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오빠도 이제 장가가야지!>
적폐 덮밥, 그로부터 7일 뒤.
예정대로라면 나는 40일 뒤에 한국을 떠나야 했다.
떠나고 싶었다.
나를 음해하려는 세력에 의해 유배처럼 결정된 사안이지만 솔직히 설렜고, 외국에서의 2년이 창남 같은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되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오를 통한 간접 치료가 라희의 다리 마비에만 조금 효과가 있을 뿐 나머지 멤버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다시 갈등에 빠졌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사실상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 나를 궁지로 몰아넣은 배후가 알고 보니 업키걸 놈들이었으니 외국으로 도피해야 할 명분마저 사라져버렸다.
업키걸 아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내가 많이 지치고 위태로워 보인다고 했다.
사실 나는 남들 앞에서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녀석들의 눈에는 속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많이 지쳐있는 상태이긴 했다. 번아웃 증후군에 우울증까지 겹쳐서 공황 증세까지 나타났고, 당장은 근성으로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내일의 안녕은 보장되지 않은 위태로운 상태였을 것이다.
휴식이 필요했다.
펑크가 난 곳을 임시방편으로 때우는 식의 단기 휴가 말고 아예 타이어 자체를 갈아 끼우는 대대적인 리프레시 말이다.
퍽커니 아우라니 보라색이니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보고 싶었다.
그것들이 내게 안겨 준 혜택과 사회적, 경제적 성공은 물론 고맙지만 언제까지 꼭두각시처럼 롤플레잉 미션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자기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굿이나 보고 떡이나 치라는 리야의 말이 고마웠고, 녀석이 해결해줄 수 없는 영역의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데우스 엑스 알리야의 은총이 깃들기를 내심 기대했다.
물론 외국으로의 도피는 내 마음속에 어지러이 자리잡은 수많은 속마음 중 하나에 불과하다.
회사원들이 마음속에 늘 사표를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굳이 회사를 그만두고 떠나야 할 명분이 없다면,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어글리 더클링의 데뷔와 성공을 위해 매진하며 뛰고 구르고 갈려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란이의 재기와 다른 녀석들의 성공을 그 누구보다 바라고 책임져야 할 사람 아닌가.
지금으로서는 업키걸이 그랬듯, 어느 날 갑자기 보라색 아우라가 사라지면서 내 두 번째 퀘스트가 끝나기를 바라는 쪽이 더 현실적이겠지.
내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계획된 일상은 계속됐다.
나는 일단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발언을 철회하지 않은 채 어덕의 데뷔 프로모션과 인터넷 가요 순위 채널 신설에 집중했다.
오늘은 어덕 데뷔곡 '예쁜 오리 새끼'의 뮤직비디오 초안이 도착했다.
회사 직원들과 어덕 멤버들이 모두 모여 모니터링을 한다.
직원과 어덕 멤버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초안이 마음에 들면 그대로 진행하는 거고, 거슬리는 부분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이 있으면 감독과의 상의 하게 두번의 수정을 할 수 있다.
촬영 현장에서 확인했듯이 발레 '백조의 호수'를 패러디한 '오리의 호수'가 컨셉이었다.
라희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간병과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소녀가장 결손녀. 지만 우울해보이지 않고 귀엽고 재기발기함.
란이는 실수투성이에 손님들에게 갑질을 당하는 패밀리 레스토랑 알바. 지만 결코 서툴지 않은 능숙한 색기가 있음.
미오는 남자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훈련하는 여군 부사관 후보생. 인데 군복을 코스프레 의상으로 만들어버리는 큐트 섹시미.
지유는 암 투병 중인 환우. 지만 왜인지 핏기 없는 얼굴이 그렇게나 청순하고 부성애를 자극함.
규율이는 팀원들의 배신 속에서 혼자 꿋꿋이 조별과제를 준비해나가는 이 시대의 평범한 여대생. 이지만 비주얼은 대학내일 표지 모델에 빼박 걸그룹 센터.
이렇게 알바와 학업, 생계 등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다섯명의 청춘이 각자의 꿈을 위해 정진한 끝에 마침내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우뚝 선다는 아주 희망찬 내용이었다.
그런데.
아주 희망차고 밝고 순수한 분위기여야 할 초안 영상을 쭉 모니터하다보니 글쎄, 콘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은꼴은꼴한 페티시 요소가 1인 1컷 이상씩 무조건 포진돼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시청연령을 12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놓고 섹슈얼하게 연출하지는 못 했지만 페티시 귀신인 나는 감독의 음습한 의도를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1. 할머니와 동생들이 모두 모인 단칸방에서 돌핀 팬츠를 입고 동생들과 행복한 표정으로 놀아주고 있는 소녀가장 라희. 그로다가 동생이 가지고 놀던 레고를 밟고 발라당 넘어지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코믹하게 연출된다. 이때 라희의 연분홍빛 발바닥과 발가락, 각선미가 부각된 클로즈업 컷이 나오는데, 이건 분명히 페티시를 자극하는 구도와 연출.
2. 패밀리 레스토랑에 일하던 란이. 브레이크 타임 때 직원휴게실에서 잠깐 쉬던 도중 오늘 처음 신은 살색 스타킹의 올이 나간 것을 발견하고 한숨을 쉰다. 이때 살스 발바닥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올이 나간 부위를 요리조리 검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명명백백한 페티시적 연출. 동료와 대화를 하면서 구두를 반쯤 벗고 발가락에 걸친 채 까딱까딱 거리는 장면도 킹리적 갓심.
3. 훈련소에 입소한 부사관 후보생 미오. 훈련이 끝나고 침상 위에서 동기들과 장난을 치다가 조교한테 걸려서 얼차려 받는 장면이 나옴. 이때 여름 활동복을 입고 있는데, 동기들과 뒤엉켜서 맨발, 날다리를 버둥거리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 부각되어 풋&각선미 페티시를 민감하게 자극. 부사관에 임관한 뒤 치마 제복을 입는 장면에서도 스타킹과 종아리가 나오는데 이 부분도 상당히 신경 써서 구도를 잡은 티가 남.
4. 마침내 암을 이겨내고 발레리나로서 무대에 선 지유. 발레복 자체가 페티시 덩어리임. 암튼 페티시임.
5. 노메이크업에 동그리 안경, 사과머리를 하고 카페에서 홀로 조별과제를 하고 있는 규율. 귀엽기만 하던 동그리 안경과 노메이크업 얼굴이 검은섹 뿔테 안경과 성숙한 메이크업으로 겹쳐지면서 녀석의 꿈인 여교수로 전환됨. 이때 착장이 전형적인 여교수 페티시를 자극하는 오피스룩. 대학 시절 자취방 에어컨이 고장 나서 민소매를 입고 찬 물에 발을 담가가면서 공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 겨드랑이가 부각되며 겨티시를 자극. 세숫대야에 담근 맨발은 발티시 자극.
이런 장면들이 대놓고 나오지는 않지만 남자들로 하여금 은은한 꼴림을 자극하여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게 만들겠다는 확실한 의도가 느껴졌다.
뮤직비디오 제작은 특유의 몽환적인 색감과 연출력을 바탕으로 아이돌 뮤비계의 샤넬이라고 칭송받는 'MV매니아'라는 팀이 담당했는데 역시는 역시였다. 어덕 멤버들의 색기를 이런 식으로 포착해서 표현해준 것이다.
그것도 마치 암호처럼, 영상물 등급 위원회에서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정도로 수위를 조절해서 말이다. 이런 일상의 장면을 선정적이라고 하기에도 뭐할 것이다.
나는 혹시나 해서 이 팀이 제작한 다른 뮤비도 검색을 해봤다. 페티시에 중점을 두고 확인을 해보니 확실히 여성 신체에 대한 페티시적 감각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소민정, 차밍카펫, 같은 여돌은 물론이고 제이코미, 지르탱 같은 래퍼 뮤비에도 발, 다리, 손, 겨드랑이, 양말, 스타킹 같은 대표적인 페티시 요소들이 농염하면서도 싼티나지 않게 연출돼 있던 것이다.
이 인간들 확실하게 발과 각선미 매니아다.
"이거 뭔가 의도적이지 않냐?"
이 방면에 있어서는 박사인 미오에게 슬쩍 언질을 주자 녀석은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소곤소곤 대꾸했다.
"저는 촬영할 때부터 알아봤죠. 이 오빠들 페티시 프로예요, 프로. 일과 사심을 동시에 채우고 있어요."
"역시···."
화면과 음악의 프레임이 살짝 어긋나는것을 빼면 연출쪽으로는 딱히 수정할 곳은 없었다.
내가 감독과 직접 통화를 해서 그 부분을 전달한 뒤 전화를 끊을 무럽.
웬일로 형에게 전화가 왔다.
"어, 형."
-카톡 확인 왜 안 해. 바빠?
"어, 회사야. 애들 뮤비 초안 나온 거 모니터 하고 있었어."
-모니터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왜 전화 했어."
-병신아, 다음 주에 엄마 생일이잖아.
"아, 맞다. 은빛이가 말해줬었는데 깜빡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YH엔터 대표직을 그만두고 머리도 식힐 겸 잠깐 해외에 나가있을 거라고 발표할 자리이기도 했다.
"요즘 바빠서 정신이 없어."
-미친 새끼야, 니가 바쁘면 은빛이보다 바쁘냐?
"응. 요즘은 내가 더 바쁜듯."
-지랄하네. 장소는 나랑 형수가 알아서 예약할 테니까 너는 빵꾸 내지 말고 시간이나 맞춰서 기어와.
"알았어."
-은빛이도 같이 올 거지?
"이번에는 업키걸 애들 다 같이 갈 거 같은데. 작년에 은빛이 혼자만 데리고 갔다고 삐졌거든."
-예약 인원 말해야 되니까 확실히 정해서 연락 줘.
"어, 스케줄 확인해보고 톡 할게."
***
일주일 뒤.
오스칼 호텔 내에 입점한 한식당의 25인실 프라이빗 룸.
업키걸 5인이 모두 참석한 씽씽걸의 72번째 생신 파티 겸, 씽씽걸배 며느리 배틀이 열렸다.
"끼요옷, 씽씽걸님 생신 축하축하! 할머니가 축하한다고 전해달래요."
"생신 축하드려요 어머님.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절부터 받으세요. 며느리 후보 1순위 홍이가 절 드릴게요."
"맘, 장소는 맘에 드세요? 김윤상 선배가 또 구질구질한 데로 예약할 거 같아서 알리야가 미리 손을 쓴 거예요."
각자 존재감 어필을 하느라 왁 자지 껄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씽씽걸은 손사래를 치며 진절머리를 표시했다.
"아이고 정신없어! 리더가 대표로 하면 될 걸 뭘 하나하나 다 말하고 있어! 홍이 너는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와서 무슨 절을 한다고 엎어져 있어! 일어나, 어서!"
"그쵸 어머님? 연홍이 진짜 예의 없죠? 돼지 너는 이런 날에 무슨 술집 아가씨 같은 옷을 입고 왔냐. 어후···."
"이 옷 우리 엄마가 선물해준 건데···."
"그러니까. 청담동 고급 바에 술 마시러 간 부잣집 아가씨처럼 부티 난다고. 옷이 좋으니까 없는 인물도 확 살아난다 야."
"푸하핰! 서원 언니 탈룰라 타이밍 오졌누."
"지렸누."
"유은빛, 알리야! 언니가 안율이 앞에서 그런 말 쓰지 말라고 했지. 애기들은 나쁜 거 금방금방 배운다니까?"
"이요나 너도 참 너다. 이 바보들한테 뭘 바라냐."
"아앗! 안율아, 방금 누나들이 한 말 못들은 걸로 하면 큰 빠방이 사줄게, 큰 빠방이."
"응, 씨바 누나랑 회장님 누나가 한 말 하나도 못들었어요!"
"그렇지, 그렇지. 우리 안율이가 사회생활 잘하네! 김윤상 선배님이랑 형수님은 이렇게 똑똑한 아들래미 두셔서 좋으시겠어요? 그쵸?"
출근길 9호선 염창역-당산역 구간과도 같은 지옥불 만담에 혼이 쏙 빠진 형과 형수님이 나를 보며 혀를 내두른다.
"와, 김윤호 얘네 진짜 정신 하나도 없다. 만난지 5분도 안 됐는데 기가 쫙 빨렸어."
"윤호 도련님은 맨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내신다는 거잖아요."
"저도 오랜만이에요···."
올드보이는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가 그저 흡족하신 모양이다. 손자 앞에서만 보이는 인자한 할아버지 미소를 지으시며 느긋하게 관망하고 계신다.
음식은 리야가 미리 주문을 해좠는지 한정식 코스의 에피타이저가 바로 준비가 됐다. 그렇게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된 지 10분 쯤 지났을까.
엄마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어, 도착했어요? 가만 보자, 여기가 어디지? 리야야 엄마 손님인데 니가 전화 좀 받아봐."
"예쓰, 맘."
길 안내 역할을 맡아 엄마의 전화기를 건네받은 리야는 상큼한 목소리로 자기 이름부터 밝혔다.
"안녕하세요, 업키걸 알리야라고 합니다."
그 쪽에서도 본인 이름과 엄마와의 관계를 밝혔는지 이내 리야의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아, 제희 언니예요?"
엥? 웬 제희?
뜬금포 이름의 등장에 나를 포함한 업나니 녀석들의 시선이 모두 씽씽걸에게 쏠렸다.
엄마는 업나니들을 향해 나무라듯이 대답하셨다.
"엄마가 불렀어. 너네 오빠도 이제 장가가야지. 내일모레면 벌써 마흔이야, 마흔!"
하아···.
체할 게 분명하니 소화제를 미리 먹어놔야겠다.
리야에게 올 때 소화제를 갖다 달라고 말하려는데 미리 선수를 친 녀석이 있었으니.
"리야야, 미안한데 제희 언니 모시고 올 때 언니 소화제 하나만 구해다 줄 수 있어?"
요나였다.
<너네 오빠도 이제 장가가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