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ㅂㄱㅅㅇㅇ.. >
나경이의 답문이 온 건, 녀석의 답장을 한참 기다리다가 포기를 하고 차의 시동을 건 후였다.
나는 D로 옮겼던 기어를 다시 파킹으로 옮긴 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나경이의 개인 톡을 확인했다.
나굥 [옙옙, 꼭 열심히 해서 1위 할게요! 저 대표님이 세세한 거 하나하나 칭찬해주실 때마다 너무 기쁘고 감동이었어요! 저 아플 때 걱정해주시고 약 주신 거는 진짜 평생 못 잊을 거 같아요. 그럼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아, 혹시라도 방송국이나 공연장에서 마주치면 아는 척 정도는 해도 되죠?]
나 [밖에서 만나면 당연히 인사하고 아는 척 해야지. 개인적인 연락하지 말자 그랬지 누가 평생 보지 말재?]
나굥 [히히^――^ 뭐, 그럼 된 거죠!]
나 [그리고 다른 멤버들한테도 꼭 전해. 1위하면 수상소감에 내 이름 꼭 말하라고]
나굥 [그것만큼은 제 입으로 꼭 말할게요! 믿어주세요!]
나 [그래, 승채한테는 커피농장 잊지 말라 그래]
나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나경이가 생각보다 씩씩하구나.
난 또 답장이 없기에 지하철역에서 승채한테 신세한탄하면서 우는 줄 알았지 뭐야.
내가 자뻑에 빠진 나머지 너무 나갔어, 껄껄껄.
나경이 때문에 내심 신경이 쓰였었던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방윤수 대표와의 약속장소인 아마조네스를 향해 악셀을 밟았다.
***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없지만, 제가 경험해본 바로는 그나마 거기에 가까운 게 김윤호 대표의 감이에요. 방 대표님도 알다시피 나도 촉 좋다고 소문난 사람이잖아. 그런데 연예계 쪽은 나보다 김윤호 대표가 더 확실하니까 한 번 믿어 봐요. 미심쩍으면 내가 보증을 설게.”
“흐으으으음···.”
방윤수 대표는 음률이 담긴 침음성으로 복잡한 심정을 대변했다.
역시나 타이틀곡, 컴백무대 변경이 끝까지 마음에 걸리는 듯 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그룹 같은 경우에는 컴백 첫 주에 후속곡으로 내정된 곡까지 총 2곡을 부르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Loving’의 퍼포먼스와 연습까지 마무리가 돼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컴백 무대에는 타이틀곡인 ‘뷰티풀 선샤인’ 한 곡만 부르기로 계획이 돼있었다고 한다.
러빙의 안무와 무대구성은 모두 나왔지만 두 곡을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변명인 것 같고, 내 생각에는 프라미슈에 대한 푸시와 기대치가 그만큼 낮아진 듯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프라미슈가 컴백 첫 주에 한 곡이 웬 말이냐고.
갑자기 확 짠해지면서 빵순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뭐, 연습 부족이라는 방 대표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컴백 무대가 1주일 연기됐으니 그동안 충분히 연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긴 한데···.”
이마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방 대표는 이내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선경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뭐······ 믿어봐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선경까지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니 강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 혼자 말하는 것과 작년 음원사이트 매출 2위에 오른 논스톱뮤직 대표가 하는 말은 당연히 공신력의 차이가 큰 것이다. 게다가 선경 누나는 로그인레코드의 지분에도 관여하고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지선경은 로그인의 또 다른 대표 이름을 거론하며 방 대표의 용기 있는 결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조수영 이사님한테는 내가 말할게요.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프라미슈한테는 관심 없겠지만 말은 해둬야지. 그럼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결정난 거죠?”
“그런데··· 어···.”
잠시 말을 끊었던 방 대표가 차마 내게는 묻지 못하고 좀 더 편한 지선경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는 건 아니죠?”
“에이, 당연히 아니죠.”
“죄송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 머리로는 이해가 안 돼서요.”
“김윤호 대표가 자기한테 아무 이득도 없는데 왜 불법까지 동원하면서 도와주겠어요.”
“그러니까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나마 지선경이 하는 말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거지.
우리는 모두가 행복해진 결말을 자축하며 건배를 했다.
희석된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한 잔 마신 나는 그를 위로하듯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오늘 컴백 티저 나갔는데 갑자기 스케줄 변경하기에는 시간이 좀 빠듯하긴 하죠?”
방 대표는 이제야 조금 느슨해진 표정으로 특유의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제가 빠듯할 게 뭐 있나요. 직원들만 갈려나가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여러모로 진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하고 보니 ‘내가 왜 감사하지? 당신이 나한테 감사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방 대표를 설득했으니 내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단순히 지선경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하기에는 내가 내 건 배팅도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내가 요구한 것을 모두 이행했는데도 활동 기간 안에 1위를 못할 경우, 이번 프라미슈의 컴백 앨범에 들어간 제작비의 절반을 내가 부담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방 대표는 곧장 회사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 바로 변경해야 할 일처리부터 알려준 뒤 내일 아침 긴급회의 시간을 잡았다.
그가 통화를 마친 뒤 지선경이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김윤호 대표가 아무 조건 없이 도와주는 거 알죠?”
“그러니까요. 진짜 1위하게 되면 저희가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되나···.”
떠보듯이 물으며 나를 쳐다보며 그의 눈빛에는 내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려는 미심쩍은 의구심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진짜로 1위를 하게 되면 다 자기 덕분이니 앞으로의 활동 수익을 나누라든지 자기네 회사로 데려간다는 거 아니야?’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나경이랑 승채한테 말해놨어요. 1위 수상소감 말할 때 제 이름 꼭 말해달라고요. 저한테는 그게 최고의 보답이에요.”
“에이, 그런 감성적인 거 말고요.”
“아니요, 진짜 원하는 거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난 며칠 동안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던 이 놈의 프라미슈 미션에서 좀 해방되어 결과만 보고 싶을 뿐이었다.
업키걸 이후 우리 회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소녀날다’ 첫 방이 내일로 다가왔는데 어째 프라미들한테 더 신경을 쓴 것 같다.
“그럼 이렇게 하죠.”
끝까지 겸손하고 쿨 한 내 모습에서 이제야 진심을 느낀 걸까.
방윤수 대표는 이번 프라미슈 컴백활동과 관련된 프로듀싱 및 프로모션을 YH엔터테인먼트와 공동으로 진행한 것으로 공식 발표하겠다고 했다.
뭐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맞기는 했기 때문에 이번 제안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데뷔 4년차 동안 별 다른 성과가 없었던 프라미슈를 반등시켜 1위를 만들었다는 건 우리 회사 프로듀싱 능력과 내 이미지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어글리 더클링’ 데뷔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겠지.
“그럼 지금은 말고요, 공중파 음방 1위하면 그때 말씀해주세요.”
비록 서류와 도장이 등장하는 공식 협약은 아니었지만, 연예계를 비롯해 정재계까지 영향력이 닿아있는 지선경이라는 인물 앞에서 오간 대화였기 때문에 방윤수 대표도 절대 허투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듣는 앞에서 회사 직원들과 통화를 하고 일을 바로바로 진행시킨 것을 보면 그 역시 진지하게 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으로 프라미슈12에 대한 내 할 일은 끝이 났다.
본론이 끝난 술자리는 이후 2시간가량 이어졌다.
우리는 프라미슈12, 브이라벨, 소녀날다, 어글리 더클링, 엔터 대표로서의 고충, 쓰리에쓰 게이트 수사의 진행 상황 등을 비롯해서 가요계의 전반적인 이슈를 주제 삼아 대화를 나눈 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기분 좋게 자리를 마쳤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동시에 성공을 거둔 VNF, 업키걸에 이어, 차세대 한류 걸그룹으로 떠오른 ‘브이라벨’와 관련된 로그인레코드의 내부 이야기는 어덕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내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
―여보세요.
“어, 요나야. 어디야?”
―저 아직 회사요. 홍이 언니 와서 음악 작업 하고 있었어요.
“아, 그래? 나는 이제 미팅 끝났어.”
―어, 생각보다 일찍 끝나셨네요. 술 많이 드셨어요?
“적당하게 마셨어. 너랑 맥주 마실 배는 남겨뒀는데 어떻게 할래? 작업 계속 해야 되는 거면 다음에 보고.”
―아니에요. 제가 지금 대표님 계신대로 갈게요.
“밖에서 마실래?”
―앗, 저는 집이 편해요. 연습하고 땀 많이 흘려서 밖에 돌아다닐 꼬라지가 아니에요. 완전 거지, 거지.
“그래, 그럼 나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우리 집으로 와라 거지야.”
―흐흐흐흥,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대리를 불러 집에 도착한 나는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거지를 기다렸다.
침대에 누워 방윤수 대표를 만나는 동안 확인을 하지 못했던 여러 단톡방들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 중에는 프라미슈 아이들과 내가 속한 13인 톡방도 있었는데 ‘체인지’ 촬영이 끝난 이후 처음으로 메시지가 올라온 것이다.
메시지가 무려 300개가 넘게 와 있었다.
들어가 보니 촬영 틈틈이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찍었던 사진들과 그에 관련한 이야기들이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다가 중간중간 내 얘기도 나오고 그랬다. 나경이와 승채가 나와 떡볶이를 먹은 건 비밀인지 그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답장을 보냈다.
나 [나 없는 사이에 신나게들 떠들었구나]
나 [나는 너희 대표님 만나서 얘기하고 이제 퇴근했다]
숙소에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다던 녀석들이 다시 채팅에 참여하며 단톡방이 활발해졌다.
12호 이다빈 [무슨 얘기 하셨어요?]
6호 원지연 [막 우리 뒷담화 한 거 아니에요ㅋㅋㅋㅋ]
11호 김소원 [뭐 드셨어요?]
나 [너네 컴백 앨범 얘기 했고, 너무 예뻐서 뒷담화 할 게 없었고, 술 마셨어]
11호 김소원 [안주 뭐 드셨어요?]
나 [얘들아 소뱅이 뭐 좀 먹여라. 쿨타임 돌았나보다]
10호 한미나 [ㅋㅋㅋㅋㅋㅋㅋㅋ]
3로 이루미 [소뱅이 팬들한테 받은 과자 몰래 먹다가 실장님한테 걸려서 저희 전부 소지품 검사 당했잖아요ㅋㅋㅋ]
나 [굉장하네..]
11호 김소원 [뮤노 대표님. 저 YH 앞에서 파는 그 떡볶이 먹고 싶어요. 배달해주시면 안 돼요?]
4호 이승채 [ㅋㅋ거기 진짜 맛있긴했지]
5호 유나경 [나도 가고 싶다..]
잠잠하던 승채와 나경이는 떡볶이 얘기가 나오자 처음으로 등장했다. 시치미 떼는 모습이 능글 맞다기 보다는 귀엽다.
나경이는 프로필 사진이 변경됐다. 눌러보니 저녁에 나를 만나러 올 때 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이었고, 상태메시지는 초성으로 바뀌었다.
<ㅂㄱㅅㅇㅇ..>
정액으로 채워진 내 머릿속에서 귀신처럼 조합된 문장은.
“박고 싶어요···?”
였지만 우리 나경이가 그럴 리는 없고, 아마도 ‘보고싶어요..’겠지.
하여튼 이것들은 꼭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이라니까. 개인 카톡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런 작은 시그널들이 모여서 팬들한테 열애설 의심을 받는 거 아니냐고.
팬들도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 열애를 인정한 효주랑 건혁도, 열애를 인정하자마자 그동안 SNS와 무대 백 스테이지 등에서 주고받은 자기들만의 암호가 팬들에 의해 싹 다 까발려지지 않았던가.
이런걸 보면 우리 업키걸 애들은 진짜 철두철미한 거다.
그런데 나도 참 못난 놈이지.
나경이의 상태메시지 속 ‘보고싶어요’의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좋아해주는 건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녀석과 나는 이뤄지지 못한다는 현실을 떠올리면 촉촉했던 설렘은 곧 씁쓸함으로 변해 수분을 잃고 바스러진다.
“하아···.”
가슴 한 가운데서 가스처럼 모인 안타까운 한숨이 입을 통해 새어나갔다.
나경아, 나도 보고 싶다.
아까 만났는데 또 만나고 싶다.
단 둘이 만나서 사람들 눈 피해가며 몰래 데이트도 하고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싶다.
술 한 잔 마시면서 남들 앞에서는 미처 말하지 못했던 진솔한 대화를 하다가 감성에 젖고 이내 생식기도 젖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미도 하고 싶다.
왜 하고 싶지 않겠는가.
나경이가 지금은 비록 머리 위에 유니콘이 앉아 있지만, 언젠가 누군가와 하긴 할 건데 그게 나일 수도 있잖아.
내가 제일 먼저 사정 좀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상태창 이 새끼는 원하지 않는 상대한테는 뜬금포로 떠올라서 나를 남창처럼 굴리더니 이럴 때는 꼭 잠잠하지.
쌍놈의 새끼. 그리고 나도 쌍놈의 새끼고······.
소식 없는 씹창을 원망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생각되던 그때였다.
< ㅂㄱㅅㅇㅇ..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