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26) 김포국제공항 회전(會戰) - 2
동맹군은 국내선 청사를 가로질러 활주로로 빠져 나왔다.
“이거, 무슨 스포츠 경기하는 기분이네요. 라커룸을 빠져나와 거대한 경기장에 들어서서 상대와 마주보고 결승전 시작을 기다리는 기분이랄까? 하아······.”
한호는 긴장하면 말이 많아졌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긴장하면 말이 없어지기 마련이기에 그의 수다에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후우웅―
활주로로 나오는 순간, 돌풍이 스쳐 지나가며 플레이어들의 거친 숨소리를 날려버렸다. 드넓은 공터에 감돌고 있던 차가운 공기가 다리 근육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활주로는 상상 이상으로 넓었다. 시선을 어디에 두던 간에 회색 아스팔트가 시야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면······ 붉은 일렁임이 시야의 3분의 2를 장악했다.
두웅―두웅―두웅―
당장이라도 파도처럼 몰려와 모든 걸 휩쓸어버릴 것만 같은 거대함······ 그건, 레드 오크 군단이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모두 도열하라!”
“그룹 별로 도열! 탱커는 앞으로!”
“마법사들은 후방이 아니라 중앙으로! 전장이 넓으니 놈들에게 포위당할 경우를 대비하라!”
지휘관들의 고성과 함께 동맹군이 포지션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방에 펼쳐진 적군의 기세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는 걸, 이 자리의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충돌과 동시에 먼지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 이건 불가능 해.”
“이러다 다 주, 죽겠는데?”
“조용히 해. 도망치기에는 늦었어.”
어느 정도 대열이 완성되자 동맹군의 수장인 정훈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네크로맨서의 등장으로 그 명성이 많이 퇴색되었음에도, 여전히 찬란함을 품고 있는 장신의 기사······.
그는 동맹군을 쭉 둘러보았다.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것 같은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수도 없이, 계속해서 불가능한 싸움을 승리해왔습니다. 이 게임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바로 이 순간까지 말입니다.”
명료한 목소리가 활주로에 퍼져나갔다.
“지금 이 순간 역시 그 승리의 연장선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승리한 뒤에는 더욱 더 불가능한 싸움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그는 목소리를 점점 높이며, 손가락을 들어 올려 레드 오크 군단을 가리켰다.
“그 뒤에는 더, 더, 더 어려운 순간이 올 겁니다. 우리를 굴복시키기 위해 온갖 말도 안 되는 시련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다면······.”
그가 잠깐 입을 닫았다. 레드 오크를 가리킨 손가락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깐의 침묵······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겠습니까?”
그 물음에 정적이 감돌았다.
“······.”
정훈의 말은 사실이었다. 게임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 시련이 끝이 아니며 내일은 더 깊은 수렁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요! 포기 안할 겁니다!”
누군가 외쳤다. 그 목소리에 악이 담겨 있었다. 그 한 마디를 시작으로 이내 곳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절대로 아닙니다!”
“포기 안합니다!”
“에이 씨! 못 먹어도 고!”
“켠 김에 왕까지 깬다! 운영자 얼굴 좀 보자!”
정체불명의 게임이 시작된 이후, 원인도 모른 채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숱한 이들이 죽어나갔지만 이들은 끝내 살아남았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마침내, 시스템을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인류는 다시 한 번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시련에 맞서기 시작했다. 포기하고 싶은지도 몰랐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장담하건데! 이 순간 이후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를 겁니다! 웅크린 채 버텨내는 게 아니라! 이제 우리는 앞으로 밀고 나갈 겁니다!”
정훈이 대검을 들어올렸다.
“전투 준비!”
그러자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정훈이 하늘을 향해 왼 손을 뻗자 황금색 깃발이 공중에서 내려왔다.
쩌―엉!
깃발이 바닥에 내리 꽂혔다.
- 해당 지역에 ‘성전의 권역’이 선포됩니다. (1시간 지속)
* 모든 아군이 자동 치유 효과를 얻습니다. (초당 2%)
* ‘크루세이더’의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5)
두웅―두웅―두웅―두웅―
이에 레드 오크 군단이 맞대응하듯, 무시무시한 함성을 쏟아냈다.
그아아아아!
플레이어들의 목소리 따위는 단숨에 집어삼킨 채, 이 거대한 활주로를 작은 경기장처럼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었다.
“으! 더러운 오크 새끼들 목소리만 커가지고!”
“울대를 도려내주마!”
플레이어들은 의기를 살리며 전투를 준비했다. 이내 저 멀리에서부터, 붉은 일렁거림이 앞으로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노, 놈들이 온다! 대비하라!”
“저쪽에서 먼저 온다! 방패를 세워!”
“마법을 준비한다!”
붉은 군단이 밀물처럼 활주로를 잠식해왔다. 지축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구구구구구―
“우리가 여기서 밀리면! 한반도는 끝이다!”
“반드시 이긴다!”
“이기자!”
곧 두 전열이 맞닿았다.
“발사!”
“쏟아 부어!”
그아아아!
충돌 직전, 온갖 마법과 스킬이 먼저 날아들었다. 활주로 곳곳에서 폭음이 울리며 화염이 치솟았다. 선두의 오크들이 빙결 마법을 맞고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뒤로 수십 발의 화살이 연달아 쏟아졌다.
하지만······.
“젠장! 줄어든 것 같지도 않아!”
“충돌 대비!”
너무나도 한 없이 많았다. 일제히 쏟아 부은 화력이 무색하게도 레드 오크들은 끝도 없이 밀고 들어왔다. 파도에 돌멩이 하나 집어던진 꼴이었다.
쿵! 쿵! 쿵! 쿵!
정면의 방패 벽이 뒤흔들렸다. 탱커들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그아! 그아아아!
“으으! 젠장!”
“밀쳐내!”
그리고 방패 밀치기 스킬로 오크들을 밀어낸 뒤 그 뒤로 창을 찔러 넣었다.
푹! 푹! 푹! 푹!
오크들이 와르르 쓰러졌지만, 그 뒤에서 수십 개의 도끼가 날아들어 방패를 강타했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을 틈조차 없었다.
“놈들이 방패 벽 옆으로 돌아간다!”
“견제해! 견제!”
전장이 너무 넓은 탓에 포지션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전투가 불가능했다. 탱커들이 딜러들을 둘러싼 채, 최대한 보호하려고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전방에 주술사 출현! 마법에 대비해!”
“오른쪽에서 무소가 달려든다! 견제 사격!”
하물며 단순한 물량공세가 아니었다. 놈들은 동맹군의 진영을 향해 강력한 마법을 날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거대한 짐승 ‘황무지 무소’를 타고 돌진해오기까지 했다. 방패 벽을 단 한 방에 허물어뜨릴만한 괴물이었다.
“저 망할 코뿔소를 향해 쏴!”
“지, 집중 사격!”
전속력으로 돌진해오던 ‘황무지 무소’는 수십 발의 화살과 쇠뇌를 정통으로 맞은 뒤, 방패 벽 목전에서 고꾸라졌다.
쿵―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 저, 저건!”
거대한 공성병기 ‘발리스타’가 이쪽으로 전진해오고 있었다. 곧 사거리 안에 들 것 같았다.
성벽을 부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무기였다. 저게 장전되는 순간, 방패 벽이고 뭐고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없게 될 게 뻔했다.
“버텨라! 놈들의 병력을 이쪽으로 끌어내야 된다! 그게 작전의 핵심이다!”
“오크 로드 주변에서 최대한 끌어내야 돼!”
그리고 이렇게 무모한 전면전을 유도한 이유가 있었다. 정면이 아니라, 다른 곳, 더 깊은 핵심을 찌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레드 오크의 병력이 동맹군을 향해 돌진하여 최대한 흩어졌을 바로 그 시점······.
삐이이!
하늘 위를 날고 있던 그리핀이 지상과 가까워졌다. 동시에 녀석의 등 뒤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후우웅―
이번에는 시체가 아니었다. 암녹색의 로브를 휘날리며 수직 낙하하는 단 한 사람, 네크로맨서였다.
그리고 그의 몸 근처, 수백 미터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응집하더니 거대한 뼈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건 ‘오우거 스켈레톤’이었다.
네크로맨서가 그 거인의 등에 올라탔다. 지상에 닿기 직전, 거인이 오른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파지지지!
푸른 섬광이 다발처럼 뿜어져나갔다.
콰과과과!
그 전격이 레드 오크 무리의 중심을 강타했다. 마치 번개가 떨어진 것처럼, 방어막을 준비하던 일대의 오크 주술사들이 통구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오우거 스켈레톤과 네크로맨서가 착륙하며······.
콰―앙!
- 주의! 해당 지역에 ‘대강령(大降靈)’이 시작됩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죽음의 응답’이 시작됩니다.
검은 연기가 퍼져나갔다.
덜그럭! 덜그럭!
다음 순간, 검은 연기 속에서 수십 마리의 ‘트롤 스켈레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으으······.
녀석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오크들을 휩쓸어버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는 일정한 공간을 동그랗게 둘러싸며 넓게 늘어서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우어어!
그 뒤를 이어서 좀비들이 달려 나가더니 트롤 스켈레톤 사이사이에 자리 잡았다.
덜그럭!
오크의 진영의 한 가운데, 뼈 갑옷을 입은 언데드로 구성된 거대한 울타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치의 실수 없이 속행된 건 단 한 사람이 움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좋아 아늑하네.”
그리고 그 울타리의 가장자리에서 이 모든 과정을 기획한 자, 거대한 낫을 든 리치, 성우가 나타났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한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왼손에 들고 있던 아이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텅―
보온병 같이 생긴 물건이었는데, 그 안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일대를 서서히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그건 진화 학회가 영등포역에 설치하고 간 ‘정제된 심연의 호흡(단지)’으로, 뚜껑을 열면 생명체에 치명적인 가스를 방출하는 아이템이었다. 해적들의 본 거지를 습격할 때도 한 번 사용한 적 있었다.
- 심연의 호흡 방출 중 (11% 남음)
“우리 둘만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어서 말이야.”
성우는 울타리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그르르―
그곳에는 한 무리의 오크들이 있었다. 검은색 갑옷을 입고 등 뒤에 깃발을 달고 있는 오크들이 성우를 경계하고 있었다.
언뜻 봐도 정예 병력으로 보이는 놈들이었는데, 촘촘하게 맞대고 선 어깨 틈 사이로, 뼈로 만든 왕관이 얼핏 보였다.
- 군벌 몬스터 ‘오크 로드’가 출현했습니다.
오크 로드였다.
“거기 있군.”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동맹군을 몰아치던 오크 군단이 급히 진로를 틀어, 로드를 구하기 위해 회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어어어!
놈들은 평소보다 광포하여 성우가 조성해놓은 뼈 울타리를 향해 돌진했다. 당장으로 무너뜨리고 넘어와 제 우두머리를 구출할 기세였다.
퍽! 퍽! 퍽! 퍽!
하지만 그 거대한 포효가 무색하게도, 한 마리도 빠짐없이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결코 쉽게 뚫릴 만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 팀플레이로 인해 ‘시너지 효과’가 부여됩니다.
[시너지 목록]
1) 소대 편제(히든)
- 구분 : 인원 시너지
- 조건 : 지휘관(2단계) 속성 + 구성원 30명 이상
- 효과 : 공격력 상승(+6%), 방어력 상승(+6%), 단일 적 합동 공격 시 추가 데미지(+3%)
2) 거인(5단계)
- 구분 : 속성 시너지
- 조건 : ‘거인’ 속성 50마리 이상
- 효과 : 소형 및 중형 상대에게 받는 피해 감소(-40%)
3) 철갑 기사단(5단계)
- 구분 : 방어구 시너지
- 조건 : ‘풀 플레이트 아머’ 50개 이상 장착
- 효과 : 방어구 방어력 상승(+30%), 방어력의 40%에 해당되는 방어막을 형성한다.
지금까지 사용해본 시너지 중, 버티기에 최적화된 시너지만을 엄선하여 도배한 상태였다.
그러하니 야만의 군대가 완전무장한 기사단에 돌격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달리 비유하면 바위에 계란치기다.
푸쉬이이―
하물며 울타리 안을 ‘심연의 호흡’이 잠식해나가며 거대한 뼈 사이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검은 연기는 돌격해오는 오크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으! 그억!
그리고 놈들의 머리 위로 트롤의 도끼가 떨어졌다.
- ‘레드 오크 전사’를 사냥하여 1,200골드를 얻었습니다.
- ‘레드 오크 전사’를 사냥하여 1,200골드를 얻었습니다.
- ‘레드 오크 전사’를 사냥하여 1,200골드를 얻었습니다.
하물며 부서진다고 해도 리치의 권능으로 인해 다시 살아났으니, 뚫기도 어려운데 자동으로 수리가 되는 울타리인 셈이었다.
그아아아아!
물론 무한정 버틸 수는 없었다. 발리스타가 회전하며 이쪽을 겨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무지 무소’ 대여섯 마리가 진격해왔다.
울타리의 이곳저곳이 무너지는 순간, 그 틈으로 엄청난 수의 오크들이 파고들 것이었다. 제 몸을 사리지 않고 로드를 구출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별로 없군요.”
성우의 등 뒤로 민석이 다가왔다. 그 옆에 오른이도 서 있었다.
“로드를 지키고 있는 친위대가 20마리쯤인데, 일반 오크보다 강할 겁니다. 어떻게 뚫는 게 빠를까요?”
민석이 대검을 들어올리며 당장이라도 돌격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뭐, 한 방에 터뜨리죠.”
“······예?”
“원래 쓰려던 걸 굳이 안 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삐이이!
그때, 머리 위에서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민석이 고개를 드니 그리핀의 네 개의 다리가 무언가를 잔뜩 움켜쥐고 있었다.
그건, 오크의 시체였다. 그리고 오크 로드와 친위대의 머리 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잘 가라.”
민석이 중얼거렸다.
펑! 펑! 펑! 펑!
폭발이 친위대를 휩쓸었다. 오크 로드를 감싸고 있던 거구들의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체크메이트.”
그와 동시에 성우와 민석, 오른이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