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원이는 흑우가 아니라 천사다 >
서원이의 집착은 두 종류다.
마치 만화 속 인물이 자신에게 부여된 성격에 따라서 움직이듯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하는 일상의 집착.
그리고 소유욕에서 우러나오는 광기의 집착.
지금은 눈에서 서슬 퍼런 스파크가 튀어 오르는 진심 집착이다.
“바지 벗어요. 당장.”
“하늘에 맹세하고 나경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갑자기 하늘이한테 왜 맹세를 하는데? 왜? 하늘이랑도 잤냐?”
“아니아니, 그 하늘이가 아니라 그냥 하늘. 스카이.”
“됐고. 가래떡부터 꺼내라고요. 내가 확인해보면 알아.”
하루 종일 열애설에 시달리고 해명하느라 기진맥진해진 몸으로 귀가를 했다.
더 이상 싸울 힘도 달랠 여력도 없던 나는 녀석이 손에 가위를 들고 있든 말든 그대로 껴안으면서 어깨에 턱을 기댔다.
“서원아, 나 오늘 진짜 힘들었어. 그냥 한 번 안아줘라···.”
아무리 광전사 모드라고 해도 평소답지 않은 내 행동을 알아차릴 정도의 인정은 있는 놈이다.
흑우는 그제야 광기를 거두고 애써 태연한 투로 삐죽거렸다.
“그러게 왜 감당하지도 못할 짓을 벌이냐고.”
“나 이번에는 진짜 아무 짓도 안 했어.”
“평소에 끼를 흘리고 다니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잖아.”
“그래. 내가 너무 인기가 많아서 미안하다.”
“치.”
“가위 내려놔. 정조대도 내려놓고.”
녀석은 양 손에 들고 있던 흉기를 뒤로 툭 던지고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요. 연락도 안 되고, 톡 확인도 안 하고.”
“미안해. 여기저기서 전화랑 문자가 하도 많이 오다보니까 질려서 핸드폰을 못 보겠더라.”
“내가 그 맘 알지.”
녀석도 얼마 전 운전자 바꿔치기, 음주운전 루머에 시달리며 핸드폰에 불이 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공감을 하는 듯 했다.
나는 흑우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좌우로 나른하게 흔들면서 리듬을 탔다.
서원이는 혼자 광분한 것이 자기도 민망했는지 내 등을 토닥여주며 멋쩍은 투로 말했다.
“빨리 씻고 자요. 피곤하겠다.”
“뭐야, 너 갈 거야?”
“응. 연습하다가 중간에 잠깐 온 거예요. 내가 업키걸 대표로 꼬추 자르려고 온 건데 안 잘라도 되니까 가야지.”
“대표로 온 거였어?”
“응. 누가 김윤호 꼬추를 잘라야 하나 투표 했는데 다섯 명 전원 만장일치로 내가 당선됐어. 가위는 요나가 쥐어줬고.”
이 업친놈들이 진짜 남의 음경가지고 잘하는 짓이다.
안 하고 욕먹느니 차라리 하고서 욕먹는 게 낫지, 진짜 이 정도의 후폭풍이 올 줄 알았다면 그냥 나경이랑 갈 데까지 가볼 걸 그랬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면 텅 빈 집에 혼자 들어오는 것보다 서원이가 집착으로 반겨주는 것이 내심 반가웠다.
나는 서원이를 안은 채 안방으로 뒤뚱뒤뚱 발걸음을 옮기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가지 말고 그냥 나랑 있자. 연습 하루 안 한다고 한서원 실력이 어디 가나.”
녀석은 가지 말라는 내 말이 흡족하면서도 쑥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와, 힘들긴 진짜 힘들었나보구나. 천하의 김윤호 입에서 그런 말도 다 나오고···.”
그러는 사이 우리는 침대 앞까지 이동했고, 나는 녀석과 함께 침대에 스러지듯 누웠다.
“가지마. 나랑 그냥 이러고 있자.”
“이러고만 있을 거 아니면서.”
“아냐, 진짜 딱 이렇게 안고만 있을 거야.”
진심이었다.
아까 제희한테 야무지게 흡입을 당해서 그런가, 오랜만에 현타가 온 것 같다.
서원이는 그 말에 또 감동을 받은 눈치다.
내가 자기를 성적으로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 때 마음의 위안을 얻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는 기색이었다.
나 역시 녀석의 그런 반응을 보며 미안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육체적인 교감만을 쫓았던 건 아닌지 뒤를 돌아보게 된다.
“서원아.”
“응.”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동안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솔직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내심 미안하고 후회돼서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용기 내어 말한 건데.
“뭐야.”
녀석은 안고 있던 내 몸을 밀어내며 정색했다.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지.”
“응?”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냐고.”
“아니아니···.”
“솔직히 말해요. 나경이랑 잤지?”
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표현 안했으면 얘가 이렇게 뒤틀렸을까.
원래 뒤틀린 놈이긴 했지만, 그 뒤틀림이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은 내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이었다.
“진심이야. 내가 그동안 너한테 너무 마음을 표현 안···.”
“어디서 나를 속이려고.”
슬프다.
서원이의 마음속에 나라는 놈은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였다.
녀석은 내 말을 끊고 부랴부랴 바지를 벗겨냈다. 그러고는 내 하복부 쪽으로 얼굴을 옮겨서 실로 오랜만에 귀엽고 앙증맞은 모양새로 잠들어 있는 가래떡을 잡고 좌우로 돌려가며 꼼꼼하게 살폈다.
흑우야, 그렇게 본다고 해서 뭐가 나오겠냐.
제희가 거기에 ‘몇 월 며칠 한제희가 빨았음’이라고 써놨을 리는 없고, 나는 녀석의 증거 채취 작업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그래도 따뜻한 손으로 고추를 조물락조물락 거려주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뜻밖의 핸드잡에 몸을 맡겼고, 곤히 자고 있던 가래떡은 이내 험상궂은 진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발기가 완전하게 이뤄지던 그때였다.
“이봐, 이봐.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귀두를 잡고 가래떡을 수직으로 세운 녀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뭐야.”
“뭐가.”
“뭔지 직접 확인해 봐요.”
“응?”
나는 깜짝 놀라 상체를 세워서 가랑이 사이를 살폈다.
아뿔싸 제기랄.
음경 중간쯤에 제희의 입술 색과 일치하는 자몽 빛 립스틱이 번들번들하게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어, 이게 뭐지···?”
나도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손으로 지우려고 하자 서원이가 한 템포 빠르게 호다닥 내 손목을 낚아채며 증거를 보존한다.
“뭐긴 뭐야. 틴트지.”
“틴트으? 에이 설마. 틴트가 왜 여기 묻어있어. 틴트 아니야.”
“장난해요? 내가 설마 틴트도 못 알아볼까봐?”
“···뭐지? 손에 묻어있던 게 오줌 싸면서 묻었나···?”
녀석은 눈 감고 아웅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하는 내가 너무 처량했다.
그래도 어쩌랴.
열애설 수습하느라 하루 종일 힘들었다고 말을 해놨는데, 그 중간에 제희한테 오랄을 받았다고 말을 하면 나는 진짜 미친놈이 되는 건데 말이다.
하지만 진실을 요구하는 칼날이 턱밑까지 드리워진 지금, 딱히 거짓말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누구야. 누구한테 빨렸어.”
“······.”
“말 안할 거예요?”
“못하지···.”
“그래, 말하지 마요. 절대 말하지 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끝까지 말하면 안 돼요. 알았지?”
서원이의 입가에 광기 어린 미소가 번진다.
뭔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이번 건 진짜다.
나는 녀석이 일어서려는 것을 붙잡은 뒤 다급하게 물었다.
“아 왜. 뭐하려고.”
녀석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핸드폰에 우리 할 때 찍은 영상 있잖아요. 그거 인터넷에 뿌릴 거야.”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제희, 제희가 해줬어.”
“하···?”
“나경이랑 열애설 기사보고 멘붕 와서 차에 있는데 제희가 와서 위로해주면서 해줬어···.”
서원이는 입을 벌린 채로 굳어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치 어린 아이의 재롱을 보듯이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했다.
“대단하다 김윤호. 진짜 대단하다. 지금 이거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에요. 그래, 이 정도면 인정해줘야지. 인정!”
“미안해···.”
“아니에요. 나 지금 진짜 놀라고 있는 중이에요. 와 진짜 대박이다, 하하하.”
서원이는 고개와 손을 동시에 절레절레 흔드는 미국식의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면서 거실로 나갔다.
뭔 짓을 할지 몰라서 나도 얼른 바지를 치켜세우고 따라 나갔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신발을 구겨 신고 도어락 버튼을 누른다.
보통은 내가 잡아주길 바라며 은근히 시간을 끄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빈정거림이나 비꼬는 말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나 갈게요. 잘 자요.”
딱 그렇게 할 만만 하고 문을 여는 모습이 더 섬뜩했다.
이러다가 또 흑우처럼 돌아오겠지, 라며 마음을 놓고 있던 나는 그제야 호다닥 달려가서 서원이를 붙잡아 세웠다.
“서원아.”
“놔요.”
“내가 너한테 진짜··· 면목이 없다. 뭐라고 변명도 못하겠고···.”
“소리치기 전에 놔요.”
마주본 녀석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있었다.
안 놓으면 진짜 소리친다.
나는 붙잡았던 어깨를 놓아주면서 최대한 일상적인 톤으로 물었다.
“바로 연습실로 갈 거야?”
서원이는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함께 타든 말든 상관도 안했고, 운전 조심히 하라는 내 말에 마지막까지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지하주차장에 있던 자신의 차를 타고 훌쩍 떠나버렸다.
나는 지하주차장에서 떠나지 않고 곧장 요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요나야 난데···.”
―예, 나경이랑 뽀뽀한 성덕 대표님!
“서원이가 나랑 싸우고 나서 방금 차타고 갔거든?”
장난스럽게 전화를 받았던 요나는 내 목소리가 심각한 것을 듣고 나서야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아··· 어디로 갔어요?
“모르겠다. 싸우기 전에는 연습실로 간다고 했는데··· 니가 한 번 전화해볼래?”
―은빛. 서원 언니한테 전화해서 연습실로 오실 건지 물어봐줘.
요나는 옆에 있던 은빛이에게 부탁한 뒤 나와의 통화를 이어갔다.
서원이가 나와 싸우고 화해도 없이 그냥 갔다는 것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는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말을 해주었다.
“내가 아까 낮에 제희한테 그······ 오랄을 받았거든.”
―오다요? 그게 뭐예요?
“아니, 오랄, 오랄. 구강성교···.”
―아···.
“근데 틴트 자국이 묻어 있었는지 서원이가 그걸 발견해버렸네.”
―아아······.
“어··· 그래서 그렇게 됐어···.”
―···진짜 잘라야겠다······.
“그래야 될 거 같아.”
―서원 언니 전화 안 받는데요.
“하아, 내가 그냥 붙잡고 있어야 됐는데···.”
―삐이이이이!
주차장에 차가 진입한다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서원이의 차가 끼기기긱 타이어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서원이 다시 왔다.”
―왔어요?
“어. 내가 다시 전화할게.”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세요.
“그래야지.”
나는 전화를 끊고 서원이가 주차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차에서 내린 녀석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입구로 향했다.
나는 한 발 앞서 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요나랑 통화했어.”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팔짱을 낀 녀석이 멋쩍게 서 있는 나를 스윽 쳐다본다. 아몬드 모양의 큰 눈은 고요하고 적적했다.
“이 상태로 운전하다가는 다른 차랑 사고 날 거 같아서 다시 왔어요.”
“어, 잘했어···.”
녀석은 적막한 눈빛으로 나를 계속 응시했다.
내가 그 눈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괜히 두리번거리자 측은하다는 투로 묻는다.
“섹스가 그렇게 좋아요?”
“아니 그게··· 하아···.”
제희한테 빨린 거는 상태창 미션도 아니었고 어떤 목적을 위한 몸 로비도 아닌 순수한 내 마음이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막 하고 싶고 그래요?”
“너무 쪽팔려서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다.”
“하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라고 했잖아요. 나도 대표님이랑 하는 거 좋으니까 하자고 하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고.”
“그랬지···.”
“그리고 정 다른 사람이랑 하고 싶으면 우리 애들도 있잖아. 무식하게 가슴 큰 애도 있고 귀엽고 피부 하얀 애도 있고 섹시한 애도 있고 어린애까지 다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여자랑 하냐고. 심지어는 쓰리썸까지 해주는데, 응? 우리 다섯 명 가지고도 만족이 안 돼요?”
“서원아, 그런 게 아니야.”
“아니면 뭔데.”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는 나도 답답해 죽겠다.”
“뭔데요. 란년이처럼 섹스 중독이에요?”
“···그렇다고 해두자.”
“하아···.”
내가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까지 수치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서원이는 자기가 애를 키운다는 투로,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다는 듯 내게 손짓했다.
“바보처럼 서 있지 말고 일루와요.”
“미안해서 못 가겠다.”
“미안하면 미안한 만큼 더 사랑해줘야지.”
“맞는 말이야···.”
“빨리 와. 화난 건 화난 거고 소독은 해야 될 거 아니야.”
“아니야, 서원아. 안 해줘도 돼.”
“내가 내 가래떡 소독한다는데 뭔 말이 많아요. 빨리 오라고!”
“어···.”
서원이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 게 이렇게 쑥스러울 때가 있었던가.
나는 이러나저러나 착즙당해야 하는 운명인가보다.
서원이는 바짝 쪼그라들어있는 가래떡을 보며 푸식 헛웃음을 지었다.
“참나. 그래도 안 커진 거 보니까 진짜 미안하긴 한가보다.”
“미안하고··· 사, 사랑해.”
“이럴 때만.”
“아니야. 평소에도 사랑해.”
“나도요.”
가래떡을 입에 문 서원이는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음경을 훑으며 제희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나는 서원이를 더 이상 흑우라고 조롱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서원이는 흑우가 아니라 천사다.
집착 천사.
< 서원이는 흑우가 아니라 천사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