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287화
페가수스 길드의 대회의실에 어느 때보다 싸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 있는 리로이를 비롯해 양옆에 줄을 지어 도열해 있는 간부들의 표정들에는 하나같이 침통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투스 연합의 영역권 내에 존재하는 모든 코르부스 길드를 몰아낸 순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작은 승리의 달콤함을 맛보기에는 그들이 잃은 것들이 너무나 쓰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때,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을 쏘아 내고 있던 리로이가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일단 현 상황부터 다시 새겨 보도록 하지.”
그의 말이 끝나자 페가수스의 간부들 중 분석관을 맡고 있는 이가 회의실 가운데로 나섰다.
그는 곧 그들의 길드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내분을 잠재우는 동안 아슬란 연합이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공격을 시도했다는 것은 모두들 아실 겁니다. 방어 병력을 최소한만 배치한 까닭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 측이 입은 피해가 적지 않습니다. 지도 보시겠습니다.”
딸칵.
분석관의 손짓에 현재 세력도가 새겨진 북부 대륙의 지도가 펼쳐졌다.
파란 점은 아슬란 길드였고, 붉은 점은 페가수스 길드였다.
한데 지도를 보고 난 후,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중부 지역의 곳곳에 파란 점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시다시피 현재 본래 우리가 차지하고 있던 영지의 3분의 1 정도가 적에게 넘어간 시점입니다.”
모두가 말문이 막혀 있던 그때, 분석관이 안 좋은 소식을 하나 더 전했다.
“게다가 흑풍회 쪽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소요가 생긴 틈을 타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전선 가까이에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굳건한 1강의 길드인 흑풍회가 그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경악한 모두와 달리 리로이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이 정도는 그가 미리 하였던 예상 속에 있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하이에나 같은 그 자식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이상하지.’
스윽.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리로이가 설명을 하던 분석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얼른 적당히 수습하고 마무리하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분석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내뱉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히 코르부스의 내란이 빠르게 종결되면서 우리 측의 병력이 대부분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기에 이어질 방어전과 탈환전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비춰집니다.”
그의 말에 간부들이 수긍을 한다는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코르부스 길드를 진압하는 데 생긴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그때, 침묵을 지키던 간부들이 한마디씩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뭐, 뺏긴 곳이야 도로 되찾으면 그만이지.”
“맞아. 코르부스 놈들이 진 거지 우리가 진 게 아니잖아?”
“그래, 우리는 다르다고! 그딴 잡놈들에게 지지 않아!”
“빨리 해치우고 흑풍회도 처리해 버리자!”
하지만 그들이 내뱉는 말들 중 어느 하나에도 자신감이나 기세가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안감을 떨쳐 내려 말을 꺼낸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분위기가 개선되자, 리로이가 거기서 회의를 끝마쳤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모두 돌아가서 출진을 준비해라. 준비가 끝나는 즉시 전선으로 이동하겠다.”
“옛!”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간부들이 모두 본래 자신들의 위치로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분석관은 마지막까지 홀로 회의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리 리로이에게 명령을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활짝 열렸던 회의실의 문이 닫히고 내부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러자 리로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우리의 승률은?”
하지만 그의 말에 분석관이 무슨 이유에선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그에 리로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분석관을 노려보자,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꺼냈다.
“……후우, 현재 분석한 바로는 우리의 승률은 4할 정도입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분석관은 그들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4할밖에 안 된다고?’
이번에는 리로이 또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분석관의 말이 이어졌다.
“실상 하위 병력의 질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한데 상대 길드장이 지니고 있는 소환수의 힘이 너무나 강력합니다. 전세의 판도를 아예 뒤바꿀 정도입니다.”
상대 길드장, 즉 레온 하나가 모든 상황을 바꾸고 있다는 말에 리로이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자존심이 상할 만한 발언이었지만, 그것보다 그 사실을 부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더욱 화를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 미친 소환수들을 대체 어떻게 처치를 해야 하는 거냐.’
영상에 나온 바포메트에 본 드래곤의 힘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였다.
마신의 사도의 힘을 개방한다고 해도 처치할 수 있을지 단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후, 꽤나 오랜 시간을 고심하던 리로이는 이윽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건 바로.
‘……하지만 다시 말하면 본 드래곤을 상대할 봉쇄책만 있으면 전투는 필승을 거둘 수 있다는 거군.’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맞는 말이었다. 소환술사가 주 공격 부대였던 코르부스와 달리 페가수스는 근접전의 달인인 무투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소환수가 없는 소환술사 따위는 그들의 손에 살아남을 수 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알았다, 그럼 나가 보도록.”
리로이가 분석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분석관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나갔다.
방 안에 덩그러니 혼자만이 남은 그때.
스윽.
리로이가 인벤토리에서 검붉은 빛을 발하는 스크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그 상태로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음험한 기운을 쏟아 내고 있는 스크롤의 양끝을 손으로 잡았다.
찌이익.
그러곤 스크롤을 양 갈래로 찢어 버렸다.
슈아아아!
우우우웅!
그 순간, 회의실에 진동음과 함께 스크롤에서 진득한 마몬의 기운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여기서 져 버리면 쌓아 놓은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말테니까.’
오폐수처럼 출렁이던 그것은 이내 뭉치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까악-!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까마귀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의식이 완료된 것을 확인한 리로이가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그 위에 깃촉 펜으로 내용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곤 그 종이를 쪽지로 만들어 까마귀의 발 하나에 묶었다.
그 후, 방의 창문을 활짝 연 리로이는 시선을 돌려 사람에게 말하듯 까마귀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이걸 너의 주인에게 전해라.”
그러자 까마귀는 전혀 정상적이지 않는 날갯짓을 하기 시작하더니, 창문 바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까마귀가 절대 낼 수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까마귀가 날아가는 방향에는 암흑성국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행동을 끝마친 리로이는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슬란. 레온. 감히 나에게 이빨을 드러내다니. 기필코 모두 박살을 내 주마.’
* * *
우아아아!
전장에 병사들이 내는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곳 평야에는 페가수스 길드와 아슬란 연합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전혀 치열하지 않았다.
레온의 합류로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아슬란의 병사들이 승리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을 처치해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끄아아! 사, 살려 줘.”
“항복한다고, 이 악마 놈들아-. 크억!”
아슬란의 병사들은 마치 저승사자로 이루어진 군단처럼 적 병사들의 목숨을 쓸어 담고 있었다.
‘참말로 우리 편이라 다행이지.’
‘으으, 진짜 적으로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어찌나 참혹한지, 옆에서 지켜보는 블루 아이즈의 병사들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페가수스 길드원들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블루 아이즈 길드원들이 도리어 아군에게 기세가 잡아 먹혀 있자.
“다들 정신 차리세요! 아직 전쟁 중입니다!”
“네, 네넵!”
세토가 커다랗게 소리를 치며 자신들의 길드원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파바밧!
그녀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전장 속에서 움직이며 적들을 무찌르고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그녀를 향해 적들이 쏘아 내는 수많은 스킬들이 머리 위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지만.
휘이익.
휘익.
이내 체조를 하는 듯한 부드러운 몸동작으로 그녀는 투사체들을 날아드는 족족 피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에잇! 죽어라!”
‘이런!’
그녀도 사람인지라 모든 것을 피해 낼 수는 없었다.
쐐애애액!
부우우웅!
파공성과 함께 그녀를 향해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참마도가 수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디스크에서 카드를 뽑아 방어를 시도하려 했지만.
타탕!
퍼엉!
“크어, 억!”
그것보다 뒤편에서 날아온 레온의 지원사격이 더 빨랐다.
포탄은 참마도의 검날과 상대방의 머리에 직격하며 폭음을 만들었다.
“해치워!”
아쉽게도 처치는 되지 않았지만, 뒤로 넉백이 된 상대의 틈을 놓치지 않은 세토가 공격을 이어 갔다.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에 들려 있는 카드 한 장에, 사파이어색을 띤 눈동자를 지닌 화이트 드래곤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슈아아아아!
-캬오오오오!
그리고 곧이어 카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화이트 드래곤이 적을 통째로 입안에 집어 삼켜 버렸다.
까드득.
끄드득.
듣는 이가 오싹해지는 효과음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휴우.’
레온의 도움으로 한숨을 돌린 그녀는 이내 고개를 살포시 돌려 근처의 산마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희미하게나마 레온이 그녀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담기고 있었다.
피식.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레온의 장난기 어린 행동에 그녀가 웃음을 보였다.
그러곤 속으로.
‘……이따가 고맙다고 해야겠네.’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전장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온은 내심 커다란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야, 웃는 모습이 더 예쁘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샤먼의 스킬을 통해 월등히 높아진 시력으로 세토의 미소를 확인한 까닭이었다.
이어 레온이 ‘역시 여자는 연상이지.’라고 생각하던 그때,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던 파크와 마루가 질색하며 말을 꺼냈다.
-으으, 주인아. 저번에 내가 말했었다. 그렇게 웃지 마라. 징그럽다.
-맞다낭. 원래는 참아 줄 만은 했는데, 지금은 확 물어 버리고 싶다낭.
그에 머쓱해진 레온이 입맛을 다시며 연신 뒷머리를 긁적였다.
‘……쩝, 내가 뭘 어쨌다고.’
한데 그때였다.
띠링.
띠링.
레온의 귓전에 경쾌한 효과음이 울려 퍼졌다.
“오오!”
효과음과 함께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레온이 탄성을 터뜨렸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298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레전드리 직업의 한계 레벨인 300까지 단 2레벨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