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무한전직-171화 (171/332)

# 171

유호가 메르엠으로 돌아오고 난 이튿날 아침.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게임 속에 있지 않았다.

뚜벅뚜벅.

현실 속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경사진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혹시 오늘 서쪽에서 해가 뜬 것이 아닌가 싶은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판테라를 시작하고 난 후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게임에 모든 것을 투자하였던 그이지 않은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밖에 나온 것은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편의점에 가려 잠깐 나온 것도 아닌 듯싶었다.

그의 전용 복장인 무릎이 나오고 다 늘어난 트레이닝 복 차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지 티셔츠에 셔츠 그리고 청바지와 스니커즈.

오랜만에 정말 제대로 갖추어 입어 있었다.

게다가 등에는 백팩까지 두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하아, 진짜 미치겠네.”

유호가 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한탄을 내뱉었다.

‘아오, 이 중요한 타이밍에 이게 무슨……!’

그러곤 부들부들 몸을 떨어 대다가 답답해 죽을 것 같아 하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그 순간, 같은 표정과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유호뿐이 아니었다.

“아, 진짜 싫다.”

“벌써 오다니, 와 버리다니.”

“크흑,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함께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 이들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던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들도 하나같이 똥이라도 밟은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던 순간.

유호의 머릿속으로 어젯밤 게임 속에서 동석과 나눴던 대화의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정 관리를 통해 마을을 도시로 승급시키는 데 성공시키고 난 후.

“후, 그래도 어떻게 시기는 맞췄네. 다행이다, 하루라도 더 늦어졌으면 완전 곤란해질 뻔했어.”

브룩이 천만다행이라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루라도? 뭐 내일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그에 레온은 브룩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가 그렇게 맘을 졸인 이유가 궁금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레온의 말에 브룩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레온을 쳐다볼 뿐이었다.

“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확 때려 주고 싶네.”

레온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브룩이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너 설마 진짜 까먹고 있는 거야?”

그가 그렇게 진지하게 나오자, 레온은 정말 짐작 가는 것이 없어 고개를 갸웃하였다.

“응? 뭔데 진짜?”

그러자 브룩이 황당해하며 레온에게 한마디 말을 건넸다.

“우리 내일 ……이잖아.”

그리고 이어진 브룩의 말을 들은 레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어떻게 잊고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이.

그의 코앞까지 닥쳐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하아.”

순간 유호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말을 내뱉었다.

“아오, 이 타이밍에 무슨 개강이야!”

라고 말이었다.

그랬다. 동석이 말했던 유호가 까먹은 것.

그건 바로 오늘이 그의 대학교의 개강 날이라는 사실이었다.

“크흑, 휴학이 답이었어.”

“교수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휴강이 어떠십니까.”

“……안 되겠다, 오늘은 자체 공강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걷고 있던 이들도 모두 강의실을 향해 걸어가는 학생들이었던 것.

그러던 그때였다.

“야야, 부들대도 어쩔 수 없다. 받아들여.”

유호의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유호는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과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휴우, 왔냐.”

엄청난 키와 덩치 그리고 터질 듯한 근육.

그는 바로 동석이었다.

둘은 같은 과였기에, 시간표를 동일하게 맞추었던 것.

그때 동석이 유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꺼냈다.

“이 자식은 어떻게 지 개강 날짜도 잊어버리냐.”

“……글쎄다, 진짜 오고 싶지 않으니까 뇌 속의 무의식이 잊어버리게 만든 것 아닐까?”

“호오, 이 친구 설득력 보소?”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둘은 강의실을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겨 갔다.

그리고 중간부터는 거의 뛰다시피 한 그들은 다행히 교수님이 오기 전에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동석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첫날은 OT니까 금방 끝내 주시겠지?”

“야 야, 그런 말 입 밖에 꺼내는 것 아니다. 조용히 기대만 하고 있어. 부정 탄다.”

유호는 그렇게 대답을 한 후, 곧장 핸드폰으로 판트라넷에 들어갔다.

악명을 없앨 방법을 찾아보려 했던 것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주변에서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이야.”

학생들이 한시에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뭐야, 왜 저래?’

유호가 고개를 빠금히 들어 보자 그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와…….’

그 원인은, 강의실의 앞문으로 들어온 누군가 때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곳에 여학생 한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 양쪽 어깨가 살짝 드러난 민소매 원피스는 건강미가 느껴지는 몸매를 보이고 있었다.

청순함이 느껴지는 얼굴은 무척이나 예뻤다.

그때 동석이 유호에게 조용하게 말을 건네 왔다.

“……네가 이 수업 듣자 했지. 내가 끝나고 맥주 쏜다.”

한데 그에 대한 유호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묘한 얼굴로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유호는 속으로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아, 어디지, 분명 어딘가에서 봤는데.’

분명히 처음 보는 그녀가 어디선가 본 것처럼 기시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유호의 반응이 무언가 시원찮으니 이상하게 느낀 동석이 슬쩍 물어 왔다.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아니, 그게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레온의 말에 동석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웬 쌍팔년도 멘트냐. 꿈속의 이상형이라도 만나셨쎄요?”

“아냐, 인마, 그런 거.”

하지만 곧이어 유호는 자신은 아는 여자가 없다는, 무척이나 객관적이면서도 서글픈 근거를 떠올리면서.

‘언젠가 본 연예인이란 닮은 건가 보다.’

언젠가 티비에서 스치듯 보았던 여자 연예인과 닮은 것이라고 치부하고는 이내 들어온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 내용에 시선을 돌렸다.

한데 그러던 그때.

그 여학생이 힐끔 유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가늘게 떨리며 놀란 기색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첫 수업은 이후 진행될 수업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오리엔테이션으로 간단하게 끝이 났다.

시끄러워진 강의실 속에서 유호와 동석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 맥주는 게임 속에서 마시면 되지.”

“마,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건 그냥 음료수지 맥주가 아니야. 내가 산다니까, 잔말 말고 얼른 들어가.”

그 후 동석은 게임하러 가겠다는 유호를 반협박식으로 근처에 있는 단골 주점으로 데리고 갔다.

끼익.

[중구 비어]

-거 맥주 먹기 딱 좋은 날씨네.

가게의 이름이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튀김 기계 앞에 서 있는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구 형, 저 왔어요.”

“어어, 왔냐.”

동석의 밝은 인사에 그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폭처럼 생긴 그는 가게 주인인 이중구였다.

“헤헤, 이제 개강했으니까 출근 도장 찍어야죠.”

“그래, 좋다. 매상은 너에게 맡기마.”

“네네.”

그렇게 서로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유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둘이 같이 서 있으니까, 감자튀김집이 아니라 조폭 사무소 같네.’

그 후, 두 사람은 감자튀김과 맥주를 시켜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했다.

게임이나 하러 가자고 했지만, 오랜만에 술이 들어가니 유호도 즐겁게 마시고 있었다.

한데 그때.

끼익.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아저씨!”

두 명의 여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앉은 위치상 자연스레 유호와 동석은 그 둘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야, 오늘 무슨 날이냐.”

동석의 행복에 겨워 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상당히 예뻤기 때문이었다.

한데 두 여학생은 서로 스타일이 완전 상반되어 있었다.

한 명은 꽤나 큰 키에 원피스를 입은 청순한 스타일이었고.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인상의 다른 한 명은 스트리트 브랜드의 큰 박스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한데 그때, 유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지, 저 여자들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러자 동석이 혀를 차며 말을 꺼냈다.

“쯧, 이 자식 무슨 병에라도 걸렸나. 무슨 여자만 보면 다 봤다네.”

“아니, 그게 아니고. 이번에는 진짜로 생각이 날 듯한데.”

유호가 울컥해서 말을 꺼내자, 동석이 유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알았어, 인마. 외로운 거 어필하는 거지? 좀만 기다려 봐라. 형이 소개시켜 줄게.”

“……그래? 뭐 더 먹고 싶은 건 없니?”

솔깃한 동석의 말에 또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던 그때.

“……저기요.”

“으응?”

갑자기 유호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유호가 고개를 돌리자.

‘어라?’

들어왔던 키가 작은 여자가 유호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큰 소리를 내뱉었다.

“우와, 역시 그때 거지 아저씨다!”

그리고 잠시 후.

“진짜 죄송해요. 얘가 한번 들뜨면 앞뒤가 없어져 가지고. 얼른 사과드려.”

“초면에 죄송합니다아.”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정식으로 사과했다.

유호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제야 유호는 그들이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포를란에서 배고파서 쓰러졌을 때, 도와줬던 그 유저들이구나!’

그가 처음 직업을 얻고 포를란으로 돌아오던 시점에 쓰러졌을 때, 그를 도와주었던 두 여성 유저였던 것이었다.

그를 보고 거지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그때 그의 차림새가 정말 완전히 거지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야, 이렇게 만나게 되네.’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유호는 그녀들에게 큰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정말로 아무것도 못하고 사망해 버릴 뻔했던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게임 속에서 언제 한번 만나면 크게 대접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같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줄이야.

순간 유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었다.

“하하, 아니에요. 저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계속 쳐다봤는걸요. 그때는 정말 감사했어요.”

“아뇨, 한 것도 별로 없는 걸요.”

그렇게 상당히 부드러운 분위기가 펼쳐지던 그때.

스스럼없어 보이던 키 작은 여학생이 불쑥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흠, 이왕 이렇게 된 거 맥주나 같이 드실래요? 언니, 괜찮지?”

“으응? 나야, 뭐 이분들이 괜찮으시면.”

유호가 동석에게 시선을 돌리자, 동석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유호가 웃어 보이며 말을 대답했다.

“그러시죠, 그럼. 그때 도와주신 것도 있고 제가 500 한 잔씩 돌릴게요.”

“오오, 굳굳.”

곧바로 동석이 맥주를 시켰다.

“사장님, 여기 2,000 같은 500 네 개요.”

“뭐래는 거야, 미친놈아.”

그리고 사장님의 욕설이 들려왔다.

잠시 후, 간단하게 통성명이 이루어졌다.

청순한 여학생의 이름은 나연이라고 했고, 발랄한 여학생의 이름은 다은이었다.

그녀들은 같은 과의 선후배 관계라고 했다.

나연은 레온과 동석보다 두 살 어렸고, 다은은 세 살 어렸다.

네 사람은 아예 초면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판테라라는 공통 화제가 있었던 데다가, 유호가 자신의 완전 거지꼴을 보였다는 점 때문인지 아예 편하게 대하기 시작하자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금방 서로 말을 놓기까지 했다.

“그럼 계속 둘이서만 플레이를 했던 거야?”

“이야, 둘이서만 180이 넘게 올린 거면 진짜 대단하네.”

그러자 다은이 둘만 알라는 듯 몰래 속삭였다.

“엣헴, 우리 둘 다 이래 뵈도 히든 직업 소유자라고.”

그녀의 말에 레온과 브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랬구나.”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라? 반응들이 왜 이리 미적지근하지. 원래 이 타이밍에 우와! 정말? 대박이다! 구라치지 마! 이 넷 중에 하나가 나와야 하는데.”

유호와 동석이 놀라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들도 히든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또 말이 이어지던 그때, 나연이 말을 꺼냈다.

“우리도 이제 북부 대륙 쪽으로 이동해 보려고.”

“그래?”

“주둔지로 생각해 놓은 영지라도 있어?”

동석이 질문을 던졌다.

이제 북부 대륙으로 진출을 하면, 유저들의 영지 중 한 곳을 근거지로 잡아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응응, 최근에 뜨고 있는 곳이 있어서 한번 가 보려고.”

‘최근에 뜨고 있는 곳?’

“거기가 어딘데?”

그 말에 유호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며 되물었다.

“혹시 메르엠이라고 알아?”

순간 유호와 동석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