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견고하게 만들어진 건물의 벽면이 물처럼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스르륵.
이윽고 그 물결치는 벽면에서 한 사내가 불쑥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로 레온이었다.
성공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완수하고 난 후, 곧장 나하르의 영주관에서 빠져나왔던 것이었다.
스윽.
미리 확인하고 나왔지만, 그럼에도 레온은 조심스레 한 번 더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주변에는 어떤 기척도 존재하지 않았다.
‘좋았어.’
그렇게 만전을 기하고 난 뒤에야, 레온은 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첫 단추를 완벽하게 꿰었어.’
자신이 처음에 했던 생각보다 너무나 손쉽게 계획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레온이 끼고 있던 그림자 사신의 반지를 매만지며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쓰면 쓸수록 너무 유용해. 후후, 역시 잘 빼앗았어.’
그는 이번에 영주관에 잠입을 할 때에도 그림자 사신의 반지에 부여되어 있는 ‘투영환신’ 스킬을 사용했다.
투영환신 스킬은 모든 지형지물의 내부를 그림자로 만들어 자유로이 거닐 수 있게 해 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는데.
사용하다 보니 연금술사 스킬의 상위 호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숨겨진 효과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구조물 속에 있을 때에도 그림자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기습을 가할 때 첫 공격에 크리티컬이 터지는 점이었다.
여러모로 잠입에 최적화된 스킬이었다.
이렇듯 반지를 계속해서 이용하면서, 레온은 그동안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 부분에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쩝, 허수아비 검사의 직업 아이템에 붙은 스킬은 뭘까?’
여태껏 창조한 직업들의 직업 아이템 수색이었다.
투영환신 스킬처럼 다른 직업 아이템들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스킬들이 숨겨져 있을지 몰랐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할 일이 따로 있었다.
이어진 다음 순간.
‘다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제 얼른 가 볼까.’
레온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내 변신 스킬을 사용했다.
슈아악.
일순간 레온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흐릿한 인상을 지닌 사내로 탈바꿈하였다.
그러곤 이내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인적이 드문 공간에서 벗어나, 유저들이 북적이는 행렬의 틈새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어느 누구도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끼이익.
그리고 잠시 후, 레온이 도착한 곳은 다 쓰러져 가는 한 주점 안이었다.
한데 특이하게도 그 주점의 내부에는 손님들이 NPC들밖에는 없었다.
단 한 사람의 유저도 없었다.
게다가 주점 안에 있는 모든 NPC들은 레온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자 레온은 자연스럽게 한편에 위치한 화장실로 들어갔다.
‘으으.’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비위생적인 공간이 나타났다.
레온은 질색을 하면서 손으로 코를 막고는 비어 있는 구석의 칸에 들어갔다.
레온은 바지를 내리지 않았다.
그저 변기를 서글픈 눈빛으로 바라보며 속으로.
‘……쩝, 아무리 들킬 걱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이딴 곳에다가 문을 만들어 놓은 거지?’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머뭇거리던 레온은 이내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잇!’
그러자 눈을 딱 감고 행동을 감행하였다.
폴짝.
난데없이 레온이 변기 위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슈우우욱!
놀랍게도 레온의 모습이 변기 안으로 빨려들며 사라지고 있었다.
휘이잉!
그리고 다음 순간, 사라졌던 레온은 새로운 공간에 낙하하고 있었다.
처척.
이내 깔끔하게 착지를 해낸 레온의 눈앞에 익숙한 배경이 펼쳐져 있었다.
레온은 데빌즈 네스트의 연금술사들이 살고 있는 ‘샴발라’에 도착하여 있었다.
그랬다. 레온은 미리 나하르에 연금술사들을 이동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들킬 염려가 없는 곳에 출구를 설정해 놓으라 했더니, 연금술사들이 변기 속이라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센스를 발휘하여 놓았던 것.
‘으으, 정말 더 이상은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레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만나러 성큼성큼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오오, 정말 성공하셨군요!”
“크으, 역시 레온 님이십니다!”
대회의실에 데빌즈 네스트의 모든 연금술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레온의 성과에 놀란 나머지 얼굴들이 죄다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의 심처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셨다가 오실 수 있다니. 대단하십니다.”
“……저희였다면 바로 걸려서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또다시 레온을 향한 감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데 그럴 만도 했다.
그들 또한 성질 변화 스킬을 통해 벽을 뚫고 어디든 들어갈 수 있었지만.
스킬 성능이 지닌 한계 때문에 레온처럼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영주관 내부를 제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암스트롱 님이 구출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군요!”
그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레온의 이런 활약상이 암스트롱을 구출해 내는 능력과 일맥상통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때, 커티스가 슬며시 레온에게 질문을 건네 왔다.
“원하시던 것은 얻으셨습니까?”
그러자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놀라운 말을 꺼냈다.
“네, 역시나 이번에 훔쳐낸 정보를 통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이 두 길드가 암흑성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레온의 말에 방 안의 모든 연금술사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이계인들이 만든 길드가 암흑성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니.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 만도 해 보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히 투스 연합의 두 길드장은 마몬의 사도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길드장들 서로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극비리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런 상태인데 그들의 길드가 암흑성국으로부터 당당히 지원을 받는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스러운 레온의 말을 커티스를 포함한 모든 연금술사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마몬의 사도가 둘이나 있으니 지원을 해 줄 만도 하지요!”
“이계인들 중에 이리도 악에 물든 자들이 있을 줄이야. 절대로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흥분하여 자신들끼리 큰 소리를 내뱉는 광경을 보며 레온이 힘겹게 표정 관리를 했다.
그리고 그러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생각했다.
‘흐흐, 역시 잘들 속네.’
레온의 눈앞에 일련의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올라 있었다.
-당신의 완벽한 거짓말에 연금술사, ‘커티스’가 속아 넘어갔습니다.
-당신의 완벽한 거짓말에 연금술사, ‘케인’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
-(……중략……)
레온이 그들에게 이런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연금술사들의 조력이 필수적이었는데, 아직 암스트롱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던지라 내릴 수 있는 명령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저들과 상관도 없는 이계인들의 길드와 관련된 명령은 따르지 않을 위험이 너무 컸던 것.
그래서 레온이 생각한 것이 바로…….
‘그럼 상관이 있는 것처럼 속이면 되잖아.’라는 작전이었다.
계획은 완전히 대성공이었다.
그때 연금술사들이 레온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레온 님! 얼른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을 명령해 주십시오.”
“맞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그런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레온은 이내 감동한 것처럼 연기하며 이어 말했다.
“여러분들의 의지는 정말 감동이군요. 알겠습니다! 자, 바로 그들을 타도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하도록 하죠!”
스윽.
처척.
말을 끝내자마자 레온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건 그가 영주관에서 몰래 챙겼던 물건이었다.
촤아악.
레온이 손으로 물건을 탁자 위에 활짝 펼쳤다.
나하르 근방을 모두 드러내고 있는 지도 한 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지도 위에 있는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체크된 동그라미들이 수두룩하다는 점이었다.
연금술사들이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그때.
레온이 그것들이 어떤 것인지, 또 이후에 어떤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인지 설명을 시작했다.
‘오오, 그런 방법이!’
‘정말 레온 님이 적이었다면……. 큰일이었겠군요.’
그 와중에 연금술사들에게서 여러 반응들이 나타났다.
마침내 모든 설명이 끝난 후, 레온이 슬쩍 말을 건넸다.
“……좋습니다, 그럼 설명은 이 정도면 끝난 것 같고. 자, 그럼 순서를 정해 볼까요.”
그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든 첫 타자는 긴장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이런 모두가 기피하는 일이라면, 레온이 누구를 지정할지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예측은 사실로 드러났다.
레온이 아까부터 자신의 눈을 피하고 있는 한 연금술사에게 시선을 똑바로 고정하며 말을 꺼내었다.
“자, 그럼 지원자가 없으니 케인이 하는 걸로.”
레온의 조수가 되어 피똥을 싸며 고생해 온 연금술사 케인이었다.
레온에게 단단히 찍혀 버린 케인은 모든 고된 일의 첫 시작에 고정으로 지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케인이 울상인 얼굴로 말을 꺼냈다.
“……또 접니까?”
그에 레온은 대답도 없이 그저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얼굴에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자 케인이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한 채, 속으로 과거의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크흑, 내가 미쳤지. 그때 왜 저 괴물을 건드려서…….’
* * *
그로부터 1시간 후.
나하르 영지 근방의 사냥터.
‘심연의 호수.’
이곳은 나하르가 블루 아이즈의 길드의 영토였을 때만 하더라도, 수많은 유저들이 불티나게 찾던 곳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출몰하는 몬스터들의 경험치가 상당히 높은 것은 물론 드롭하는 아이템마저 가치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꿀 같은 사냥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선택받은 소수의 유저들만이 심연의 호수 사냥터를 이용하고 있었다.
넓디넓은 필드에 한 무리의 유저들만이 사냥을 계속하고 있었다.
파바밧!
촤아악!
그들이 갖가지 스킬들을 쏟아부으며 몬스터들을 쓰러뜨려 갔다.
“진심 대박이다 여기.”
“후후, 내가 답은 페가수스라고 했지?”
“경배해, 갓가수스!”
그들은 모두 페가수스 길드의 신규 길드원들이었다.
그랬다. 이곳은 페가수스 길드의 독점 사냥터로 지정이 되어 다른 유저들의 접근이 원천 봉쇄되었던 것이다.
페가수스와 코르부스는 모든 영지의 가치 높은 사냥터를 이처럼 모두 분할하여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단체 전투가 길드원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자 이번 신규 길드원 교육을 지휘하는 담당관이 앞으로 나서며 말을 꺼냈다.
“자, 지금부터는 각자 넓게 흩어져서 개인 사냥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신규 길드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고레벨 길드원들에게 일명 ‘쩔’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혼자 사냥을 하라고 하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한심한 새끼들, 겁은 더럽게 많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담당관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말을 건넸다.
“다들 걱정 마세요. 이미 이곳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모두 파악이 되어 있으니까요. 여러분이 상대 못 할 몬스터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위기의 상황이다 싶으면 저희들이 바로 도울 거고요.”
그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안심한 길드원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필드의 깊숙이 이동을 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담당관과 길드원들 중 누구도 몰랐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는 그들을 훔쳐보는 낯선 시선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