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샤와푸흐의 군사들은 위험천만했던 협곡을 빠져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진군하지 못했다.
그건 당연하게도 시야를 가리고 있는 이 붉은 안개 때문이었다.
샤와푸흐 진영의 병사들은 연신 욕지거리만을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점점 더 짙어지고 있잖아.”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어.”
겁에 질린 그들은 누구 하나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데 그럴 만도 했다.
협곡 안에서 그런 끔찍한 참상을 직접 목격한 그들이 어찌 쉽게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그저 조금씩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금이라도 투항을 해 볼까.’
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샤와푸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냐! 당장 돌파하지 못하겠느냐!”
병사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작 샤와푸흐 본인도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으면서, 자신들에게만 진군 명령을 내리는 꼴이 어이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자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부족장 한 명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안개를 벗어나면 끝이다! 전군 이동하……!”
한데 그때였다.
피융!
갑작스런 한 줄기 파공성과 함께.
“……컥!”
그에게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융!
피융!
“크악!”
“억!”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샤와푸흐 진영에서 끔찍한 비명 세례가 이어졌다.
“적들의 사격이다!”
안개 속에서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새 바깥에 자리를 잡은 듯한 적들이 쏘아 내는 화살 다발이 그들의 머리 위로 억센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방패병들은 앞으로 나와 아군을 지켜라!”
혼란한 와중에 커다란 방패를 든 병사들이 앞으로 튀어나와 머리 위로 방패를 치켜 올렸다.
투두두두.
순식간에 그들의 방패들이 고슴도치의 등짝처럼 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빠르게 빠져나가 보려 했던 그들은 다시금 굼벵이처럼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그런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던 가운데.
샤와푸흐의 병사들이 하나둘 이상 현상을 느끼고 있었다.
샤와푸흐의 부하들이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으으, 뭔가 이상해.”
“……몸이 왜 이러지.”
털썩.
어떤 이는 의식을 잃고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던 그 순간.
“적들을 처치하라!”
난데없이 전장에 레온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아아아!
귀를 먹먹하게 하는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타의 병력이 핏빛 안개 속으로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적들을 물리치자!”
“우리에겐 수호신 레온 님이 계신다!”
서걱!
촤아악!
아군 병사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여러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적군이 협곡에서 포탑에 휩쓸릴 때 미리 이곳으로 빠져나와 체력을 보충해 두었던 것이었으며.
둘째는 위협을 받던 주민들을 모두 안전지대에 옮겨 놓고 나자, 사기와 안도감이 함께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은 너무 잘 싸우고 있었다.
핏빛 안개 속에서 비틀거리는 적들에 반해, 그들은 안개 속에서 오히려 활력이 넘쳐 보였으니까 말이었다.
눈앞을 가리는 안개 속에서도 시야도 훤히 보이는지, 피아식별을 제대로 해 가며 적들만 쏙쏙 처치하고 있었다.
띠링.
띠링.
그 순간, 레온의 귓전에 효과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핏빛 안개의 효과로 반란군 샤먼, 주탄의 체력을 1,350만큼 흡수했습니다.
-핏빛 안개의 효과로 만타군 샤먼, 리올의 체력이 1,350만큼 회복되었습니다.
-핏빛 안개의 효과로 반란군 샤먼, 가즈의 체력을 1,620만큼 흡수했습니다.
-핏빛 안개의 효과로 만타군 샤먼, 니트의 체력이 1,620만큼 회복되었습니다.
-(……중략……)
연신 끝도 없이 떠오르고 있는 메시지의 내용은 동일하였다.
핏빛 안개의 효과로 적군의 체력은 흡수되고, 그만큼 아군의 체력이 회복되었다는 것이었다.
아군들이 힘이 넘쳤던 가장 큰 이유는 안개의 효력 탓이었다.
순간 레온이 혀를 내두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크으, S등급 포탑의 효과가 진짜 사기긴 하네.’
핏빛 안개는 바로 S등급 포탑인 ‘바하모르의 흡혈 포탑’이 지닌 힘이었다.
[핏빛 안개]
포탑의 반경 60M으로 지속적으로 적군의 체력을 흡수하고, 그에 비례해 아군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효과를 지닌 핏빛 안개를 흩뿌립니다.
-핏빛 안개는 아군의 시야를 가리지 않습니다.
광역 흡혈 효과.
그건 바로 적들의 체력은 깎아 내고, 아군의 체력은 회복시키는 정말 꿀 같은 효능이었다.
그러던 그때.
또 한 명의 적을 황천길로 보내 주곤, 레온이 문득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한 포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일반 포탑과는 다른 고귀한 느낌을 주는 칠흑빛의 포탑.
한데 특이한 것은 포탑의 주변에 은은한 진홍빛 기운이 넘실거리며, 진동음을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그 진동음이 사람의 맥박과 같이 들려오고 있었다.
순간 레온이 슬며시 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게다가 놀라운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지.’
그렇게 생각을 마친 레온이 다시금 전장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같은 순간.
샤와푸흐는 낯빛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정도가 되었으면 전장의 승패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 짐작하지 못할 수 없었다.
이 전투는 결국 그의 처참한 패배로 끝이 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떠올라 있는 심정은 자포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 한 줄기 잔혹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던 그때.
그가 무언가 결심을 마치곤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방법이 없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는 없을 듯했다.
스윽.
이어 샤와푸흐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한 장의 양피지였다.
한데 한낱 종이에서 음험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던 순간, 샤와푸흐의 머릿속에 요우 님의 곁에 있던 신관이 전한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반항이 거세다면, 이것을 사용하십시오.
‘받을 때만 해도 콧방귀를 꼈지만.’
신관과 샤와푸흐는 달 마을의 2인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공적을 세우고 돌아가면 첫째로 할 것이 요우 님과 신관을 떨어뜨려 놓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는 이것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려 했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그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이를 꽉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전장을 승리로 장식하고, 다음에 만회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 써 버리자.
그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곤.
찌이익-.
들고 있던 양피지를 가로로 길게 찢어 버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파바아앗!
화아아악-!
양피지 조각이 칠흑 같은 불꽃에 한순간에 타올라 사라졌다.
-끼에에에에!
그러더니 갑자기 어디선가 악마가 내는 비명 같은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곧이어 순식간에 핏빛 안개를 덮어 버릴 만큼 검디검은 음험한 검은 기운이 내뿜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전장에 있던 레온은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검은 기운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는 연이어 경고 신호를 보내는 촉으로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군 물러나라!”
그러자 바로 병력들을 뒤로 물렸다.
레온의 말이 떨어지자, 아군들은 검은 기운이 닿지 않는 곳까지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샤와푸흐의 진영은 달랐다.
그들은 서로를 살피며 그저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뭐, 뭐야?”
“으아아아!”
“사, 살려 줘!”
샤와푸흐의 병사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펴져 나가던 검은 기운이 자신들을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몸에 뚫린 모든 구멍들에 끈적한 검은 기운들이 파고들고 있었다.
홀로 남아 추이를 지켜보던 레온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으으, 뭐야 저게.’
그 모습이 고어물의 한 장면처럼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샤와푸흐가 자신의 부하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슨 짓을 벌였다는 것을 말이었다.
“으으억.”
“꾸에엑.”
적들은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형태로 변이가 되기 시작했다.
‘좀비?’
한데 그때.
갑자기 마루가 고개를 갸웃하며 레온에게 말을 건네 왔다.
-주인아, 이상하다낭.
“그래, 나도 이게 이상한 건 알아.”
-아니다, 주인아. 저 힘, 분명히 마몬 님의 힘이다낭.
‘마몬?’
그 말에 레온이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난데없이 마몬의 이름이 나오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던 것이다.
레온이 마루에게 되물었다.
“마몬이라고? 확실해?”
-분명하다낭. 마몬 님의 힘이다낭.
레온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왜 달 마을의 스파이가 마몬의 힘을 사용한단 말인가.
갑자기 샤먼들의 숲에서 마몬이 등장하는 까닭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연이어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레온은 이 속에 얽힌 비밀 한 가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달 마을에 누군가가 마몬이랑 얽혀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적 편에 다른 마몬의 사도가 있다는 사실까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 정도까진 파악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한데 그 순간, 레온의 귓전에 병사들의 안타까움을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것들은 대체.”
“어찌 저런 일이.”
“하아, 영령이시여. 저들에게 구원을…….”
레온이 시선을 돌리자, 변이가 모두 끝난 검게 물든 좀비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있었다.
마치 인간에서 몬스터로 변화가 진행된 것 같았다.
레온은 곧장 녀석들의 정체를 확인하여 보았다.
반란군 샤먼에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마몬교 변이체]
레벨 : 153
분류 : ?
등급 : 유일
마몬교가 포로로 잡은 이교도 신자들에게 마몬의 힘을 강제로 주입하여 만들었던 개조 병사.
이지를 상실하고, 주인의 명령만을 듣게 된다.
생전의 힘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어어어.”
“으어어어.”
검은 변이체들이 끔찍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만타군의 병사들이 한때나마 자신의 동료였던 이들의 변화에 할 말을 잃은 그 순간.
“저놈들을 죽여라!”
샤와푸흐가 공격을 명령하였다.
투다다다다!
“그어어어!”
그러자 변이체들이 양손과 양발로 지면을 박차며, 엄청난 속도로 아군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크아아!”
“으억!”
생김새는 구울과 비슷했지만, 그 성능은 천지차이였다.
괴력과 더불어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달려드는 변이체들은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만타군의 병사들이 속수무책을 쓰러지고 있었다.
“크하하하! 그래, 모두 죽여 버려라.”
그러자 자신의 부하들을 한순간에 괴물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샤와푸흐가 통쾌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안나가 두려움에 차올라 만타의 소매를 붙잡았다.
전황이 급격히 불리해지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
레온의 표정에는 조금의 절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치열한 전장이 아니라 흡혈 포탑을 바라보며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바로.
‘조금, 조금만 더.’
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때.
띠링.
‘됐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렸던 한 줄기 효과음에 레온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바하모르의 흡혈 포탑의 궁극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레온이 커다랗게 시동어를 내뱉었다.
“바하모르의 흡혈 포탑, 궁극기 사용!”
그러자.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처척-!
두둥-.
핏빛 안개를 내뿜는 포탄을 쏘아 낸 후 잠잠하던 흡혈 포탑에서 갑작스레 포구가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퍼엉-!
그러더니 폭음과 함께 포탄 하나를 발사하였다.
한데 앞서 말했던 궁극기라는 거창한 이름치고는 초라한 이펙트였다.
한데 포물선을 그리며 전장의 중심으로 떨어지고 있는 포탄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일반적인 형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른 포탑에서 발사되는 포탄들은 원형인데 반해, 이것은 직육면체의 형태였던 것이다.
휘우웅-.
쿠웅!
잠시 허공을 부유하던 기묘한 포탄은, 이내 멀리 가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포탄에서는 어떠한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어?”
“그어어어!”
수십의 변이체들이 날아온 물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액!
촤아악!
변이체들이 적들을 찢어 내던 날카로운 손톱으로 마구 할퀴어 댄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았다.
변이체들에게 조금 더 이성이 남아 있었다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할퀴고 있는 것은 포탄 같은 게 아니라, 거대한 ‘관’이라는 것을 말이다.
한데 그때.
끼이익-.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관의 뚜껑이 스르륵 열렸다.
처척-.
그러자 그 안에는 키가 족히 2M는 넘을 것 같은 거구의 남자가 눈을 감고 있었다.
턱시도를 연상케 하는 복장이었다.
“……끼에익.”
“그어.”
무방비 상태로 있음에도, 풍겨나는 압도적인 아우라에 변이체들은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뒤편에 잇던 아군들조차 압도될 정도였다.
그러던 그때.
의문의 존재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현혹될 것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잠시간 그 상태 그대로 변이체들을 오시하다가.
이윽고 ‘흡혈귀 군주, 바하모르’가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이 건방진 피조물들이 감히.
그 순간 엄청난 기운이 폭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바스커빌가의 개.
바하모르의 한마디 말과 함께 그의 검은 망토가 나부꼈다.
-크에에에!
-크아아아!
그러자 그 속에서 망령의 형태를 한 수많은 개들의 형상이 쏟아져 변이체들을 갈가리 물어뜯기 시작하였다.
우걱우걱.
그드득.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펼쳐지던 그때.
레온이 그 진풍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가 좀비면 우리는 뱀파이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