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타무딘 영지의 성벽은 강철 거성이라는 말마따나, 엄청난 위용이 느껴지고 있었다.
굳건한 성벽은 다른 영지의 것들보다 두 배는 높았는데, 놀랍게도 보수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지 어느 부분에서도 조금의 흠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준비된 성벽의 견고함은 보는 사람에게 마치 거대한 산과 같이 보이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타무딘 병사들의 분위기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것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이봐, 방어선 안 뚫리게 조심하라고.”
“끌끌, 맞아. 그쪽 네들은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다 약골들뿐이니 말이야.”
나하르 사태로 인해 다시금 하나의 부대로 재편성된 페가수스와 코르부스의 길드원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코르부스 병사들의 비아냥거림에 페가수스 병사들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입 열지 마라. 똥내 나니까.”
“쯔쯔, 어디 아이템도 쓰레기장에서 주워 입은 것 같은 놈들이 분수도 모르고 말을 거냐.”
“뭐가 어째!”
“흥! 꼬우면 붙어 보든가!”
부대장의 만류로 몸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성벽 곳곳에 배치된 모든 부대들이 전부 이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제까지 서로 칼을 들고 으르렁대던 이들이 같이 전투를 준비하려 하니 잘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성벽 곳곳에서 크고 작은 말썽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휴, 말큐스 님은 언제쯤 오시는 거야.’
그러던 그때, 임시 지휘관을 맡고 있는 말큐스의 부하 ‘토드’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앞에는 코르부스 소속의 부관이 브리핑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토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규모의 부대를 이끄는 전술과 같은 것은 자신의 특기가 아니었다.
그는 암살과 대인 전투에 특화된 전투 요원이었다.
‘젠장, 가까이 있던 게 죄지. 하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고.’
갑자기 나하르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하자, 가까이에 임무를 나와 있던 그가 갑자기 임시 지휘관으로 임명이 된 것이었다.
한데 그때, 지겹게 설명을 이어 가고 있던 부관이 드디어 말을 끊었다.
“……그럼 이만 가시죠.”
당연하게도 앞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토드가 부관에게 되물었다.
“응? 어딜 가?”
그러자 부관이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을 꺼내었다.
“……성벽으로 순찰을 나가실 시간입니다.”
* * *
잠시 후, 토드는 부관을 포함한 호위대와 동행한 채 성벽 위를 거닐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날선 감정을 쏘아 내던 병사들의 분위기는 지휘관이 나오자 잠시나마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자 그들의 불만 어린 눈빛은 지휘관인 토드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들 보지 마라. 나도 니들 맘과 똑같다.’
그러자 토드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속으로 생각했다.
동부 최강의 성채라고 불리는 이곳이 뚫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텐데, 왜 이리 상부는 호들갑이냐는 것이겠지.
그런데 그 순간.
“토드 님!”
‘으응?’
갑작스럽게 그를 찾는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시선을 돌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병사 하나가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두두둥!
둥둥!
‘……뭐야?’
그리고 동시에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은 다름 아닌 적의 출현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적이 나타났다!”
“전투를 준비하라!”
늘어져 있던 병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 바쁘게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토드 또한 황급히 병사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착한 곳을 확인한 토드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여기라고?’
한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이 나타났다는 곳이 다름 아닌 정문 바로 앞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위치한 성벽 밑으로 영지의 성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성문이 위치한 정문 쪽은 가장 삼엄하게 방비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성문이 뚫리는 순간 적들이 손쉽게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니 말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식으로 정중앙에 쳐들어오는 자는 없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토드의 시선에 성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담기고 있었다.
얼굴과 옷차림새 모두 나하르 학살 영상에 찍혀 있던 자와 동일했다.
그때 토드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남자의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곤 이내 어이가 없어하며 생각했다.
‘뭐야, 저놈. 진짜 혼자 온 거야?’
아무리 재차 확인을 해 보아도 숨어 있는 부하들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타무딘 영지는 탁 트여 있는 평지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공성 병기를 가져왔다면 눈에 뜨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무슨 저딴 놈한테 나하르 놈들은 당한 거야.’
현재 토드에게 레온을 본 첫인상은 자살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으로 보이고 있었다.
순간 토드가 차갑게 식은 눈빛을 부관에게 보냈다.
부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큰 소리로 침입자에게 말을 꺼냈다.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에 레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뭘 다 알면서 물어봐. 나 맞아, 그쪽이 기다리던 상대.”
웅성웅성.
레온의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성벽 위의 병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허, 게임 하면서 별의별 미친놈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네.”
“그니까. 저놈 정신 나간 거 아니야?”
“끄응, 아무리 봐도 콘셉트충인 거 같은데.”
대부분의 반응들은 헛웃음을 지으며 레온을 어이없어하는 것들이었다.
“자, 여기 집주인이 누구신가?”
그러던 그때, 파리처럼 두 손을 비비며 레온이 질문을 건넸다.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토드에게로 향하자,
“……나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위아래로 토드를 훑어 내리던 레온이 의아해하며 말을 꺼냈다.
“흐음, 별로 안 세 보이는데. 진짜 맞아?”
‘저 자식이!’
훅 들어온 레온의 도발에 토드가 눈빛에 살의를 내뿜었다.
“흥, 같잖은 도발은 집어치워라.”
“도발 아닌데…….”
하지만 레온은 도발을 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토드가 영주를 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뭐, 아무튼 됐고. 제안을 건네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는데 말이지.”
제안?
느닷없는 레온의 말에 토드가 조용히 머릿속으로 무슨 의미인지 떠올렸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토드의 대답이 없자, 레온의 말이 이어졌다.
“하도 니들이 난리를 벌여 놔서 영지 꼴이 말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큰맘 먹고 하는 제안이야.”
잠시간 뜸을 들인 후.
레온이 씨익, 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충격적인 제안을 건네고 있었다.
“자, 다들 조용히 짐 싸서 나가 주면 특별히 죽이지 않을게.”
그건 바로 조용히 꺼져 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싸아-.
레온의 말이 끝나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윽고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토드였다.
“푸흡, 크하하하.”
그가 폭소를 터뜨리자 병사들도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쏟아 냈다.
한동안 성벽이 떠나가라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레온의 제안이 미친 소리로 들리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 하도 웃느라 흐른 눈물 한 방울을 손가락으로 닦아 내며 토드가 말을 꺼냈다.
“제안은 고맙지만 말이야.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지.”
그러곤 토드가 부관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당장 죽여 버려라!”
그러자 부관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플레임 볼!”
“트리플 애로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성벽 위의 마법사들과 궁수들이 레온을 향해 원거리 포화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피유우웅!
쐐애애액!
촤아아아!
수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스킬을 시전하자, 엄청난 파공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화살들과 마법 투사체들이 폭우와 같이 레온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레온은 전혀 두려움이 없어보였다.
그는 그저 혀를 차며 한마디를 나지막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쯧, 은혜를 베푼대도 안 받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고 난 후, 레온은 곧바로 한 가지 스킬을 시전했다.
지면에 거대한 소환진이 나타났고, 곧이어 소환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토드를 비롯한 모든 병사들이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갑작스레 소환진에서 조그마한 남자 아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꼬마가 만들어 낸 다음 행동으로 인해 모두의 표정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아이의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어스퀘이크!”
그 순간, 레온이 소환한 너클즈가 자신이 지닌 최강의 스킬, 어스퀘이크를 발동하고 있었다.
쿠가가가가!
콰드드드드!
병사들이 만들어 낸 소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굉음이 주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헉!”
“저, 저건 대체!”
무언가를 확인한 병사들이 하던 공격도 멈추고 놀란 반응을 만들었다.
마치 파도가 치듯 지면이 물결치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레온의 등 뒤에서 대지가 갈라지며 생긴 흙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저건?’
토드가 입을 쩍 벌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가 당황할 만도 했다.
여태껏 게임을 하며 이런 무지막지한 스킬은 본 적도 없었으니까.
점점 커지다가 이제 성벽의 크기에 필적할 만큼 커진 대지의 파도는 적들이 쏘아 낸 모든 공격을 집어삼키며 앞으로 진격했다.
“피, 피-!”
“으아아!”
그리고 당황한 나머지 명령을 내리지 못한 토드의 실책으로 병사들은 그대로 너클즈의 스킬에 직격당했다.
투콰아앙!
콰가가가강!
“크어억!”
“끄아아아!”
엄청난 폭음과 함께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전쟁이 아닌 흡사 자연재해가 덮친 광경이었다.
“모, 모두 부상자를 치료하고! 반격을 준비해!”
뒤늦게 정신을 차린 토드가 무너진 전열을 정비시켰다.
하지만 혼란한 상황은 쉽사리 잠잠해지지 않았다.
레온의 상식을 벗어난 힘에 단체로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젠장, 저 새끼 정체가 뭐야!’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토드가 살의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레온을 바라보았다.
“허억, 헉, 아부지, 힘들다.”
“수고했어. 거기서 좀만 쉬고 있어.”
초상집 같은 자신들과는 달리, 너무나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레온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이런 힘을 연달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지금이 기회야!’
그때 소리가 나게 이를 갈며 토드가 반격을 준비하였다.
“다들 정신 차려라! 성벽에는 타격이 없다! 모두 반격을 준비해!”
그의 말마따나 어스퀘이크가 강타했음에도 성벽은 아직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우아아아!
그 사실에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함성 소리를 내며, 레온에게 다시금 공격을 이어 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온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같잖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어스퀘이크로는 성벽까지는 무리일 거라 생각했지.’
이미 예상한 결과였다.
성벽을 뚫지 못할 것임을 알지만 어스퀘이크를 시전하였던 것은 단지 이 스킬이 지닌 임팩트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 성을 함락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지금 중요한 건 나의 이미지 구축이야.’
사실 레온은 맘만 먹으면 가로막은 성벽 따위는 무시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지하로 굴을 뚫을 수 있는 너클즈도 있었고,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연금술사의 비기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전투로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작업에 안성맞춤인 존재가 자신의 품에 있었다.
‘……하지만 본 드래곤이 출동하면 어떨까?’
자신을 향해 다시금 쏟아지는 공격을 보며, 레온이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