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4) 체육관의 오크 추장 – 2
커튼이 처진 창문 사이로 수십 명의 눈동자가 슬며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불안한 심정으로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봤다.
그러나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났다. 고블린 스켈레톤 여덟 마리가 자살에 가까운 공격을 감행한 뒤 눈 녹듯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젠장, 끄, 끝났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저기서 낙담에 찬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예상했던 결과라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지니 암담할 따름이었다.
“역시 안 되는 거였어.”
그리고 이제 저 남자까지 당한 이상······ 더 이상의 희망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강의실 안에 무거운 절망이 내려앉았다. 이제는 자신들의 차례라고 생각했다. 오크들이 건물 문을 뜯고 들어와서 살육을 벌일 것이다.
그때였다.
“어, 어어? 저기 봐!”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고 소란스러워졌다. 황당하게도, 오크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잠깐만, 저것도 해골이잖아?”
그들은 이내 오크 틈 사이에 섞여 있는 새하얀 거구들을 발견했다. 동족을 향해 무자비한 도끼질을 일삼는 그 새하얀 악마들을 말이다.
“저것도 뼈다귀잖아?”
“대체, 저 사람은······.”
“······정체가 뭐야?”
한편, 셔틀 버스의 운전석에 앉아 있던 경수는 가속 페달을 거의 반쯤 밟았다 떼었다. 성우가 관중석에 올라가버리는 바람에 구하기는 글렀다 싶었을 때, 오크 무리의 중간 부분이 분열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판이 뒤집혔다.
“와, 씨, 선배······ 그 사이 스킬 좀 찍으셨나보네. 좀 말 좀 해주지.”
“······진짜로 계산한 거였어.”
지수는 넋을 놓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아니, 모두가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우는 눈앞에 떠오르는 마나 표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 마나(184/350)
“부족하지 않다. 아니, 넘친다.”
이게 아이템 하나의 위력이란 말인가? ‘바다 정령의 눈물’은 전설 등급이라는 거창한 아이템인 만큼, 그 효과를 절절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벌써 16마리나 되살렸지만 아직도 충분한 양의 마나가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그 사이에 마나가 14나 회복되기까지 했다. 성우는 마르지 않는 샘을 몸 안에 지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승기가 어느 정도 넘어왔다는 걸 알 수 있는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 오크 무리가 ‘죽음의 냄새(1단계)’를 맡고 약해집니다! 능력치 30% 하락!
* 해당 종족 스켈레톤이 4마리 이상 시 발현됩니다.
그으으······. 그아아!
- 오크 무리의 투지가 반영되어 능력치 하락 폭이 절반으로 감소됩니다.
오크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저주가 완전히 반영되지는 않았으나 15퍼센트의 능력치 감소는 무시 못 할 패널티였다. 하물며 이쪽은 <야만전사(1단계> 시너지 덕분에 순간적으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힘뿐만이 아니었다. 질긴 생명력은 압도적이다 못해 공포 그 자체였다.
콱! 콱! 콰직!
이리저리 뒤엉켜 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두세 마리의 오크가 한 마리의 오크 스켈레톤을 둘러싸고 사방팔방에서 도끼질을 해댔다.
팔을 잘라내고, 갈비뼈가 박살내고, 대퇴골을 반 토막 내고, 그렇게 어떻게든 간신히 부서 버리면······.
- 당신의 권능 아래 망자가 권속(眷屬)됩니다.
퍽!
등 뒤에서 새롭게 일어난 스켈레톤에게 목숨을 내주고 말았다. 전투는 그 과정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밀어붙였건만, 이런 싸움이 계속되자 오크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제 아무리, 전투에 도가 트고 전투를 즐기는 오크 부대라고 할지라도 이런 싸움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으으······.
그리고 그 사이에, 성우는 오른이에게 새로운 임무를 하달했다. 작은 체구를 이용해서 몰래 난간을 넘어, 놈들의 뒤를 노리고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매우 주요했다.
촤악! 촤악! 촤악! 촤악!
녀석은 쇄도하며 오크들의 오금을 차례차례 베어 넘겼다. 그러자 후방의 오크들이 일제히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저 작은 녀석이 덩치 큰 오크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버린 것이다.
그렇게 뒤에서 버텨주던 지지대가 먼저 무너져버리자 전방의 오크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고, 어느새 살아 있는 오크의 숫자보다 시체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
“이제 정리하자.”
사실상 그때부터 상황 종료나 다름없었다.
그, 그어어!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살아남은 열 마리 가량의 오크가 전투를 포기하고 체육관으로 도주하면서, 짧고도 굵었던 전투는 막을 내렸다.
“후······.”
성우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계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 치열한 전투의 보상이라도 되는 듯,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몬스터 100킬 업적 달성으로 ‘룰렛 티켓’이 지급됩니다.
* 역대 21번째로 업적을 달성하여 ‘무제한’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지급 됩니다. (100인 한정)
20킬 때 받은 적 있는 100명 한정의 업적 보너스였다. 이번에는 그 내용을 조금 더 꼼꼼하게 살폈다.
‘역대 21번째라? 이건 현 시간대, 전 세계 기준인가?’
그렇다는 건, 세계 어디에선가 이 정도 이상의 학살을 벌이고 있는 인물이 20명 더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 역시 처음에 좋은 직업을 뽑은 걸까? 혹시 5성 이상의 카드도 있을까? 그중에서 네크로맨서는 얼마나 좋은 걸까?
그때였다.
우우웅!
등 뒤, 교내 도로로 버스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지나갔다. 처음에는 한호와 지수가 탄 버스인 줄 알았는데, 그 버스는 저 멀리, 원래 서 있던 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응? 뭐야?”
그렇다면 누군가 탈출을 시도하는 건가? 아직 학교 안에 수많은 생존자가 숨어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교문의 봉인이 풀리지 않은 상태이기에 크나 큰 낭패가 될 것이었다.
성우는 버스의 상황을 계속 살폈다. 버스는 입구를 틀어막은 차량들을 강제로 밀어버리는데 성공했지만, 역시나 보라색 사슬 아이콘으로 막혀 있는 교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내리자 꽤나 익숙한 차림새가 눈에 확 들어왔다.
“······아? 저 새끼가?”
총학생회장 박대성, 그 새끼였다.
아무래도 성우의 등 뒤에서 탈출을 모의하고 버스 한 대를 가지고 튈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내 말을 어디로 처들은 거야?”
하지만 정말 멍청하게도, 보스를 잡기 전까지는 캠퍼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성우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무모함의 결말은 암담했다. 하필이면 체육관이 교문 근처에 위치했고, 체육관에 남아 있던 오크들이 그쪽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은 속수무책이었다. 대성이 대검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십여 마리의 오크를 당해낼 수 없었다.
“쯧쯧······.”
그런데, 오크들은 무슨 속셈인지 그들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게 아닌가?
“아아악!”
저 멀리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오크가 대성의 양 팔을 부러뜨리는 중이었다. 오크들은 그들의 팔과 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버린 뒤, 머리채를 잡은 채 체육관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지수 말이 맞았어. 해골만도 못한 것들.”
성우가 혀를 찼다.
***
체육관 공략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성우 혼자만이 아니었다. 한호와 지수 그리고 경수 일행은 물론이거니와, 성우의 활약에 경도된 몇몇이 동참했다.
“저희도 싸우겠습니다!”
“적어도 방해는 안 하겠습니다.”
“제 한 목숨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그렇게 모인 인원이 21명, 성우는 영 탐탁지 않았다. 혼자 싸우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걸 절감했으니 말이다.
“스켈레톤 동선만 막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 내부를 알 수 없는 보스 방에 들어가야 함으로 뒤를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기도 했다.
개방된 장소에서 부딪치는 게 아니라, 적의 소굴로 들어가야 할 때는 최대한 방비할 필요가 있다.
일행은 그렇게, 학교의 마지막 보스를 잡기 위해 체육관으로 향했다.
끼이이―
방음 재질의 문이 열렸다.
입구 양 측으로 이동식 농구 골대에 누더기 같은 가죽 휘장이 걸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엄니를 드러낸 오크 얼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기괴하게 꾸며진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인테리어 한 번 좆같네.”
무대 천장,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프레임에 일정한 간격으로 밧줄이 묶여 있었으며 밧줄은 시체의 목덜미를 휘감은 채 흔들렸다.
끼익― 끼익―
그 바로 아래, 피로 그려진 문양 한 가운데, 붉은 머리털의 오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앉아 있었다.
‘뭘 하는 거지? 명상을 하는 건가?’
때마침 무대 뒤쪽에서 사람들이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으, 으으! 사, 살려줘!”
대성을 비롯한 총학생회 무리였다. 양쪽 팔이 완전히 부러진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성우 일행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다가가, 무대에서 스무 걸음 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지수 씨, 주변을 경계해주세요.”
성우의 말에 지수가 주변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양측이 관중석이기에 언제 어디에서 기습해올지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특별한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맞아요. 완전 텅텅 비었는데요?”
그렇다면 너무 이상했다. 눈에 보이는 건 스무 마리 가량의 오크가 전부였다.
‘설마······ 최후의 발악으로 인질극을 하려고 산채로 잡아간 건가?’
저런 무식한 녀석들이 벌일 일 같지는 않았지만, 당장은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윽!”
성우가 한 발작 다가가자, 오크들이 인질들을 꿇어 앉혔다. 그리고 그 뒤에 서 도끼를 들어올렸다. 성우는 다시 멈춰 섰다.
“으아아아! 제, 제발 살려줘! 우, 우리 좀 구해줘!”
인질들이 패닉에 빠진 채 소리쳤다. 진석은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거리고 있었다. 성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 성우 씨!”
총학생회장, 대성이 성우를 불렀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제, 제발 우리 좀 구해주세요! 서, 성우 씨 하실 수 있죠? 네? 제발요!”
성우는 그렇게 애원하는 대성과 보스를 번갈아 살폈다. 보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그의 손아귀에서 검은 연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거, 언뜻 봐도 수상쩍다.
“서, 성우 씨!”
“닥쳐요 좀.”
성우의 매정한 말에 대성이 입을 쩍 벌린 채 굳었다.
“멍청한데, 멍청한 줄 모르고 감투 욕심까지 있는 것들이 제일 문제야. 지 혼자 피해보는 걸로 안 끝나는 상황을 만들어요 꼭.”
“······.”
“지금까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다가 난장판 만들고 망하고 나서 울며불며 떼쓰면 먹혔지?”
“무, 무슨······.”
“미안하지만, 이제는 그런 게 먹히는 세상이 아닌 것 같다. 아니, 내가 미안할 필요도 없지.”
어쩌면 매정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성우는 그대로 돌격을 감행했다. 스켈레톤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순간, 도끼와 함께 총학생회의 머리가 떨어져나갔다. 성우는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 자처한 죽음이었다.
“어?”
그런데 그 직후, 오크들이 도끼날을 제 목덜미에 대더니 그어버리는 게 아닌가?
촤악―
뭐야, 갑자기 자살한다고?
무대 위에 선지피가 쏟아지며 육중한 몸뚱이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 뭐야?”
“왜, 왜 저런······.”
그리고 마침내, 가부좌를 하고 있던 한 마리의 오크가 눈을 떴다. 노란 눈동자가 성우를 마주보았다.
- 강화된 보스 몬스터 ‘하급 흑마술사 오크 추장’이 출현했습니다.
푸쉬―이―
그 순간, 오크 추장의 몸에서 검은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피할 틈도 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기는 순식간에 체육관을 가득 매웠다.
“으으! 콜록! 콜록!”
“아악! 이, 이거 뭐야! 이상해!”
“몸에 힘이······. 윽.”
그리고 연기를 들이마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검게 물든 시야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건 물밀 듯 밀려오는 경고 메시지였다.
- 심연의 숨결에 의해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 심연의 숨결에 의해 ‘무력’ 상태에 빠집니다.
- 심연의 숨결에 의해 ‘경직’ 상태에 빠집니다.
- 마나가 지속적으로 타오릅니다.
“으헥, 으에에······.”
그 가운데, 한호는 가방을 열어서 물약 하나를 급히 꺼냈다. ‘C급 소형 해독제’였다. 물약 꾸러미에서 나온 아이템이었는데, 아이템 설명을 기억하기로 이런 ‘상태 이상’을 회복시켜준다고 했었다.
꿀꺽― 꿀꺽―
“크으······.”
정말로 온몸을 짓누르던 마비 증상이 빠르게 가시는 걸 느꼈다. 한호는 서둘러 물약 한 병을 더 꺼내어 성우를 찾았다.
“서, 선배! 선배 어디 계세요! 빨리 이걸······. 어?”
마침내 성우를 발견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지수 씨나 챙겨.”
“어, 선배는?”
성우는 아주 멀쩡하게, 그것도 어딘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선배 대체······.”
이내 연기가 서서히 옅어졌다.
그르르―
2미터 30센티미터는 될 법한 거구가 무대에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놈은 거대한 철퇴를 들고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십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그리고 단 세 사람만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한호와 지수는 해독제를 마셨기에 가능했고······.
“후, 이거 뭔데 왜 이렇게 상쾌하지? 흐흐.”
성우는 조금 이상했다.
저 검은 연기를 들이마신 이후부터 설명할 수 없는 쾌락이 물씬 밀려왔다.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말이다.
- 심연의 숨결에 의해 ‘마나’가 대폭 증가합니다.
- 마나 (4,585/4,585)
“마나가 사천이나? 기분 좋은 이유를 알 것 같네. 하하하······.”
- 심연의 숨결이 체내에 축적되어 일시적으로 ‘1차 각성’에 이릅니다. 모든 능력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 최대 권속 수가 일시적으로 (+50)만큼 증가했습니다.
몸에 힘이 넘치는 이유는 분명하고 명료했다.
“나한테 뭘 해준지는 몰라도, 이거, 비법 좀 알고 싶다.”
겁나 강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