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11) 뒤늦게 온 군인들 – 1
수원 화성, 이곳에는 안전 구역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허상을 쫓아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성우가 게시물을 올려서 경고한 이후에도 폐공장의 생존자 몇 명이 흡혈귀에 대해서 폭로하는 글을 올렸었다. 누군가는 그 내용을 보고 선택을 달리했을 수도 있지만, 이곳을 찾은 200여 명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는 환상에 빠져 경고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말았다.
그만큼 절실했고 불안했다. 다른 말로는 안일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도, 그들의 최악의 선택은 성우에 의해 구제 받았다.
밤이 왔다.
생존자들은 흡혈귀들이 아지트로 사용하던 시립 미술관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200명 정도의 사람을 수용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성우는 그곳의 사업소장실에 있었다.
“프로필.”
[플레이어 프로필]
- 이름 : 유성우
- 레벨 : 10
- 직업 : 네크로맨서, 흑마법사
- 능력 : 근력(8+6), 민첩성(8), 체력(5),
- 보유 골드 : 298,880
- 추가 속성 : 악마
30만에 이르는 총 골드 중에서 방금 전 전투로 얻은 골드가 무려 15만 골드였다.
거리에서 온갖 몬스터를 사냥하고, 던전에서 코볼트 한 무리를 초토화시킨 것보다 많은 골드를 번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스킬 정보]
- 이름 : 뼈 갑옷 제조
- 등급 : 기초
- 분류 : 액티브
- 소모 : 마나 10
사체의 뼈를 이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갑옷을 제작합니다. 갑옷은 제작과 동시에 착용됩니다.
재료의 종류와 품질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며 숙련 등급이 올라갈수록 보다 완성도 있는 구성의 갑옷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전용 퀘스트를 통해서 얻은 스킬이었는데, 뼈 무기 제조의 방어구 버전 같은 느낌이었다. 스킬을 사용하면 근처에 있는 시체를 재료로 하여 갑옷이 제작되는 동시에 몸에 저절로 부착되었다.
툭툭.
성우는 제 가슴팍에 부착된 뼈 갑옷을 두드렸다. 몸에 딱 맞는 사이즈로 형성 되어서 그런가, 마치 촘촘한 갈비뼈를 덧씌운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갑옷은 스켈레톤들에게도 착용시킬 수 있었기에, 앞으로 대폭 증강된 방어력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어서 성우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큼직한 크로스보우를 들어올렸다. 킬러를 역으로 제거하는 특별 퀘스트를 완수해서 얻은, C급 아이템 상자에서 나온 무기였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드워프제 리피팅 크로스보우
- 등급 : 영웅
- 분류 : 크로스보우
- 효과 : 아공간의 병기창과 연결된 탄창이 장착되어 있다. (장전 없이 발사가 가능하다.)
“하긴 이제 투창이나 단검 투척은 그만할 때도 됐지.”
물론 활이나 석궁을 얻는다고 해서 투창이나 투척 단검이 무용해지는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용도가 다른 무기로 봐야했다.
순간적인 견제 후 육탄전으로 돌입하는 경우가 잦은 성우의 전투 방식에는, 오히려 단검 투척이 유용할 수도 있었다. 적이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에, 휴대가 편한 단검을 쏟아 붓고 곧장 다른 무기로 교체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전선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 후방 지휘와 원거리 견제를 주로 하던 성우에게는 이런 무기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엄청난 성장을 한 날이었다. 그리고 이 밤이 지나면 또 다른 골치 아픈 일들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날 밤, 성우는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속의 어린 성우는 지금과 달리 무력한 존재였다.
그는 거대한 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애걸 하는 가족의 목소리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선배, 선배.”
“······응?”
한호의 얼굴이 보였다.
“김 병장이 찾아요. 그, 어제 말한 군인들이 왔어요.”
오늘의 골치 아픈 일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어제 뱀파이어 로드를 처리한 직후, 근처 건물에 잠복 중이던 군인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인 김 병장이 나타나서는 군대가 살아있다고 말했다.
“저희 부대로 함께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병장의 부탁에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 저에게 용건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하시죠.”
성우는 볼 이유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먼 거리까지 행차할 생각이 없었다. 긴 싸움으로 적지 않은 피로까지 누적된 상태였으니, 그런 작은 친절조차 베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김 병장은 그 말을 전하겠다고 했고, 이른 아침부터 군 수뇌부가 찾아왔다.
성우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책상 의자에 앉았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
“아, 그래도 될까요? 성질 더럽게 생겼던데······.”
“성질이 레벨은 아니잖아.”
“하긴, 알겠어요.”
군인들이라?
수십 년 동안 대를 이어온 무력 집단이 쉽게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군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고들 말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쟁 같은 국가비상사태를 대비해서 훈련을 해오는 집단이었다.
물론, 이 게임은 군대의 매뉴얼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모든 통상 무기가 사용불가 상태가 되어버렸고, 군 지휘체계도 먹통이었으니 혼란을 겪었겠지만······.
저벅― 저벅―
“이쪽인가?”
“그게 죄송한데, 아직 조금 기다려달라고······.”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호가 당황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하려고 했지만, 상대는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을 모양이었다.
“기다려? 지금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어? 이 사태가 애들 장난 같나? 저리 비키게.”
중년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사업소장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눈을 비비던 성우는 중령 계급장을 단 남자와 마주쳤다.
그의 등 뒤, 남자 대위 한 명과 김 병장이 서 있었다. 김 병장은 성우와 눈이 마주쳤는데, 인상을 찌푸리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자네인가?”
“······.”
“나는 육군 51사단 소속 박태용 중령일세.”
박 중령은 그렇게 말하며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 뒤로 대위와 김 병장이 벽에 붙어 섰다.
“우리가 먼 길 오느냐고 여유가 없는 건 알고 있을 테니, 바로 본론으로 가지.”
이 발언은 성우가 호출에 응하지 않고 직접 오라고 한 걸 은근히 트집 잡는 걸까?
“말씀하시죠.”
성우는 박 중령의 맞은 편, 가죽 소파에 앉았다.
“우리가 예의주시하고 있던 화성 행궁의 괴뢰 집단을 자네가 처리했다고 들었네. 그 사건에 대한 증언 좀 듣고 앞으로의 상황에 협조 좀 부탁하려고 하네.”
“증언이야 어렵지 않을 텐데, 어떤 협조일까요?”
박 중령은 도대체 어떤 발언을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두꺼운 입술을 움직였다.
“군으로 들어오게.”
성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거 참······ 대한민국 남자 99퍼센트는 경기 일으킬 것 같은 제안이네요.”
“이해하네. 하지만 내 제안이 농담이 아니란 걸 알 테지?”
박 중령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를 필두로 한 군대는 성우에게 무엇인가 얻어내기 위해, 혹은 자신들에게 복속시키기 위해 온 게 분명했다.
그리고 군이라는 강력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초장부터 성우의 기를 누르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여기서 굽혀주면 불필요한 신경전만 길어질 것이었다.
“제가 박 중령님의 제안에 협조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요? 너무 황당한 내용이라 쉽게 이해가 되지 않네요.”
다짜고짜 군대에 들어오라니, 이런 제안을 그 누가 환영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박 중령의 얼굴은 여전히 뻣뻣하기만 했다.
“내 제안이 당연한 걸 넘어서 편의를 봐주는 거라고 이해해주면 좋겠군.”
“편의요?”
“국가비상사태일세. 계엄령 선포가 불가능할 뿐, 사실상 계엄 상황이니 자네 같은 건장한 남자를 군에서 징집해 가는 건 아주 정당한 일이지. 다만, 나는 자네의 실력을 인정하고 조금 더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이네.”
확실히 이런 비상 상황에서 정부가 온전하다면, 계엄령과 동시에 동원 명령이 내려왔을 테고, 군대를 중심으로 몬스터들에 맞설 것이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정부는 초장부터 부재중이었고, 군대는 모든 무기를 잃고 정신을 차리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제가 뭘 해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비상 대응. 국가 수복. 체제 안전 그 과정의 힘이 되어주 면 되네.”
“······.”
“하아······ 이보게, 이름이 유성우라고 했던가? 자네도 군대는 나왔을 테고, 그렇다면 내 말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보네. 헛소리로 치부하지 말아주게.”
박 중령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벼대더니 억양을 한 층 누그러뜨렸다. 갑자기 감정에 호소하려고 하는 걸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단합을 해도 모자랄 판에, 영등포 검사 같은 인간이 국가를 부정하고 독자적인 괴리 집단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네. 알고 있겠지?”
“알고 있죠.”
군 입장에서는 영등포 검사라는 커뮤니티 네임드가 길드 선포를 한 사건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우 개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국민들은 군을 중심으로 뭉쳐서 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야만 해. 그리고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고, 영웅이 될 수 있다네. 앞으로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야. 광화문에서부터······ 음.”
그는 문득 입을 꾹 다물었다.
‘광화문? 뭘 말하려던 거지?’
그나저나 영웅이라? 꽤나 멋있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멍청한 소리였다.
“아뇨.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괴리 집단이라고요? 무슨 근거와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십니까?”
“뭐?”
“이 사태가 발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군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그것만 믿고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죠.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살아남았고,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서 힘을 합치는 것뿐이죠. 그게 괴뢰 집단이라고요?”
“······.”
“그래도 저는 영등포 검사 같은 사람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이 시스템에 적응한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시스템이라고?”
“박 중령님도 아시겠지만, 이 현상은 게임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몬스터가 나오고 아이템이 주어지며 퀘스트가 생기죠. 그리고 그 퀘스트는 대부분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개인에게 주어집니다. 애초에 국가나 군대가 책임져줄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이 게임은 인간 사회를 철저하게 조각낼 수밖에 없다.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그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에 떨어진 퀘스트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건 기존의 사회나 체제 내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영등포 검사의 길드처럼 과감한 사고 전환을 감행하는 게 이롭다.
“그리고 영웅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차라리 용병이 되겠습니다. 만약 저를 필요로 하시면 마땅한 비용을 지불하셔야 할 겁니다.”
박 중령의 말문이 막혔다.
“지금 돈을 달라는 건가?”
“정확히는 골드죠.”
박 중령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국가를 상대로 장사를 하겠다는 건가? 징집에 응하지 않고 무장을 갖추면 내란죄로 잡아갈 근거가······.”
“그 국가, 어디에 있습니까? 박 중령님, 제가 아는 대한민국은 더 이상 없습니다. 국민들이 며칠 째 죽어나가는데 아무 것도 못하는 건, 국가가 아닙니다. 이 일이 벌어지는 순간부터, 우리에겐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성우가 말을 끊고 반박하자 박 중령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입을 뻐끔거리며 어떻게 반론할 여지를 찾지 못하는 듯 했다.
“······하, 한 마디 한 마디 불온하기 그지없는 발언이군. 먹여주고 키워준 국가를 부정하다니?”
그래, 이렇다. 군인이라는 꽉 막힌 집단이 훈련되지 않은 새로운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들은 철저하게 어떤 틀 안에서 사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체제와 국민의 자세를 논하고, 군 기강과 상관 예우 때문에 유연한 사고가 불가능한 것······.
“그럼, 협상 결렬이군요.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이보게!”
성우가 소파에서 일어나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등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회할거다! 감히 이런 식으로 우리를 모욕해? 네가 군대와 반목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거냐? 인간의 힘이란 자고로 연대와 화합에서 나오는 법이다!”
“······저는 혼자가 편하더라고요.”
성우가 복도로 나왔다.
“성우 씨.”
그의 뒤를 김 병장이 따라 나왔다. 병사가 제 의지로 먼저 나왔을 리는 없고, 아마 간부들이 성우를 다시 설득하라고 보낸 게 아닐까 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괜히 불편한 자리를······.”
“아뇨, 군대라는 곳이 뭐, 병사가 책임질 건 아니죠. 김 병장님 보고 저를 설득하라고 하던가요?”
“아, 그게······.”
김 병장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정말로 필요하긴 한 것 같군요.”
“하하하······.”
김 병장은 허탈하게 웃더니 혼잣말로 욕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고뇌가 느껴졌다. 그러더니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성우의 팔을 붙들었다.
“예, 사실 성우 씨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대장님이 저렇게 꽉 막히게 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저 역시 간부들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듭니다. 그래서 말인데, 보여드릴게 있습니다. 이게 좀, 기밀 비슷한 건데······.”
김 병장은 성우를 지하주차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비상구 입구에 멈춰 섰다.
“잠시만 여기 계십쇼. 아무래도 몰래 꺼내야 와야 될 것 같습니다. 들키면 총살감이거든요.”
김 병장은 성우에게 당부한 뒤,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대기 중이었다. 김 병장은 군장에서 어떤 상자를 몰래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성우를 향해 재빠르게 다가왔다.
“후, 누구 볼 수도 있으니 계단 안으로 가죠.”
그는 비상구에 선 채 하드 케이스를 열어서 녹색 돌을 꺼냈다. 희미한 빛을 내는 것 같기도 했는데, 표면에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음, ‘예언석’이라고 하는 물건입니다.”
“예언이요?”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게 세계 곳곳에 뿌려져 있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어느 정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같이 운 좋게 발견한 사람들이 이점을 가질 수 있겠죠. 이 게임에는 밸런스 따위는 없는 겁니다.”
말 그대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다는 게 아니던가? 성우는 김 병장이 내민 녹색 돌을 덥석 집었다.
- ‘예언석(시즌2)’에 접촉했습니다.
그러자 눈앞이 어두워지고, 필름 영사기의 한 장면 같은 세상이 펼쳐졌다.
후우웅―
장소는 광화문 광장이었다. 마천루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광장은 잿빛과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그 끝자락에는 사람과 몬스터의 시체가 높게 산처럼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그건······ 와이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언데드 와이번이라고 해야 될까?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간 그 괴물의 눈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와이번의 등에 녹색 보석이 박힌 뼈로 만들어진 왕관을 쓴, 키가 매우 큰 해골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그의 보랏빛 로브는 발아래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졌는데, 오른 손에는 한 없이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리치?’
그 존재가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광화문대로에 쌓인 시체들의 눈이 녹색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성우는 그게 뭔지 직감했다.
‘설마 저걸 다?’
수만의 시체들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다음 순간, 번뜩 고개를 세웠다. 그리고 하나 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후,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언데드의 습격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보였다.
파도 같이 몰려드는 시체들, 사방에서 포위당한 채 뜯어 먹히는 사람들, 놈들이 건물을 타고 오르고, 차를 전복시키고, 창문을 뜯고 들어간다.
- 시즌2 <지옥의 도래> 2021년 1월 1일 대규모 업데이트 예정
성우는 고개를 들었다. 김 병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게, 막 해골이랑 그런 것들 나오니까 성우 씨 생각이 안날 수가 없더라고요.”
하지만 성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눈앞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떠올랐으니 말이다.
[전용 퀘스트]
- 제목 : 죽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 유형 : 목표 획득
- 목표 : ‘사신의 낫’을 선점하라
- 보상 : 1차 각성, 전용 스킬
당신은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죽음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건, 현재의 당신으로서는 감히 쥘 수 없는 압도적인 권능이다. 그에 상응하는 힘을 키우지 않으면 당신은 ‘리치’의 힘에 동화되어 그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 ‘사신의 낫’ 위치는 15레벨에 도달했을 때 공개됩니다.
* 당신의 선택이 당신의 ‘운명’에 영향을 미칩니다.
“······고맙습니다.”
“예?”
“덕분에 목표가 생겼네요. 젠장. 15레벨이라?”
네크로맨서의 별 다섯 개, 그건 아무래도 퀘스트 난이도를 뜻하는 게 분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시즌2의 시작까지는 두 달 정도 남았다. 그 안에 사신의 낫이란 걸 얻지 않으면 나도 리치의 해골바가지가 된다는 거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길은 어딜까?
“김 병장님, 하나만 더 묻죠. 지역 별 보스 몬스터가 생성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놈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첫 번째 메인스트림이 시작되면서 지역 별로 보스 몬스터가 생성된다. 그리고 그 놈을 잡으면 상점에서도 얻을 수 없는 엄청난 보상이 따를 거라는 내용이 떠올랐다.
‘놈을 잡는 게 레벨 업을 위한 가장 빠른 길임에는 분명하다.’
성우는 다음 목표를 확정했고 정보력이 남다른 것 같은 군대의 구성원, 김 병장에게 보스 몬스터의 위치를 물은 것이다. 김 병장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저희가 지역 정찰을 몇 번 하긴 해서 그 보스라는 놈을 목격하긴 했습니다. 딱 한 곳, 중요한 장소에 처박혀 있죠. 대대장님이 제일 골칫거리로 여기는 놈이기도 합니다.”
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김 병장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좋습니다. 당신네 간부가 원하는 게 지역 수복이라고 했죠?”
군대의 제1 목표인 지역 수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지역 보스란 놈을 잡아야만 할 것이었다.
“예. 일단 이 일대의 위협이 될 만한 걸 모두 처리해서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말이 쉽죠. 작전만 잘 짜는 척 하는 놈들이라 성우 씨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없으면······.”
“그리고 저를 설득해보라고 김 병장님을 보낸 거고요?”
박 중령 그 외골수가 성우 앞에서는 강하게 나오는 척했지만, 여기까지 직접 행차한 걸 보면 성우의 힘이 간절하게 필요한 게 분명했다.
“예. 그렇죠 뭐······.”
“그럼 가서 말해주세요. 저를 어느 정도 설득해서 보스 몬스터를 잡아주기로 했다고, 대신, 돈을 받을 생각은 굽히지 않는다고요.”
김 병장은 군 소속이면서도 성우를 돕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에게 다른 수작이 있는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이 말만 전해주면 그만이다.
“그럼 얼마를 제안했다고 할까요?”
“10만 골드입니다. 선불이고요.”
“······.”
더 큰 목표를 위한 보스 레이드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출전 전에 아이템 세팅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