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25) 올림픽대로 전투 – 1
김포 일대를 휩쓸고 강서구로 진입한 레드 오크 군단은 등촌역 인근의 생존자 그룹을 공격한 뒤, 한강 근처에 결집했다. 그리고 올림픽대로를 통해서 진군해오고 있었다.
“······맙소사 진짜 떼거지네.”
총 5대의 마법 드론이 안양천 너머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었다. 지휘관들은 백색 스크린에 영사되는 장면을 지켜보며 치를 떨었다.
“일반 오크 보다 세 배는 센 놈들이 저렇게 많다니······.”
붉은 피부에 2미터가 넘는 체격을 가진 몬스터들이 야만적인 깃발을 들고 진격해오고 있다.
그들의 깃발에는 인간의 잘린 머리가 매달린 채 흔들렸다. 목동의 안전 구역에서 버티려고 했던 이들이 분명했다. 직접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최후가 끔찍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것도 고작 선발대라는 거지?”
무겁게 내려 앉은 분위 속에서 민흠이 일어섰다. 직후, 스크린에 지도 한 장이 떠올랐다. 민흠은 레이저 포인트로 오크들의 행군 루트를 표시했다.
“자, 현재 놈들의 진격 방향을 볼 때 ‘염창교’를 통해 안양천을 건너려고 할 것으로 보입니다. 영등포역으로 이어지는 최단 거리의 대로가 위치한 곳이죠.”
동맹군이 자리 잡고 있는 ‘경인교속도로 교차로’보다 훨씬 북쪽, 안양천과 한강이 이어지는 지점의 다리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놈들이 절대로 건너오지 못하게 막아낼 것입니다. 반드시 그래야 됩니다.”
정훈이 일어섰다. 그의 의자에 기대어두었던 대검을 들어올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바로 출발해야 됩니다. 준비된 이동수단을 이용해서 정해진 위치로 가십쇼. 그리고 작전대로 싸우시길 바랍니다.”
한반도의 운명을 건 전쟁이 시작되었다.
***
올림픽대로 염창IC 교차로 부근
쿵! 쿵!
올림픽대로에 버려진 차량들이 옆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목덜미에 쇠고랑을 찬 노예 트롤들이 차를 들어, 도로 밖으로 던져버리고 있었는데, 레드 오크의 대군이 지나갈 길을 치우고 있는 것이었다.
두둥― 두둥― 두둥―
그 뒤로 북소리가 강변을 가득 매웠다. 레드 오크 군단은 일정한 대열 없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채 행진했다. 이렇게 무법적인 겉모습처럼, 그들의 전투 방식은 간단했다.
몰려가서
쳐부순다
보다 전술적일 때도 있지만, 당장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느끼기에 이 땅의 원주민인 인류는 나약하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
······그어?
그런데 그들의 진격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선두가 정지하자 북소리가 멈췄다. 오크 한 마리가 앞으로 걸어갔다.
그르르―
놈은 눈앞에 벌어진 장면에 이빨을 드러냈다. 길을 치우고 있던 노예 트롤들이 숯덩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습격당한 것이다.
레드 오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전쟁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전쟁을 즐기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도끼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르르······.
적들이 숨을 곳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올림픽대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방풍림과 아파트단지 정도였다.
“공격!”
“공격하라!”
이내 인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아파트 단지의 곳곳에서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당황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고, 대부분이 아파트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적이 등장했으니 앞뒤 가리지 않고 처부술 생각이었다.
그때, 트롤의 시체 뒤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남자, 화염계열 마법사인 이강윤이었다.
“더러운 오크 새끼들!”
그는 완드를 치켜들어 주문을 외쳤다. 그러자 아파트 단지를 가로막고 있던 방풍림에서 불이 치솟았다.
화르르!
마치 미리 뿌려놓은 기름에 불똥이 떨어진 것처럼, 방풍림 라인을 따라서 거대한 불길이 번져나갔다.
그어어!
아파트 단지로 돌격하려고 했던 오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로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군데군데에서 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타올라, 타올라라! 계속 타올라라!”
여의도 전투 당시에는 습지라는 지형적 조건 때문에 별다른 활약을 못했던 강윤이지만, 광역 데미지에 특화된 스킬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이렇게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적과 대규모의 화재가 존재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건기의 산불처럼 미처 날뛸 수 있었다.
“불의 파도!”
그가 완도를 흔들어대자 방풍림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수 미터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정말로 파도처럼 굽이치며 올림픽대로를 향해 기울어졌다.
파도 중에서도 집채만 한 파도였다.
화아악!
불의 파도가 레드 오크 무리를 집어삼켰다.
그아아아!
난데없는 불꽃 파도를 피할 겨를이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수십 마리의 레드 오크들이 불에 타오르며 몸부림 쳤다.
- ‘레드 오크 전사’를 사냥하여 1,200골드를 얻었습니다.
- ‘레드 오크 전사’를 사냥하여 1,200골드를 얻었습니다.
- ‘레드 오크 전사’를 사냥하여 1,200골드를 얻었습니다.
- ‘레드 오크 전사’를 사냥하여 1,200골드를 얻었습니다.
폭발적인 메시지 앞에 강윤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으흐흐! 이런 기분 오랜만이네. 나 말고 누가 이런 게 가능하겠어?”
하지만 자만에 빠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레드 오크 무리는 여전히 건재했고, 화염을 일으키는 마법사, 강윤을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쉬익!
“까, 깜짝이야!”
화살 한 발이 강윤의 모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기겁하며 트롤의 시체 뒤로 숨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잠시 멎어 있던 북소리가 다시금 터져 나왔다.
두웅! 두웅! 두웅!
레드 오크들이 정면 돌격을 시작했다. 방풍림이 불길에 휩싸여 쉽게 넘어갈 수 없자, 정면을 뚫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막아! 마법사를 지켜라!”
그러자 강윤의 등 뒤, 버려진 차량 사이에서 플레이어들이 달려 나왔다.
대부분 방패를 쥔 탱커 포지션이었다. 그들은 트롤의 시체를 넘어서 방패 벽을 세웠다. 어깨를 맞대고 방패를 오밀조밀하게 붙였다. 그 숫자가 약 이백여 명에 이르렀다.
“온다!”
“버텨!”
그리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오크 무리와 충돌했다.
쿵! 쿵! 쿵!
올림픽대로 한 복판에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태생적인 체격과 근력은 물론이거니와 숫자 쪽에서 오크들이 앞서지만, 숱한 생존 게임 속에서 레벨 업을 하며 단련된 플레이어들이었다.
“버텨라! 우리가 여기서 버티면 놈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불길과 방패로 놈들의 진격을 저지한 채, 아파트 단지에서 화살과 마법을 쏟아 부으면 상당히 유리한 전투가 될 것이었다.
버틸 수만 있다면 말이다.
텅! 텅!
“으악!”
“버, 버텨야 돼!”
하지만 방패 벽을 세운다고 해도 반드시 유리한 건 아니었다. 키가 큰 오크들은 방패보다 높은 위치에서, 방패 너머로 공격을 가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마주보고 대치하는 건 불리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밀어 붙여!”
“프리스트들! 전방의 방패에 보호막을 걸어줘!”
플레이어는 그런 한계를 스킬로 극복하려고 했다. 방패 벽 뒤에 포진한 십여 명의 프리스트들이 치유 스킬과 보호막 스킬을 아낌없이 걸어주었다.
전사들은 한층 견고해진 방패를 들어올려서, 밀치기 스킬을 통해서 오크들의 자세를 흐트러뜨리고, 그 틈에 창과 검을 집어넣어 오크의 배를 꿰뚫었다.
푹! 푹! 푹! 푹!
플레이어 한 명이 쓰러질 때 레드 오크 십여 마리가 쓰러졌다.
또한 그런 혈투가 벌어지는 내내 아파트 옥상의 화살 세례 역시 멈추지 않았다.
쉬익! 쉬익!
“발사하라! 계속 발사하라!”
“불길을 넘어오는 것들은 신경 쓰지 마! 1층의 방어 병력이 막아줄 거다!”
매복과 고립 전략이 통했다. 올림픽대로 곳곳에 오크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여나갔다.
그어어어!
그럼에도 적은 여전히 엄청난 군세였다. 오크들은 동족의 시체를 넘어서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놈들에게는 전사 계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크 주술사다!”
큼직한 나무 방패가 앞으로 나오더니, 그 뒤에서 나무 지팡이를 든 오크들이 나타났다. 마법을 사용한 ‘주술사’ 계열의 몬스터였다.
“대비해! 방패에 마법 보호 주문을 걸어!”
“······느, 늦었다!”
검은 구슬이 날아들어 방패에 꽂혔다.
쾅! 쾅! 콰―앙!
구슬이 터져나가며 엄청난 충격이 일대를 휩쓸었다. 단단한 방패를 밀어내고 탱커마저도 즉사시킬 정도로 강력한 주문이었다.
“아아아악!”
“······크으!”
방패 벽이 적의 공격을 버텨낼 있는 건, 조금의 균열도 없을 때였다. 그럴 때는 아무리 많은 적이라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부만 무너지더라도 힘을 잃고 만다.
방패의 파편과 전사의 사지가 사방에 흩어졌다. 방패 벽의 왼쪽 부분이 마비됐다.
“제, 젠장! 정신 차려! 노, 놈들이 몰려온다!”
흐트러진 방패 벽을 향해서 수백 마리의 오크 전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다이어 울프’를 탄 오크 기병대까지 나타났다.
화르르!
강윤이 다시 한 번 화염 파도를 일으켰지만, 처음에 비하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방풍림을 충분히 태운 뒤 불길 자체가 옅어졌으니 말이다. 결국 놈들은 돌진을 저지하지 못했다.
“길을 터!”
“모두 비켜!”
그때, 플레이어들의 후방에서 고함이 들렸다.
절그럭― 절그럭―
그리고 쇠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차량 사이에서 백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사내가 등장했다.
크루세이더 커맨더, 최정훈이었다.
“크루세이더 팀, 돌파한다.”
“돌파 대형으로!”
그의 한 마디에 민흠이 명령을 전달했고, 회색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크루세이더 대원들이 도열했다. 그 숫자가 여의도 전투 때보다 훨씬 늘어, 무려 45명에 이르렀다.
텅! 텅! 텅! 텅!
선두의 대원들이 카이트 실드를 바닥에 내리찍으며 오크들의 돌격을 받아냈다. 두 겹의 방어막이 번뜩이며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켰는데, 일반 플레이어들의 방패 벽에 비하면 한 차원 위의 견고함이었다.
레드 오크 전사는 물론이거니와, 다이어 울프의 돌격조차 무마되었다. 공격을 한 번 받아냈으니 되갚아줄 타이밍이었다. 오크들을 향해 거대한 쇠뇌가 조준되었다.
퉁! 퉁! 퉁! 퉁!
후열의 대원들이 일제히 시위를 튕기자, 미친 듯이 달려들던 오크 무리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마어마한 관통력이었다. 10명의 대원이 단 한 번의 사격을 했음에도 30여 마리를 고꾸라뜨릴 수 있었다.
“주술사 견제!”
민흠의 외침에 두 번째 열의 대원들이 창을 내던졌다. 그런데 그건 실물이 아니었다. 빛의 에너지가 응집된 창이 날아가더니, 주술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나무 방패에 박혔다.
콱! 콱! 콱! 콱!
그리고 폭발했다.
쩡! 쩡! 쩡! 쩡!
강력한 충격이 발생한 건 아니었지만, 그 한 방에 일대의 오크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비틀거렸고 오크 주술사들이 준비하던 마법도 취소되었다. 일종의 섬광탄 역할을 하는 스킬이었다.
“돌격!”
척―척―척―척―
그리고 크루세이더 팀이 앞으로 나아가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오크 군단의 정면을 강타했다.
그아아!
방패 사이로 튀어 나오는 창들이 오크 전사들의 목덜미와 배를 꿰뚫었다. 놈들이 전투 도끼를 휘두르며 반격했지만, 크루세이더 팀의 황금색 보호막에 튕겨져 나갔다.
그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일정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크의 대열을 박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 뒤로 붉은 피부의 시체들이 줄지어 쌓였다.
“······여, 역시 크루세이더 팀이다!”
“전쟁은 저렇게 하는 거지!”
같은 전장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자, 우리도 멍 때리지 말고 크루세이더 팀의 후방을 지원한다! 프리스트들 마나 아껴서 뭐해! 버프를 걸어!”
네크로맨서의 활약에 묻혀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크루세이더 팀은 한반도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대규모 파티였다. 특히나 이런 난전 속에서는 최고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대로면 전용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다.’
정훈은 백색의 갑옷에 흥건한 피를 묻히면서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
그는 왼손을 들어 올려 빛줄기를 쏘아내어, 다섯 마리의 오크를 날려버리더니 그대로 달려들어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단 한 방에 오크 두 마리가 쓰러졌다.
투―웅!
이어서 크로스 가드의 시위를 튕기자, 빛줄기가 뻗어나가며 오크 네 마리가 줄지어 쓰러졌다.
‘전용 퀘스트를 완수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네크로맨서에게 더 가까워진다. 오늘이 바로, 각성하는 날이다.’
그는 각성이 멀지 않음을 느꼈다. 각성의 조건인 10레벨 이상의 크루세이더 30명 양성,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여정이 바로 이 전장에서 마무리 될 것 같았다.
“······한성 씨, 앞으로!”
“예!”
그의 명령에 10레벨을 목전에 둔 9레벨의 대원이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정훈의 옆에 서서 함께 검을 휘둘렀다. 정훈은 무력화 시킨 오크를 남겨두고 나아갔고, 한성은 그 오크들을 처리하며 경험치를 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 커맨더! 저 10레벨······.”
“······됐다.”
- 전용 퀘스트 <영웅이여 성전을 준비하라!>를 ‘육성’으로 공략하셨습니다.
* 보상이 주어집니다. (1차 각성, 전용 스킬)
* 당신의 운명이 미세하게 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우우우―
정훈의 몸에서 금빛 아우라가 치솟았다. 그는 왼손을 천천히 뻗어 하늘을 향해 들어올렸다.
“······저, 저건!”
그러자 허공에서 금색의 깃발 하나가 천천히 내려왔다. ‘War standard’라고 불리는 군용 깃발이었다. 정훈은 그것을 움켜쥐었다. 바람이 거의 없음에도, 깃발은 찬란하게 나부꼈다.
“전군······.”
그가 깃발을 들어올렸다.
“돌격!”
깃발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쩌―엉!
- 해당 지역에 ‘성전의 권역’이 선포됩니다. (1시간 지속)
* 모든 아군이 자동 치유 효과를 얻습니다. (초당 2%)
* ‘크루세이더’의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5)
올림픽대로 위로 금빛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크루세이더 팀이 함성을 내지르며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엄청난 버프를 두른 기사들이 오크 군단의 중심부를 종회무진 돌파했다.
“우리도 간다!”
“기세를 몰아 쓸어버려!”
그리고 그 뒤로,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뒤따랐다. 크루세이더 팀이 한 바탕 뒤흔들고 지나간 길에는 반쯤 죽어가는 오크들이 남아있었다. 마치 살충제를 맞은 말벌 마냥, 정신을 못 차리고 퍼덕이고 있는 놈들이었다.
“죽어!”
“남김없이 없애!”
플레이어들은 그 잔재를 헤치우며, 마치 기마대가 휩쓸고 지나간 길을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전진하라!”
“커맨더를 따르라!”
황금빛 깃발이 나부낀 이후로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오크 전사들은 크루세이더 팀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 반면 오크 전사들은 너무나 손쉽게 무너졌다.
네크로맨서가 없음에도 가능한 일이었다.
***
정훈은 ‘오크 선봉대장’의 목덜미에서 대검을 뽑았다.
“끝났군······.”
레드 오크 군단의 한 개 부대를 전멸시키고 그 지휘관까지 처리한 것이었다.
민흠이 다가왔다.
“커맨더, 백여 마리 정도의 패잔병들이 시가지로 사라진 것 말고는 사실상······ 완승입니다.”
“우리 쪽 피해는요?”
“크루세이더 대원 세 명이 사망했습니다. 플레이어는 거의 백 명 정도, 다수가 사망했지만, 당초 예상보다는 훨씬 적은 수입니다. 물론 전부 지친 상태라서 다른 오크 부대와 마주치기 전에 휴식을 취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정훈은 고개를 돌려 올림픽대로를 돌아보았다. 방풍림에서 회색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는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시체 무더기가 도로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난전이 끝난 풍경이었다.
플레이어들은 불에 그슬리지 않은 공터에 앉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크루세이더 팀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때였다.
두웅―두웅―두웅―
일정한 박자의 진동이 울렸다.
“······설마?”
다시 북소리였다.
“······어? 뭐야?”
“바, 바로 전투라고?”
“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플레이어들은 주춤주춤 일어서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두웅―두웅―두웅―
전방, 가양대교 교차로 부근에서 엄청난 진동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뜻 느끼기에도 방금 전 상대했던 병력보다 많은 수였다.
흩어져 있던 크루세이더 팀이 정훈을 중심으로 모였다. 그들 중 마법사 직업군의 대원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마법 드론과 연결된 상태였고 하늘에서 촬영 중인 영상이 재생되었다.
멀지 않은 곳, 올림픽대로를 따라 대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거대한 짐승들을 타고 있었다.
다이어 울프는 물론이거니와, 선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수 4마리 있었다. 검은색 코뿔소였는데, 그 크기가······ 코끼리보다 더 커보였다.
“아무래도 저게······ 놈들의 핵심 전력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저희가 상대한 건 선발대 정도고요.”
민흠이 말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마법 드론의 운용 거리가 짧기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커맨더, 이건 좀 위험합니다. 모두 지쳤고······ 크루세이더 팀이 정면에서 버티더라도 저런 거대한 괴물의 돌격을 막는 건 불가능합니다.”
“······.”
“도로를 벗어나서 시가전을 펼쳐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정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가 시가로 들어간다면, 놈들이 우리를 따라올까요? 아니면 올림픽대로를 타고 그대로 영등포역으로 향할까요?”
정훈의 물음에 민흠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시스템은 정확히 예측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위험하군요.”
놈들은 플레이어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분명 영등포역이었다.
놈들은 과연 동맹군을 따라서 시가전을 치러줄 지는 미지수였다.
두웅―두웅―두웅―
북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선두의 괴물 코뿔소가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 육중한 걸음마다 아스팔트가 으스러졌고, 거대한 진동이 플레이어들의 발바닥에 와 닿았다.
“제, 젠장! 저게 대체 무슨!”
“저런 걸 대체······ 어떻게 막지?”
플레이어들 역시 얼이 나간 상태였다. 머리통에 달린 뿔의 길이만 1.5미터에 이른다. 저 거대한 괴물의 돌격을 몸으로 받아내었다간, 뼈고 내장이고 구분할 것 없이 한 뭉텅이의 반죽이 될 게 뻔했다.
쿵―쿵―쿵―
괴물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지, 진짜, 도망쳐야 되는 거 아니야?”
“저건 못 막아!”
그때였다.
후웅―
괴물의 머리를 향해 무언가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에 보이기에, 그건 사지가 달린 무언가, 그러니까······ 시체였다.
퍼―엉!
괴물의 머리맡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 충격에 괴물의 몸이 휘청거렸다. 등 뒤에 타 있던 라이더 두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갔고, 괴물을 통제를 잃고 가드레일을 들이받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
그리고 그 장면 뒤로, 오크의 기병대를 향해, 하늘에서 십여 개의 시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저건?”
펑! 펑! 펑! 펑! 퍼―엉!
엄청난 연쇄 폭발과 함께, 기병대 전열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난데없는 폭발 세례에 짐승들이 미처 날뛰기 시작하자 통제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펑! 펑! 펑! 펑!
또 한 번의 시체 폭발 세례, 그야말로 대규모 병력을 화력으로 와해시켜버리는 전술인 ‘융단 폭격’이었다.
정훈은 고개를 들었다.
삐이이!
그리핀 한 마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새들이 줄지어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발톱에는 시체들이 들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네, 네크로맨서다!”
“네크로맨서가 왔다!”
플레이어들의 목소리에는 감격이 담겨 있었다.
네크로맨서가 양동작전이 아니라 화력 지원이라는 카드를 가져올 거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내 전방, 올림픽대로를 가로지르는 가양대교 분기점 다리 위에 검은 연기가 퍼져나갔다.
후우우―
한강에서 불어온 바람이 연기를 밀어내자, 그 자리에 거대한 스켈레톤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리고 본 드레이크 위에 낫을 든 리치가 서 있었다.
최적의 순간에, 최고의 지원군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