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9화.김윤호 나경 열애 (312/371)

< 김윤호 나경 열애 >

여기까지 오는 중에도 대화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어휘와 표현만 다를 뿐이지 결국은 주변 풍경과 화사한 날씨를 칭찬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냥 입을 닫고 있자니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그렇다고 우리가 깊은 대화를 나눌만한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가벼운 주제로 밖에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좁은 대화의 폭은 곧 한계를 드러냈고, 어느 순간 우리는 대화를 멈춘 채 그냥 앞에 펼쳐진 한강을 보며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침묵을 깼다.

“회사에는 뭐라고 하고 나왔어?”

“친구 만난다고요.”

“에휴, 이러니까 걸그룹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지.”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아 왜요오. 대표님이 친구 해주시면 되죠.”

“그럼 오늘부터 친구 먹을까?”

“예, 예, 좋아요.”

어쩌면 주변 풍경이나 날씨 얘기보다 더 의미 없는 농담 따먹기 식의 가벼운 대화였는데, 나경이는 그 안에서 굳이 의미를 찾아내어 말을 이어 붙인다.

“와, 그럼 저 앞으로도 대표님 계속 볼 수 있는 거네요? 친구니까요, 그쵸?”

“근데 나경아. 친구끼리는 뽀뽀 같은 거 안 해.”

그날 밤의 입맞춤을 상기시키자 녀석은 아하하하하, 하며 낯 뜨거운 너털웃음만 흘렸다.

“너 솔직히 그때 취했지?”

“예, 예···.”

“앞으로는 그런 거 하지 마. 어디 여자가 남자한테 먼저 입술을 들이밀어.”

“좋아하면 할 수도 있죠!”

“물론 할 수도 있지. 근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친구 사이에는 그런 거 안 해.”

“그럼 친구 안 할래요.”

“그럼 나는 너 안 만나지.”

“와, 진짜 단호하시다.”

“야, 내가 진심으로 단호하게 대하면 너는 뼈도 못 추린다.”

“진심 단호는 어떤 건데요?”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묻는 질문에, 나도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꺼져.”

“푸훕!”

“웃어?”

“그게 뭐예요, 완전 발연기잖아요. 아, 완전 웃겨.”

나는 오늘 나경이에게 최후통첩을 하기 위해 녀석의 만남에 응했다.

앞으로 우리가 단둘이 만날 일은 없고, 개인 톡도 차단을 할 테니 더 이상 연락을 하지 말라고 전할 것이다.

이 이상의 만남은 녀석이나 내게 독이 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이 미약을 먹고 내게 호감을 품었다고는 해도, 규율이는 보라색 아우라이기 때문에 나와 어떻게든 엮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나경이는 그게 아니다.

내가 녀석의 머리 위 유니콘을 없애야 할 명분도 없거니와, 설령 내가 개인적으로 나경이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해도 굳이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밀연애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너 남돌 애들한테 대시 많이 받지?”

“많이 받는다는 게 어느 정도예요?”

“니가 더 잘 알지. 쪽지로 연락처 주고 가는 애들 있을 거 아냐. 아니면 스타일리스트 통해서 연락처 물어봐서 연락한다든지, 그냥 대놓고 너한테 번호 물어보든지.”

“뭐··· 있기야 있죠.”

녀석은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쑥스러운지 말끝이 희미해졌다.

“그 중에 연락하는 애들도 있어?”

“있었는데··· 그냥 바쁘다보니까 흐지부지하게 되더라고요. 제 스타일도 없었고요.”

“니 스타일이 뭔데.”

“어··· 대표님이요? 막 이래, 프히히히히.”

“너도 어지간히 뒤틀렸구나···.”

“왜요, 왜요? 대표님 같은 스타일 좋아하면 뒤틀린 거예요?”

“그럼 17살 차이 나는 늙은 남자 좋아하는 게 뒤틀린 거지 정상적인 거냐?”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그러는 대표님은 저보다 어린 하늘이 좋아하시잖아요.”

“이게 무슨···. 야, 내가 설마 하늘이를 여자로 좋아하겠냐?”

“하늘이가 남자는 아니잖아요.”

“연예인으로 좋아하는 거지 바보야.”

“그쵸그쵸, 여자 연예인. 그리고 나이 차이가 뭐가 중요해요. 겉으로 보이는 외모랑 대화가 통하느냐 안 통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잠깐. 너 설마 나랑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녀석은 내가 오히려 자기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당돌하게 반문했다.

“왜요? 대표님은 저랑 대화 안 통해요?”

“지금까지 너랑 나 사이에 대화라고 부를 만한 뭔가가 오가지도 않았잖아.”

“지금 하고 있는 이런 게 대화죠.”

“아니아니, 이런 건 오늘 처음 만난 사이끼리도 할 수 있는 거고. 내가 말하는 대화라는 건 뭐랄까, 서로의 생각이나 경험에 공감을 한다거나 이해해주는 뭐 그런 걸 말하는 거지.”

“저는 대표님이랑 말 되게 잘 통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충분히 안 통하고 있어.”

“그런 거야 앞으로 맞춰가면 되는 거죠. 처음부터 잘 맞는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요.”

“잠깐, 그러고 보니까 너 왜 말이 바뀌었어? 이번에 만나면 마음 정리할 수 있을 거 같다며.”

“예? 제가요?”

“어. 그때 나한테 뽀뽀하고 나서 그랬잖아. 하루만 놀아주면 포기할 수 있을 거 같다고 분명히 그랬어.”

“아··· 저 그때 사실 취했었거든요.”

“이게 어디서 한 입으로 두 말을···.”

“지금처럼 이렇게 가끔 만나면 되는 거 아닌가.”

“에효···.”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별로예요?”

“내가 니가 별로라서 이러겠냐. 우리는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 사이니까 그러는 거지.”

“어차피 다들 몰래몰래 만나고 다니는데···.”

“그래. 그리고 그렇게 몰래몰래 만나고 다니다가 걸려서 작살나는 거지. 너 지금 만에 하나라도 나랑 열애설 터지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어떻게 될 지는 녀석도 알고 나도 안다.

단순히 우리 둘만 다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 회사, 멤버, 가족, 팬들을 전부 기만한 죄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험한 불장난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이성을 향한 호감과 사랑이라는 것이 이성적으로는 통제가 어려운 본능의 영역이기 때문이겠지.

한 번 불이 붙으면 다 소진될 때까지 멈추지 못하는 폭주기관차.

그렇기 때문에 녀석보다는 그나마 절제가 가능한 내가 잘라내야 한다.

수많은 여자들을 과감하게 쳐냈던 통곡의 벽 모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오늘 놀 거 다 놀고 헤어질 때쯤 하려고 했던 말을 미리 꺼냈다.

“나경아, 니가 나를 좋아해주는 건 진짜 너무 고맙고 감사하고 과분한 일이지. 나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어떤 남자가 안 그러겠냐. 그런데 아닌 건 아닌 거야. 너랑 너희 팀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인생에서도 지금이 진짜 중요한 시점이야. 그래, 니 말대로 몰래몰래 연애 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것도 열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평가가 갈리는 거야. 니가 만약 또래 남돌하고 연애를 하다가 걸리면 그건 그래도 용납이 돼. 물론 프라미슈 팬들은 조금 상처 받겠지만, 요즘 웬만한 사람들은 아이돌이 연애 하는 것 정도는 이해를 해준다고. 그런데 너랑 나는 아니야. 나는 나이 먹고 어린 여자나 밝히는 추한 노땅이 되는 거고, 너는 어린 애가 벌써부터 돈이랑 능력 보고 남자 만나는 애로 찍힐 거야.”

“저 대표님 그런 거 때문에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 알지. 그런데 니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중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거잖아.”

나경이도 안다.

알고 있지만, 그냥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청춘의 객기와 페로몬의 이끌림 때문에 잠시 판단력이 흐려진 것뿐이다.

“너희 멤버들이랑 회사 식구들, 그리고 팬들이랑 가족들을 먼저 생각해. 너 하나 망가지는 거면 상관없는데 그게 아니잖아. 그치?”

“예···.”

“오늘 이후로 나 너 차단할 거야. 앞으로 촬영장이나 방송국에서 만나도 웬만하면 아는 척 안 할 거니까, 니가 나를 진짜 좋아한다면 내 결정을 좀 존중해줘. 나 회사 대표고 내가 책임져야할 직원이랑 가수들이 수십 명이야. 내가 잘못되면 그 사람들도 다 같이 고통 받는 건데 나는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그러기는 싫다.”

조금 침울해지려던 나경이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감돈다.

애써 꾸며낸 활력이었다.

“그쵸그쵸, 저 때문에 대표님이 힘드시면 안 되죠.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던 거 같아요.”

“이해해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녀석은 마치 달콤한 꿈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낮은 한숨을 흘렸다. 그러고는 아련하면서도 후련한 눈빛으로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주시면 안돼요?”

나는 별 말 없이 오른쪽으로 상체를 돌려서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위로와 애틋함을 담아 등을 토닥여주었다.

나경이도 소심하게 내 허리를 끌어안았고, 녀석의 몸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른 분홍색 아우라가 우리 두 사람을 보호막처럼 따뜻하게 에워쌌다.

서로의 심장박동이 교차하며 애처로운 울림을 빚어낸다.

샴푸 향과 신경 써서 뿌린 듯한 향수 냄새가 너무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괜한 여지를 주는 것 같아서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나 역시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과 여운을 좀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꽤 오랫동안 녀석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깝다, 아까워.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를 밀쳐내야만 하는 현실이 억울하고 원통해서 부아가 치밀 지경이다.

나는 비틀린 허리에 슬슬 무리가 올 때쯤에 허그를 풀고 자세를 똑바로 세웠다.

앞에 펼쳐진 한강의 경치를 보고 나서야 순간적으로 깊은 감성에 빠졌던 내 모습이 민망해진다.

나경이가 내 품안에서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은 녀석이 소심하게 훌쩍거리는 콧소리를 듣고 나서야 눈치 챘다.

녀석은 창밖을 쳐다보며 볼에 묻은 눈물 자국을 엄지로 슬쩍슬쩍 닦아내고 있었다.

뒤통수에 꽂히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혀 짧은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창피하니까 보지 마세여···.”

“어, 알았어. 근데 우리 이제 뭐하지?”

자기도 딱히 생각한 게 없다는 듯 대답이 없다.

애써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외곽으로 나왔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영화를 보러 가기도 그렇고, 배는 안 고프다고 하고···.

이거 내가 너무 준비를 안 하고 나왔나 싶어서 조금 미안해지려는 찰나에 고맙게도 나경이가 선택지를 주었다.

“아, 노래방 어떠세요?”

“오, 노래방 좋다. 노래방 갈까?”

“예.”

“대신 노래 부르면서 청승맞게 울기 없기.”

“아, 안 울어요···.”

우리는 나경이의 본가가 있는 일산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방을 갔다가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한 차례 감정을 태워버리고 나니 둘 다 마음이 편해졌는지 헤어질 때는 오히려 웃으면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나경이를 집 앞에 내려준 뒤 혼자 서울로 돌아오는데, 교미를 안 하고도 관계를 정리한 내 자신이 기특하고도 신기해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

그로부터 2주 뒤.

프라미슈12가 ‘어덕해’ 5화에 출연하기로 결정이 났던 날.

나는 업키걸 요나, GIG 혜진, 메이퀸즈 유진, 립밤 가온으로 이뤄진 프로젝트 팀의 타이틀곡을 선정하기 위해 제희네 회사에서 프로듀싱 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브으으으으

―브으으 브으으 브으으

업무용과 개인용 두 개의 폰이 동시에 울리는 것이 아닌가.

업무용 폰에 찍힌 번호는 회사, 개인용 폰에 찍힌 번호의 발신자는 리야였다.

일단 무슨 일이 터졌다는 건 분명했고, 나는 직감적으로 리야의 전화를 먼저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회의 중이던 제희와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와 통화를 했다.

“여보세요?”

―뮨댕쓰 목소리가 아직 모르는 눈치네.

“그러니까. 지금 뭔 일 생겼지? 갑자기 전화기가 난리가 났는데?”

―으이그으, 실검부터 확인해봐.

나는 리야와 통화를 하면서 업무용 폰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실검 단어를 보자마자 등줄기와 두피에 식은땀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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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확인했어?

“어.”

―사진도 봤어?

< 김윤호 나경 열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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