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모 한 가닥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다 >
규율이는 합숙소로 돌아갔고 이정아도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두 사람이 오늘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고를 흐리게 만들었던 봊깍지가 벗겨지고 나면 남는 것은 지독한 자괴감뿐인데, 그것을 굳이 입에 올려서 상기시키지는 않겠지.
서로 합의를 보지 않아도 어제 일을 연상하게 만드는 언급 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을 테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유사)모녀 쓰리썸 다음날.
나는 이정아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안부를 물었다.
관계 이후 나까지 연락을 뚝 끊는 것은 뭔가 예의에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출근은 잘 하셨어요?]
하루건너 보낸 안부에 그녀는 내 예상을 깨고 꽤나 당돌한 답장으로 응답했다.
이정아 [거기가 지금도 계속 부어있어요;; 아직도 팬티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찌릿찌릿거려서 미치겠어요ㅜㅜ]
나 [앗, 아앗···]
이정아 [그리고 정액이 왜 아직까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수업시간에 계속 흘러나오는데 어찌나 당황했는지···]
나 [왠지 제가 사과해야 하는 분위기네요. 죄송합니다···.]
이정아 [제가 이 정도인데 규율이는 어떨지 걱정이에요]
이정아 [가만히 서 있어도 새는데 안무 연습할 때 얼마나 불편할까요. 경연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지 괜히 미안하네요]
괜찮을 거예요. 란이는 안무할 때 미끄덩거리는 그 느낌이 좋아서 일부러 질싸 당하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거든요. 규율이도 몇 번 경험을 해봤고요. 그리고 그거 팬티에 묻으면 금방 말라서 괜찮지 않았어요? 라는 TMI 답장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제 일을 감추려고 하기는커녕 자기가 먼저 얘기를 꺼내다니. 규율이라면 모를까 이정아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예상치 못한 솔직한 후기에 오히려 내가 민망해져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런 거 때문에 연습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허술한 애는 아니잖아요ㅋㅋ]
이정아 [그럼 다행이고요]
의외로 덤덤하고 숨김없는 그녀의 반응에, 나는 감히 내 인생 최고의 섹츄에이션이라 부를 수 있는 어젯밤의 일을 또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세 명 모두 좋은 경험이었다면 굳이 피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정아 [와, 방금 사전 투표 순위 확인했는데 규율이가 2위네요?]
나 [그러게요ㅋㅋ]
이정아 [나이가 많아서 인기 없을 줄 알았는데ㅜㅜ]
나 [시청자들도 보는 눈이 있잖아요. 실력이랑 비주얼이 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이정아 [뿌듯하긴 하네요]
나 [마음껏 뿌듯해하셔도 됩니다. 지금의 규율이가 만들어지기까지 정아씨가 반 이상을 해주신 거니까요]
이정아 [기자 간담회 때 욱한 것 때문에 이미지 안 좋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에요]
나 [규율이는 기복도 없고 멘탈도 탄탄하니까 무난하게 데뷔조에 들 거예요]
이정아와 톡을 주고받던 중 프라미슈 아이들과 찍기로 확정된 게임 광고 담당 AE에게 연락이 와서 이정아와의 대화는 마무리가 됐다.
김성환AE [김윤호 대표님, 새 콘티 메일로 전송해드렸습니다]
김성환AE [광고의 타깃층이 10~20대 젊은 층인 바이럴 광고인만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B급 감성을 강조했다는 점을 감안하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나 [저도 병맛 좋아합니다ㅋㅋㅋㅋ]
김성환AE [그럼 다행이네요. 역시 배우신 분답습니다!]
나 [(코쓱 거리는 짤)]
김성환AE [(코쓱 거리는 짤 다른 버전)]
받아치는 솜씨가 제법인걸.
일을 하면서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질 수밖에 없다.
김성환AE [이번에 프라미슈12가 1위 했을 때 저희 직원들 다 소름 돋았습니다. 진짜 1위를 할 줄이야···.]
나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네요]
김성환AE [그러니까요]
프라미슈12와의 동반 모델 때문에 내가 물밑 작업을 많이 했다.
처음 광고회사에서 프라미들에 대한 모델 선호도 조사를 했을 때는 평가 결과가 조금 낮아서 모델료가 생각보다 훨씬 낮게 책정이 됐었다.
광고회사 입장도 이해는 됐다.
가뜩이나 바이럴이라서 일반 CF보다 광고료가 낮은데다가, 원래는 나 혼자 출연하기로 했던 광고에 프라미들을 끼워 넣은 것이기 때문에 최소 등급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그인레코드 측에서는 그 모델료로 12명이 출연하는 것은 손해라고 판단했다. 차라리 메인 멤버 5~6명 정도만 추려서 출연을 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걸 내가 위험을 감수하는 옵션까지 걸면서 두 배 가까이 끌어올려준 것이다.
그 결과 원래의 대폭적인 콘티 수정이 이뤄졌지만, 계약 이후에 빵순이들이 1위를 하고 인지도와 몸값이 뛰고 있는 중이니 광고회사 측에서도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김성환 AE와 카톡을 마친 뒤 수정된 콘티를 확인했다.
‘라니온스’라는 제목의 모바일 게임이다.
총을 의인화(모에화) 한 중국 게임의 헬조선식 파쿠리 버전인데 이건 총 대신 칼이다. 동서고금의 유명한 칼과 검을 의인화 한 소녀 캐릭터들로 파티를 짜서 전투를 벌이는 그런 세계관이었다.
무과금 원칙주의자인 서원이가 ‘와씨, 캐릭터 일러가 예뻐서 한 번 파볼라고 했더니 대놓고 과금유도 극혐이네. 내가 이래서 우리나라 모바일 게임은 안 건드려요’하면서 며칠 만에 때려 쳤던 바로 그 게임이었다.
콘티 확인 결과, 인터넷에서 한창 인기 있는 짤이나 유행어를 적절하게 패러디 한 가벼운 컨셉의 광고였다.
메인은 당연히 나였고, 빵순이들은 이번에 새로 출시되는 신 캐릭터 및 기존의 인기 있는 캐릭터들로 분장해서 등장한다.
캐릭터 일러스트가 예뻐서 유입되는 유저들도 많은 만큼 코스프레 퀄리티가 중요할 것 같다.
빵순이 애들도 지금 콘티를 확인했는지 내가 속한 13인 단톡방에 대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프로필 사진은 대세가요 1위 트로피를 들고 찍은 대기실 단체샷으로 통일이 돼 있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경이의 프로필부터 눌러본다.
상태메시지는 여전히 초성이었는데 기존의 ‘ㅁㄴ ㅂㄱㅅㅇㅇ’에서 살짝 바뀌어있었다.
‘ㅁㄴ ㄱㅅㅎㄴㄷ’
나는 문구를 보자마자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조합을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뮤노 가슴 혼낸다.”
하앍, 더 혼내줘.
나경이의 하얗고 가지런한 앞니에 유두 잘근잘근 씹힘 당하고 싶.
물론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번에 1위를 한 것에 대한 ‘뮤노 감사합니다’가 아닐지 싶다.
아니, 뮤노보다는 ‘뮨님’이 더 자연스럽겠다.
오늘도 순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나였다.
프라미슈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만 하면 풋풋했던 옛 감성으로 돌아가서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이모 조카를 위아래로 포개놓고 질펀한 쓰리썸을 즐긴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
<전과자와 미혼모도 걸그룹이 될 수 있나요?>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소녀날다’ 2회가 방송된 직후 란이와 지유가 동시에 검색어에 오르면서 이슈가 되자 연습생들의 신변과 관련된 기사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 7년 동안 전과기록이 남기 때문에 란이는 현재 전과자라는 점을 강조했고, 거기에 지유의 미혼모 신분까지 언급하면서 대중들의 반응을 첨부한 기사였다.
속은 좀 쓰렸지만 그래도 이런 기사가 연예뉴스 상위권에 오른 걸 보면 프로그램 자체는 꽤 화제가 되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그걸로 위안을 삼았다.
란이 마약사건의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쓰리에스 엔터 측의 부정 청탁 혐의가 발견돼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점을 명시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댓글의 ‘좋아요’와 ‘싫어요’ 기능을 통해 직접 찬반 투표를 한 베스트 댓글의 반응도 주목할 만 했다.
물론 결과는 참담했지만 말이다.
―나란놈답너 : 마약돌 이소란 방송 출연 찬성은 좋아요, 반대는 싫어요
좋아요 678 / 싫어요 1,345
―넣 : 미혼모돌 보고 싶으면 좋아요, 보기 싫으면 싫어요
좋아요 451 / 싫어요 891
반대 의견이 두 배 가까이 된다.
물론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기사에 작성된 단편적인 이미지와 단어만을 보고 투표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이 결과를 대세의 여론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단어 선택 하나와 문장의 뉘앙스만으로도 찬반여론이 확연하게 갈릴 수 있지 않은가.
커뮤니티나 포털의 성격에 따라서도 찬반 의견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론이라는 것을 광범위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편향적이고 편협한 요소들 또한 여론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저 정신승리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도 ‘소녀날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란이, 지유에 대한 하차 요구를 넘어서 폐지까지 요구하는 게시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그 중에서 극단적인 의견은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충분한 근거와 일리가 있는 반대 의견들은 제작자인 내 입장에서 시장조사 개념으로 참고할 만 했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의견은 ‘그게 나쁜 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굳이 내 시간과 돈을 소비하면서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였다.
란이가 보라색 아우라로 변하던 초기 때부터 내가 가장 우려하고 고민했던 바로 그 리스크였다.
이제 다섯 멤버가 모두 모였고, 앨범 제작도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나는 어글리 더클링의 컨셉과 타깃층을 확실하게 선택해야만 했다.
대중의 호불호가 적고 누가 봐도 매력적인 ‘천상 아이돌’ 업키걸 아이들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씹덕 대장 은빛이 같은 확실한 입구 멤버도 없다.
업키걸 때는 멤버별 트레이닝 방식까지 세세하게 알려주던 상태창의 개입도 현저히 적어졌다. (생각해보니까 상태창 이 새끼 조교 쩌네.)
어덕 아이들의 데뷔 과정을 요약하자면, 청국장을 먹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청국장의 장점과 효능을 어필해서 기어코 먹여야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막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태창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프라미슈 스타킹 미션’을 통해서 대중에게 어필하는 방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감을 잡은 덕이었다.
어울리는 타이틀곡 선정, 헤어스타일과 안무 변화, 파트 체인지, 잘 나가는 스타들의 SNS 홍보,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용한 멤버들의 캐릭터성 극대화 등.
어찌 보면 상태창이 준 꿀팁은 제작자와 디렉터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사소하면서도 당연한 것들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기획사가 그런 요소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면서 아이돌 제작을 하고 있다.
다만 그것들을 얼마만큼 센스 있게 조합하고 배치하느냐의 문제였는데, 그게 바로 제작자로서의 재능과 감각, 경험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제작자가 자기 아티스트의 성향 및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할수록 결과물이 더 좋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
그런 점 때문에 큰 걱정이 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어덕 아이들의 성격은 물론이고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 쉬이 알 수 없는 은밀한 성적취향과 신체 구석구석까지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대음순 모양, 아니, 음모 한 가닥만으로도 누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내가 ―라희를 제외한― 녀석들과 전투 삽입을 하면서 느낀 건데, 피가 물보다 진하다면 피보다 진한 것은 감히 애액, 정액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적어도 녀석들의 이미지 메이킹을 할 때 부각해야 할 점과 비주얼 스타일링만큼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무실 책상에서 1시간 넘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연습장에 메모까지 하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나는 잠시 생각을 환기하기 위해 ‘소녀날다’ 공식 SNS에 올라온 어덕 아이들의 실시간 투표 순위를 확인했다.
24명의 연습생들이 전부 공개가 된 2회 방송분을 기준으로 한 인기투표였고, 다행히 어덕 아이들은 모두 상위권에 안착해 있었다.
1. 예라희
2. 정규율
4. 이소란
6. 이지유
10. 미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적어도 방송을 본 시청자에 한해서는 란이와 지유의 매력이 어필된 것 같다.
오히려 라희가 처음부터 1위로 치고 나간 것이 조금 의외였다.
올해 상반기를 대표하는 히트 곡 중 하나인 ‘분수’의 원작자이자 버스킹 공연을 통해 유튜브와 뮤즈티비에서 이미 수 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2회까지 방송에서는 녀석이 딱히 보여준 한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뒤로 가면 갈수록 존재감을 드러낼 것으로 생각했는데 곧바로 1위에 오른 것을 보면 역시 요나의 후예이자 2기 1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오가 10위에 오른 것은 조금 마음이 아프다.
전체적으로 보면 낮은 순위는 아니지만 다른 어덕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처진다.
게다가 미오는 다섯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자의가 아닌 타의로 연예계에 뛰어든 녀석이다.
안 그래도 기본기를 채 떼기도 전에 방송에 출연해서 우등반과 열등반을 오가며 기복을 보이고 있는 녀석이 혹시나 인기투표에 상심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하지만 미오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요망하고 영리한 녀석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게 있었다.
녀석이 남자의 판타지를 자극해서 솜씨 좋게 정액을 뽑아내는 이미지―페티시 클럽 출신이라는 것이다.
녀석은 3회 차 방송 중 숙소에서 진행된 ‘경연 순서 정하기 게임’을 통해 나조차 알지 못했던 모습을 ‘연기하면서’ 남성 팬들의 이목을 끌었고, 그것을 계기로 사전 투표 순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언더독’ 팀 숙소에 전달된 종이봉투의 정체는?>
―어? 이거 혹시 미션 카드 아니에요?
―빨리 열어봐요.
―뭐라고 적혀 있어요?
―잠깐만요··· 아, 게임을 통해서 무대 순서를 정하라는데요. 그리고 1위한테는 특별 베네핏 점수도 있대요.
―와! 무슨 게임이에요?
―제한 시간 안에 발가락으로 최대한 많은 과자 봉지를 뜯어라···?
―푸하하하, 뭐야 그게!
―발가락으로 과자 봉지를 어떻게 뜯어요!
다른 연습생들이 어이가 없어서 갸르륵 거리는 동안, 미오만이 유일하게 신발을 벗은 채 발가락을 풀고 있었다.
마치 이런 미션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신경 써서 바른 레드와인 빛깔의 펄 페디큐어.
풋잡에 특화된 길고 예쁜 미오의 발이 화면에 클로즈업 된다.
걸그룹 연습생의 맨발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담아내던 방송이 있었던가.
전국 팔도에 숨어있는 발 변태들이 바지 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뷰륵
미친.
나 역시도 파블로프의 댕댕이 마냥 쿠퍼액이 주르륵 새어나왔다.
< 음모 한 가닥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