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무한전직-24화 (24/332)

# 24

* * *

흐리멍덩한 두 눈은 초점을 잃어 있었다.

파리가 다녀가도 모를, 쩍 벌어져 있는 입.

레온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지금의 그를 본다면 과연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처참한 꼴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다행히도 그는 점차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듯 보였다.

멍했던 표정은 점점 슬프게 변해 가긴 했지만 말이다.

‘혹시 꿈인가?’

레온은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닐까 하는 서글프기 짝이 없는 기대를 품어 보았다.

스윽.

볼이라도 꼬집어 볼까 슬며시 손을 올려 보는 레온이었지만.

“……휴, 됐다. 내 볼만 아프지.”

굳이 그것을 행동으로까지 옮기지는 않았다.

슬프지만 지금 이 순간은 빼도 박도 못하는 현실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일련의 문장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노멀 클래스를 획득하셨습니다.

-인장 티어 상승에 실패하셨습니다.

-클래스 진화에 실패하셨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당당히 떠올라 있는 시스템 메시지는 그에게는 잔혹하기 짝이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크흑, 도박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건 바로 그의 이번 인장 사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여태껏 인장을 사용하며,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끔찍한 사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한 번은 터지는구나.’

여태껏 운 좋게 한 번도 실패를 한 적이 없었지만, 내심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생각은 했었다.

다만 그게 이리도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을 뿐.

‘휴-.’

그의 얼굴에 자연스레 씁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 지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그에게서 커다란 실망감과 패배감이 엿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밖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레온이 풀이 죽는 일은 없었다.

까득-.

난데없이 귀를 괴롭히는 소음만이 방 안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 소리는 바로 레온이 이를 악무는 소리였다.

‘됐어! 어차피 일어난 일! 현실을 직시하자!’

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든 그는 오히려 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허무함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무너진 모래성이야 다시 쌓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직 어떤 결과가 벌어졌는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래, 최악은 아닐 거야.’

이내 정신을 추스른 그가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충격에 잠시 뒷전으로 밀어 놓았던, 현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인장.”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스템 창이 레온의 눈앞에 떠올랐다.

[창생의 인장]

티어 3 / - (경험치 획득 불가)

개방 특성(4/?)

(1) 창조(사용 불가)

(2) 합성(사용 불가)

(3) 진화(사용 불가)

(4) 초기화

인장 티어를 초기화합니다. 소유주의 레벨과 직업 또한 동시에 초기화됩니다.

“……허허.”

상세히 내용을 살펴본 레온은 무심결에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앞서 다짐했던 자신의 생각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정합니다. 최악의 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억 소리를 낼 뻔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경험치 획득 불가에 창조, 합성, 진화 특성이 모두 막혔다니…….’

눈앞에 펼쳐진 내용이 정말 최악의 상황이라 단언할 만한 것들이었던 것이다.

인장의 티어 상승을 위한 기초 토대인 경험치 획득이 막혀 있었으며.

직업을 얻을 수 있는 특성들 전부가 ‘봉인’ 상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휴, 전부는 아니지.”

그래, 전부는 아니었다.

다만 열려 있는 것이 ‘초기화’ 특성 하나라는 것일 뿐.

포기하면 편해~.

얼른 포기하고 초기화하라고~.

마치 인장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해 주는 듯했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그 말을 애써 무시하며, 레온은 다음 작업으로 넘어갔다.

‘휴, 그래도 새로 얻은 직업도 보기는 봐야지.’

힘겹게 흔들리는 멘탈을 붙잡으며,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인 ‘섀도우 워커’에 눈을 돌린 것이었다.

초기화를 하면 사라질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번 살펴보기는 해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의 시선에 섀도우 워커의 정보가 담기고 있었다.

직업 총람(4/?)

4. [섀도우 워커]

클래스 랭크 : 노멀 / 진화 불가

클래스 특성 : 단일

수많은 것들을 살인의 도구로 삼는 암살자들이지만, 그런 그들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암살자들이 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발밑에 지니고 있는 그림자, 그 자체를 자신들의 무기로 삼은 이들 말이다.

그들이 바로 섀도우 워커다.

보유 패시브 스킬

1. 은밀한 밤손님

-밤이 되었을 때, 모든 능력치가 15% 상승합니다.

-밤이 되었을 때, 이동속도가 20% 증가합니다.

보유 액티브 스킬

‘그림자 주박’

대상의 그림자로 은밀히 발을 묶습니다.

-상대를 1초 동안 결박합니다.

‘그림자 촉수’

그림자를 통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촉수를 만들어 냅니다. 이 그림자 촉수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사용 가능 촉수 2개.

‘그림자 은신 Ⅱ’

그림자에 모습을 숨깁니다.

첫 공격에 크리티컬이 100%로 발휘되며, 크리티컬 대미지가 200% 적용됩니다.

-이제 전투 중인 상대의 그림자에도 스며들 수 있습니다.

‘그림자 아공간’

그림자 속에 무엇이든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인벤토리와 다르게 아이템화되지 않는 것들도 넣을 수 있습니다.

현재 크기 : 30×30

-살아 있는 생명체는 넣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섀도우 워커의 정보를 다 훑어보고 난 후.

레온은 다른 의미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얼굴에 만들 수밖에 없었다.

“……참나.”

그는 짧은 탄식을 토해 내더니, 격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하, 이게 왜 노멀 등급이냐고?”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인 레온이었다.

차라리 쓰레기 직업을 주든가.

그럼 억울하지나 않지 말이다.

그랬다. 섀도우 워커는 랭크만 레어 등급이었다면 그가 얼씨구나 하고 절을 올린 뒤, 덩실덩실 춤까지 췄을 만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순간 레온이 속으로 생각하였다.

‘스킬도 하나 버릴 것이 없고 좋구먼! ……클래스 기준이 너무 깐깐한 거 아냐?’

아무리 보아도, 여러모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스킬들이 많았기에.

‘그냥 이대로 키워 볼까?’

문득 섀도우 워커를 계속 키워 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시 스쳤지만.

이내 그 생각은 스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에고, 부질없다.”

레온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레벨을 못 올리게 된 순간 끝난 거지.’

그도 그런 것이, 이대로 섀도우 워커를 계속 키운다면 인장의 티어를 올릴 수 없으니, 50레벨의 한계에 계속 멈춰 있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스킬이 아무리 좋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장 중요한 레벨을 못 올리는데 말이다.

즉, 붙잡고 있어 봐야, 그저 시간 낭비라는 뜻이었다.

이내 레온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군.’

바로 ‘초기화’를 하는 것.

그것밖에는 이제 답이 없었다.

그래, 고민해 보아야 무엇 하겠는가.

‘에잇! 어쩔 도리가 없으니 행동으로 옮겨야지!’

하나 입 밖에 명령어 하나만 내리면 되는데도.

“…….”

레온은 한동안 우물쭈물했다.

막상 하려고 하니, 온갖 걱정이 밀려왔던 것이다.

‘제발!’

이윽고 레온이 닫혀 있던 입을 열려 하고 있었다.

이 선택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인장 초기화.”

파앗!

그렇게 그의 입이 달싹거린 그 순간.

그의 몸에서 다시금 일전의 빛무리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고.

-초기화를 선택하셨습니다.

-현재 레벨과 직업이 초기화됩니다.

동시에 전혀 반갑지 않은 내용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크흡.’

그리고 레온은 별안간 침음성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그의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뭐, 이딴 더러운 기분이 다 있어?’

마치 모든 활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랄까?

이전에 ‘창조’와 ‘진화’ 특성을 사용했을 때와는 정반대였다.

온몸으로 퍼지는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느낌은 저절로 인상을 쓰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사실 지금 그런 문제는 사소한 것이었다.

현재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초기화하면 뭐라도 주겠지? 아니, 주시겠죠?’

‘초기화’ 특성이 무언가 특수 효과를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 하나였다.

그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이걸로 끝인가요? 신이시여, 정말? 리얼리?’

다시 한 번 신에게 끝없는 질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얼마나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가.

이제 와서 아무것도 없는 0의 상태로 복귀하라는 것은 너무나 끔찍하고 잔혹한 일이었다.

‘제발, 뭐 하나 정도는 줄 수 있잖아요! 하나만 남겨 주세요! 신이시여! 0과 1의 신이시여! 오오! 기계신이시여!’

신이라는 신은 모두 불러낸 후, 이제는 가공의 신을 만들어 가며 숭배하는 레온이었다.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짚는 심정으로 절절하게 신앙을 간증하던 그때.

띠링.

‘어라?’

레온은 귓전에 난데없이 효과음이 들려온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쉴 새 없이 빠져나가던 기운은 멈췄고, 몸 상태는 잠잠해졌다.

‘설마.’

이런 찰나에 들려올 효과음은 시스템 메시지가 분명했다.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그는 가슴속에 일말의 기대를 품은 채.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끔뻑끔뻑.

‘읏, 아, 안 보여.’

얼마나 힘을 주어 눈을 감고 있었던지, 시야가 흐릿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점차 시야는 밝아져 갔다.

조금씩 효과음을 만든 의문의 메시지가 눈에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자!’

그는 순식간에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전부를 확인한 레온은 말도 못 할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초기화에 성공하였습니다. 일정량의 보너스 스텟이 지급되었습니다.

-티어 3 초기화 혜택으로 이전 직업들의 스킬 중 전승할 스킬 4개를 골라 주십시오.

-초기화 특전, 이전 최종 레벨(50)에 도달할 때까지, 경험치 획득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소유한 칭호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초기화 특성 또한 엄청난 혜택을 갖고 있었던 것!

레온이 미친 듯이 웃음소리를 만들었다.

“……크하하하! 믿쑵니다!”

역시 갓든피스.

다행히도 초기화는 그저 초기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걸음마 때로 돌아가게 하는 줄 알았더니, 이 정도면 신생아가 운전대를 잡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캬하하! 하나를 구하면 열을 주시는군요! 갓인장! 아니, 갓갓입니다!”

레온이 기쁨에 찬 나머지, 객실에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꽝꽝.

그러자 그의 객실 옆을 사용하고 있는 손님이 사이의 벽을 쳐 댔다.

“아, 거참, 조용히 좀 합시다! 부흥회는 현실에서나 가시고!”

불만에 가득 찬 외침 또한 동봉해서였다.

“캬하하하하!”

하지만 그럼에도 레온의 쾌활한 웃음소리는 어째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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