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5화.성기 순례(3) (348/371)

<성기 순례(3) >

이정아와 만난 곳은 신사동 연어 전문점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밥을 사주고 싶다는 그녀가 고른 장소다. 

오랜만에 만난 윤리 선생님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숏 팬츠와 앞머리가 짧아진 산뜻한 헤어스타일, 톤업된 메이크업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재 방학 기간이고 여름이니 패션은 그럴 수 있다. 

딱딱하고 사무적이던 인상과 태도가 부드럽고 친근하게 변한 것이다. 

뮤버프를 받아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전에 없던 묘한 색기까지 서려 있었다. 

원래 본판 비주얼은 규율이와 자매라고 할 정도로 괜찮았던 그녀가 이제야 자신의 진가를 깨닫고 잘 활용하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흐뭇하고 보기 좋았다. 

윤리 선생님이라고 해서 꼭 고루할 필요는 없지.

"정아씨 분위기가 많이 변했는데요?"

"아, 어제 머리 새로 했는데, 이상해요?” 

"아뇨아뇨, 어려 보여서요.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화장법도 달라졌죠?"

"에헤이, 만나자마자 너무 띄워주신다. 어차피 밥은 제가 살 건데.”

그녀는 민망함에 손사래를 치고는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바뀐 것은 비단 외모와 말투뿐만이 아니었다.

"대표님 맥주 한 잔 하실래요? 저는 목이 말라서 한 잔 마시고 시작해 야겠어요. 아, 더워.” 

"와, 정아씨 술꾼 다 됐네.” 

“에이, 맥주 한 잔 가지고 술꾼이라니, 맥주는 음료수죠.” 

"허허."

“저 요즘에 혼맥도 잘해요.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원짜리 해외 맥주 사놓고 1일 1캔 하면서 드라마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에요.” 

"알레르기는?"

“괜찮던데요?"

"좋네, 그럼 저도 한 잔 마실게요.”

알콜 알레르기가 사라진 것도 아마 뮨버프 때문일 테지. 

나란 놈의 음경이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지난날의 창남인생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평가할 만한 것은 아니구나. 

나,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살았다. 

비록 그녀들 스스로는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연어 회와 맥주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정작 이정아의 가장 큰 변화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규율이는 잘 하고 있죠?” 

"응? 규율이랑 연락 안 해요?"

“맨날 통화 하긴 하는데 일에 대한 건 제가 일부러 잘 만 물어봐요. 이제 겨우 시작인데 괜히 부담 가질까 봐요.” 

"잘 하고 있어요. 지금 여기저기서 섭외 엄청 들어오고 있는데 지금 분위기로 보면 업키걸 초반 때 보다 더 좋아요.” 

"대표님 가시면 누가 담당하는 거예요? 염 대표님?” 

“염 대표는 소녀날다 A팀 담당이고, A&R팀 김현동 팀장이 2팀까지 맡아서 진행하기로 했어요.” 

"아, 대표님 군대 동기라던 분?” 

"예, 원래 프로듀싱을 전문으로 하는 친구라서 저보다는 잘할 거니까 걱정 만 하셔도 돼요.” 

"저 이제 규율이 걱정 만 해요. 회사에서 알아서 잘 해주시겠죠 뭐.” 

"와. 정아씨 진짜 많이 변했다."

"흐흐흥, 대표님이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요?” 

"규율이를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 

"포기까지는 아니고요." 라고 샐쭉하게 대꾸한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정규율 말고 이정아한테 신경 좀 쓰려고요."

“그건 반가운 소리네요. 이정아한테는 이정아가 더 중요하죠.” 

"이런 말 하면 규율이한테 좀 미안하긴 한데, 걔 하나 내려놨다고 제 삶이 너무 여유로워진 거 있죠. 

그런 여유가 생기니까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더라고요.” 

"좋네.” 

"제가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대표님도 그런 점 때문에 회사 그만두시는 거 아니에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정아의 말을 듣고 보니 나와 그녀의 처지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정아는 규율이, 나는 보라돌이들에게 얽매여서 정작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것 아닌가. 

물론 그녀에 비하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지만, 이제는 타성적인 책임감에서 벗어나 내 삶을 다독여주겠다는 목적 만큼은 비슷했다. 

뜻하지 않게 공감대를 형성한 우리는 맥주 두 잔씩을 마신 뒤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내내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아직 할 얘기도 더 남아 있었던지라 누가 먼저 제안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2차 술자리로 장소를 옮기는 분위기였다.

“맥주로 계속 갈까요?” 

"대표님 편하신 대로 해요. 전 소주만 아니면 돼요.” 

"음. 그럼 가로수길 쪽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 거기 분위기 괜찮은데 많잖아요.” 

"대표님이 안내해주세요. 저는 그쪽은 잘 몰라서....”

이정아의 분홍색 아우라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나를 만나는 내내 내 쪽을 향해 있었다. 

그녀가 섹스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로수 길에서 술을 마신 뒤 우리 집으로 가면 될 것 같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변수가 발생했다.

"정아씨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예, 그러세요.”새로 옮긴 술집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던 중, 이틀 전에 15 질싸를 나눴던 정아윤과 마주친 것이다.

"어?”

"어, 오빠.”

"뭐야.” 

"나 회식, 오빠는?” 

"어. 나는 누구 좀 만나고 있어.”

 "여자?” 

"규율이네 이모."

"아항, 우리 자리는 저기.”

정아윤이 가리킨 구석 자리에는 10여명의 남녀가 모여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맨스로망' 직원들이었다.

"회식을 여기까지 와서 해? 너네 회사 홍대잖아.” 

"아, 우리 본사가 여기거든, 오늘 본사 미팅 있었는데 본부장님이 회식 시켜주는 거야. 우리 요즘 점유율 쭉쭉 올라가고 있는 중이거든.” 

"오. 축하축하.” 

“립밤 이후에 판매 부수가 뛴 거니까 오빠 덕분이기도 해, 안 그래도 아까 오빠 얘기 나왔었는데.”

살짝 꼬인 말투와 한 톤 업 된 목소리, 배실배실 흘리는 눈웃음을 보니 술이 조금 들어간 것 같다.

"사무실 사람들이랑 민사할래? 다 오빠 팬이야.” 

"어어. 나 지금 들어왔거든? 일단 일행이랑 얘기 좀 하고 이따가 시간되면 갈게.” 

"알았어.” "근데 아윤씨 좀 취한 거 같은데?” 

"응, 좀 그런 거 같아, 히히히.”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응응, 알았어!”

정아윤은 예의적인 내 걱정에서 큰 유대감을 느낀 듯 고개를 귀엽게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정아가 미리 자리 잡고 있던 테이블에서도 나와 정아윤이 만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먼저 정아윤의 정체를 밝혔다.

“잡지사 에디터님인데 여기서 회식 한대요."

"무슨 잡지예요?”

"맨스로망'이라고 남자들 보는 잡지요.” 

"아, 뭔지 알아요. 가끔 남자 애들이 학교에 가져와서 압수당한 거 교무실에 몇 개 있어요. 그거랑 또 유명한 거 있던데, 뭐였더라. 믹스? 커피?” 

“맥심. "아. 맞아요 맥심.” 

"그걸 왜 압수해요. 19금도 아니고 전체연령 간데."

"그게 전체연령 이라고요? 막 여자 모델들이 벗고 나오던데?” 

"나중에 확인해 봐요. 전체연령 맞아요.” 

“흐응, 그렇구나.”

1시간쯤 지났을까. 

이정아와 대화를 하느라 정아윤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던 그때, 정아윤이 맨스로망 편집장과 본사 본부장을 데리고 직접 우리 자리로 찾아왔다. 

그들은 내가 립밤을 맨스로망 표지모델로 기용해준 것에 고마움을 전했다. 

YH엔터 대표직을 내려 놓는다는 기사를 접했다며 앞으로의 삶에 행운을 빌어주기도 했다. 

나는 모든 공을 정아윤 에디터에게 돌리며 그녀의 위상을 세워주었다. 

이정아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쪽 회식자리로 잠깐 가서 나머지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나와 인사를 나눈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식자리를 마감했고, 나는 이정아와 좀 더 술을 마시며 자리를 이어갔다. 

사건은 나와 이정아가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터졌다.

"와, 정아씨 술 엄청 늘었네, 왜 이렇게 멀쩡해요?"

"그동안 꾸준히 수련한 혼맥이 효과를 보나 봐요. 푸후, 근데 오늘따라 만 취하긴 하네요."

"그럼 한 잔 더 하실래요?” 

"대표님 괜찮아요?"

"와, 정아씨한테 그런 말을 듣는 날이 오는구나, 저는 솔직히 딱 알딸딸한 정도?"

"그럼 한 잔 더 해요.” 

“저희 집으로 갈래요?”

"그래요.” 

"잠깐만요, 택시 부를게요."

우리는 택시를 호출하기 위해 술집 앞 도로변에 잠시 멈춰 섰다. 

목적지를 우리 집으로 설정하고 콜 버튼을 터치했다. 

그때 이정아가 내 팔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저 분, 아까 그분 아니에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우리 뒤편에 있던 골목이었다. 

그곳에는 취해서 비틀거리는 정아윤과 그녀를 뒤쫓으며 애절하게 팔을 붙드는 웬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포마드 머리에 퉁퉁한 몸집을 한 그는 아까 회식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진작가였다. 

정아윤이 남자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나와 이정아가 있는 도로변으로 걸어온다.

"어... 여자 분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이정아의 말투에서는 같은 여자로서의 우려감이 느껴졌다. 

내가 받은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정아윤의 짜증스런 표정과 팔을 뿌리치던 태도, 남자의 능글맞으면서도 다급함이 느껴지는 표정만 놓고 보면 사진작가가 취한 정아윤을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이번에는 정아윤의 어깨를 감싸 만든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한 잔 더 하자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고, 정아윤은 싫다는 뉘앙스를 확실히 전하고 있었다. 

내 나쁜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남자를 밀치려던 정아윤이 되레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진다.

"어머!”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라 거리에는 우리말고도 다른 행인들도 많았다. 

주변에 있던 행인들도 정아윤의 상태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나와 이정아는 동시에 그쪽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우리 둘 다 규율이가 클럽에서 당했던 범죄를 경험했던 터라 전투력이 확 올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정아의 성격상, 정아윤이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개입을 했을 것이다. 

이정아가 내게 묻는다.

"여자분 성함이 어떻게 돼요?” 

"정아윤이요.”

"정아윤.”

"예.” 

"제가 얘기할 테니까 대표님은 가만히 계세요."

그것은 얼굴이 알려진 나를 대신해서 자기가 해결을 보겠다는 말이었다.

“아윤씨. 괜찮아요?”

정아윤과 포마드는 우리가 말을 걸기 전까지 인기척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이었다. 

나는 아직까지는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은 채 정아윤을 일으켜 세웠다.

"아윤씨, 괜찮아?” 

"어, 오빠?”

내 얼굴을 확인한 정아윤의 표정에서 깊은 안도감이 드러난다. 반면 도라에몽의 퉁퉁이를 닮은 사진작가는 당황했다.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하듯이 내게 말한다.

"아... 편집자님이 많이 취하셨어요.” 

"다른 분들은 다 가셨어요?"

"예? 아, 2차로 자리 옮겼는데요. 편집자님이 너무 많이 취하셔서 제가 데려다드리려고 같이 나온 거예요.” 

“나 혼자 갈 수 있다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 느낌상 그렇게 가까운 사이 같지는 않아보였다. 

정아윤의 반박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정아가 상냥한 미소를 띠며, 하지만 똑 부러지는 선생님 말투로 퉁퉁이에게 통보했다.

"아윤씨는 제가 데려다 드릴 테니까 들어가세요.”

그때 내가 호출한 택시기사에게 전화가 왔다. 

이정아는 취하지 않은 척 애써 몸의 중심을 잡고 있는 퉁퉁이에게 다시 한 번 통보했다.

"택시 왔네요. 저희 이거 타고 같이 들어가면 되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그제야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깨달은 퉁퉁이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예,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아윤 씨, 도착하면 단톡방에 톡 하나 남겨주세요.”

정아윤은 그를 향해 빨리 꺼지라는 듯 손을 까딱거리며 "네에네에" 하고 대답했다. 

그가 골목 안쪽으로 터덜터덜 사라진 뒤, 나와 정아윤, 이정아는 잠시 뒤에 도착한 택시에 함께 올랐다. 

내가 앞좌석에, 두 사람이 뒷자리에 탔다. 

내가 이정아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기사에게 전한다.

"기사님, 목적지 좀 바꿀게요.” 

"예, 그러십쇼.” 

"아윤 씨, 집이 어디에요?"

여기까지가 우리 세 사람이 정아윤의 집으로 가게 된 전말이다. 

이게 보기에는 단순해 보여도 나와 정아윤의 관계, 우연한 만남,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이정아의 선한 오지랖, 정아윤의 만취, 퉁퉁이의 흑심까지, 자그마치 5개의 퀑 기술이 합쳐진 콤비네이션이었다. 

그리고 택시가 30분을 달려 정아윤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정아윤은 이정아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깊은 잠에 들어버렸다. 

몸을 흔들고 깨워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꽐라가 됐다.

"아... 대표님이 업으셔야 겠는데요."

이정아와 택시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늘어진 정아윤을 업었다.

다행히 그녀가 잠들기 전에 주소를 말해줘서 건물 앞까지 도착할 수는 있었지만 정확한 호수는 알지 못했다. 

이틀 전에 왔을 때는 그녀의 안내를 받아서 생각 없이 왔기 때문에 5층이라는 층수만 기억할 뿐이다. 물론 이정아 앞이라서 그마저도 모른 척 해야 했다. 나를 대신해서 이정아가 정아윤의 등을 토닥이며 묻는다.

"아윤 씨, 정신 좀 차려봐요. 지금 아윤 씨 집에 왔는데 집이 몇 호예요?"

"응... 503호요....”

한참을 흔든 끝에 정아윤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고, 그녀는 너덜너덜한 정신 속에서도 용케 1층 현관 비번과 자기 집 현관문 비번까지 말을 해주었다. 

이제 이틀 전 끈적끈적한 교미를 나눴던 침대에 정아윤을 눕혀놓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아아...”

내게 업혀 엘리베이터에 오른 정아윤이 야한 한숨을 흘리며 내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땀샘이 폭발적으로 열리며 식은땀이 줄줄 새어나온다. 

그래도 다행히 이정아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았....

"으으음, 오빠 살 냄새 너무 조타....”

야앗, 야아아아아앗! 

엘리베이터 문의 반사판을 통해 이정아와 눈이 마주쳤다. 

내 젖꼭지를 문지르고 있는 정아윤의 손동작까지 포착됐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불특정다수를 향한 술주정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하아아... 윤호 오빠 나 하고 싶어... 해 주세요....”

구아악! 

구아아아아아아악!

<성기 순례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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