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6화.소녀들의 라이브, 소라넷 (309/371)

< 소녀들의 라이브, 소라넷 >

“우리 리야가 마음의 병이 깊어요. 오빠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 좀 해주세요.”

“예, 예.”

매니저님에서 오빠로 바뀐 요나의 호칭에 병용이의 입가에는 마침내 완연한 미소가 걸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도 ―요나가 요나 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데 당사자는 어련하겠는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요나는 허그를 푼 뒤 허리를 숙여 병용이에게 인사했다.

그렇게 요나가 업키걸을 대표해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난 뒤.

쫓겨났던 아이들이 다시 들어와서 다시 인사를 나눴다.

리야는 밖에서 홍이한테 한 소리를 들었는지 자기가 먼저 사과를 했다.

“휴먼으로 살다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것이야. 휴먼이란 게 원래 그런 존재자너? 서로 상처주고 상처 받으면서 그걸 극복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숙한 휴먼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자너. 이름이 김멍용이라고 했지?”

“김병용 입니다.”

병용이는 우리 회사에서 리야가 가진 영향력을 본능적으로 파악했는지 아니면 녀석의 기세에 눌린 건지 자기가 손아랫사람인 것처럼 낮은 자세로 대답을 했다.

“병용이는 뭔가 어감이 별로야. 그냥 멍용이로 해.”

“아···.”

병용이가 이게 지금 농담인지 진실인지 헷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것이 리야 나름대로의 친해지는 방법임을 알고 있는 나는 그냥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나이는?”

“스물여덟입니다.”

“앗, 아앗. 젊은 친구가 탈모···. 암튼 앞으로 우리 언니들이랑 립밤 이모들 잘 섬기도록 해요. 이상.”

“······.”

···암튼 리야 스타일의 사과였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겠냐 싶겠지만, 녀석이 나를 제외한 다른 남자들한테 이 정도로 길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사과가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개념 없고 버릇없는 금수저의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면 자기 나름대로 선을 긋고 서열 정리를 하는 과정 같다.

가라오케 웨이터로 일하던 장우도 처음 업키걸 로드매니저를 할 때도 이랬고, 나와 염, 현동이한테도 똑같이 대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익힌 ‘내 잘못 인정 안 하기’ 패시브와 남자들에게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가 동시에 영향을 미친 것이리라.

그래도 일단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챙겨주기도 한다.

업키걸 담당 매니저이자 1팀장으로 있는 장우는 24평짜리 아파트를 업키걸 3주년 기념 선물로 리야한테 받아서 현재 어머님이 그곳에 살고 계시고, 그 외에도 연봉 절반만큼의 용돈을 리야에게서만 따로 받고 있다. 인센티브나 보너스가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용돈으로 말이다.

리야는 병용이가 측은했던 건지 바로 보상을 주었다.

“뮨댕쓰, 멍용이 탈모빔 맞은데 머리 심어줘. 고귀하고 관대하신 알리야의 입사 선물인 것이에요.”

“오, 니가 해주는 거야?”

“그럼 내가 해주지 누가 해줘.”

안 그래도 내가 병용이한테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이식수술 비용을 대주려고 했었는데 돈 굳었다.

병용이는 요나한테 허그를 받은 것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이 회사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

프라미슈와의 광고 촬영 일정은 저녁에 잡혀 있었다.

메이크업과 의상은 촬영장에 다 준비돼 있다고 하여, 나는 잠깐 시간이 비는 사이에 어덕 아이들을 회의실로 불러 데뷔 앨범 및 유튜브 콘텐츠와 관련한 회의를 진행했다.

“앨범 프로듀싱은 염 대표랑 옆집작곡가가 공동으로 할 거야. 노래는 여기저기서 받고 있는 중인데 내 생각에는 아마 옆집이 께 타이틀이 될 확률이 높아. 장르는 레트로 댄스 쪽으로 갈 것 같고.”

옆집이의 작사 작곡, 현동이의 편곡, 염의 프로듀싱은 이미 업키걸 앨범을 통해 검증받은 조합이기 때문에 이견은 없었다.

“라희도 곡 쓴 거 있으면 A&R팀에 보내.”

“아··· 써놓은 건 많은데 제 노래는 팀 색깔이랑 좀 안 맞을 것 같아서요.”

“봐서 편곡 할 수 있는 건 하면 되니까 일단 보내봐.”

“예에.”

앨범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이 되지 않는다.

내가 신경 써야 될 부분은 인터넷 방송 콘텐츠였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콘텐츠를 만들어갈 역량이 되는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럴 수 있다.

라희와 란이의 버스킹 공연을 제외하면 자기 혼자서는 그 흔한 개인 인방도 한 번 안 해본 아이들이다.

말 그대로 다섯 명이 진행자 겸 메인 게스트가 되어 콘텐츠를 이끌어가야 하는데 걱정이 될 수밖에 없겠지.

“엄승미 작가님이 그러는데 너희가 예능감이 꽤 있는 편이래. 나도 같은 생각이고. 일단 엄 작가님이 소스 하나 던져줬거든? ‘어덕을 이겨라’라고, 다른 걸그룹이랑 너네가 게임을 해서 벌칙도 받고 후원도 하고 그러는 거야.”

이 콘텐츠를 현재 라희&란의 버스킹 콘텐츠를 담당하고 있는 ‘잼미디어’ 육봉선생에게 제안했더니 그는 인터넷 병맛 계의 앵무조개답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서 몇 가지 시안을 보내주었다.

“너네끼리만 하는게 아니라, 게임이나 벌칙은 요즘 인기 있는 유튜버들이 대신 정해주는 거지.”

소재는 참으로 무궁무진 했다.

필라테스 또는 요가 유튜버와 함께하는 극악의 스트레칭 게임.

스포츠 전문 유튜버와 함께하는 병맛 스포츠 올림픽.

패션&뷰티 유튜버와 함께하는 ‘웃지 마 분장 쇼’ 등등.

그냥 그들의 전문성에 병맛 한 스푼을 넣으면 다 되는 것이다.

요즘 혐오음식 먹방 콘텐츠로 한창 구독자가 늘고 있는 ‘우마왕’에게 혐오음식 벌칙 받기 같은 것도 끝내주는 아이디어였다.

물론 이걸로 하루아침에 대박이 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요즘은 인방 쪽이 워낙에 레드오션이라서 백종원 아저씨 같은 인지도가 아니고서야 처음부터 인기가 있을 수는 없대. 꾸준히 제작해서 구독자 수 늘리고 인지도 쌓는 게 중요한 거지. 그나마 우리는 라희랑 란이가 버스킹으로 어느 정도 눈도장을 찍어뒀기 때문에 ‘잼미디어’ 쪽에서는 유리할 거야.”

어덕 아이들은 자신들도 밑바닥부터 올라갈 각오가 돼 있다는 표정으로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한마디씩 의견을 내놓는다.

“다른 걸그룹이 자신 있는 종목을 정하면 저희가 도장 깨기 형식으로 도전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미오의 아이디어에 란이도 진취적으로 덧붙인다.

“1회 게스트로 업키걸 언니들 부르면 되겠다.”

란이의 귀여운 하룻강아지 멘트에 나는 실소가 터졌다.

“큭큭큭, 야, 업키걸 애들은 이쪽 세계에서 끝판왕이다. 아, 맞다. 란이 너는 리플걸 때 같이 해봐서 알잖아?”

“괴물들···.”

당시 ‘리플레이걸’에서는 아이돌 육상대회 포맷으로 게임을 진행했는데 업키걸은 거기에서 금메달을 휩쓸며 ‘만렙 체육돌’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수영의 마이클 펠빛스. 25m 잠영이 가능한 해녀 출신+예능신의 가호.

게임의 서원 페이커. 2년 동안 집에서 은둔하면서 게임만 했음.

달리기 요나. 운동신경 좋음+승부욕좌.

최종병기 홍. 말 그대로 끝판왕. 초등학생 때부터 씨름, 유도, 투포환, 역도 등 각종 운동부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했던 인재+먹방은 생활.

레저 스포츠의 퀸리야. 어렸을 때부터 승마, 볼링, 테니스, 골프, 스키, 스노보드, 웨이크 보드 등등 각종 스포츠를 선출 전문가에게 배움.

당시, 란이가 속해있던 아이컨택은 PD에게 유리한 푸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목에서 업키걸한테 처참하게 발리며 고배를 마셨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란이가 오기 섞인 얼굴로 음경 빠는 소리를 한다.

“섹스배틀은 우리가 이길 자신 있는데. 김윤호 자지 입으로 빨아서 빨리 싸게 하기···.”

“영양가 없는 소리 그만 하고. 채널 이름은 뭘로 하지? 하나씩 던져봐.”

나는 섹천포로 빠지려는 대화를 단숨에 제압하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작명 쪽에 센스가 있는 라희가 이미 준비했다는 듯 바로 대답한다.

“소녀들의 라이브. 줄여서 ‘소라넷’ 어때요?”

다시 섹천포로 빠지고 있다.

소라넷이 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미오와 나뿐인 것 같은데,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신음을 삼켰다.

라희는 순진한 얼굴로 두 번째 후보군을 내놓았다.

“‘폰허브’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건 무슨 뜻인데.”

녀석은 자기가 생각해도 아주 기발하고 의미가 있다는 듯, 온몸으로 순수한 학구열을 내뿜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체스 말 중에 폰이라고 있거든요?”

“있지. 장기로 치면 쫄.”

“예, 맞아요. 그리고 허브(hub)는 자전거 바퀴의 중심축을 뜻해요.”

아직은 폰(쫄)의 위치인 자신들끼리 모여서 중심축을 만들어가는 뜻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어글리 더클링과 비슷한 맥락이긴 한데, 이렇게 끼워 맞추기도 힘들겠다.

미오가 옆에서 중얼거린다.

“다 아는 이름들이구만···.”

라희의 노력과 센스가 가상하긴 하다만 당연히 둘 다 탈락이었다.

라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세 번째 후보를 내놓았다.

“그럼 살짝 불량식품 느낌으로 ‘엑스비디오(XVIDEO)’는 어때요오? 어감이 좀 강해보이긴 하는데···.”

“미오야, 아무래도 얘 다 알고 이러는 것 같지?”

“이쯤 되니까 저도 합리적 의심이 들긴 하네요.”

“예···? 뭐가요오···?”

라희는 진짜 모른다는 투로 눈을 동그랗게 떴고.

“처녀인데 씹물 좔좔 음란 보지 예라희, 퍽킹 퍽킹 퍽퍽킹!”

가만히 듣고 있던 지유는 순도 7%짜리의 짭틱을 터뜨렸다.

얘도 알고 있었구나.

라희의 섹스러운 작명 센스보다는 지유의 방대한 섹펙트럼이 더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래. 이름은 다음에 짓자···.”

***

프라미슈12와 함께하는 광고 촬영 장소에는 비번인 립밤 담당 로드매니저가 따라붙었다.

촬영장으로 이동 중에 나경이에게 개인 톡이 왔다.

나굥 [대표님 언제 오세용?]

나 [나는 이제 출발했는데 너희는 어디?]

나굥 [저희는 이미 도착해서 메컵 받고 있지요ㅋㅋ]

나 [아, 그렇겠구나]

나굥 [빨리 오세요]

나굥 [아니아니, 조심히 오세요!]

내 입버릇인 ‘아니아니’를 말하는 나경이는 정말 귀엽구나.

내게 친밀감을 어필하기 위해 일부러 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다.

빵순이들과는 ‘체인지’ 촬영 이후로 처음 만나는 자리다.

프라미슈는 ‘Loving’으로 음원과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찍은 뒤 원래 타이틀곡이었던 ‘Beauty sunshine'으로 후속곡 활동 중이다.

한창 분위기가 좋을 때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음성안내를 종료합니다.

촬영 장소는 남양주에 위치한 종합 촬영 세트장이었다.

4가지 버전의 컨셉에 맞춰 총 4개의 스튜디오가 준비됐고, 내가 도착했을 때 빵순이들은 헤어 메이크업을 모두 끝내고 코스프레 의상을 체킹 하던 중이었다.

나는 촬영감독 및 스텝들과 먼저 인사를 나누고 콘티를 받은 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바쁘게 피팅을 하고 있던 아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와, 1위 가수들이다.”

“어이고, 대부님 오셨습니까.”

승채가 너스레를 떨며 가장 먼저 다가왔다.

나는 녀석의 은발의 생머리 가발과 역시 은빛 계열로 메이크업 된 얼굴을 보며 물었다.

“너는 뭐야?”

“엑스칼리버요.”

“오, 제일 유명한 거 했네?”

“내가 프라미슈 에이스니까?”

“와, 1위 했다고 그새 어깨에 벽돌 올라간 것 봐라.”

“뭐래? 저는 원래 이랬거든요?”

“그럼 이제부터 겸손해지는 방법을 좀 배워.”

“어우, 오랜만에 만나서 그놈의 잔소리, 잔소리.”

내가 승채와 주거니 받거니 티격태격 하는 사이, 나를 발견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첫 번째로 촬영을 해야 할 세 명의 아이들은 이미 세팅이 끝난 상태였는데, 나경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금발 생머리.

붉은 컬러렌즈와 눈매를 날카롭게 강조한 메이크업.

하이레그 수영복 타입 슈트에 촘촘한 망사스타킹, 가죽 롱부츠.

나경이는 방어력이 상당해 보이는 퇴폐적이고도 노출이 많은 의상과 어울리지 않게, 해맑은 미소와 슈크림처럼 달달한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었다.

“대부님 오셨어요!”

“왔지.”

“그쵸그쵸, 오셔야죠. 잘 오셨어요!”

상반되는 이미지에서 오는 배덕감 무엇.

나경아, 나도 뒤틀린 성벽이 있다.

니가 이런 식으로 내 성벽을 자극하면은 마!

그때는 남창이 되는 거야!

나경이 뿐만이 아니었다.

전원 센터돌 프라미슈12의 의상 컨셉은 노출이 심할수록 방어력이 높다는 게임 속 여캐의 방어구답게 하나 같이 으슬으슬 했던 것이다.

< 소녀들의 라이브, 소라넷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