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한적하기 짝이 없는 썩어 가는 들판.
슈웅!
그곳에 갑작스러운 효과음이 울려 퍼지더니, 느닷없이 포털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후아.”
그 안에서 가쁜 숨을 내뱉는 레온이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핀 뒤에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다. 타이밍을 잘 잡았어.’
그는 귀환용 포털을 통해 히든 던전을 벗어나, 처음 입장했던 곳으로 되돌아온 찰나였다.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한 장소에 도착하자, 가득했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려 왔다.
하지만 그 안도감을 즐긴 것은 잠시 뿐이었다.
“끄응.”
무엇이 떠올랐는지, 레온이 침음을 흘렸다.
‘아오, 쪽팔려.’
사실 그는 지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 도망을 치다니.”
그랬다. 점차 적으로부터 도망을 쳤다는 사실이 자각되어오자, 고개를 치켜드는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것이다.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입은 상태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계속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 해 보아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 분노는 결코 의문의 여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안일했던 자신의 행동을 책망하고 있었다.
레온은 의문의 여인을 향한 억하심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 의문스러운 행동을 하기는 했으나, 사실 결과적으로 그녀가 레온에게 해를 가한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혹시라도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취한 행동이 불순한 의도였다면.
자신의 시체가 예배당에 널브러져 있던 몬스터의 사체 옆에 놓여 있었을 것이었기에.
그런 빈틈을 내 주었던 자신이 용납이 안 되는 것뿐이었다.
레온이 자꾸만 떠오르는 자신의 실책들에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가 있었어. 인장이라는 엄청난 히든피스를 가지고 있다고 해 봐야, 난 아직 노멀 직업 50레벨에 불과한데 말이야.’
잠시 까먹고 있었다.
이 판테라에 얼마나 강자가 많은지를 말이다.
그가 인장을 얻은 지, 한 달 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자신이 멈추어 있던 순간에도 랭커들은 계속 레벨링을 하고 있었을 테니, 꽤나 큰 격차로까지 벌어졌을 터였다.
레온이 그 사실을 되짚으며 이내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무리 내 직업이 더 좋다고는 하지만, 게임이니까 레벨을 무시할 수는 없지.’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느긋하게 일을 진행한 것 같았다.
본 네크로맨서의 면면을 파고드는 데 푹 빠진 나머지, 정작 전 주인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과 더욱 강력한 직업을 만들어 내는 데에 속력을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최대한 빨리 인장을 사용해 직업을 창조해야겠어.’
그리고 그러려면 빠르게 본 네크로맨서의 직업 퀘스트를 해결해야 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현재 그가 지니고 있는 직업 퀘스트들을 떠올려 보았다.
크게 두 가지였다.
본 네크로맨서의 일파를 찾는 것과 보스 몬스터 스켈레톤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흠, 일파를 찾는 건 단서가 없으니……. 일단 후자부터 후딱 해치울까. 그래, 쟈켄부터 만나 보기로 하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레온은 네크로폴리스가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때마침 지고 있던 석양을 바라보게 되었다.
한데 그 순간.
‘뭐, 뭐지?’
그가 왜인지 무척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일으켰다.
그건 바로 해괴하게도 그 노을 진 배경에, 볼을 발그레 붉혔던 의문의 여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암습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여자의 얼굴이 비춰 보이다니.
‘……나도 참.’
레온은 머쓱한지, 연신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신 차리자 생각하며, 세차게 고개를 가로젓고 난 레온은.
‘아서라, 이제 다시 볼 인연도 없는 사람인데.’
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걸음을 재촉해 나갔다.
하지만.
이때 레온이 간과한 사실은, 사람 일이란 언제나 예측 불가하게 펼쳐진다는 것이었다.
* * *
잠시 후.
레온은 순조롭게 네크로폴리스로 복귀했고, 곧장 쟈켄의 집으로 향했다.
물론 그 이유는 직업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레온은 몇 번 와 봤었던 지라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한데 무슨 일인지 그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앞에 우두커니 멈춰서 있었다.
그러던 그때, 레온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감탄을 내뱉었다.
“호오? 엄청 깔끔해졌는데? 이제 제법 가게 같잖아?”
그건 바로 잠깐 사이에 싹 바뀌어 버린 재료 상점의 외견 때문이었다.
페인트가 죄 벗겨져 있던 푯말은 다시 깔끔히 그려져 있었으며, 흉가 같던 외부의 모습은 깨끗이 보수되어 있었던 것.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도 평범한 영역까지는 회복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바뀐 것은 외견뿐이 아닌 듯 보였다.
“어라? 재료 상점이 새로 생겼네.”
“오, 진짜네? 한번 구경이나 해 볼까?”
“그래, 그러자. 왠지 이런 구석진 곳에 있는 상점에 히든피스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잖아. 흐흐.”
“헉! 그래그래.”
갑작스레 등장한 새로운 상점에 관심을 표하며, 상점 앞을 기웃거리는 손님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문전성시는 아니었지만, 파리만 날리던 과거와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였다.
‘크으, 내가 다 뿌듯해지네.’
순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온은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고, 코끝이 찡해 왔다.
이전에 돈을 못 벌어 오는 탓에 아내에게 갖은 핍박을 받던 고개 숙인 가장, 쟈켄의 슬픈 처지를 목격하였던 터였기에 이런 감동이 밀려오는 것이리라.
끼익.
이윽고 감상을 끝마친 레온이 마침내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
“안녕하세요!”
미소를 머금은 레온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고! 우리 금덩이 손님이 오셨네!”
쿵쿵!
‘그헉!’
손님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던 아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내팽개치더니, 그대로 레온에게 돌진해 왔다.
단언컨대 투우사를 향해 달려드는 투우의 기세와 호각지세였다.
“호호! 왜 이리 오랜만에 오셨어요!”
“아, 아니 그, 터헉! 크헙!”
아내는 레온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크억! 수, 숨이!’
그러자 레온은 거대한 풍채의 아내에게 파묻힌 채, 가쁜 숨을 토해 내야 했다.
벗어나려 하는데, 나올 수가 없었다. 힘이 장사였다.
이 정도면 그냥 밖에 나가서 아줌마가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더 돈을 많이 벌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레온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던 그때.
“어허! 은인에게 무슨 무례인가.”
뒤늦게 레온을 확인한 쟈켄이 아내를 향해 호통을 내뱉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든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레온을 품에서 해방시켰고, 격한 환영 인사가 끝이 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
‘끄응.’
레온은 여전히 어지러운 상태이기는 했지만, 드디어 쟈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레온의 첫마디는 역시나 칭찬으로 시작됐다.
“크, 가게에 이렇게 활기가 도는 것을 보니, 이제야 네크로폴리스의 사람들이 쟈켄님의 진면목을 알아 차렸나 봅니다.”
“하하, 자네가 저번에 넉넉히 챙겨준 사례비로 가게를 꾸몄더니. 손님이 발길이 다시 이어지더군. 이제 밥 굶을 일은 없을 듯하네. 전부 자네 덕이야.”
“하하, 별 말씀을요.”
‘……사례비? 아!’
쟈켄의 말을 듣고 보니, 일전에 사혼석을 정제할 때 책정된 금액보다 상당 부분 더 얹어서 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쟈켄은 그 돈을 가지고 다시금 가게를 꾸몄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허튼 곳에다가 쓰지는 않은 모양이니, 다행이었다.
아니, 저런 아내를 두고 쓰지 못한 것이려나.
한동안 쟈켄은 가게의 실적이 계속 상승세를 타고 있으며, 이것이 지속만 된다면 외곽 지역을 벗어나 중심지로 가게를 옮기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레온은 신이 난 어린아이 같은 쟈켄의 말들에 모두 친절히 호응을 해 주었다.
레온 본인 또한 쟈켄의 이런 달라진 상황이 진심으로 기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때.
띠링.
‘으응?’
그의 귓전에 난데없이 효과음이 들려왔다.
-당신을 향한 쟈켄의 호감도가 최고치를 달성하였습니다.
-쟈켄에게 당신의 위치가 ‘복덩이 은인’으로 격상되었습니다.
그 효과음은 레온을 향한 쟈켄의 호감도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레온은 메시지를 보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호감도 맥스를 찍는 게 가능한 건가?’
쟈켄과 자신이 알게 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호감도가 최상치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의 말처럼 이런 식으로 빠른 시간 내에 NPC의 호감도가 폭발적으로 오르는 일은 판테라 내에 흔치 않았다.
이 일은 본 네크로맨서와 쟈켄 가문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애초에 레온을 향한 쟈켄의 호감도가 매우 높은 상태에서 시작하게 된 점과, 사례금을 많이 챙겨 준 것이 가게를 기사회생하게 만드는 단초가 된 점이, 짧은 만남임에도 이런 이벤트를 성사시킨 것 같았다.
‘흠, 근데 뭐 없나……?’
말로만 복덩이라 하지 말고 혜택은 뭐 없나요라고 내심 생각하던 그때.
띠링.
기다렸다는 듯이 또다시 효과음이 들려왔고 뒤이어 추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호!’
그의 바람이 이루어져 있었다.
내용을 모두 확인한 레온의 두 눈이 놀라움에 커다랗게 확장되어 있었다.
-가게의 물품을 구매 시, 15%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재료 정제 시, 별도의 수수료를 받지 않습니다.
‘이건 무슨 개이득이냐?’
레온은 생각지도 않게 얻게 된 이득에 자연스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물품 값을 깎아 주는 것도 모자라, 정제를 할 때 수수료를 안 받는다니!’
그가 좋아할 만도 했다.
재료 상점이라는 특성상, 포션을 비롯해 지속적으로 소비하게 될 품목들이 많았던 데다가, 사혼석의 정제는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 같았기에, 장기적으로 보면 더욱 좋은 혜택을 손에 얻은 것이었던 것이다.
순간 레온이 새로운 깨달음을 떠올렸다.
‘절박한 처지의 NPC를 향한 선의의 행동은 이런 뜻밖의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러던 그때.
쟈켄이 따스한 눈길로 레온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데 그건 그렇고 어쩐 일로 다시 왔는가? 사혼의 파편을 더 모아 온 겐가?”
레온은 쟈켄의 말에 고개를 젓고 이어 말했다.
“아닙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일단 이것부터 한번 보시죠.”
레온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쟈켄에게 인벤토리에서 뼈의 정수를 꺼내어 건넸다.
그렇게 얼떨결에 건네받은 쟈켄은.
“이, 이건!”
이내 동공을 부풀리며 마치 귀중한 보석이라도 얻은 것처럼, 정수를 낱낱이 살피기 시작했다.
‘오오! 내 생전에 이것까지 보게 될 줄이야.’라는 추임새도 곁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진정되기까지 묵묵히 바라보는 레온은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격 조건(1)’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더 이상 경험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보상으로 명성 500을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5골드를 획득합니다.
‘흐흐, 좋았어!’
쟈켄의 호들갑스러운 반응과 함께 눈앞에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자네는 정말 대단하구먼. 아니, 대단하다는 말로는 영 부족한 것 같네.”
어느새 흥분을 가라앉힌 쟈켄이 경이로운 존재를 바라볼 때의 눈빛으로 레온을 쳐다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별말씀을요. 그다지 힘든 것도 없었던 걸요.”
“허허, 겸손도 그 정도면 흉이 된다네. 이것을 얻느라 들인 위험이 엄청났을 텐데 말이네. 몸 성히 온 것이 천만다행일세.”
‘응?’
레온은 쟈켄의 말을 듣고는 약간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보스 몬스터를 잡는 것이 위험한 과정이기는 하나, 시체에다가 해체 스킬을 사용한 것뿐인데 쟈켄의 반응이 너무 거창했기 때문이었다.
‘뭐지? 그냥 해체를 하면 다 나오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이어진 다음 순간, 쟈켄이 충격적인 내용을 덧붙였다.
“참으로 너무하지 않는가. 혹여 해체 과정이 실패한다면 몬스터의 시체가 뼈의 모습으로 다시 깨어나 공격을 해 온다니 말일세.”
‘……이게 무슨 개소리야?’
보스 몬스터의 해체를 잘못하면 되살아나서 공격한다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레온의 눈앞에 쟈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기 시작했다.
-숨겨져 있던 해체 스킬의 정보를 발견하였습니다.
-해체 스킬에 새로운 설명이 덧붙여집니다.
[해체]
몬스터의 사체에서 뼈를 해체해 ‘뼈 조각’을 추출합니다.
(추가)
-보스 몬스터를 해체할 시, 50%의 확률로 몬스터의 시체가 스켈레톤 형태로 되살아나 시전자를 공격합니다.
-이때 해당 몬스터의 본래 몬스터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생전의 능력치의 200%로 적용됩니다.
‘어디 한 번 되살아난 보스 몬스터한테 당해 보고 알아차려 봐~.’
라는 악의가 듬뿍 담겨 있는 전개에 레온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쟈켄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새롭게 추가된 해체 스킬의 설명에 보스 몬스터의 해체가 실패할 경우, 지정했던 보스 몬스터가 뼈의 형태로 다시 되살아나 공격해 온다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려 생전의 두 배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지닌 채 말이다.
‘아니, 이 미친 개발사 놈들은 이런 중요한 사항을 사용하기 전에 업데이트를 안 해 줘?’
그렇게 한동안 레온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쌍욕들을 마음속으로 쏟아 내던 그때.
“……사실 자네에게는 미안한 말이네만,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하나 걱정이 들었었네.”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쟈켄이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레온은 무언가를 직감하고 그런 그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쟈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본 네크로맨서로서 성장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끝내 이렇듯 뼈의 정수까지 가져올 정도로 노력하는 자네의 모습을 보니 자네를 믿지 않을 수가 없구먼…….”
순간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다가.
“……놀라지 말게. 자네가 떠나 있던 시간 동안 또 다른 본 네크로맨서 일파의 후예를 찾아냈다네.”
‘뭐?’
놀라운 이야기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