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네크로맨서-55화 (55/244)

# 55

20) 영등포역 테러 – 1

만신창이가 된 정훈은 자존심을 다 버리고 성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서, 성우 씨, 부디 도와주십쇼. 역 안에는 무기력한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저, 저는 이 상태로는 아무 것도······.”

정훈은 눈이 반쯤 감긴 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성우는 말없이 헬리콥터에 올랐다.

정훈의 말대로 수많은 생존자가 떼죽음을 당하게 생긴 건 물론이거니와, 영등포역을 습격한 세력이 누군지 의심이 가는 상황에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정훈 씨에게 따지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정훈은 분명 신의를 저버렸다. 그게 비록 성우가 유발한 경쟁이라고 할지라도, 작전을 무시하고 보스 몬스터에게 돌진한 건 큰 잘못이었다.

주변부의 몬스터부터 정리하고 진입하기로 한 계획을 이행하지 않았기에 더 큰 위기가 닥쳤다. 성우는 그 일을 쉽게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두두두두!

성우 일행과 크루세이더 팀을 태운 소방 헬기가 급히 이륙했다. 여의도에서 영등포역은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기에 순식간에 검은 연기 근처로 접근했다.

성우가 로터의 폭음 속에서 소리쳤다.

“연기 속으로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지난 번, 폭주족들에게 맞았던 폭탄 기억하십니까?”

다른 플레이어들이 ‘심연의 호흡’을 들이마셨다간 그대로 졸도 할 것이었다. 조종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 영등포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참극이 벌어진다.

“알겠습니다!”

기력이 없는 정훈 대신 민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종사에게 명령을 전했다.

우우우웅!

헬기는 검은 연기를 크게 우회해 영등포역의 정면으로 돌아갔다.

“······미친.”

그 순간, 민흠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연기에 가려져 있던 영등포역의 민낯은 생각 외로 심각했다.

푸우우우―

지하차도, 역사, 백화점 등 영등포역이라고 불릴만한 곳의 모든 구멍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생화학 테러 현장인 셈이었다.

크루세이더 팀조차 저 연기에 한 번 데여 봤기에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저······ 성우 씨?”

민흠은 어찌해야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성우를 바라보았다. 성우는 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등포역 주변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색깔만 봐서는 알 수 없지만 심연의 농축액보다 약하다. 확산 범위를 늘리기 위해서 농도를 줄인 거야.’

두두두두!

헬기의 고도가 점점 낮아졌다. 영등포역 밖으로 탈출한 이들이 역 주변부에 모여 있었다. 그 숫자만 족히 천 명 이상 될 것 같았다.

그 근처로 소방 헬기가 착륙하자 크로스보우로 무장한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영등포역의 경비대였다.

“부관님! 수인들입니다! 수인들이 대규모로 급습하는 바람에······.”

“뭐? 수인? 의식이 돌아온 놈들이었나?”

“예, 자기들끼리 사인을 주고받는 걸 봤습니다.”

광복 길드 역시 수인이 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역시나.’

그리고 성우의 예상이 맞아 들어갔다. 이전에 의식이 돌아온 웨어 울프에게 들었던, 플레이어를 증오하는 수인들과 미친 과학자들의 모임, 일명 ‘방문판매상’으로 잘 알려진 족속들이 틀림없었다.

“저,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민흠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밖이나 잘 지키고 계시죠.”

그 잘난 크루세이더 팀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성우는 영등포역 1번 출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잡아서 실체를 확인해야 된다.’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지만 앞으로 큰 골칫거리가 될 놈들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영등포역을 공격했다는 건, 수원의 마을 역시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놈들은 플레이어를 적대시하여 주력 병력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노린 걸 테니 말이다.

성우는 역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그의 오른쪽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압도적인 크기의 ‘본 드레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어!”

“저, 저게······.”

그 거대한 괴물을 처음 목격한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두 번째 보는 이들도 넋을 놓고 바라보는 건 마찬가지였다.

‘벽을 뚫어.’

성우는 본 드레이크를 조종하여 영등포 역사의 외벽 2층에 구멍을 뚫게 했다.

콱! 콱! 쾅!

본 드레이크가 앞발을 들어 올려 외벽을 몇 번 긁어내자, 패널이 떨어져나가고 콘크리트 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겼다.

푸우우우―

그곳에서도 엄청난 연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점령당한 건물의 출입구로 걸어 들어가는 건 위험한 짓이었다. 그리고 창문까지 지키고 있을 걸 감안하여 놈들이 전혀 예상 못한 길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성우는 본 드레이크의 몸을 밟고 올라가 구멍 속, 검은 연기 안으로 사라졌다.

민흠은 성우가 사라진 구멍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경비대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역 안에 몇 명이나 남아있지?”

“정확히 집계가 안 되는데······ 천 명 이상은 남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도 그나마 대부분 지하통로를 통해서 타임스퀘어 쪽으로 대피하는데 성공해서요.”

“젠장······.”

“그런데 부관님, 저 사람 혼자만 들어가도 괜찮은 겁니까? 아직 안에 수인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물음에 민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뒤늦게 깨달았다. 저 사람 혼자 성공 못하면······ 원래 안 되는 일인 것 같더라고.”

***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빛이 없는 게 아니라, 실내를 가득 메운 검은 연기가 빛을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후우― 하―”

그리고 그 지독한 연기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가슴을 쭉 펴고, 그 연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이번 건 별로야. 싱거워.”

하물며 옅은 미소를 띠고 있기까지 했다.

- 심연의 숨결에 의해 마나가 소폭 상승합니다.

- 심연의 숨결에 의해 모든 능력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 최대 권속 수가 일시적으로 (+2)만큼 증가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네크로맨서에게는 이 검은 연기가 스테로이드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마치 투시경을 쓴 것처럼 연기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성우는 연기 속을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L백화점이었던 실내는 진열대가 싹 정리되고 텐트가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생존자들의 생활공간인 것이다.

한쪽 벽면에 위치한 긴 책상에는 커피포트나 밥솥 등 공용물품들이 정리되어 있었고, 배식을 위한 스테인리스 식판이 쌓여 있었다.

‘나름 체계적으로 조성하려고 노력했군.’

정훈이 레이드 과정에서 추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런 면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신경 쓰고 있는 건 확실했다.

정훈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하며, 성우에게까지 찾아온 이유 역시 알만 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부양해야 될 인구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처럼 그 사람들을 지켜낼 힘은 한 없이 부족했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뭔가 박살나는 소리가 났다니까?”

“확실해? 방독면을 써서 제대로 느껴지지가 않네. 어후, 존나 답답해.”

3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성우는 4인용 텐트 뒤로 몸을 숨겼다.

“근데 의식은 얼마나 걸린다는 거야?”

“낸들 알아. 마법사 새끼들이 알아서 하겠지.”

‘웨어 울프’ 한 마리와 ‘웨어 호그’ 한 마리였다. 두 수인은 얼굴에 검은 방독면을 뒤집어 쓴 채 성우가 숨어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운 좋게 법사 뇌 빨아 먹은 놈들이 대장 짓거리하는 꼴 봐주기 힘들다. 나는 발굽까지 달렸는데 하필이면 궁수 뇌를 처 먹었을까.”

“그래도 매드 사이언티스트, 그 새끼들보단 낫다. 그 음침한 새끼들, 우리 죽으면 시체까지 갖다 달라고 했다며? 그걸로 무슨 영약을 만든다고 하던······.”

촤악!

성우의 검이 웨어 울프의 목덜미를 긋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역행하여 돌아오더니 웨어 호그의 가슴팍에 꽂혔다.

푹!

“커어! 누, 누구!”

수인이라고 하지만 검은 연기 속을 헤집어 볼 수는 없었다. 성우는 오른손의 대검을 그대로 밀고 나가며, 왼손으로 리프팅 크로스보우를 들어 올려 난사했다.

픽! 픽! 픽! 픽!

“윽! 으! 허어······.”

웨어 호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 웨어 호그를 사냥하여 3,00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이제 수인도 잡을 만 하네.”

여태까지 수인이라 함은 일대일로 대적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동안 레벨 업을 거듭하고 아이템을 확보하며 능력치에 적지 않은 투자를 해온 게 빛을 발한 것이다.

물론 수인 역시 다른 방법을 통해서 능력치를 강화할 테니, 앞으로 훨씬 강한 놈이 나타날 게 분명했다.

성우는 놈들이 내려온 곳, 3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원래 의류 매장이었던 곳이었다.

쿵― 쿵―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성우는 에스컬레이터 끄트머리에서 몸을 숙였다.

그 순간 거대한 황소 같은 생김새의 ‘웨어 불’ 한 마리가 나타났다.

“흠······.”

놈은 정화통이 세 개나 달린 방독 마스크를 쓰고 양쪽 어깨에 사람을 들쳐 맨 채, 에스컬레이터 앞을 스쳐지나갔다. 그러고는 구석진 곳에다가 두 사람을 내팽개쳤다.

“아 씨, 이게 몇 명이야 이백 명은 족히 되겠는데?”

그곳에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웨어 렛’ 3마리가 큼직한 자루에 사람을 집어넣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다른 층에도 이만큼 쌓여 있습니다. 그나저나 플레이어 새끼들을 될 수 있을 만큼 많이 잡아오라니, 참나 이것도 실험 재료가 되는 겁니까?”

“그 인간들 속을 어떻게 알겠어? 얼핏 듣기로는 뭐, 경험치를 추출해낸다고 한다던데.”

경험치를 추출해낸다고? 사람한테서?

“앵? 그런 게 가능합니까?”

황소는 거대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짐승으로 변했는데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크크크! 하긴, 저는 요즘 원래부터 쥐로 태어났던 것 같다니까요? 이 삶도 그리 나쁘진······.”

- 주의! 해당 지역에 ‘대강령(大降靈)’이 시작됩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죽음의 응답’이 시작됩니다.

“뭐야 이거?”

“응? 형님도 이거 보이십······ 칵!”

수다를 떨던 웨어 렛의 목덜미에서 백색의 창이 튀어나왔다.

“뭐야!”

다음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며 웨어 두 마리를 짓밟아버렸다. 그건 웨어 베어 스켈레톤이었다.

“크아아아!”

웨어 불이 웨어 베어 스켈레톤의 앞발을 피해내며 옆구리를 뿔로 들이받았다. 뼈 갑옷 덕분에 데미지는 적었지만, 그 충격에 멀리 날아가 버렸다.

덜그럭! 덜그럭!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방향에서 웨어 베어 스켈레톤이 튀어나왔다. 웨어 불은 자세를 낮추며, 달려드는 녀석의 복부를 향해 프론트 킥을 날렸다. 발굽이 달린 뒷발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쩡!

그 육중한 몸뚱이가 발차기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이어서 등 뒤에서 달려드는 인기척까지 캐치해내고, 고개를 숙이며 상대의 허리를 잡아챘다. 그리고 단숨에 들어 올려서 바닥으로 메쳤다.

쾅!

지축이 뒤흔들리는 충격과 함께 웨어 베어 스켈레톤의 몸에서 온갖 뼛조각이 튕겨져 나갔다.

그렇게 3마리의 스켈레톤을 날려버리기까지 불과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예상외다.’

생각보다 터프한 놈이었다.

푹!

놈은 팔뚝을 들어 올려 투창까지 비껴내더니, 바닥으로 내리 꽂아 놓은 스켈레톤을 향해 장대비 같은 파운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뻑! 쩍!

- 당신의 권속이 영원한 죽음으로 돌아갑니다.

놈이 천천히 상체를 들어올렸다. 양 손과 머리의 뿔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떤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크아아아! 어디에 있냐! 네가 누군지 안다! 나와라 네크로맨서! 제대로 붙자!”

놈이 성을 내며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덜그럭! 덜그럭!

다만 엄청난 수의 인기척이, 검은 연기 깊숙한 곳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직후, 웨어 울프 스켈레톤이 사방에서 튀어나오며, 일제히 투창을 내던졌다.

푹! 푹! 푹! 푹!

“컥, 커어······.”

웨어 불의 가슴부터 허벅지까지 긴 투창이 잔뜩 꽂혔다. 육탄전에서는 다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언정, 이런 원거리 공격을 견뎌낼 수는 없었다.

이 무리에서 압도적인 힘을 가진 놈일 테지만, 네크로맨서 앞에서는 장사가 아니었다.

“이 치, 치사한······.”

“가스 뿌리는 건 안 치사하고?”

성우가 스켈레톤 사이에서 걸어 나오며, 놈의 목덜미를 향해 대검을 찔러 넣었다.

푹!

- ‘2단계 웨어 불’을 사냥하여 30,000골드를 얻었습니다.

‘······2단계?’

처음 보는 메시지에다가 평균 이상의 골드까지 수급되었다. 아무래도 이성을 찾은 수인들에게는 레벨과 다른 개념의 성장 체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보다 질 좋은 컬렉션을 완성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 당신의 권능 아래 망자가 권속(眷屬)됩니다.

두 개의 큼직한 뿔을 가진 ‘웨어 불 스켈레톤’이 몸을 일으켰다. 웨어 베어보다 두 뼘 정도 더 큰 사이즈였는데, 머리 위의 뿔 때문인지 훨씬 커 보였다.

이어서 성우는 쓰러진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살아있다. 하지만 연기 속에 오래 방치하면 죽을 거야.’

성우는 10마리의 좀비들을 이용해서 생존자들을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우우웅! 쿠구구구······.

엄청난 진동과 함께 메시지 한 줄이 떠올랐다.

- 주의! 해당 지역에 ‘대규모 소환 마법’이 시전 중입니다.

‘소환?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성우는 마법사가 어떤 의식을 진행 중이라는 대화를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어차피 방금 전 소란으로 침입한 게 들켰겠다, 성우는 스켈레톤을 대동하고 4층을 향해 급히 뛰어올라갔다.

L백화점 4층, 그곳 역시 모든 진열대가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로, 거대한 빈 공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몇 마리의 수인이 우뚝 서 있었다.

웨어 베어가 무려 4마리에 웨어 울프가 3마리였다. 그리고 8개의 가스통이 아무렇게 새워진 채 검은 연기를 모락모락 내뿜는 중이었다.

푸쉬이이―

‘저게 원흉이군. 여기에만 있는 건 아니다.’

수인 특공대가 영등포역 곳곳에 저런 물건을 설치해둔 상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연기를 자아낼 수는 없었다.

“젠장, 네크로맨서? 역시나 저 놈은 심연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구나? 연구원 놈들이 알면 기뻐하겠어!”

가스통의 사이에서 갈색 롱 코트를 입은 웨어 울프 한 마리가 몸을 일으켰다. 놈은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던 중이었는데, 그건 붉은색의 마법진었다.

‘소환 마법, 저거다.’

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며 성우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소환 마법이 작동할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총 7마리, 이 중에서 ‘2단계’ 이상의 수인이 있더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숫자이긴 했다만, 느긋하게 전투를 즐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 사신의 낫 ‘그림리퍼’를 소환합니다.

- 그림리퍼 유지 시간 (00:59:58)

성우는 그림리퍼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녹색 불꽃이 성우의 피부를 태우며 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크으······.”

그 과정은 적지 않은 고통을 수반했다. 그러나 곧 무감각해진다.

‘하루에 1시간이다. 이런 놈들에게는 5분만 투자하면 된다.’

- ‘리치’의 힘을 얻습니다.

* 최대 권속 수가 (+50)만큼 증가합니다.

* 모든 능력치가 (+10)만큼 상승합니다.

* 인근의 파괴된 언데드를 ‘최대 권속 수만큼 무한정’ 부활‧재생시킬 수 있습니다.

“······저게 뭐야?”

“끔찍한 새끼잖아!”

성우는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르며 흑색 낫을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스켈레톤들이 녹색의 안광을 내뿜으며 진격하기 시작했다.

덜그럭! 덜그럭!

평소와 1차 각성 상태의 차이점은 ‘소모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에 있다. 스켈레톤의 전력 보존을 위해서 최대한 아껴야 될 필요가 전혀 없다.

“젠장! 해골 새끼들 머리통을 부숴버려!”

“뼈 밖에 없으니까 척추부터 끊으면 돼!”

뻑! 콰직!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어? 다, 다시 살아난다! 커, 컥!”

“으아아! 아악!”

그리고 그건 최고의 시간 절감 전략이었다. 7마리의 수인들은 처음 몇 분 동안만 어떻게 버텨냈을 뿐, 곧 속절없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으흐흐! 대단해······ 연구원들이 보면 군침을 흘리겠어. 하지만 늦었다 네크로맨서!”

혼자 남은 웨어 울프는 제 편이 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킬킬 웃으며 손뼉을 쳐댔다.

그때였다. 놈의 발아래 그려진 마법진이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대규모 소환 마법’이 시작됩니다!

쿠구구구!

백화점 건물이 통째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천장에 금이 가고 파이프가 튀어나왔다.

“방송을 하다니 이 멍청한 것들! 너희가 여의도에서 전력 낭비를 하는 걸 다 지켜봤······ 으아아! 아악!”

놈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사이, 웨어 타이거 스켈레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놈의 어깨에 이빨을 박아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질질 끌고 가, 창문 밖으로 집어던져버렸다.

‘일단 탈출해야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그것도 건물 안에서 그대로 지켜보고 있는 건 위험했다.

성우 역시 깨진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바닥에 부딪치기 직전,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켁, 크으······.”

반면 웨어 울프는 바닥 위에서 앓는 소리를 하며 방독면을 벗었다. 하지만 곧 입 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으흐흐! 인간들은 끝이야. 끝!”

“뭘 소환한 거지?”

“한 번 지켜봐라! 기가 막힌 친구가 올 테니까!”

기가 막힌 친구라?

쿠구궁!

이어서 건물 안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무너지고 때려 부수는 소리였다. 이어서······.

우어어어!

소환된 존재의 포효가 울렸다. 피포식자의 본능을 자극하는 엄청난 위압감에 역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민흠이 경비대를 대동하고 다가왔다.

“서, 성우 씨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저도 아직 모릅니다. 곧 알게 되겠죠.”

쾅! 쾅! 쿵!

건물 안에서 울리는 굉음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저 안에서 나오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외벽에 균열이 가더니······.

콰드드!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쿵!

- 레이드 보스 몬스터 ‘오우거 투사’가 출현했습니다.

‘레이드 보스를 여기에 소환한다고?’

우어어어!

붉은 피부에 8미터에 이를 법한 거인이 지상에 착지하며 보도블록을 죄다 으스러뜨렸다. 놈은 심연의 숨결을 호흡한 게 고통스러운 지, 목을 박박 긁어댔는데, 언뜻 봐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으하하! 전력을 거의 다 소진한 너희가 저걸 잡을 수 있을까? 잡더라도 복구 불가능할 텐데?”

하지만 성우는 실소를 터뜨렸다.

“······너, 방송 끝까지 안 봤구나?”

“뭐?”

“방송 어디까지 봤어?”

“······.”

사실 충분히 논리적인 기습이었다. 레이드 보스를 잡은 뒤라면 응당 전력 손실이 발생했을 테고, 거기에 레이드 보스를 하나 더 끼얹어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주겠다는 생각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 타이밍을 노리기 위해 레이드 방송을 끝까지 시청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영등포역을 습격하고, 가스를 뿌리고, 마법진을 그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될 테니 말이다.

쿵! 쿵! 쿵! 쿵!

별안간 땅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웨어 울프는 시선을 돌려 성우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동공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콰득!

거대한 백색 아가리가 달려들어 오우거의 뒷목을 단숨에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머리를 휘둘러, 영등포역의 외벽을 향해 내던졌다

쿵! 쿠구구······.

오우거의 몸이 철골 구조물 안에 처박혔다.

“이쪽에도 기가 막힌 친구가 하나 있거든.”

놈들은 아직 네크로맨서를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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