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20) 영등포역 테러 – 3
일명 방문판매상, 성우는 그 미친 과학자들의 존재를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수인화 앰플’과 ‘심연의 농축액’ 등 원재료를 알 수 없는 물건을 제조하는 일당이었다. 또한 일부 수인들과 협력하여 플레이어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까지 어림잡고 있었다.
‘아이템 설명으로 대충 눈치 채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만들고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놈들의 연구시설이 바로 이곳, 신도림역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대로 미친놈들이군.’
놈들의 진상을 마주하니 기분이 절로 더러워졌다. 간편 식품의 비위생적인 제조 과정을 본 느낌이라고 해야 될까? 물론 그런 것과 비교하는 게 말이 안 될 정도로 끔찍한 현장이었다.
‘아이템 설명에 쓰여 있던 것처럼, 놈들은 생명을 원재료로 쓴다.’
어두침침한 지하에는 4개의 물탱크가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천장에는 도르래와 쇠사슬이 설치되어 인간, 수인, 몬스터 등의 시체를 물탱크 안에 수시로 넣었다 뺄 수 있게 만들어 놨다.
그 안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거뭇한 액체가 출렁이고 부글부글 끓으며, 처음 맡아보는 악취가 진동했다.
한쪽 구석의 바닥에는 파란색 방수 비닐이 깔려 있었는데, 토막 난 시체가 종류 별로 쌓여 있었다.
성우는 그 꼴을 훑어보고는 소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오우거 스켈레톤을 바라보다가 성우와 눈이 마주쳤다.
“······악취미를 들킨 기분이 어때?”
성우의 물음에 소장이 피식 웃었다.
“악취미? 으하하! 그래, 쓸 만 한 거라고는 목덜미 아래 몸뚱이 밖에 없는, 짐승과 큰 차별점도 없는 무지렁이들이 철학서를 보고 콧방귀 뀌는 법이지. 이건 실험이다!”
“그래? 너는 오늘 목덜미 위에서도, 하필이면 입만 쓸 줄 아는 걸 후회하게 될 것 같은데?”
픽!
놈의 허벅지에 화살이 박혔다.
“억!”
놈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제 허벅지에 피가 흘러나오는 걸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으아악! 이런 시발! 아아악!”
“거봐, 입만 열심히 일하잖아?”
놈은 쩔뚝거리며 뒷걸음질 치더니 물탱크에 등을 기댔다. 부글부글 끓고 있던 액체가 살짝 넘치며, 그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치이익―
정체불명의 액체가 그의 가운을 녹이기 시작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서 있던 웨어 렛이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소, 소장님?”
그건 정체불명의 스위치였다.
“크으! 그 동안 수고했다. 이제 내가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줄게.”
딸각―
버튼 소리와 함께 웨어 렛의 금속 목줄이 순간적으로 수축했다. 그와 동시에 놈이 몸을 한 번 뒤틀었다.
“컥! 카악!”
웨어 렛이 고통을 호소하더니, 손톱을 세워 제 목덜미를 긁어댔다. 다음 순간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성우를 향해 도약했다. 순식간이었다.
픽! 픽! 픽! 픽! 픽!
성우는 겨누고 있던 리피팅 크로스보우를 난사했다. ‘그림자 분신’이 형성되며 2배의 화살이 쏘아졌다.
크아아아!
하지만 웨어 렛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했다. 잠깐 사이 십여 발의 화살을 맞고도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게, 금속 목줄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성우는 몸을 옆으로 뒤틀며 웨어 렛의 손톱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쾅!
놈의 공격이 성우의 등 뒤, 철문을 강타했고, 문짝이 반으로 접히더니 복도로 튕겨져 나갔다.
‘드레이크의 꼬리보다는 아니지만, 맞았으면 꽤나 아팠겠군.’
픽! 픽! 픽!
성우는 옆으로 빠지며 화살을 계속 퍼부었다. 놈은 온몸에 화살을 주렁주렁 매달고도 성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최초의 기습을 피해낸 이상, 폭주하는 웨어 렛 한 마리쯤이야 위협이 되지 않았다.
뻑!
같은 장소에 오우거 스켈레톤이 있었으니 말이다. 웨어 렛은 오우거의 발에 걷어차여 벽으로 날아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 ‘변이된 웨어 렛’을 사냥하여 13,000골드를 얻었습니다.
‘변이된’이라는 수식어 역시도 괴상한 실험의 결과물이 분명했다.
“······크으.”
회심의 일격까지 막히자 소장은 또 다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성우는 그게 뭔지 알았다. 이전에 강 중사가 사용한 적 있는 ‘수인화 앰플’이었다. 수인으로 변신해서 도망칠 생각인 듯 했지만······.
콰득!
“끄아아아!”
천장의 구멍을 통해 들어온 웨어 타이거 스켈레톤에게 손목 통째로 빼앗기고 말았다. 성우는 놈의 손목을 물탱크 안으로 던져버리게 했다.
풍덩―
“다음은 팔목을 넣을 거고, 그 다음은 하반신, 그 다음은 그 잘난 머리통을······ 그런데 너도 혹시 독 삼켰어?”
소장의 입에서 거품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늦었다. 컥! 저 짐승 놈을 보낸 건 전부 독을 삼키기 위함이었다. 으흐흐! 네크로맨서······ 넌 분명 내 동료들이 좋은 실험재료로 삼아줄 거다.”
성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입 아플 필요는 없네.”
“뭐? 왜, 왜 웃는 거······ 컥! 큭!”
“넌 영원히 모를 거야.”
푹썩―
놈의 몸이 기울어졌다.
성우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제 이놈을 스켈레톤으로 일으켜서 기억의 파편을 읽으면 그만이다.
“······응?”
안 된다. 놈이 스켈레톤이 되지 않았다.
“······.”
왜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던 성우는 등에 맨 주인 잃은 검을 꺼냈다. 그리고 놈의 오른쪽 팔뚝을 향해 내리쳤다.
퍼석!
“으아아아!”
놈이 비명을 지르며 구르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웨어 타이거 스켈레톤이 잘려나간 팔을 곧장 집어 들더니, 물탱크 안으로 던져버렸다.
풍덩―
“지금 누구 앞에서 죽은 척을 해.”
“아악! 악!”
“오래 끌면 입만 아파질 스타일이네······.”
성우는 더 말 할 것도 없이 놈의 가슴팍에 대검을 박았다.
“컥······.”
이제는 협박이나 취조보다 이게 더 편했다.
- 당신의 권능 아래 망자가 권속(眷屬)됩니다.
- 망자의 ‘기억 파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내 영상이 재생되었다.
깨끗하고 넓은 회의실이다. 기억의 주인인 ‘소장’은 포마드 머리의 멀끔한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지부에 자네를 파견하는 이유는 간단해. 현장에서 ‘A가스’를 최대한 생산해야 돼.”
“그거야 뭐 제 전문이죠. 하나부터 한 여덟까지는 제가 개발한 물건 아닙니까? 다른 부분에서는 제가 들러리라도 그건 제 자식 같은 놈인 걸요. 잔뜩 만들어서 영등포를 날려버리면 되는 거죠?”
소장의 말에 포마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가스는 그대로 잡 벌레를 날려버리는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수인 마법사들한테 맡겨. 그들이 억류 중인 레이드 보스를 텔레포트 마법을 통해 영등포로 보내버릴 거야. 세 마리 연속으로 말이야.”
······세 마리? 그리고 억류 중이라니? 성우는 이어지는 대화에 집중했다.
“예? 그 냄새나는 애들을 뭘 믿고 이 중요한 작전을 맡기려는 겁니까?”
포마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조심해. 그래도 그들이 없으면 우리 계획도 진행할 수가 없어. 특히 ‘사수(四獸)’는······ 플레이어 랭킹의 탑 쓰리보다 강할 거야. 무조건 그들의 힘을 빌려야 돼.”
사수(四獸), 그 뜻과 맥락을 볼 때 수인을 이르는 말인 듯 했다. 그런데 어떻게 상위 랭커보다 강하고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수인은 카드를 뽑지 않은 이들이고, 그들이 의지를 되찾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었다. 성우가 경험한 대로라면 놈들이 랭커보다 강할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걸까?’
하지만 이 게임 안에는 언제나 변수가 존재한다. 수인에게도, 과학자들에게도 나름의 ‘퀘스트’가 부여되어 행동을 강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퀘스트는 다른 이들 보다 앞서 가게 만든다.
“그 말을 들으니 빨리 놈들을 해체해서 물약으로 달여 먹고 싶네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우리의 목표는 고작 플레이어들을 쫒아내는 게 아니야. 그걸 명심해. 벌레를 잡기 위해 함부로 불을 놓으면 집 전체를 태울 수가 있어.”
“압니다. 알지요. 여의도의 신인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 차는 걸요. 제 자식들은 초월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이 고생하는 겁니다.”
당초에 눈치 챈 대로 역시 여의도가 목표였다. 다만 여기서 ‘신인류’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파편화 된 정보고 속속히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성우는 그게 놈들의 ‘전용 퀘스트’와 관련된 내용이 아닐까 했다.
끼익―
그때, 포마드의 뒤,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건······.
‘중복된 인물이다.’
갈색 코트의 웨어 울프의 기억에서도 봤던, 백색의 웨어 울프였다. 그는 얼마 후 있을 영등포 테러 직전의 모습과 동일하게 흑색의 비늘 갑옷과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중복된다는 건 중요한 인물이란 뜻이지.’
성우는 백색의 웨어 울프를 예의주시했다.
“저기 오시네요. 사수(四獸)의 셋째, 대마법사.”
소장이 비꼬듯 말하자 먼 거리에서 다가오던 백색의 웨어 울프가 고개를 저었다.
“틀렸습니다.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이 거리에서 들었다고? 역시 짐승······ 아니, 수인들은 귀가 참 밝단 말이죠?”
소장의 태도와 다르게 포마드는 공손했다. 그는 허리를 숙이며 빈 의자에 손짓했다.
“오셨습니까?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다들 지팡이만 보고 저를 마법사라고 생각하죠. 그건 광수 씨도 마찬가지군요. 자, 저는 사실 이런 사람입니다.”
백색의 웨어 울프가 소장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사람이요? 어?”
그러자 손가락 사이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더니, 소장의 가슴 속으로 흡수되었다. 소장은 놀란 듯 의자를 뒤로 밀며 셔츠 위를 쓸어내렸다.
“······어? 윽! 뭐, 뭔 짓을 한 겁니까!”
“저와 함께 먼 길 떠나셔야 되는데, 서로 지켜줄 수 있는 보험 하나 정도는 있어야죠. 그게 광수 씨도, 저도, 서로를 지켜줄 겁니다. 서로가 위험할 때 메시지를······.”
그때, 영상이 멈추고 노이즈가 끼는 것처럼 화면이 흐릿하게 변했다.
- 주의! ‘사이코메트리’에 의한 간섭 상태입니다!
‘이건 뭐지?’
처음 보는 메시지와 함께 영상 속 분위기가 어딘가 딱딱하게 변했다.
직후, 포마드의 남자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오로지 백색의 웨어 울프만 남았다. 그런데······ 그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네크로맨서.”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응?”
하물며 성우도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눈앞의 이 현상이, 더 이상 기억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 이게 놈의 스킬인 것이다.
“영등포를 막은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생각 이상으로 훨씬 빠르게 신도림 지부를 찾았다 싶었는데······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었군? 시체의 기억을 읽는다니?”
“아, 신도림이 생각 이상으로 텅텅 비었다 했더니, 본대가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지?”
지체하지 않고 신도림 연구소를 쳤기에 백색의 웨어 울프가 부재중인 것이었다.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은 듯, 성우를 지그시 노려볼 뿐이었다.
“······방해가 되지 말고 영등포를 떠나라. 싸움만 길어질 뿐이지, 어차피 우리의 승리다. 플레이어만의 랭킹에서 한 자리 차지했다고 네가 강하다는 착각은 하지 마라.”
“그래서, 너희가 누군데?”
“우리는 ‘진화 학회’다.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라. 인류는 곧 끝날 테니까.”
영상은 거기서 종료 되었다.
“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했다. ‘사이코메트리’ 말 그대로 초능력자라고 해야 될까? 아무래도 성가신 적이 등장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 신경 써야될 건 따로 있었다.
‘기억에서 본 정보 중, 빠르게 고민해봐야 되는 건 레이드 보스에 관한 거다. 세 마리라니?’
기억 속 포마드 남자는 레이드 보스 세 마리를 연속으로 소환할 예정이라고 했다. 물론 첫 번째 타자가 실패한 이상 계획을 수정할 가능성이 크지만, 대응해야만 되는 문제였다.
성우는 추가 정보를 얻기 위해 소장의 가운을 뒤적였다. 하지만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성우는 이어서 실험 도구가 잔뜩 올라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불필요한 물건을 죄다 책상 밖으로 쓸어 내버렸다.
그러자 책상 위에는 단 한 장의 지도만 남았다.
‘무슨 지도지?’
그건 수도권 지도였다. 그리고 지도 위, 일부 지역에 빨간색 마카로 A, B, C 표시가 되어 있었다.
‘공통점은?’
일단 눈에 들어오는 건 ‘A 여의도’다. 다만 여의도 위에는 X표시가 되어 있다.
이어서 ‘B 부천’ 정확히는 ‘소사동’이라고 필기되어 있다. ‘C 안양’에는 괄호 치고 ‘범계역’이라고 필기되어 있다.
이 두 장소에는 O표시가 되어 있다. 그리고 어디론가 화살표가 이어지는데 그곳은······ 영등포다.
‘그래, 이게 바로 레이드 보스의 위치다.’
성우는 그 맥락을 해석했다. 여의도의 레이드 보스는 동맹군이 선수 쳤으니 이용할 수 없을 테고, 나머지 두 지역의 레이드 보스를 영등포로 소환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오우거 투사’였다
기억을 읽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정보다.
“그럼 한 마리가 남았을 수도 있다는 건데······.”
기억 속 포마드의 남자가 말하길, 수인 마법사들이 레이드 보스를 ‘억류’한 상태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진화 학회의 또 다른 세력이 바로 이 위치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우는 지도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어쩌면 보물지도를 발견한 걸 수도 있다.
***
성우는 영등포에 돌아간 즉시 민흠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커뮤니티를 확인해서 부천이나 안양에 관련된 내용을 찾아봐주세요.”
반쯤 명령이었다.
“어떤 내용이 필요하신 겁니까? 아니, 그나저나 어떻게 되신 겁니까? 무슨 성과라도······.”
“그건 정훈 씨랑 얘기할 테니 부탁 좀 드립니다. 레이드 보스에 관한, 혹은 거대 몬스터에 관한 정보로요.”
“······예. 찾아보죠.”
이어서 성우는 정훈과 영등포역 앞 상가의 카페 안에서 마주앉았다. 영등포역은 아직 정밀 조사와 점검을 위해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말씀하시죠.”
정훈의 얼굴은 여전히 초췌했다. 그 때문인지 첫인상 때의 위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성우는 몰랐지만, 그건 완전 무장을 해제하여 ‘전쟁 영웅의 아우라’ 스킬이 발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등포역에 대한 재차 공격이 시작될 겁니다.”
성우의 첫 마디에 정훈은 담담했다. 크게 놀랄 만한 소식도 아니었다.
“누가 벌이는 짓이죠?”
“진화 학회.”
“······처음 듣습니다.”
“저도 그것 말고는 모릅니다. 다만······ 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죠.”
정훈이 말없이 성우를 바라보았다.
“놈들이 노리는 건 영등포역, 그러니까 광복 길드가 아닙니다.”
“그럼 왜 우리를······.”
“여의도, 여의도입니다.”
“예?”
“여의도 하면 떠오르는 거 없습니까?”
정훈은 반쯤 감긴 눈꺼풀을 끔뻑이다가,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타락자들?”
“저도 의심 중입니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여의도에 자라난 타락한 세계수가 한반도의 모든 생명체를 잡아먹는다. 그건 ‘예언석 배드엔딩-2’의 장면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끔찍한 결말이다.
정훈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가 이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창백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확실하고 말고를 떠나서, 어차피 상대해야 될 놈들이기도 하고, 그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막아야 될 일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훈은 고개를 들어 성우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예전 같은 힘이 담겨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다짐한 듯 보였다.
“······성우 씨.”
정훈이 성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성우 씨를 고용해도 되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예?”
“영등포를 지켜주십쇼. 현재까지 심연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분은 성우 씨가 유일하니, 그 비용은 제대로 치루겠습니다.”
성우는 대답을 보류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만신창이가 된 영등포역이 있었다. 외벽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여전히 검은 연기가 군데군데 피어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 최고의 생존자 그룹이자 레이드 동맹군을 진두지휘하던 광복 길드의 핵심이던 곳이었거늘······.
당장은 어떻게 버텨냈지만, 앞으로는 영등포역을 지켜내는 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성우가 없다면 말이다.
성우가 고개를 돌려 정훈을 바라보았다.
“저를 얼마에 사시려는 겁니까?”
“100만 골드, 혹은 앞으로 그 이상을 드리겠습니다.”
100만 골드라 함은, 여의도의 레이드 보스를 잡았을 때나 얻을 있는 거금이었다.
물론, 영등포에는 수많은 플레이어가 있었고, 길드 운영비를 위해 골드를 각출하고 있었기에 여유 자금이 존재했다. 하지만 거금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 돈을 선뜻 투자하겠다는 뜻이었다.
“쉽게 말해, 비용은 제가 지원해드릴 테니, 그 놈들을 깡그리 쓸어 주십쇼.”
성우가 정훈의 눈을 마주보기에, 그에게는 또 다른 계획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우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훈은 내 적이 아니다. 그리고 당장은 진화 학회를 깨부수는 게 가장 중요하니 차라리 잘 됐다.’
성우는 정훈에게 지원을 받아 레이드 보스를 사냥한 뒤, 진화 학회를 박살내기로 마음먹었다.
***
성우는 정훈과의 대화를 마친 뒤 한호와 지수를 찾았다. 그들은 대기 중인 크루세이더 팀과 한 대 섞여 있었다. 한호는 성우를 발견하더니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 다가왔다.
“어휴, 저 인간들 친화력 장난 아닌데요? 한 명 한 명 말이 진짜 많네요.”
“그새 친해진 거야?”
“저 같은 찐따는 못 끼겠다니까요? 한 번 같이 싸웠다고 무슨 전우애가 생긴 것처럼 굴어대는데, 그래도 자기네 커맨더가 짱이라는 사고방식은 못 버리더라고요. 마치 잉잉! 우리 아빠가 짱이야!”
성우는 그 부분에 있어서 정훈의 전용 스킬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 거라고 봤다.
“그리고 저 남정네들 지수 누님한테 아주 꼬리를 360도로 치고 있어요. 빨간 트레이닝복이 잘 어울리십니다. 어쩌고저쩌고 우엑······.”
한호가 은근슬쩍 빠져나오자 그 사이에 지수만 남았는데, 꽤나 고달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선배, 커뮤니티 보셨어요?”
“커뮤니티를 볼 시간이 있었겠냐?”
한호가 변태 같은 미소를 지었다.
“흐흐, 난리 났어요.”
난리가 날만 했다. 아니, 난리가 나지 않으면 이상했다. 네크로맨서가 반전을 거듭하며 압도적인 레이드 보스를 사냥하는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 생생한 모습이 영상에 담겨 전국에 생중계 됐다. 죽음에서 깨어나며 1차 각성으로 리치가 되고, 이어서 본 드레이크를 일으키는 장면까지 하나하나 명장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정훈이 의도했던 대로, 생존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건 성공한 셈이었다. 비록 그 주체가 달라졌지만 말이다.
“선배 팬클럽까지 생긴 거 알아요?”
“뭐? 그건 좀······.”
“오른이 팬클럽도 생긴 거 알아요?”
“······.”
“회장 아이디가 ‘최강돚거’거든요.”
“꼴값 떤다.”
“아, 그리고요······.”
한호는 핸드폰을 켜고 플레이어 가이드북 어플리케이션을 켜더니, 랭킹 페이지를 열었다.
“닥터 제로? 그 인간이 15레벨이 되면서 랭킹 3위까지 올라왔어요. 영등포 검사가 4위까지 밀리고요. 검사님 체면 다 구기네요.”
성우의 눈썹이 순간 꿈틀댔다. 아이디 ‘DOCTOR-000’ 성우와 정훈일 이어서 랭킹 4위였던 플레이어였다.
‘······닥터라.’
어딘가 신경 쓰이는 아이디였다. 그와 비슷한 아이디가 몇 개 더 보이는 거 보면 꽤나 큰 집단이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진화 학회.’
놈들일 가능성이 컸다.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와 퍽 어울리는 닉네임이었으니 말이다. 성우의 추론이 맞을 경우, 놈들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다가 랭킹에 집계되지 않는 수인들까지 있다. 상당한 전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어.’
그때, 민흠이 다가왔다.
“성우 씨, 역 건물 안에서 정체불명의 물건이 발견 됐습니다. 그것 때문에 연기가 계속 나오고 있는 거였어요.”
“······.”
성우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을 짓자 민흠이 이어서 설명했다.
“아 그게······ 강력한 심연의 호흡을 내뿜는 물건인지라, 그 근처로 가면 방독면까지 뚫고 들어오더라고요. 성우 씨가 아니라면 제거가 불가능한 것 같아서요.”
심연의 호흡을 내뿜는 물건?
진화 학회가 선물을 하나 더 두고 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