서 전해주었는데, 정말 가관이었다.
해적단, 일명 ‘붉은 혁명군’은 자신들이 네크로맨서의 처단자가 될 것이며, 이미 충분한 공략 방법을 마련해 놓은 상태라고 홍보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오래전부터 천사 석상을 가지고 있는데, 벌써 3천 명의 천사 진영 플레이어가 준비되어 있다네요? 와 진짠가? 아무튼, 그래서 버프를 왕창 받고 네크로맨서와 제3 진영을 쓸어버릴 거랍니다.”
더 나아가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장기적인 목표까지 구구절절하게, 중국 커뮤니티에 한가득 써놓은 것이다. 한호는 그 메시지를 보고 격분했다.
“아오! 해적 새끼들 또 나대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봐요. 내가 또 길리슈트를 입어야 하나?”
“······길리?”
“아무튼, 대륙의 인민 전체가 선배를 꼭 좀 죽이라고 난리라는데요?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많은 증오를 받는 사람은 선배가 아닐까요?”
자국 플레이어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이 방송된 이후, 네크로맨서에 대한 반감으로 똘똘 뭉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네크로맨서의 라이벌 이미지를 굳힌 붉은 혁명군의 이미지가 어부지리로 좋아지는 중이었다.
“헐? 저 방금 불길한 상상 했는데, 설마 언젠간······ 저 많은 중국인하고도 싸워야 하는 걸까요?”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조상님들께 차례라도 지내야 하나? 조상님들 팁만 받아도······.”
그날 밤, 혜연은 계속해서 중국 서버 쪽 소식을 전해왔다. 네크로맨서에 대한 현상 수배가 월드 퀘스트로 발행된 이후, 중국 서버 역시 네크로맨서에 대한 이슈로 종일 들끓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정보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중국 서버에서는 ‘한국 정벌론’이 부상하고 있었다. 하물며 붉은 혁명군은 대만 정벌 기념과 한국 정벌이라는 미래 사업을 위해서 ‘대규모 궐기 대회’를 열겠다고 했는데, 그 행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중이었다.
“지랄한다 아주? 우리한테 그렇게 깨지고도 병력이 남아도나 봐요? 무슨 열병식까지 열겠대요. 하여튼 그 뻘건 DNA 어디 안 가죠?”
심지어 자신들의 세력을 선전하기 위해서, 약 10만 명이 참석하는 ‘열병식’을 생중계하겠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이런 시대에 열병식이라니?
“근데 왜 우리나라 주변에는 우리를 가만히 못 둬서 난리인 얘들밖에 없을까요? 지금쯤 일본 서버 애들도 군침 다시고 있겠죠?”
7천만 골드와 더불어 천사 진영 측에서 엄청난 추가 보상을 걸었으니, 한국 서버의 ‘네크로맨서’를 노리는 이들이 우후죽순 생겨날 것이 분명했다.
“뭐, 걔들뿐만이 아닐 거야.”
“네? 그럼 어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노리려나? 헐? 설마, 중국 이기면 다음은 다른 동네에요?”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만, 다른 지역 역시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
“확인하지 못하지만, 이미 잠재적인 적대자가 되어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서버의 상위 랭커들 역시 난데없이 벌어진 현상금 퀘스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래의 적이 될지 모르는 다른 서버의 플레이어, 그 사람의 이름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욕심을 넘어서 경계심이 들 것이었다.
‘나라도 궁금할 거다. 도대체 절대 진영에 대거리하고 있는 놈이 누구일지······.’
그리고 네크로맨서를 노린다는 건, 한국 서버 자체를 노린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시선이 집중된 결과, 성우에게도 퀘스트가 발행되었다.
[진영 퀘스트]
- 제목 : 맞불 작전
- 유형 : 습격 및 선전
- 목표 : 다른 진영에 큰 피해를 주는 장면을 방송한다.
- 보상 : 진영 스킬, 진영 아이템
기성세력(절대 종족)은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을 조롱하며 진영이 설립되기 전부터 전쟁을 선포하는 등, 모든 견제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신과 진영의 평판에 전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응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십시오. 그리고 방송을 통해서 더 많은 이들이 목격하게 하십시오.
* 조건 : 다른 진영이 당신을 공격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가해야만 합니다.
* 당신이 패배하는 장면이 노출될 경우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방송이라······.”
쉽게 말해, 제3 진영이 절대 종족의 진영을 깨부수는 장면을 만천하에 보여주라는 뜻이었다. 정말 변태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시스템은 더 치열한 판을 벌이게 만든다.’
성우는 품속에서 한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천사의 날개 조각
- 등급 : 전설
- 분류 : 소비 아이템
- 효과 : 사용 시 일정 범위 내의 ‘천사 석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1회) * 악마 진영은 사용이 불가능하다.
- 설명 : 석상이 파괴될 경우 최후의 비상 탈출 용도로 사용된다.
석상을 파괴하고 얻은 아이템이다. 적진이 사용할 수 없게 ‘악마 진영’은 제한된 상태였다. 하지만 성우는 아직 새로운 진영을 창설하지 않았다.
즉,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할 수 있다.
“아무래도 대만에 들러야겠어.”
그럴 통해서 10만 명이 모인다는 붉은 혁명군의 궐기 대회에, 깜짝 손님으로 참석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