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경이의 틴트 향은 너무도 달콤했다 >
“아, 어떡해. 귓가에 계속 멜로디가 맴돌아.”
“나도.”
“라니온스, 라니온스, 라니오오온~ 스!”
“꿈에 나올 것 같아요.”
병맛 가득했던 촬영이 모두 끝난 뒤, 빵순이들은 의상을 반납하며 촬영 후기를 주고받았다.
나도 메이크업 테이블 앞에 앉아서 마지막 촬영 때 했던 노인 메이크업을 지우며 아이들과 히히덕 거렸다.
8시간 가까이 촬영을 하는 동안 나경이와 애써 그었던 선이 조금은 흐려진 것 같다.
나경이도 내가 더 편해졌는지 내 주위를 계속 배회하면서 살갑게 말을 걸고는 했다.
촬영이 끝난 직후에도 비타나경 특유의 상큼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부님 은근 연기 잘하시던데요?”
“그치그치. 나 연기 레슨 받았잖아.”
“우와우와, 진짜요?”
“응. 레슨 죽어라 받았는데 예능 시상식에서 희대의 발 연기 소리 들었지.”
“아, 그거 기억난다!”
“엄청 섭섭했어. 뮨무룩.”
근처 어딘가에서 크흐흐흐흫 비웃음이 들린다.
이제는 나와 톰과 제리 같은 관계가 형성된 승채였다.
“저도 그거 봤어요.”
“왜 봤어. 왜.”
녀석은 내 인생 최대의 흑역사를 소환하며 나를 공격했다.
“술 한 잔 마셨습니다. 제 연기가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습니다. 크흡!”
빵순이들을 포함해서 고된 얼굴로 뒷정리를 하던 스텝들까지 하나 되어 빅웃음을 터뜨리며 다소 지쳐있던 촬영장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승채의 개드립이 노동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 나 하나 음경병신 돼서 모두가 즐거우면 됐지 뭐.
라고 하기에는 조금 아팠다.
“이승채 나쁜 놈···.”
“에이, 농담이죠. 설마 상처 받으셨어요?”
“그래. 나 그거 진지하게 쓴 글이란 말야.”
“···그게 더 웃긴데요? 푸흐흐흩!”
나는 촬영이 끝나고 내가 쏘기로 했던 회식을 빌미로 녀석을 압박했다.
“소고기 회식은 없던 걸로 하자. 다 같이 김밥천국으로 가는 거야.”
그러자 다른 멤버들이 부와왘 들고 일어나서 승채를 몰아세웠다.
“아아아앙!”
“아, 이씅채!”
“빨리 무릎 꿇고 용서를 빌도록 해.”
“대부님, 저는 안 웃었거든요? 저는 소고기 사 주세요.”
“소고기, 소고기, 소고기!”
물론 모두가 농담인 걸 알면서 즐기는 상황극이기 때문에 회식은 예정대로 진행이 됐다.
미성년자인 하늘이는 먼저 촬영을 마치고 밤 10시에 퇴근을 해서 함께 할 수 없었다.
프라미슈 담당 실장의 허락 하에 아이들은 가볍게 맥주도 한 잔씩 하며 분위기를 달궜다.
업키걸 5명만 모여도 식당이 들썩거리는데, 한창 수다스러울 때인 여자 아이들이 11명이나 모여서 마음 놓고 재잘거리니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광고 촬영 뒷풀이라기 보다는 프라미슈 떡상 기념 회식 같았다.
항상 브이라벨에 밀려 있던 로그인레코드 내에서의 위상도 조금 오른 것 같다.
원래 프라미슈에게 붙은 매니저는 2명이었는데 이번 앨범이 성공을 거둔 뒤 1명이 더 추가돼 총 3명이 따라붙고 있었다.
새로 온 실장 매니저는 프라미들이 신인 때 방송국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눴던 로드매니저였다. 그동안 실장급으로 승진을 해서 다시 프라미슈에게 배정됐다고 한다.
당시에는 업키걸도 프라미슈도 갓 시작한 신인이었고, 나와 그도 초짜 매니저였는데 이제는 1위 가수의 실장 매니저와 대표로서 재회를 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는 이번 프로미슈 떡상에 숨은 공로자 역할을 한 내게 연이어 술을 권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대표님, 한 잔 받으세요. 제가 드릴 게 술 밖에 없습니다.”
“예, 주세요.”
포마드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리는 30대 초반의 그가 내 잔에 술을 채웠고 나도 그의 잔을 채운 뒤 바로 건배를 하고 잔을 비워냈다.
그는 프라미들이 안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줄이며 내게 말했다.
“하아, 진짜 감사드립니다. 저한테는 진짜 아픈 손가락이었는데 이제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럼 저 부탁 하나 드려도 됩니까?”
“예, 말씀하세요.”
“저희 이번에 새로 준비하는 걸그룹 애들 있잖아요.”
“예.”
“걔네가 지금 인터넷 방송 콘텐츠를 하나 준비 중이거든요. 거기에 혹시 빵순이들 좀 출연시켜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걸그룹 대결’이라는 컨셉을 간략하게 설명했고, 그는 스케줄만 맞으면 언제든지 출연하겠다며 확답을 주었다.
우리는 칭찬과 겸손을 주고받고 추억팔이를 곁들이며 몇 차례 대작을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프라미슈 아이들과 광고 촬영 스텝들이 돌아가며 따라주는 술까지 석 잔 넉 잔 받아먹다 보니 짧은 시간 안에 취기가 확 올랐다.
지금 당장은 긴장도 풀리고 알싸하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내일 아침 몰아닥칠 숙취를 생각하면 혈중 알콜을 분해시켜주는 ‘RU―69’ 아이템을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바람도 쐬고 중간 계산도 알아볼 겸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썸의 성좌’의 가호를 받는 특급 남창답게 아슬아슬 로맨틱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바로 나경이와 말이다.
회식 장소가 강남이었던지라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입구 쪽에는 행인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고, 나름 얼굴이 알려진 나는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봐 건물 옆 인적이 드문 골목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요주의 대상인 나경이가 뒤따라 나온 것이다.
화장실은 안에 있고 번화한 밤거리에서는 최대한 노출을 삼가야 하는 걸그룹 멤버가 겁도 없이 혼자 가게 밖에 나올만한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나를 뒤따라 나왔다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표님!”
낮과 밤의 기온차를 대비해 아직은 얇은 겉옷을 챙겨야 하는 늦봄의 어느 새벽, 봄보다 더 싱그럽고 풀내음 가득한 소녀가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굳이 나를 뒤쫓아 나온 것이다.
‘나경컷’이라 불리며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 한 차례 유행했던 샤기한 단발머리.
손가락 끝만 살짝 삐져나온 크고 헐렁한 후드 티.
발목이 보이는 스키니 진.
하얀색 스니커즈.
산뜻하게 풍겨오는 향수 냄새.
아찔하리만큼 설렌다.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퉁명함으로 내 마음을 꽁꽁 싸매야 했다. 그것이 비록 풋내 나는 소녀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 유치한 연극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너는 겁도 없이 왜 혼자 나왔어. 실장님한테 혼나려고.”
“대표님 보려구 나왔져!”
움찔.
얘 왜 이렇게 당돌해졌지.
“뭐야, 취했어?”
“아녀아녀, 안 취했어여. 아니다, 취했나? 힛,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여.”
“안 취했으면 그 짧은 혀는 일부러 잘라낸 거 맞지? 말투 왜 그래.”
“그쵸그쵸, 저 방금 말투 좀 재수 없었죠오.”
“재수 없을 것까진 없고···.”
오히려 귀여웠지. 사랑스러웠지. 볼따구를 깨물어버리고 싶었지.
당장이라도 끌어안아서 우리 집으로 납치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고.
“아니아니···.”
“아니아니, 힛.”
나경아, 이 사랑스러운 나경아.
내 말투를 따라하며 살균 웃음을 내뿜는 너를 어쩌면 좋으니.
나랑 결혼할래?
내일이라도 당장 목동 집으로 가서 씽씽걸과 올드보이에게 인사드릴 거야?
업나니 다섯 명과 맞짱 떠서 이길 자신 있니?
물론 나도 자신은 없지만 너와 함께라면 그 어떤 역경도 해쳐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미치겠다.
‘이러지 마라 나경아’라는 마음과, 요즘 걸그룹 중에서 가장 예쁘다는 평을 받는 나경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우쭐한 마음이 상충하며 내적갈등을 일으킨다.
안 되겠다.
이러다 진짜 음경되겠다.
나도 술이 꽤 거나하게 취한지라 자꾸만 음습하고 흉흉한 본능이 고개를 쳐들려고 한다.
집에 가는 길에 사용하려고 했는데 지금 써야겠다.
<‘RU―69’를 사용하셨습니다.>
―쑤커어어엉!
됐다.
알콜에 찌들었던 피가 변깃물처럼 씻겨 내려가고 새 피가 들어찬 기분이다.
순식간에 취기가 빠져나가며 몹시도 개운한 기분이 되던 그 순간.
내 옆에 비스듬히 서 있던 나경이가 장난스러움과 용기가 뒤섞인 표정으로 내 바로 앞에 한 발짝 다가왔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카메라 어플에서 집중 효과를 거친 듯이 유난히 반짝이는 주홍빛 입술이 녀석의 의도를 대변했다.
최소 뽀뽀.
내 예감은 맞았다.
녀석의 머리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유니콘이 내 얼굴 쪽으로 가까워진다.
뒤로 물러서거나 손으로 막아야 했다.
하지만···.
―쪽♡
나는 나를 향해 당돌하게 내밀어진 입술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판단력이 흐려졌다거나 교미력에 지배된 건 아니었다.
그저, 키 차이 때문에 까치발까지 드는 녀석의 가상한 수고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뒷짐을 진 손 모양이 너무 귀여워서였다.
술기운에 기대서라도 내게 마음을 전하려고 하는 소녀의 용기가 기특해서였다.
지그시 감은 눈꺼풀 사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순간적으로 코를 침투한 틴트 향은 너무도 달콤했다.
나는 결국 희멀겋게 뜬 눈으로 나경이의 짧은 입맞춤을 받아들여버렸고, 녀석은 까치발을 내리고 다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특유의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선포하듯이 힘주어 말했다.
“저 안 취했어요.”
“취했어.”
보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며 깜빡인다.
“으응, 완전 말똥말똥해요.”
“흐릿흐릿해 보이는데.”
“에이. 일부러 무뚝뚝하게 구시는 거 다 알거든요.”
“알면 그만해야지?”
“저도 그만하려고 해봤는데요, 그게 제 맘처럼 안 되는데 어떡해요?”
“노오오력을 하면 되겠지?”
“시이이러요.”
“너네 대표님한테 이를 거야. 이제 좀 잘 됐다고 연애질이나 하려고 한다고.”
“아니아니, 잘되기 전부터 좋아했잖아요.”
“내 말투 따라하지 마.”
“대표님도 제 말투 따라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아까 촬영장에서 연기 레슨 받았다는 말씀하시면서 그치그치, 이러셨어요.”
그랬나.
기억 안남.
“······너 원래 이렇게 되바라진 애였냐.”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하는 게 되바라진 거예요?”
“그치그치, 되바라진 거 맞······ 앗!”
젠장, 따라했구나.
어느새 이불속으로 기어들어와 가랑이 사이에 자리 잡은 떼껄룩처럼 나도 모르게 나경이의 말투를 쓰고 있었다.
“프힛, 거봐요. 대표님도 제 말투 따라하시면서.”
“아니지. 너는 그쵸그쵸잖아. 나는 그치그치라고 했는데?”
“아이고 의미 없당···.”
“들어가자.”
“예.”
녀석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지 들어가자는 말에 순순히 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내 옆을 종종 걸음으로 쫓아오며 끝까지 빌드업을 했다.
“대표님. 저희가요, 이번 앨범 활동 끝나면 며칠 쉬거든요?”
나는 아예 맥락을 딱 잘라버렸다.
“싫어. 안 해. 안 만나. 오지 마. 연락도 하지 마. 차단할 거야.”
“아앙, 끝까지 들어보세요. 저랑 그때 딱 하루만 놀아주시면요, 저 진짜 포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포기하든지 말든지. 안 만나.”
“대표님 오실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개인적으로 연락하기만 해봐라. 너네 대표님한테 이른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거 알지?”
“저도 한다면 해요.”
나경이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식당 쇼윈도가 보이는 지점으로 꺾어지는 바람에 대화가 중단됐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나경이와 단둘이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
일주일 뒤.
어덕의 인터넷 방송 제작을 맡은 육봉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미 나올 건 다 나왔어요. 여기서 더 고민해봤자 오히려 더 꼬이기만 하니까 일단 시작하고 보는 거예요. 촬영하다보면 알아서 다 나오게 돼 있어요.”
그리하여 ‘어덕을 이겨라’의 첫 촬영이 번갯불에 콩 까듯이 부랴부랴 시작된 것이다.
정식 채널 제목은 어덕한테 입덕하라는 뜻의 ‘어덕해’로 정했고, 어덕 5인과 대결을 펼칠 1회 게스트는 쪼꼬미 혜진이가 소속된 GIG였다.
서원친구 유진이의 메이퀸즈와 GIG 둘 중에 한 팀을 고민하다가 예능돌 혜진이가 있고 팬덤이 우세한 GIG로 결정을 내렸다.
GIG는 7인조지만 매노스의 육봉스냅으로 지워진 슈슈와 드라마 촬영에 들어간 안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명이 출연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매 편마다 다른 채널의 유명 스트리머, 유튜버를 초대해 그의 콘텐츠에 맞는 진행 겸 벌칙을 정하기로 결정이 났는데, ‘어덕해’의 역사적인 첫 콜라보레이션 채널은 프리랜서 전향 1년 만에 예능 판을 씹어 먹고 다니는 아나운서 출신 김규성의 ‘국경 없는 방송’이었다.
수위에 국경이 없다하여 ‘국경 없는 아나운서’라 불리는 김규성.
그는 예전에 혜진이가 ‘스타킹 커피’를 우려냈을 당시, ‘업계 포상’이라는 탈지상파 드립을 날리며 혜진이와 함께 동반상승했던 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촬영장에 오자마자 혜진이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담당 PD인 육봉선생을 향해 대놓고 친분을 자랑했다.
“편파 판정해도 되죠?”
육봉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 정해진 룰도 대본도 없으니까 규성 씨 스타일대로 하시면 돼요. 어차피 녹화방송이라서 저희가 생각했을 때 조금 많이 나갔다 싶은 건 알아서 편집해드릴 테니까 진짜 국경 없이 한 번 해주세요.”
“아싸.”
겉으로는 허술하고 대충대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김규성은 누구보다 진지하고 영리하게 방송에 임하는 사람으로 평판이 자자하다.
그는 어덕 아이들에 대한 사전 모니터링도 철저하게 해왔다.
“저 ‘소녀날다’에서 발가락으로 과자 봉지 뜯는 게임 진짜 재밌게 봤거든요. 첫 판은 그걸로 갈까요?”
이 정도로 끝내면 국경 없는 김규성이 아니었다.
“그런데 미오 씨가 사기적으로 잘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스타킹을 준비해왔습니다. 스타킹 신은 발로 뜯는 거예요. 그럼 밸런스가 좀 맞겠죠?”
이 인간 발 페티시, 스타킹 페티시 맞네.
그리하여 풋잡 장인 미오 대 스타킹으로 인생 역전한 혜진이의 1라운드 대결이 성사됐다.
< 나경이의 틴트 향은 너무도 달콤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