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5) 학교 밖, 지옥으로 - 3
다행이 핸드폰 배터리가 남아 있었다. 전화도 인터넷도 안 터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셔두길 잘했다.
세 사람은 각자의 핸드폰으로, 마치 고대의 글자처럼, 다소 기괴한 문양으로 뒤엉킨 파란색 QR코드를 스캔했다.
그러자 김 병장의 말 대로 APK 확장자의 파일이 하나 깔리더니 이내 어플리케이션이 설치되었다.
“뭐야? 선배, 이거 바이러스는 아니겠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이제 핸드폰 쓸모도 없잖아.”
“아 씨, 바꾼 지 이제 한 달인데.”
“네 수명이 한 달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해.”
곧 어플리케이션이 자동 실행되었다.
「플레이어 가이드북」
- 본 프로그램은 ‘플레이어’의 원활한 생존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가이드북?”
로딩 화면이 지나가고 이내 몇 가지 메뉴가 표시되었다.
━ 플레이어 가이드북
[1. 공지사항(NEW)]
[2. 플레이어 랭킹(집계 중)]
[3. 자유게시판]
[4. 경매장]
[5. 악마 진영 전용(권한 없음)]
[6. 천사 진영 전용(권한 없음)]
[7. 개인 방송국(준비 중)]
성우는 자연스럽게 1번부터 클릭했다. 그러자 공지사항이 1개 등록되어 있었다.
[1] 정식서비스 시작 안내
- 작성 : 운영자 │ 조회 : 398,433
금일 정식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1차 직업 카드 선택 과정을 통해 총 2,967,821명이 플레이어로 선발되셨으며, 현재 시간까지 1,341,112명이 살아남아 플레이 중입니다.
2차 플레이어 선발이 3일 후 예정 되어 있으니 많은 인류 여러분의 적극적인 ‘카드 선택’을 바랍니다.
* 댓글을 달 수 없는 게시물입니다.
공지사항을 읽은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공통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가 이딴 짓을 벌이는 거지?’
이어서 성우는 ‘자유게시판’에 접속했다.
- 게시물이 없습니다.
앞서 본 공지사항의 조회가 40만에 달하는데 게시판에 글이 하나도 없다고? 성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단의 [글 작성] 버튼을 클릭했다.
- 게시물 작성 시 1,000골드가 소모됩니다. [YES/NO]
“아?”
“와? 선배, 그럼 글 하나 쓰려면 고블린 100마리를 잡아야 된다는 뜻이네요? 미친, 우리가 이틀 동안 고생한 게 고작 이 정도 가치야?”
당장 1,000골드는 생존과 직결된다. 제 아무리 골드를 많이 벌었다고 해도 이런 곳에 낭비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 외에 접근할 수 있는 게시판은 없었다. 그렇게 어플리케이션을 종료하려는 순간······ 자유게시판에 첫 번째 게시물이 올라오는 게 아닌가?
[1] 누구 있어요?
- 작성 : kor-4884 │ 조회 : 2
있으면 댓글 좀 달아주세요! 저희는 8레벨 달성한 그룹인데 경기도 화성시 H아파트에 안전 구역을 만들고 있습니다. 근처에 계시는 분들은 답해주세요!
「댓글 : 2」
─ kor-1461 : 어? 진짜입니까? 저희 근처인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 kor-4884(작성자) : 단지 내 공원에 서 계시면 저희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댓글 작성에도 골드가 들어가니 일일이 답변 못합니다. 그리고 댓글은 200자 제한입니다. 참고하세요.
벌써 댓글이 하나 달려있었다.
성우는 [댓글 작성] 버튼을 클릭했다.
- 댓글 작성 시 100골드가 소모됩니다. [YES/NO]
댓글도 골드를 받다니? 성우는 바로 NO 버튼을 클릭했다. 그런데 한호는 여전히 그 게시물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H아파트면······ 저희 집 근처인데?”
“그럼 그쪽으로 가볼까?”
성우의 말에 한호의 눈이 커졌다. 연락이 되지 않는 가족들이 아직 집에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너희 집도 들릴 겸, 이 글 작성자도 만나 보자.”
1,000골드를 이렇게 쉽게 쾌척하는 것도 모자라서 벌써 8레벨을 달성한 그룹이라고? 그렇게 수많은 몬스터를 잡아온 성우가 이제야 6레벨인데?
‘어딘가 구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스스로 살아남은 고 레벨 그룹을 만나는 것도 필요하다.’
김 병장을 만났기에 커뮤니티 기능을 알 수 있었다. 김 병장의 말처럼 이런 상황에서 정보만큼 중요한 건 드물다.
“이쪽 방향이지? 갑시다.”
일행은 H아파트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에도, 게시물에는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댓글 : 5」
─ kor-1461 : 어? 진짜입니까? 저희 근처인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 kor-4884(작성자) : 단지 내 공원에 서 계시면 저희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댓글 작성에도 골드가 들어가니 일일이 답변 못합니다. 그리고 200자 제한입니다. 참고하세요.
˪ 작성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작성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작성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kor-1461 : 위에 댓글 못 봤는데 왜 삭제된 거죠? 중요한 정보인가요?
˪ kor-4884(작성자) : 어떤 미친년 하나가 헛소리 써놔서 지웠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조심히 오세요.
***
일행은 H아파트로 행선지를 정한 뒤, 망가진 세상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지금은 주택가를 지나는 중이었다.
“길거리에는 진짜 죄다 몬스터 밖에 없네요.”
그동안 다수의 고블린은 물론이거니와 일곱 마리로 구성된 오크 사냥꾼 무리를 마주쳤다. 물론 이제는 손쉬운 상대이긴 했다만, 이렇게 심심치 않게 마주칠 정도로 길거리는 몬스터가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 한 명을 못 봤을까요?”
“봤잖아. 창문 너머로.”
“아, 그것도 본 거라고 해야 되나?”
반면 생존자들은 건물 안에 숨어서 커튼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성우 일행이 지나가는 걸 발견하더라도 경계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그들은 누군가 구해주길 바라며, 정부가 나서길 기다리며, 한 없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히 집 안에 숨겠어요.”
지수의 말에 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저라도 밖으로 나올 생각은 안했을 것 같아요. 아마, 음, 먹을 게 떨어지기 전까지는?”
사실 그게 문제였다. 곧 식량이 떨어질 테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저들은 그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 미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할 것이다. 그게 늦게 출발한 자의 숙명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 세계의 구조는 어떻게 될까?
성우는 조금 전에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물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8레벨에 도달한 그룹이며, 안전한 장소를 만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순수하게 누군가를 도우려고 하는 걸까?’
성우는 정부와 군대가 제 기능을 상실할 때, 게임 룰에 의거하여 힘을 얻은 이들이 생존자들을 이끌 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리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눈에 뻔히 보이는 결과였다.
“성우 씨, 고블린 무리에요.”
이 순간, 다시 한 번 힘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성우는 세이버를 뽑아들었다. 또 다시 전투다.
끼이이! 끼이!
주택가의 도로 한 복판에 고블린 7마리가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놈들은 누군가를 둘러싸고 위협하는 중이었다.
“저, 저리가!”
30대 남자가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고블린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딸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그가 애원하듯 소리쳤지만 주택가의 창문들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물며 조금씩 열려 있던 커튼마저 반사적으로 닫히기 시작했다.
드르륵!
그 누구도 이런 상황에 휘말리기를 원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사람은 유약할수록 이기심에 쉽게 노출된다.
덜그럭! 덜그럭!
왜냐하면 과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우는 그 누구보다 과감했다. 자신을 대신해서 돌격할 괴물이 아홉 마리나 있으니까.
끼익?
인기척을 느낀 고블린들이 돌아보았고, 이내 놈들의 눈동자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망을 택하기엔 늦었다.
쉬익! 쉬익!
단검 세례가 날아들어 고블린들을 순식간에 전멸시켜버렸으니 말이다.
떵―
오크 스켈레톤의 등장에,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방망이를 떨어뜨렸다. 그가 보기에는 스켈레톤도 몬스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으, 으으······.”
고블린 무리에게는 어찌어찌 맞설 수 있었다만, 저것들에게는 감히 대항해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스켈레톤 사이에서 성우가 걸어 나왔다.
“이제 괜찮습니다.”
성우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거친 숨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는 어린 딸을 꼭 끌어안았다.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 자신의 무력함에 딸이 죽게 된다는 게 두려웠을 것이었다.
성우는 그 심정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된 경험이지만······.
“눈앞에 카드가 떠올랐을 때, 아무 것도 안 집으셨죠?”
“······예.”
“댁이 어디시죠? 데려다 드리죠. 그리고 3일 뒤에 다시 한 번 카드가 떠오를 겁니다. 그때, 별이 제일 많은 걸 선택하세요.”
성우는 역시나 이 가녀린 부녀를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다. 다만, 생존을 위한 최대한의 정보를 제공했다.
“아, 집은 바로 앞인데······ 음식이 떨어져서······.”
어떤 상황인지 알만했다. 성우는 가방을 열어서 딱 3일 치, 최소한의 식량을 제공했다.
“자 그럼······.”
끼이이?
그건 고블린의 울음소리였다.
끼······.
골목 어귀에서 나오던 고블린 두 마리가 사방에 널브러진 동족의 시체를 목격한 것이다. 놈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이내 한 낡은 상가의 지하로 내려가 버렸다.
“어이구? 저 멍청한 놈들 보소? 막다른 길로 도망가네요. 선배, 따라가서 조질까요?”
“잠깐.”
성우는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부녀를 데려가지는 않더라도 길거리에 내팽개칠 순 없었다.
“아, 저, 저희 집은 바로 이쪽 골목입니다. 거기까지는 갈 수 있을 거예요. 벼, 별 일 없이······.”
“그럼. 행운을 빕니다.”
“아, 저, 그런데 지하실에는 내려가지 않는 걸 추천합니다. 아는 형님이 운영하던 노래방인데······ 듣기로는 저 녹색 짐승보다 더 끔찍한 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성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지하계단 앞에 섰다.
“내려가자.”
남자가 경고했지만, 성우는 그 조언을 새겨 들을 생각이 없었다. 두려움의 기준은 천차만별이니까.
“끔찍한 게 살고 있다는데요?”
“영양분이 풍부하다는 뜻이지.”
“······선배, 요 며칠간 부쩍 이상해졌어요.”
“아니면 이미 죽었어.”
오크 스켈레톤이 줄지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택가에 있는 오래된 상가인지라 낡은 계단이 요란하게 삐걱거렸다. 그 소음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22시 이후 청소년 출입 금지라는 푯말을 지나, 어두침침한 노래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악!”
“왜?”
한호의 비명에, 성우는 칼을 뽑아들었다.
“뼈, 뼈······.”
“뭐?”
한호가 가리킨 곳에는 온갖 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인간, 고블린, 오크 가릴 것 없이 분해되고 부식된 것들이 한 무더기였다.
“······지금 뼈를 보고 놀라?”
딱딱―
성우 옆에 서 있던 오른이도 한호를 올려다봤다.
“아? 그러게요?”
성우는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자전거 용품점에서 챙긴 LED라이트를 꺼냈다. 총 8개였는데, 세 사람이 하나씩 쥐었고 나머지 5개를 오크 스켈레톤의 갈비뼈 사이에 라이트를 장착했다.
그러자 마치 어두운 실내에 진입하는 특수부대처럼, 여러 개의 빛줄기가 이곳저곳을 휘졌기 시작했다.
“들어가자.”
- 유니크 던전 ‘엘더 슬라임의 성지’에 입장하셨습니다.
“슬라임?”
“어? 그거 완전 약한 놈들 아니에요? 그나저나 이거 무슨 냄새야? 으······.”
많은 판타지들이 슬라임을 유약한 몬스터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원은 차라리 먼치킨에 가깝다. 형태가 자유롭고 뭐든지 녹여버리는 산성 물질로 이루어졌기에,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닌 것이다.
하물며 엄청난 악취가 지하 노래방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그 냄새만으로도 두통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꾸륵― 꾸륵―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1번 방 문 밖으로 슬쩍 삐져나와 있는 고블린의 다리였다. 방금 전에 도망쳐 내려간 놈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천천히 다가가 그 모습을 확인하니······.
“욱!”
“······.”
한호와 지수가 코를 막고 물러섰다. 견딜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이게 대체 무, 무슨 냄새죠?”
악취는 고블린 쪽에서 풍겨왔다. 놈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는데, 그 얼굴 부분에 반투명한 젤리 모양의 물체가 들러붙어 있었다.
그게 바로 슬라임이었다.
꾹― 꾸륵―
자세히 살피니, 고블린의 안면 피부는 완전히 녹아내린 채 두개골이 드러나 있었다. 산성에 의해 단백질이 녹아내리며 끔찍한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이었다.
1번 방 안쪽으로 빛을 비추니, 슬라임이 한 무더기였다.
“젠장.”
놈들은 가족 소파나 나무 탁자 등, 온갖 기물에 들러붙어 있었는데, 그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녹여버린 상태였다.
꾸륵! 꾸륵! 꾸륵!
원체 음지에 사는 종족인지라 빛이 닿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했다. 그러고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꿈틀 뻗어 기어오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2번 방, 3번 방, 곳곳에서 슬라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상당하여 마치 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꾸륵! 꾸륵!
일행은 엉거주춤 물러섰다.
저 액체 덩어리의 괴물을 어떻게 공격해야 할까? 칼로 내리치는 게 소용이 있을까? 난생 처음 보는 형체에 모든 게 막연했다.
“성우 씨, 다시 올라갈까요?”
“······저 녹아서 죽기는 싫어요.”
녹아서 죽는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방금 전에 봤던 그 고블린처럼······.
“고블린?”
그 순간 성우는 뼈만 남은 고블린 시체와 입구에 쌓인 뼈 무더기를 떠올렸다.
“아, 뼈는 소화를 못시킨다?”
딱딱.
그런데 미안하게도 이쪽은 전부, 먹을 거 하나 없는 뼈다귀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슬라임 한 마리가 오크 스켈레톤의 다리에 엉겨 붙었다가 금세 떨어져버렸다. 먹이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거, 아무래도······.”
슬라임의 왕국에 제대로 된 정복자들이 납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