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9) 폐공장의 인신매매 조직 – 1
‘진짜로 뱀파이어 로드라고?’
성우는 유진의 미소 안에서 기분 나쁜 존재를 느꼈다.
그렇다면 로드가 유진의 몸에 빙의했단 말인가? 방금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그게 놈의 스킬 중 하나인 거고?
“아이 참, 내 아이들이 원래 잘 안 죽는데 누가 자꾸 죽이나 했지! 다행이 죽은 우리 실장 옆에 이 아이가 있지 뭐야? 그래서 어떤 분이신지 얼굴 좀 보려고 왔어. 잘 안 보이지만.”
실제로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기분 나쁜 새끼인 건 확실했다.
“말······ 진짜 많네.”
“그치? 그런 소리 자주 들어. 아무튼, 수다 떠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까 그럼, 딱 할 말만 할게.”
순간, 유진이 붉은 잇몸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성우를 향해 입을 쩍 벌리더니 무언가를 토해냈다.
파하아!
붉은색 입김이었다. 성우는 뒷걸음질 쳤지만, 그게 손등에 닿고 말았다.
- 하급 저주에 빠졌습니다.
* 분석과 해독을 위해선 ‘신성력’이 필요합니다.
성우는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유진을 쳐다봤다. 그녀, 아니, 뱀파이어 로드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으흐흐! 넌 뒈졌어.”
“······.”
“진짜 뒈졌어.”
“······.”
“시발새끼, 내장까지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마. 응? 아주, 딱 기다려 가서 먹기 좋게 토막 내서 버리는 거 하나 없이 다 발라 먹을 테니까. 왜 말이 없······.”
뻑!
유진이 코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성우가 걷어 차 기절시켜버린 것이다.
“계속 듣고 있을 필요 없었네.”
“어, 허허······. 그래도 선배 싸커 킥은 좀?”
태성 역시 충격 받은 모양인지, 기절한 유진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성우는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저주라니? 보통 저주라고하면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여 천천히 죽어가는 걸 의미하지 않던가?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저 손등 위에 붉은 반점이 생겼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안한 건 당연했다.
‘분석과 해독을 위해서는 신성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뭐고, 어디서 구해야 되지?’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성우는 고민하던 중에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한호의 시선을 느꼈다.
“어······ 선배? 저 이상하게 선배 몸에서 뭔가 느껴져요.”
“······그게 무슨 더러운 소리야?”
한호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성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뒷걸음질 쳤다.
“왜이래?”
“이리, 이리로 와보세요.”
“저, 저리가.”
그 순간, 한호가 달려들어 성우의 손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선배······. 알 것 같아요.”
“미쳤냐?”
“저주에 빠지셨군요?”
“어? 아, 너······ 프리스트였지?”
생각해보니 한호가 뽑은 직업 카드는 ‘도적’과 ‘프리스트’였다. 프리스트, 신성력을 사용하는 직업이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예. 형제님. 저도 까먹고 있었네요. 어디보자······.”
한호는 성우의 손을 잡은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떤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낸 저주의 내용은 이러 했다.
- 뱀파이어 로드의 전용 스킬 ‘피의 추적’에 노출되었습니다. 12시간마다 위치가 노출됩니다.
* 신성력이 낮아서 해독할 수 없습니다.
“형제님, 죄송합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형제님의 아픔을 치유······.”
“1절만 해.”
“예.”
하지만 저주의 정보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그리고 그로인해서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 특수한 상황에 따라 특별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특별 퀘스트 일람]
- 제목 : 악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조건 : 자신을 노리는 킬러를 역으로 제거하라.
- 보상 : 30,000골드, C급 아이템 티켓
당신은 누군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상대는 당신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온갖 악랄한 작전을 준비 중입니다. 이 악연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날 것입니다.
이거, 아무래도 인연이 꽤나 질기게 엉켜버린 모양이었다. 성우는 태성에게 다가갔다.
“야.”
“······.”
“야.”
“······네?”
넋을 놓고 있던 태성이 마침내 성우를 바라보았다.
“상점 어디에 있어? 이거 몇 번 째 물어봐는 거야?”
“아 저쪽······.
“그리고 거기 어디야. 흡혈귀들이 살고 있다는 거기.”
이렇게 된 이상 선제공격이다.
***
그리고 싸우기 전에는 언제나 무장을 점검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것도 최대한 강력하게 말이다.
총 42,950골드, 성우가 보유한 골드였다. 지금까지 숱한 전투에서 가장 많은 몬스터를 처리했기도 하며, 악질 플레이어들을 살해하고, 웨어 울프와 웨어 베어를 잡으며 꽤나 짭짤한 수익을 얻었다.
일행은 사무실 한편에 있는 LCD모니터 앞에 섰다. 그 위에 초록색 상점 아이콘이 떠 있었다.
- D등급 상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 이번엔 룰렛이······ 아니네요?”
컴퓨터를 조작하던 지수가 말했다. 이번 상점은 ‘뽑기’ 형식이었다. 모니터 안에 조잡한 그래픽의 통이 하나 떠 있었다.
- 행운의 공을 뽑으세요!
1) 브론즈 (100)
2) 실버 (1,000)
3) 골드 (10,000)
4) 플래티넘(100,000)
* D등급 상점은 ‘플래티넘’까지만 판매합니다.
“아, 공 뽑기?”
통 속에 든 공을 뽑아, 그 공에 적힌 상품을 지급하는 형식의 게임이었다.
“제가 먼저 하죠.”
성우가 먼저 시작했다.
- 티켓을 1장 보유 중 (무제한 등급)
성우는 이번에도 무제한 등급의 룰렛 티켓을 1장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운동장의 관중석에서 오크 무리와 맞서 싸우며 100인 한정, 100킬 달성 보상으로 얻은 것이었다.
‘새로 오픈된 플래티넘은 무려 십만 골드다. 그렇다면 더 높은 상점에서는 그 10배의 등급이 오픈된다는 뜻이다. 무제한 등급 티켓이 100인 한 정인 걸 생각하면······.’
성우는 티켓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장은 자력 생존이 어느 정도 가능한 상황이기에 조금 더 미래를 보기로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돌릴 건 많으니까.’
성우는 1만 골드를 사용해 ‘골드’뽑기를 선택했다. 이내 공이 섞이는 소리를 묘사한 것 같은, 저급한 8비트 사운드와 함께 백금색의 통이 나타났다.
- 공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1) 3등 상품 공 (300)
2) 2등 상품 공 (500)
3) 1등 상품 공 (1,000)
* 공은 총 100개이며 최대 5개까지 추가 가능합니다. (노말 아이템 당첨 공과 교체 됩니다.)
룰렛에는 없던 새로운 모드였다. 공을 추가해서 당첨 확률을 높일 수 있는 것이었다.
공은 총 100개, 하지만 그 중에서 1~3등 공이 몇 개 있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룰렛 판을 기준으로 봤을 때, 공 100개 중 1등이 당첨될 확률은 1~2개 정도로 추정되었다.
‘이전에 당첨된 1등 아이템을 봤을 때, 얼마를 쓰던 1등을 뽑는 게 이득이다.’
골드 등급 룰렛에서 1등 당첨으로 얻은 전설 등급의 아이템, ‘바다 정령의 눈물’만 생각해도 답이 나왔다. 그걸 얻는 순간, 네크로맨서 특유의 소모적인 전투에서 오는 고질적인 마나 부족이 완전히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2등으로 뽑은 희귀 등급 아이템, ‘선봉장의 방패’도 꽤나 쏠쏠하게 사용했지만 1등 상품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성능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 1등 상품 공을 추가했습니다. (+5개)
성우는 5,000골드를 사용해서 1등 공 5개 추가했다. 그럼에도 물약 꾸러미 따위를 뽑을 확률이 더 높겠지만, 10,000골드를 소비해서 기본 옵션으로 1등을 뽑을 수 있는 확률이 1퍼센트인 걸 감안할 때, 5,000골드를 투자하여 5퍼센트 확률로 올리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다음으로 마우스를 조작해 통 속에 집어넣고, 랜덤으로 공을 하나 끌어내면······.
딸각―
“헐······ 서, 선배?”
그리고 거짓말처럼······ 공에서 나온 숫자는 ‘1’이었다.
- 축하합니다! 1등에 당첨되셨습니다!
성우는 공중에서 나풀나풀 떨어지는 양피지 한 장을 움켜쥐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장인’ 등급 스킬 획득 쿠폰
- 등급 : 전설
- 분류 : 소비 아이템
- 효과 : 랜덤으로 ‘직업 전용 스킬’ 한 가지를 부여받습니다. 해당 스킬은 별다른 숙련 과정 없이 ‘장인’등급으로 설정됩니다.
성우가 경험한 바로는, 레벨 업 시 얻을 수 있는 스킬은 ‘기초’ 등급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에 어떤 등급이 있는지, 얼마나 강화되는 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등급을 올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이템 사용.”
성우의 한 마디와 함께 양피지가 증발하더니, 눈앞에 메시지로 나타났다.
[스킬 정보]
- 이름 : 공허의 안식처
- 등급 : 장인
- 분류 : 액티브
- 소모 : 0
아(亞)공간에 권속의 안식처를 조성합니다. 수와 질량에 관계없이 모든 권속을 체류시킬 수 있으며, 의지에 따라 현재 위치로 소환할 수 있습니다. (단, 파괴되지 않은 상태의 권속만이 해당됩니다.)
+ 대강령(大降靈) : 다수의 권속을 일제히 소환할 경우 일대에 죽음의 저주를 퍼트립니다. 숫자가 증가할수록 범위와 효과가 증가합니다. (재사용 대기 : 1시간)
언뜻 봐도 괜찮은 게 나온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스켈레톤 무리를 대동하고 다니는 게 당연했는데, 신경 써야할 게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몸을 숨겨야 될 때는 물론이거니와, 좁은 지역을 지나갈 때조차 상당한 골칫거리였으며, 생존자들을 마주칠 때의 난감함에,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덩치들을 인벤토리에 아이템 넣었다가 빼듯 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체류’
성우가 속으로 되뇌자 스켈레톤들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 모든 권속이 ‘공허의 안식처’에 체류됩니다.
“어? 애들 어디 갔어요?”
“새로운 스킬이야.”
이후 ‘대강령(大降靈)’이라는 추가 스킬까지 사용해볼까 했지만, 혹시 다른 생존자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기에 자제했다.
이어서 공을 뽑은 한호는 ‘노말 아이템’으로 ‘질긴 황소가죽 가슴 보호대’를 얻었다. 지수 역시 운이 따라주지 않았는데, 그녀는 붕대, 구급약, 밧줄, 랜턴 등이 들어 있는 ‘B급 서바이벌 패키지를’ 뽑았다.
“뭐, 언젠간 쓸모 있겠죠.”
그녀가 아쉬운 듯 쓴 입맛을 다셨다.
“선배가 우리 운 다 가져가는 거 아니에요? 다음에는 제가 첫 번째로 돌릴래요.”
“그러든가.”
일행은 그렇게, 각자 한 번씩 룰렛을 돌린 뒤에 골드를 아끼기로 했다.
상점의 위치를 알아두기도 했겠다, 골드가 안전 구역 유지에 쓰이는 등, 상점에서만 쓰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자는 차원에서였다.
“자, 이제 갑시다.”
준비를 마친 뒤, 성우가 계단을 올라갔다.
때론, 눈을 똑바로 뜨고 정면충돌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
이경수, 그는 매 순간 후회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쩌면 학교에서 버스를 몰고 나올 때, 그때 어떻게든 유성우라는 남자에게 붙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안일했다.’
군부대는 안전할 거라는 단순무식한 생각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
그 끔직한 와이번 무리도 피하고, 여러 몬스터들을 지나치며 끝내 도착한 군부대는······ 텅 비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를 좋아했건만, 왜 막상 일이 벌어지니까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은 과오를 반복한단 말인가?
“젠장.”
경수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이 좌절했다. 경수는 부대의 철조망 앞에 버스를 세운 채, 핸들에 머리를 박고 가만히 있었다. 모든 게 막막했다.
그때였다.
“어, 경수야 이것 좀 봐!”
친구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운 좋게 ‘플레이어 가이드북’ 어플리케이션 QR코드를 발견한 친구였는데, 커뮤니티를 통해 얻은 여러 정보를 알려주곤 했다. 그리고 이번에 가져온 내용은 경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아, 안전 구역이라고?”
“그래! 멀지 않아. 수원 화성이래. 거기까지 갈 기름 남았지?”
“어, 되, 될 것 같아.”
경수는 다시금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버스의 핸들을 굳게 잡았다. 하물며 버스에 탄 서른 명의 학생들 모두 경수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어깨가 무거웠다. 고작 운전할 줄 알고, 길 좀 꿰고 있다고 해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이라니?
“좋아. 다시 가봅시다.”
그래서 더욱 사명감을 가졌다.
그렇게 버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짧고도 먼 거리를 주파해나갔다.
너무나 위험천만한 길이었지만 정말 다행이도, 아무런 사고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경수는 이 모든 여정에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했다.
“다 와 간다. 대, 댓글 좀 남겨줘!”
“알았어. 지금 바로 쓸게.”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성우와 같은 구원자가 아니었다.
“어이, 똑바로 걸어.”
등 뒤에서 살벌한 목소리가 들리자 경수는 현실을 깨닫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무거운 발을 옮겼다.
“왜? 힘들어? 이 일이 하기 싫으면 말해. 조금 빨리 주방으로 들어가도 돼.”
“······.”
목소리가 말하는 ‘주방’은 음식이나 설거지를 하는 주방 일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지는 식사,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었다.
“으흐흐! 이 새낀 뭐, 먹을 것도 없겠네.”
이 미친놈들은 사람들을 유인해서 노예처럼 부리거나 피를 빨아 먹는 괴물들이었다.
그렇다. 경수와 서른 명의 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달려와, 미끼를 물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실상 노예 신분이었다. 목숨 걸고 몬스터를 잡고, 벌어들인 모든 골드를 빼앗기는 ‘전투 노예’였다.
“야, 우리 조 애들 슬슬 비실비실해져 간다. 갈아치워 달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러게. 또, 레벨 좀 올랐다고 혹시나 하는 희망 품고 반항하는 새끼가 나올 지도 모르니까.”
경수와 네 명의 노예들은 그런 끔찍한 말을 들으면서도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반항하다가 잔인하게 죽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니 말이다.
경수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것 뿐이었다.
“윽.”
그때, 선두가 멈춰 서는 바람에 경수는 앞사람의 등에 부딪치고 말았다.
딱딱?
“응? 이건 뭐야?”
“뼈다귀? 언뜻 봐서는 고블린인데?”
경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얗고 작은 무언가가 길을 막고 있었다.
“새로운 몬스터 아니야? 그냥 죽여 버려!”
경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 서, 성우 씨?”
“뭐? 이 새끼가 갑자기 뭐라고? 성우가 누구야?”
그건, 그 하얀 건, 성우가 데리고 다니던 고블린 스켈레톤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말로, 왼쪽 골목에서 성우가 걸어 나왔다.
“경수 씨, 그때 제가 빌어드린 행운이 별로 도움이 안 됐나 보네요.”
그리고 사방에서 스켈레톤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