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6화.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아 (279/371)

<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아 >

“중학생이에요?”

 “네.”

 “몇 학년이에요?”

 “1학년이요.”

 “아이돌 누구 좋아해요?”

 “UTB가 당연히 범접할 수 없는 본진이고요, 보이즈비랑 아워 타이밍도 조금씩 좋아해요.”

 “걸그룹은 좋아하는 팀 없어요?”

 “당연히 프라미슈 트웰브죠!”

 “그 중에서 누구?”

 “승채 언니랑 나경 언니요!”

 “크으으으! 일루와, 언니가 안아줄게!”

 승채는 하이파이브를 하고 껴안고 난리가 났고 나경이도 해맑게 웃으며 좋아했다.

 녀석의 기분 좋은 웃음에 식당 전체가 환해진다.

 승채도 그렇고 나경이도 그렇고, 이렇게 소소한 행복에도 즐거워하는 녀석들이 공중파 1위를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빨리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다.

 나는 사장님과 학생 손님들을 향해 서울에서 성공해 금의환향한 첫째 아들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사장님, 지금 여기 손님들 드신 거 다 제 앞으로 달아주세요.”

 “꺄아아아악!”

 “저 음료수도 먹어도 돼요?”

 “예, 예, 음료수도 먹고 밥도 볶아 먹고, 먹을 수 있는 거 다 드세요. 포장도 해서 부모님도 가져다드리고요.”

 “와, 대박!”

 “그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다다음주 목요일에 저희 프라미슈 새 앨범 나오거든요? 스밍 한 번씩만 돌려주시고 주변에도 홍보 좀 부탁드릴게요.”

 “숨밍 할게요!”

 “꼭 들을게요!”

 프라미들을 모르는 20대 손님들도 있었는데, 이번을 기회삼아 팬이 된다며 사진을 찍고 플레이리스트에 예전 노래들을 바로 삽입해서 인증을 하기도 했다.

 학생들 테이블에서는 한 명씩 일어나서 경쟁을 하듯 음료 냉장고로 달려가고, 추가 주문과 포장 주문이 들어가면서 기분 좋은 야단법석이 이어졌다.

 그래봤자 기본 테이블 수가 얼마 안 되고 단가도 낮았기 때문에 최종가격은 위풍당당하게 골든벨을 울린 기세가 민망할 정도로 소소했다.

 “잘 먹었습니다!”

 “와, 진짜 오랜만에 완전 배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먹었다.”

 “하앙, 너무 맛있었어.”

 “아, 맞다. 방 대표님이 승채 너 다이어트 시키라고 했었는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네.”

 “아싸.”

 “대표님이 골든벨 울리셨으니까 커피는 제가 살게요.”

 “됐어, 너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저희 저번 달에 첫 정산 받았어요.”

 “오, 그래? 생각보다 빨리 받았네? 그럼 뭐, 일인당 한··· 이삼백 정도 나왔겠네.”

 “대박. 어떻게 아셨어요?”

 “나 이래봬도 회사 대표야.” 

 “그쵸그쵸, 회사 대표님이시죠.”

 그래도 프라미슈 정도면 나름 알려진 걸그룹인데도 4년 일한 대가가 삼백도 채 안 된다. 이게 아이돌이 처한 현실이다.

 “그럼 첫 정산 받은 나경이가 사주는 커피 좀 마셔볼까? 우리 회사 건물 1층으로 가자.”

 “네, 제일 비싼 걸루 드세요.”

 “골든벨 울려도 돼?”

 “아뇨, 저 그럼 탕진이에요!”

 “승채랑 엔빵하면 되지.”

 “허얼, 양심 어디? 떡볶이보다 커피가 더 비쌀 거 같은데요···.”

 “너네 이제 1위 가수 될 건데 이런 사소한 거에 연연하지 마.”

 “1위하면 커피가 문제겠어요. 커피 농장 차려드릴게요.”

 “나경아 들었지? 너네 1위하면 승채가 나 커피 농장 차려준대.”

 “그럼 저는 뭐 해드려요?”

 “1위 소감 말할 때 내 이름 꼭 불러줘.”

 “예, 알았어요!”

 귀여운 것들. 아직까지도 로또 1등 되면 뭐하지? 정도의 기분 좋은 상상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나경이가 산 커피로 입가심을 하면서 프라미슈 새 앨범에 대한 대화를 비롯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개인 연습을 위해 저녁 늦게 회사로 출근하던 요나가 커피를 사러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아이들과 인사를 하기도 했다.

 요나가 회사로 올라간 뒤 나는 바로 톡을 보냈다.

 나 [나 나경이랑 승채 만난 거 ‘그 녀석’한테는 비밀인 거 알지?]

 사슴이 [물론이죠. 대표님이 말씀하신 ‘그 언니’말고 ‘그 막내’한테도 비밀로 해두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나 [그렇지 그렇지. 역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구나]

 사슴이 [저 연습 끝나면 맥주 땡길 거 같아요]

 나 [그, 그래···?]

 사슴이 [대표님은 얘기 몇 시에 끝나세요?]

 나 [나 이제 일어날 건데, 8시에 로그인 대표님 미팅 있어. 술 마시는 자리라서 몇 시에 끝날지는 모르겠다]

 사슴이 [그럼 제가 먼저 끝날 거 같으니까 대표님 집으로 가 있을게요]

 나 [그래. 늦어도 12시 전에는 일어나겠지]

 사슴이 [♡]

 요나의 심쿵 하트에 나도 몰래 입 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나경이와 함께 앞에 앉아 있던 승채가 불쑥 묻는다.

 “애인이에요?”

 “어.”

 그냥 별 생각 없이 튀어나간 장난스런 대답이었는데, 도리어 장난스럽게 물어봤던 승채가 진지해졌다.

 못 믿겠다는 듯 되묻는다.

 “저번에 물어봤을 때 없다면서요.”

 “그때는 카메라 돌고 있었잖아. 4년차가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에엥? 진짜 사귀는 사람 있다고요?”

 “쉿, 목소리 낮춰라. 그럼 내가 이 나이 먹고 애인 하나 없겠냐.”

 연신 진지한 내 대답에 나경이보다 승채가 더 당황한 표정이다.

 나경이를 쳐다보지는 않지만 나경이를 의식하며 애써 안절부절한 기색을 감췄다.

 그쵸요정은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눈썹을 팔자로 치켜떴다. 애써 포커페이스를 하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고작 애인이 있다는 말에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순진한 녀석이다.

 한편으로는 표정 관리를 못할 정도로 내게 마음이 깊었나, 하고 조금은 놀랐다.

 설마 나랑 자기가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오늘 만나보니 나경이 얘 순수해도 너무 순수하고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상태다.

 별 생각이 없이 한 말에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잡혀버리니 차라리 잘됐다 싶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어차피 이따가 헤어지고 나서 내 마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더욱 확실하게 끊을 수 있을 것 같다.

 승채까지 당황해서 말을 이어나갈 타이밍을 놓쳤고, 셋 사이의 침묵이 길어졌다.

 나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슬슬 일어날까? 나 이제 너네 대표님 만나러 가야되는데.”

 “예!”

 마음을 정리한 듯 산뜻하게 대답하는 나경이.

 그런 친구를 걱정스러운 곁눈질로 흘긋거리는 승채.

 나는 커피 잔이 담긴 쟁반을 들며 먼저 일어섰다.

 밖에 나올 때까지 승채는 말이 없었고 나경이와 나만 대화를 나눴다.

 “숙소로 바로 갈 거지?”

 “예.”

 “갈 때도 지하철?”

 “예, 지하철 타고 내려서 버스 타면 돼요.”

 “그래, 조심히 가고. 다음에 또 놀러와.”

 “예, 들어가세요, 대표님.”

 “4호.”

 “예.”

 “넌 왜 갑자기 조용해졌어. 나 애인 있다는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어? 너 나 좋아하냐?”

 “설마요.”

 “근데 말이 없으니까 분위기 있어 보이긴 한다. 이래서 채나리자, 채나리자 하는 건가봐.”

 “그쵸그쵸, 우리 채나리는 가만히 있으면 완전 비주얼 여신이죠.”

 “아하하···.”

 나경이는 애써 밝은 척이고, 승채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어색한 낯빛이었다.

 녀석들과는 그렇게 회사 건물 앞에서 헤어졌다.

 나는 아마조네스에 미리 가서 지선경과 얘기도 나눌 겸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회사 주차장에 주차돼 있던 차에 올라 음악을 켜기 위해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나경이에게 톡이 왔다.

 나굥 [대표님 오늘 잘 먹었습니다! 골든벨 완전완전 멋지셨고 저희 홍보해주신 건 너무 감동이었어요ㅜㅜ]

 나굥 [다음에 또 놀러올게요!]

 나굥 [바쁘실 텐데 답장은 안 해주셔도 돼요ㅋ]

 나굥 [(허리 숙여 인사 오지게 박는 캐릭터 이모티콘)]

 “흐음······.”

 가슴 아프지만 우리 둘 모두를 위해서라도 확실히 끊어야겠지.

 원래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법이니까.

 잠깐이지만 진심으로 사랑했다, 유나경.

 나 [나경아, 앞으로 개인적으로는 연락을 안 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이번에 앨범 나오고 나면 이럴 시간도 없겠지만, 팀으로든 네 개인으로든 지금이 진짜 중요한 때니까 일에만 집중하는 나경이가 됐으면 좋겠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1이 사라진 이후,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나 역시 채팅창을 바라보는 마음이 먹먹한 건 마찬가지다. 답장을 확인하기 전까지 차마 시동을 걸지 못할 것 같다.

***

 5호선 둔촌동역 지하철 승강장.

 김윤호와 헤어진 나경과 승채는 이전 정거장에서 열차가 출발했다는 전광판을 확인하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나경은 김윤호에게 답장을 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내심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안타깝기만 한 친구 승채가 묻는다.

 “답장 왔어?”

 “아니, 답장 안 해도 된다고 했어.”

 “내가 보기에 여자 친구 없는데 일부러 그러는 거 같은데···.”

 “에이, 설마.”

 나경 입장에서는 차라리 여자 친구가 있는 게 낫지, 자기를 밀어내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는 쪽이 더 비참했기 때문에 윤호의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일부러 그러는 거 맞아. 내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 오늘 우리 여기 온다고 했을 때부터 철벽이었잖아.”

 그 순간 짧게 진동하는 나경의 핸드폰.

 나경이 수정한 김윤호의 프로필명이 화면 위로 뜬다.

 [뮨님♡]

 “어, 답장 왔다.”

 “뭐래?”

 나경의 눈망울에 내심 차올랐던 기대감이 눈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눈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며 허벅지를 적셨다.

 “힝··· 앞으로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말래에···.”

 승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친구의 용기 있는 고백을 위로해주었다.

 “야, 울지 마. 울면 지는 거야. 어휴··· 너는 하필이면 왜 그런 노땅 아저씨를 좋아해서···.”

 “그냥 좋아진 걸 어떡하냐, 히잉···.”

 “내가 보기에 너 그때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야. 원래 아플 때 잘해주는 사람한테 끌리잖아.”

 “챌리자베스, 나 근데 마음이 진짜 너무 아픈데 어떡해? 히이잉···.”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여러분께서는 한걸음 물러나주시길 바랍니다.

 “이거 타지 말고 여기서 일단 좀 울자. 울면 좀 괜찮아질 거야···.”

 두 사람 외에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은 나경은 열차 굉음 속에 울음소리를 흘려보냈다.

 “······좋아하는 건 할 수 있잖아요. 왜 저 혼자 좋아하는 것도 허락 안 해주는데요. 히이이잉···.”

 그 와중에 승채는 친구의 오글토글 혼잣말을 자본주의적 마인드로 접근하고 있었다.

 ‘어··· 이거 왠지 가사로 쓰면 대박날 거 같은데···. 메모해놔야겠다.’

 나경은 한참을 울고 난 뒤, 조금은 후련해진 마음으로 윤호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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