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
‘……이게 대체 무슨?’
헤이치아는 멍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끄아아아!”
“사, 살려 줘!”
길드원들이 쏟아 내는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며 헤이치아는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우리가 저딴 변두리 영지에 밀린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밀리는 수준도 아니었다.
그의 길드원들은 무엇 하나 해 보지도 못하고, 아슬란의 병력에 학살을 당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이 결과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할버드 길드는 서부 지역 내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곳이 아니던가.
저딴 산맥 속에나 틀어박혀 있던 길드에 이렇게 밀릴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참혹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자신들을 압도하는 엄청난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순간 그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뭔 놈의 영지군이 저렇게 강하냐고!’
길드전에는 길드 소속 유저들뿐 아니라, 영지민들로 구성된 군사들도 뽑아 쓸 수 있었다.
한데 영지군은 길드원보다 수준이 한참 낮은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아슬란의 경우는 달랐다.
암살대, 본 네크로맨서 군단, 스켈레톤 슈트 전대 등등.
모든 NPC들이 그들의 길드원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다.
오합지졸로 보이던 영지군들은 적 지휘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광전사처럼 변화하여 자신의 길드원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헤이치아가 애써 정신을 차리고는 전황을 살펴보았다.
‘젠장, 어디 하나 이기는 곳이 없네.’
전부 다 밀리고 있는 것을 보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죽어라! NPC 자식아!”
그의 눈에 길드의 간부 중 하나가 암살자 부대장에게 검을 날카롭게 휘두르는 모습이 담기고 있었다.
‘오오, 좋아!’
헤이치아가 쾌재를 불렀다.
막대한 기운이 담긴 참격이 여인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 좋아. 일단 한 놈이라도 좀 잡아 보자!’
일단 상대 간부 중 한 명이라도 잡아야,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다음 순간.
채챙!
암살자는 자신의 카타르를 번개처럼 머리 위로 X자로 교차해서 들어 올려 그 공격을 가볍게 막아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자신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혀 버리자, 검사는 당황에 가득 차 있었다.
‘으아, 안 돼! 거기서 멈추면 어떻게 해, 미친놈아!’
머뭇거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헤이치아가 답답해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 순간.
“느려.”
밍시아가 한마디 말과 함께 반격을 쏟아 내었다.
촤아악!
서거걱!
이윽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헤이치아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길드원, ‘란파’가 사망하였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헤이치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젠장, 간부도 상대가 안 된다는 거냐.’
도대체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대책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결국 잠시 후, 그가 내린 결론은 다른 방식이었다.
‘……일단 후퇴를 하자고 해야겠어.’
……그건 바로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절망한 그가 부길드장을 찾았다.
하지만.
“기, 길드장님-. 쿠억!”
눈이 마주친 부길드장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스켈레톤 병사의 검에 몸이 꿰뚫려 버리고 있었다.
이내 회색빛으로 변하여 축 늘어져 버리는 부길드장을 확인한 헤이치아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뒷걸음질을 치던 헤이치아는 아예 몸을 돌리더니.
‘이, 이건 안 돼. 일단 나라도 살자.’
투다다다!
전장 바깥으로 이탈하여 버리고 있었다.
“기, 길드장님?”
“너 혼자 어디 가!”
“야, 이 개자식아!”
그 모습을 확인한 할버드 길드의 길드원들이 악에 받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길드원들을 남겨 두고 혼자 내빼다니, 그들이 그렇게 분노를 쏟아 낼 만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대탈출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쐐애애액!
퍼버버벅!
갑작스런 파공음이 도망치던 헤이치아의 귓전을 강타했다.
‘뭐, 뭐지?’
뒤통수가 따끔하고 등골이 서늘했다.
“끄아아!”
그는 본능적으로 옆의 땅바닥에 몸을 굴렀다.
우당탕탕!
“쿨럭쿨럭.”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엉망진창이 된 채,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가 눈을 끔뻑끔뻑 뜨며 자신을 향해 날아들은 투사체의 형상을 확인했다.
‘이, 이건?’
그러자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칠흑의 빛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검들은 서로 간에 스파크를 튀며 진로를 완전히 봉쇄해 버리고 있었다.
꿀꺽.
그가 침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저 검들에 꼬챙이에 꿰이듯 당할 뻔했던 것이다.
한데 그때였다.
“힝, 아깝다. 칠흑의 봉쇄검으로 공격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는데…….”
그의 뒤편에서 분위기와는 대조되는 낭랑하기 짝이 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헤이치아가 뒤를 돌아보자.
“안녕, 아저씨?”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과 그녀를 따르는 암살자 병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헤이치아는 절망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도망도 못 치게 하는 거냐. 이런 망할.’
그러던 그때, 여자의 곁에 있던 암살자 하나가 말을 꺼냈다.
“유우 님, 저자가 상대편 대장입니다.”
그러자 유우가 먹잇감을 포착한 맹금류의 눈빛을 띠며, 탄성을 흘렸다.
“오호?”
그러곤 유우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척!
손에 장착하고 있는 이상한 형태의 건틀릿에서 카드 한 장을 뽑아내면서 말이다.
슈아아아!
전신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흩뿌리며, 순간 유우가 말을 꺼냈다.
“그럼 그에 걸맞게 상대해 줘야겠네?”
‘히익!’
그녀가 짓고 있는 악마와 같은 미소에 헤이치아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 * *
할버드 길드가 아슬란 길드의 병력에 박살이 났다는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소식을 들은 모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변경의 잡졸이라고 생각했던 아슬란의 병력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영상들만이 올라왔지만, 거기에 찍힌 것만으로도 할버드 길드가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혔는지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슬란은 폭주 기관차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의 영지전이 끝나면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다음 영지로 진격을 해 갔다.
‘길을 열든가. 함락을 당하든가.’
아슬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쪽 영지들을 죄다 집어 삼키며, 중부 대륙으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으면서 말이었다.
광분한 코끼리가 질주하듯 아슬란 길드는 파괴적인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서부 지역은 개미처럼 짓밟히고 있었다.
세력 확장이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서부의 길드들이 부랴부랴 서부 연합을 결성하여 아슬란에 대항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미친 거 아님? 아슬란 진군 속도 왜 이리 빠름?
-ㄷㄷ 이렇게 빨리 끝내는 점령전들은 본 적이 없는 듯.
-……와우, 30분 단위로 영지들이 계속 잡아먹히네.
그랬다. 그들이 서로 연합을 하려고 접촉하려는 시간보다, 아슬란군이 진격해 밀고 들어오는 시간이 더 짧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반격을 가할 세도 없이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다.
그러자 길을 비켜 주는 것보다 자진해서 투항하는 세력까지 나타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완전히 바뀌지는 못했다.
서부 지역의 세력들이 중부 지역에 비해 원체 약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거품이라고 비웃는 시선들이 많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슬란 길드가 단 이틀 만에 서부 영지의 80%를 흡수 통일해 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슬란은 블루 아이즈가 투스 연합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영지 곳곳에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 * *
서부 지역에서 아슬란이 전투를 벌이던 그때.
투스 연합에 의해 함락된 지 오래인 동부 지역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블루 아이즈는 중부 지역까지 쫓겨 나갔기 때문에, 이곳에 전쟁의 위험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곳 영지들은 전혀 다른 이슈로 인해 시끌벅적하였다.
그건 바로 하나로 합쳐져 있던 두 길드의 병력을 원래대로 나누는 일이었다.
지휘 체계가 원래대로 돌아가면서, 영지에 있던 두 길드의 세력끼리 여러 가지 말썽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부 지역의 핵심 영지 중 한 곳인 나하르 영지도 마찬가지였다.
북부영지, 나하르.
영주관.
방 안을 수많은 유저들이 채우고 있었지만, 실내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둔 채, 페가수스와 코르부스 두 세력의 인물들이 대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적대 세력으로 바라보며, 언제라도 무기를 뽑을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페가수스 진영의 대표자로 보이는 이가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이봐, 그쪽에도 똑같은 지침이 내려온 것 아닌가?”
살이 뒤룩뒤룩 찐 뚱보인 그는 페가수스의 간부 중 하나인 ‘젠킨스’였다.
“바보인가? 같이 합의를 했으니 같은 게 내려왔겠지.”
그의 말이 끝나자, 땅딸막한 키에 승모근이 매우 발달해 마치 드워프처럼 보이는 코르부스의 간부 ‘타일러’가 비꼬듯이 말했다.
코르부스의 유저들이 키득거리며 젠킨스를 함께 비웃었다.
그러자 젠킨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분위기가 더욱 험악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부글거리는 분노를 참으며 젠킨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합의를 안 따르고 맘대로 행동하는 거지?”
그의 말에 타일러는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파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응?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모르쇠로 일관하자 결국 젠킨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며 말했다.
“장난하는 거냐! 동부 서부로 나누어서 관할하고 있는데, 왜 자꾸 침범을 하느냔 말이다!”
길드장끼리의 합의로 하나로 합쳐져 있던 병력을 원래대로 둘로 나누게 되자.
나하르처럼 안정화가 되어 있는 영지들은 모두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곳을 이끄는 이들에 의해 양쪽이 완전히 독립되게 운영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영지 내에서 다툼이 생겨났다.
한데 간부 중에 성격이 안 좋은 것으로 유명한 타일러는 자꾸만 도를 넘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타일러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도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하르가 위치상으로 동부의 영지들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기에.
이곳에 기반을 확실히 다져 놓으라는 길드장의 지시가 내려졌던 것이었다.
‘흐흐, 먼저 쳐 주면 나야 고맙지.’
명분을 얻으면 타일러는 당장에라도 싸움을 일으킬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네놈의 계략을 모를 줄 아냐!’
하지만 젠킨스 또한 그 정도는 간파할 수준은 되었기에, 아슬아슬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항의 방문을 하는 것도 경고에 그치는 것이었다.
“경고하는데 다음번에는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
“흥! 무섭지도 않군! 맘대로 해 보시지!”
쿠웅!
결국 그렇게 고성이 오고가다가, 두 세력 모두 방에서 나갔다.
모두 사라진 방 안에 또다시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데 그때였다.
방 안에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마치 호수에 파문이 일듯, 방의 한쪽 벽이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스르륵.
이윽고 벽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때 벽에서 빠져나온 남자가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둘의 사이가 안 좋다 이거지.”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바로 레온이었다.
암흑성국을 빠져나온 그는 이곳에 몰래 침투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때 레온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방 안에 있던 물건 하나를 챙겼다.
“후후,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 있겠어.”
그러곤 나지막한 한마디 말과 함께 다시금 벽 속으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