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9화.스타킹 빤쓰런 (252/371)

< 스타킹 빤쓰런 >

당사자들에게 스타킹을 달라고 직접 요구를 하면 무효다···?

그러면 뭐야. 훔치거나 쓰레기통에 버린 걸 주우라는 뜻이잖아.

안 해 이 미친놈아.

주변에 카메라도 득실득실 거리는데 걸리면 무슨 개쪽이냐고. 개쪽을 넘어서 범죄다, 범죄.

그리고 뭐?

12명의 스타킹으로 다 하면 골든 꿀팁을 줘?

스타킹 위에 12번을 싸는 동안 도트 데미지로 팍팍 깎여나가는 내 존엄성은 뭘로 보상해줄 건데.

이건 위험한 거래다.

깜짝 이벤트의 보상이 아쉽긴 하지만 프라미들은 그냥 지금처럼 살라고 하자.

탑 티어만 아닐 뿐이지 지금도 상당히 성공한 삶이잖아.

아직 데뷔도 못한 우리 어덕 애들 신경 쓰기에도 바쁜데, 이미 데뷔해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애들까지 신경을 써?

물론 명예 빵덕(프라미슈 팬클럽 이름)으로서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잘되면 당연히 좋고 1위하는 모습도 한 번 보고 싶지만, 내 인생까지 걸면서 모험을 할 이유는 없다. 패널티도 없는데 이번 건 그냥 넘기자.

···라며 거절하기에는 추가 옵션이 너무 좋았다.

내가 미션 수행을 승낙하자 공략창이 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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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스타킹 착용자 : 노서나, 이승채, 유나경

★반경 30m내 버려진 스타킹 수/주인 : 1/원지연(습득 난이도★)

★클리어 혜택 : 새 싱글, 음원 차트 TOP100위권 이내 진입 팁 제공(멜론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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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킹의 대한 기본 정보는 물론이고, 친절하게도 버려진 스타킹의 위치를 알려주는 맵까지 떴다.

건물 평면도에서 빨간색 점이 가리키는 지점은 9층 화장실이었고, 스타킹 주인은 원지연이라고 표시돼 있다.

나는 지연이의 다리를 티 안 나게 살폈다. 파란색 누빔 스커트에 검정색 양말, 에나멜 로퍼를 신고 있었다. 원래는 스타킹을 신고 있었지만 올이 나가든가 해서 벗은 모양이다.

맵까지 뜨니깐 진짜 게임 같네.

제목은 ‘스타킹 빤쓰런’.

걸그룹의 스타킹을 습득해서 자위를 하고 사정을 마치면 클리어하는 게임이지.

습득 난이도까지 표시해주는 성의를 보니 이거 한번 해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린 것 같은데, 우리 회사 직원들―연습생, 트레이너―만 쓰는 남녀 공용 화장실인데다가 안에서 문을 잠그면 되기 때문에 난이도가 별 1개로 뜬 것 같다.

그냥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습득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

코쓱.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생각해보면 상태창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게 바로 나의 안위 아니었던가. 소소한 위기는 있었을지언정 큰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위험에서 구해주면 구해줬지.

상태창놈은 이번에도 쓸데없는 정성까지 기울이며 내가 착한 변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었다.

후우, 난이도가 쉬우니까 딱 한 번만 해볼까? 어차피 한 번만 해도 보상은 있으니까···.

마치 도박 중독자처럼 상태창을 터치하거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의 행동에 아이들은 잠시 숨을 죽인 채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너네 지금까지 멜론에서 최고 순위가 몇 위였어?”

내 질문에 다섯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동시에 대답한다.

“‘살랑살랑’으로 94위요.”

“논스톱 뮤직에서는 5위까지 올라갔어요.”

“다음날 바로 아웃된 건 안 비밀···.”

“가온 차트는?”

“가온에는 한 번도 못 올라가봤어요.”

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구나.

얘네가 그 정도로 인지도가 없었던가.

그래도 음원이 발매되면 50위 정도는 진입할 걸로 생각했었는데, 최고 순위가 90위권이라면 꽤나 암울한 것이다. 웬만한 대중들은 멤버 개개인의 얼굴 정도는 알지 몰라도 프라미슈12라는 팀 자체는 거의 모르는 거나 다름없다.

음원 시장이 그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데뷔 4년 차에 간신히 탑100에 턱걸이 할 정도면 소속사에서도 이제 투자를 통한 공격적인 마케팅보다는, 팬덤과 일본 시장만 보고 가는 안전한 마케팅을 할 것이다.

현재 같은 소속사에 있는 ‘브이라벨’이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워낙 잘나가고 있어서 프라미슈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나 있을까 모르겠다.

게다가 프라미슈12는 우리나라 멤버들로만 구성이 돼 있어서 동남아나 중국 시장에서 어필되기도 힘들 것이다. 이렇다 할 히트곡이 없으니 행사 페이도 크지 않을 테고, 멤버 수가 많으니 수익분배도 적어지고···.

그나마 B뮤직 오디션 출신인데다가 소속사도 대기업인 JS E&M 계열사이니 설 수 있는 무대는 많을 것이다. 자사 계열사에서 주최하는 연말 시상식 중 한 곳에서 ‘걸그룹 댄스 퍼포먼스’ 부문이라고 적당히 이름 붙인 상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걸그룹의 생명인 대중성과 인지도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의 눈에는 그들만의 세계일 뿐.

참고로 지난주에 발매된 립밤 새 앨범의 멜론 차트 첫 진입이 62위였다. 이틀 만에 차트 아웃되기는 했지만, 팬덤도 약한 립밤이 프라미슈보다 음원 순위가 높다는 건 약간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오디션 인기투표에 의해 팀이 꾸려졌다는 건 그만큼 스타성도 좋고 매력이 있다는 건데, 전원 센터 급의 멤버들을 왜 이 정도로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리즈소녀나 프리야미처럼, 스타의 아우라가 희미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잘되는 그룹이 많은데 말이다.

물론 이건 제작자나 엔터 관계자가 아니라 순수한 팬의 입장에서 느끼는 안타까움이었다.

이능력 빼면 아무것도 없는 내가 감히 누구의 기획력을 평가하랴.

나는 아이들을 향해 물었다.

“너네 이번 새 앨범 목표는 뭐야? 회사에서 정한 기준 말고 너희 개인의 목표.”

정누리가 트레이드마크인 기분 좋은 강아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공중파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케이블 1위라도 해봤으면 좋겠어요.”

다른 멤버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거라며 공감하는 눈치였다.

아이들의 자신감과 의욕도 많이 떨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데뷔 한 달 차에 출연했던 ‘리플레이 걸’때는 상큼함과 풋풋함 속에서도 자신들은 무조건 잘될 거라는 패기와 자신감이 엿보였었는데, 이제 그런 눈빛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가장 연장자인 무관의 여왕 이다빈을 향해 되물었다.

“다빈이는 이번 활동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뭐야?”

“저요?”

“어, 너. 바로 너.”

“저도 케이블 1위요···.”

“하늘이는?”

“저도 언니들이랑 똑같아요.”

나의 1픽은 공기를 청정시키는 살균 미소를 지으며 해맑게 대답했다.

귀엽긴 했다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아냐!”

방송이 나가면 프라미들의 원소속사인 로그인레코드에서 기분이 조금 나쁘겠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녀석들의 대표이자 매니저이니 녀석들의 정신상태를 란이의 질처럼 타이트하게 조여 줘야겠다.

“내가 보니까 너네는 초심을 잃었다. 걸그룹 베이커리랑 리플레이 걸 때 보여줬던 패기와 열정이 없어졌어.”

물론 방송인만큼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연기톤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빵순이들도 크게 쫄지는 않았다. 하지만 녀석들에게 약간 실망한 내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나는 걸베 1위 출신 서나를 지목했다.

“노서나.”

“예.”

“내가 누구야.”

잠시 생각을 고른 녀석은 똘똘하게도 내가 원하는 대답을 말했다.

“저희 담당 매니저님이요.”

“정답. 매니저이자 회사 대표야. 이루미, 맞아 안 맞아?”

“맞습니다.”

“프라미슈가 잘되는 게 내가 잘되는 거고, 너희가 안 되면 나도 같이 망하는 거야. 한미나 맞아, 안 맞아?”

“예, 맞아요.”

대답할 때부터 이미 입가에 웃음이 아슬아슬하게 걸렸던 미나 녀석은 결국 풉,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어쭈, 웃어? 대표가 웃겨?”

녀석은 그제야 눈을 꾹 감고 차렷 자세를 취하며 연습생처럼 각을 잡았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안 되겠다. 너네는 새 앨범이고 뭐고 정신무장부터 다시 해야겠어. 다 같이 어깨동무해.”

일렬로 서 있던 녀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했다.

‘그림자의 빛’을 비롯해서, 업키걸 아이들과 이런저런 예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며 방송의 감을 쌓았던 나는 지금 이것이 예능이라는 포인트도 놓치지 않았다.

일단 아무 말이나 던져놓아야 편집할 거리도 많아진다.

단신 서현이와 장신 승채가 미스매치 된 것을 지적하며 버럭 화를 냈다.

“키 밸런스 맞춰서 다시 서. 서현이 봐봐, 지금 승채랑 어깨동무 하느라고 어깨 빠지려고 하잖아! 배려가 없어, 배려가!”

“크흡!”

“푸푸훕!”

“얘네 봐라, 자꾸 웃네. 대표가 말하는데 잇몸을 보여?”

프라미들은 키에 따라 자리를 바꾼 뒤 다시 어깨동무를 했다.

내가 방금 생각해낸 나의 방송 컨셉은 군대 조교.

방송이 나가면 꼰대라고 욕을 먹을지 몰라도 예능으로서의 재미는 있을 것이다.

“하나에 앉으면서 초심을. 둘에 일어서면서 찾자. 하나.”

“초심을.”

“둘.”

“찾자.”

“목소리 그것밖에 안 나오지? 하나!”

“초심을!”

“더 크게! 둘!”

“찾자!”

“어떻게 열두 명이 내는 목소리가 나보다 작나! 하느아!”

“초심으을!”

“두울!”

“찾즈아!”

“너네 걸그룹 베이커리 때 순위 기억하지?”

“예!”

“이제부터 이름 대신 초심 번호로 불린다. 1위 노서나는 1호, 2위 송영아는 2호, 이런 식으로.”

나름 의미를 부여해보자면, 당시 순위에 따른 마음가짐이 모두 달랐을 테니, 그 기억을 되살려보자는 취지였다.

“이다빈, 너는 몇 호야.”

“12호요.”

“원래는 13호였지?”

“예.”

“어부지리로 아슬아슬하게 합류했을 때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거 기억나?”

“···예.”

“어떤 마음가짐이었어?”

“하늘이 주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서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마음 지금도 똑같아? 솔직히 말해봐.”

“솔직히··· 초심을 조금 잃은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조금 잃은 것 같습니다, 가 아니라 확실하게 잃었어. 맞지?”

“예···.”

“6호.”

“예!”

“너 6위에 호명됐을 때 울면서 뭐라고 했어.”

“아···.”

“이봐이봐 기억도 안 나지. 내가 말해줄게. 지금까지 믿고 응원해주신 부모님이랑 가족들 생각해서 열심히 한다고 했어. 기억나?”

“예···.”

나는 며칠 전 정주행 했던 걸베와 아이들의 데뷔 전 과정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녀석들이 했던 말을 한 명 한 명에게 상기시켜주며 당시를 추억하게 만들어주었다.

오디션 순위에 따른 초심 번호는 방금 떠오른 애드립이었지만, 아이들이 예전에 했던 다짐이나 대화를 통해 초심을 일깨워주는 멘트는 이런 식으로 써먹기 위해 미리 준비해온 상황극이었다.

“1호.”

“예.”

“너 1위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했지?”

“예.”

“탈락한 다른 친구들의 몫까지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 보여준다고 했고.”

“예···.”

12명의 빵순이들에게 모두 초심을 되살려준 결과, 효과가 있었다.

1호 서나, 11호 소원이, 12호 다빈이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아이들의 눈시울도 붉어진 것이다.

예능에서의 눈물은 웃음보다도 귀하게 취급받는 레어템.

촬영을 시작한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방송분량을 뽑아낸 것이다.

욘나 멋있어. 이래서 뮨샐럽, 뮨샐럽 하는 거지.

하지만 즙으로 끝내는 건 2류다.

1류는 웃음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

“와아, 우리 하늘이는 언니들 우는데 끝까지 안 우네?”

“아··· 제가 요즘 눈물이 없어져서요···.”

“그러니까 눈물이 없어진 니가 울어줘야 시청률이 오르는 거지. 빨리 울어!”

“피히히히.”

“울어도 모자랄 판에 웃어? 루미야, 뭐하니. 하늘이 옆구리라도 꼬집어. 어서.”

내 의도대로 착즙 분위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나는 조금은 후련해진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포부를 밝혔다.

“자, 이제 대표님이 너희들의 목표를 다시 설정해줄게. 이번 앨범으로 프라미슈 트웰브가 이뤄야 할 목표는 음원 차트 1위, 공중파 음방 1위야. 알았어?”

“예···.”

“아, 목소리 진짜. 초심 찾기 또 할래?”

“아니요!”

“11호, 이번 앨범 목표가 뭐라고?”

“음원 차트 1위! 공중파 음방 1위요!”

“다 같이! 우리 목표가 뭐라고!?”

“음원 차트 1위! 공중파 음방 1위!”

“좋아! 물론 1위가 다가 아니야. 못 해도 돼. 하지만!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것보다는 이뤄지지 못할 꿈이라고 해도 목표를 향해서 뛰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 너희들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다 그렇게 높은 목표를 향해서 뛰어왔기 때문이잖아. 맞지?”

“예!”

“좋아, 지금 10시 20분이니까 11시까지 연습하고 퇴근해.”

나는 쿨하게 연습실에서 나와 제작진들이 모니터링 중인 6층 회의실로 내려갔다.

그들은 내 진행이 너무 좋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적당한 겸손과 너스레로 답을 한 나는 다시 9층으로 올라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 스타킹 빤쓰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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